정말 영화처럼 사는 형이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로맨틱한 장르가 아니다. 예술가의 삶을 다루는 조금은 지질하게도 보이는 홍상수표 영화 같은 장르다. 회사를 다녔고 마흔 즈음에 때려 쳤다. 그리고 한 지방 도시로 내려가 자그마한 방 한 칸 딸린 집을 얻었다. 한 때 음악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쫄딱 망했지만) 이 형은 방안 한쪽 벽 책장에 레코드판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찾아갈 때마다 마치 음악카페처럼 형은 velvet underground나 한대수 판을 틀어주곤 했다. 비가 올 때 좁은 방안에서 형이랑 소주 한 잔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맛은 정말 좋았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12시쯤 해서 게으르게 일어나 대충 밥을 챙겨먹고 하루 종일 동네와 일상을 기웃거리면서 감성을 열어놓고 지내다 그 날의 일들을 엮어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밤늦게까지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다 잠이 들고...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나 영화감독, 혹은 안돼도 수필가 정도는 될 거라고 여겼지만 형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미혼이고 여전히 늦잠꾸러기이며 술 애호가에 글 애호가다.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삶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할 수 없는.

가끔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문득 문득 그 형을 떠올린다. 또 내 결혼생활도 생각한다. 정말 가상은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다고. 그 물기 하나 없을 것처럼 뽀송뽀송한 결혼생활이 어디 있을 것인가. 또 정반대로 결혼 같은 사회적 틀 바깥에서 살아가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가상 속에서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여행 떠나는 일상은 우리가 현실에서 하는 것과 너무나 같아 보이지만 왜 또 그렇게 달라 보이는 걸까. 똑같은 일상이라도 현실과 가상 사이에 벌어져 있는 이 틈새는 우리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어차피 내가 겪을 일 아닌데 어떤가. 남의 떡은 정말 좋아 보이고 커 보인다. 가상이 현실보다 좋아 보이는 건 바로 내가 실제 겪는 경험과 타인의 경험 사이에 놓여진 거리감 때문이다.

언젠가 그 형이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난 터미널에 붙어 있는 영화관은 가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영화를 보고 극장문을 나서면 느껴지는 그 낯섦 때문에 어딘가를 떠나고픈 욕망이 샘솟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실제로 무작정 터미널에서 아무 버스나 타고 떠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얘길 하면 또 혹자는 "정말 낭만적이다"하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을 아는 나로서는 그것이 그다지 그렇게 낭만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로운 것이다. 정말 현실에 발을 되돌리기가 싫은 것이다. 그 영화 속 낯선 세계를 계속 이어보고 싶은 것이다. 형은 정말 외로웠던 것이다.

'싸인'은 현실과 어떤 연결고리를 맺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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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세상은 좁고, 사건은 넘쳐난다(?). '싸인'의 스토리 구조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싸인'은 법의학을 그 중심소재로 다루고 있지만, 그 스토리는 법의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건사고들을 정치권과 검찰, 경찰, 법의학자 등의 역학관계를 통해 다차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회에 두 개의 사건을 병렬적으로 그려내면서, 이 많은 입장들이 들어가기 때문에 드라마는 느슨해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과 추격전, 추리의 연속이 '싸인'이라는 드라마의 진면목이다.

어두운 밤길, 급하게 귀가하는 여자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그 뒤를 쫓는 그림자의 발길도 빨라진다. 그리고 결국 벌어지는 살인의 현장. 이 묻지마 살인이 환기시키는 것은 사건사고가 넘쳐나는 현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여주인공 고다경(김아중)의 동생이 당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드라마지만 어찌 보면 이 설정은 지나치게 우연적이다. '싸인'이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 대부분 이렇게 주인공들과 연관되어 있다. 한 회사에서 벌어지는 독극물에 의한 연쇄살인은 윤지훈(박신양)의 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 그 아버지를 부검한 정병도(송재호)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또 윤지훈이 수사하고 있는 가수의 의문사 사건은 그가 국과수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사건이기도 하다. 왜 '싸인'은 개연성을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까지 사건과 인물들을 밀접하게 그리는 걸까. 이유는 명백하다. 검찰과 경찰, 법의학자가 사건을 파헤치는 그 동기부여를 좀 더 강하게 그리려는 의도다. 그저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들의 사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죽게 된 가족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훨씬 극적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주인공과 계속해서 연루되는 사건들은,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님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릴러가 갖는 스토리 구조의 비결은 비일상적인 사건을 긴장감 넘치게 그리면서, 그것이 일상적인 내 이야기일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싸인'에 등장한 사건사고들이 우리가 현실에서 봐왔던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것 역시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드라마와 현실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게다가 사건을 수사해가는 과정에서 그 당사자들 역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정우진(엄지원) 검사는 게임 시나리오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범에게 공격당하고, 공범이 등장하면서 잡혔던 용의자가 풀려나면서 그 위협은 다시 고다경에게로 향한다. 본격적인 멜로는 아니지만 정우진과 사랑하는 관계가 된 강력계 형사 최이한(정겨운)은 이 묻지마 살인이 이제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으로 변모한다.

사건을 계속해서 터지고 현장을 발로 뛰는 평검사와 강력계 형사, 심지어 지나치게 정치적인 되어버린 국과수를 나와 현장으로 뛰어든 법의학자의 목숨을 건 사건 추격이 이어지지만, 이 상황에서 정치권은 사건의 해결을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은폐하기 바쁘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명시되는 '이 드라마는 특정 기관과 관련이 없다'는 문구는 거꾸로 이 드라마가 그저 드라마에 머물지 않는다는 얘기를 해주는 것만 같다. 국가가 정의를 세워주지 않는 상황에서 판타지로서의 영웅들이 탄생한다. 세상은 좁고, 비정하고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질 만큼 넘쳐난다.

'싸인'의 숨 막히는 스릴러는 물론 능숙한 장르 운용의 힘이다. 하지만 장르라는 건 콘텐츠 내에서 뚝딱 만들어지는 그런 게 아니다. 장르는 당대 현실과 작품과의 조우에서 합의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과 거리가 있는 드라마적 극적 구성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싸인'은 바로 그 현실과의 접점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세상은 '싸인'이 보여주는 것처럼 심지어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그 정의를 세워야할 기관들은 모두 정치적인 입장만을 반복하며 이를 외면한다. 국과수를 지키기 위해 국과수 밖으로 나오는 아이러니한 영웅의 탄생은 이처럼 현실에 깔려있는 어두운 공기들을 포착해내고 있다.

'시크릿 가든', 앓이는 벌써 시작됐다

김은숙표 로맨틱 코미디가 또 일을 낼 모양이다. '연인 3부작'을 거치면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한 축을 그려내고 '온에어'와 '시티홀'을 통해 로맨스가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 구축을 모색했던 김은숙 작가는 이제 '시크릿 가든'이라는 판타지와 현실이 공존하는 세계를 꿈꾼다. 그 곳은 피가 철철 나도 몸이 부서져라 살아가는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이 사는 공간이면서 백화점 사장으로 중세 귀족들이 살 법한 판타지 속의 왕자님 김주원(현빈)이 사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크릿 가든'은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엇갈림이라는 로맨스 위에 무술감독이면서 길라임을 보호해주고 챙겨주는 임종수(이필립), 그리고 어딘지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바람둥이 한류스타 오스카(윤상현)를 겹쳐놓는다. 대저택에서 살아가며 뭐든 하고 싶은 것은 척척 할 수 있는 김주원에게 현실은 지나치게 시시한 것이다. 반면 대역배우로서 카메라 속 판타지 공간에서는 휙휙 날아다니며 멋진 액션을 선보이지만 컷 사인과 함께 카메라 밖으로 나오면 주인공 배우에게 모욕을 당하며 깨진 몸을 추스르는 길라임에게 판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어떤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눈 앞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길라임의 현실은 김주원에게 시시하게만 보이던 현실을 바꾸어놓고, 판타지 같은 건 없다 여기던 길라임에게 김주원이라는 남자와 그가 가진 것들은 조금씩 그녀를 꿈꾸게 한다. 카메라 밖으로 나와 김주원의 스포츠카를 마치 영화를 찍듯 엄청난 속도로 모는 길라임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과 판타지의 만남을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거기에는 길라임과 김주원의 현실과 판타지가 순간적으로 공존한다.

무엇보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모호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의 드라마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하지원과 현빈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 덕분이다. 하지원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보이쉬한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성적인 매력 또한 갖고 있는 배우다. 한편 현빈은 엉뚱하고 가벼운 코미디 속에서조차 어떤 진지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갖고 있는 배우다. 이 둘의 조합은 그래서 '시크릿 가든'을 가능하게 하고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임종수와 오스카가 가세하면,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꽃미남 판타지의 구도가 세워진다. 한 남자와 여자가 엮어가는 로맨스가 있고, 그 여자를 남몰래 사랑하며 보호하는 보디가드가 있으며, 늘 친구처럼 분위기를 돋궈주는 멋진 남자가 있다. 이것은 '꽃보다 남자'에서부터 최근 '성균관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계보가 된 꽃미남 콘텐츠(?)의 구도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구도 속에서도 이 드라마를 새로운 설렘으로 채우는 건 역시 하지원과 현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 덕분이다.

하지원이라 가능하고, 현빈이어서 돋보이는, '시크릿 가든'. 이제 주말 밤 이들에 대한 '앓이'가 시작되었다.

'대물'의 판타지, 현실 정치의 부재를 채우다

'대물'에 등장하는 정치인들은 서민들의 고충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표를 얻는 것, 그래서 권력을 계속 쥐고 있고 차츰 그 권력의 상층부로 올라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물론 이건 드라마 속 얘기다. 현실에는 그래도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통령. 온 김에 우리 동네나 한 번 들려주지. 당췌 모기 땜에 살 수가 있어야지. 지옥이 따로 없어." 매립지에 생긴 웅덩이 때문에 모기떼들이 마을을 덮쳐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기 힘들어하지만, 정치인들의 관심은 보궐선거에 가 있다. 검사들은 현장에는 나가보지도 않고 모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을 주민들의 집단 폭력으로 몰아 부친다.

"그럼. 이 사람들 대신 나 구속해. 야.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냐? 이분들 데모한 거 김태복 때문이 아니라 모기떼 때문에 데모했다잖아. 검사란 게 현장 한 번 안가보고 사무실에 앉아서 뭐? 구속? 구속이 그렇게 쉬워?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딨어?"

서혜림(고현정)의 이 말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이것이 판타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작금의 대중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물'이라는 드라마가 그토록 파괴력 있게 쭉쭉 뻗어나가는 이유가 된다.

'대물'은 바로 이 현실에서 우리가 종종 발견하는 사건들을 드라마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한바탕 속 시원히 풀어내는 드라마다. 따라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드라마의 이야기는 당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실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그리기 때문이다.

정치인 혹은 검사 같은 권력의 상층부에 있는 이들이, 차 안에서, 공연장에서, 헬기 위에서, 정당 사무실에서, 갤러리에서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서혜림이 모기떼로 고통 받는 서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고충을 듣는 장면은 사뭇 대조적이다.

서혜림이 하도야(권상우) 검사에게 주민들의 입장에서 한 마디 쏘아부칠 때, 정치권에 새 인물을 찾는 강태산(차인표)의 눈빛이 반짝거리고, 그녀에게 "정치할 생각 없냐"고 묻는 장면이 전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이 대조적인 장면들을 통해 '저런 정치인 하나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현실에서 정치라고 하면 으레 그러려니 포기하며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래서 '대물'이 보여주는 정치의 세계는 하나의 판타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그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판타지는 다름 아닌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사라지던 것이지만, 때론 정치인들의 최대관심사인 선거의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이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현실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드라마가 판타지를 통해 어떤 비전을 제시한다면, 그것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대물'의 인기가 수직상승하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팍팍하다는 반증이다. 서민들이 바라는 세상과 실제 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물'의 판타지는 액면 그대로 현실의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서민들이 뭘 바라고 있는 지는 분명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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