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시청자와의 권태기를 벗어나려면

 

KBS <인간의 조건>은 초반 <개그콘서트> 개그맨들이 함께 모여 일주일간의 관찰카메라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사실 관찰카메라 형식이 가진 핵심은 결국 누군가의 일상을 바라본다는 재미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개그콘서트> 무대 위에서 빵빵 터트리는 개그맨들. 그들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는 대중들의 관심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조건(사진출처:KBS)'

하지만 관찰카메라 형식에서 이 재미적인 부분보다 더 중요한 건 왜 이 사적인 영역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들여다봐야 하는가에 대한 대중적인 공감대다. <인간의 조건>은 그래서 그 기획의도로서 더 나은 삶을 택했다. 쓰레기 배출을 하지 않으며 살아가거나, 전기 없이 살아가고,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 불편함 속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가치를 대중들에게 공감하게 했다.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미션에서 너도 나도 들고 다니던 텀블러는 그래서 대중들이 함께 참여할만한 캠페인 성격을 띠기도 했다. 자동차 없이 살기 미션은 탄소 배출이 갖는 환경문제를 인식시켜줌과 동시에 걸으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삶의 진풍경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인간의 조건>의 힘은 방송이 환기시키는 어떤 문제의식에 대해 대중들이 공감하고 함께 참여하는 마음을 기꺼이 가질 때 생겨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캠페인도 반복되다 보면 그저 익숙하게 지나가는 문구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물을 아끼자’, ‘전기를 절약하자같은 말들이 지극히 지당하다고 해도 이제는 그 감흥이 별로 없고 마치 통상적인 캠페인 문구처럼 의식하게 되는 건 그 반복적인 노출이 의미를 퇴색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은 그래서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한 흔적이 있다. 개그우먼을 출연시켜 지금껏 남자 개그맨들의 일상을 통해 보여준 캠페인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더더욱 공감할 수 있는 아이템(이를 테면 화학제품 없이 살기같은)을 선보였던 것은 이 반복되는 패턴의 함정을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의 조건>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인간의 조건>은 여전히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다. 새롭게 시작한 나트륨 줄이며 살기는 여전히 사회적인 관심을 둘만한 아이템이고 새롭게 투입된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나 개코, <개그콘서트>의 김기리는 새로운 조합으로 일상의 웃음을 만들어낸다. 일단 채널을 고정시키기만 하면 충분히 재미있고 그 의미와 가치도 공감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조건>의 문제라기보다는 이를 반복적으로 바라본 시청자들이 여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물론 <인간의 조건>이 본래 갖고 있던 이 캠페인적인 성향의 의미와 관찰카메라가 갖는 일상 엿보기의 재미를 포기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그 재미와 의미에 좀 더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조건>은 이 틀을 가끔은 벗어날 필요가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생활이 비슷한 이야기의 패턴을 불러온다면 때로는 공간을 벗어나볼 필요가 있고, 개그맨들이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을 보여준다면 다이나믹 듀오처럼 새로운 구성원들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권태기와 같다. 무언가 잘못됐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권태기를 지혜롭게 넘기지 못하면 관계 자체가 소원해진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인간의 조건>은 지금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획사들의 독식에 대한 대중들의 생각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은 당분간은 혼자 간다는 걸 공식화했다. DY엔터테인먼트와 전속 계약이 만료된 후 3년 넘게 JS엔터테인먼트라는 1인 기획사로 활동하던 그가 최근 새로운 기획사를 찾는다는 얘기가 나온 지 단 몇 주만의 일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유재석이 소속사를 찾는다는 얘기 속에는 현재의 변화하고 있는 연예계의 환경이 바탕에 깔려 있다. 최근 연예계는 과거 연예인 중심으로만 흘러오던 분위기에서 이제는 콘텐츠 중심으로 재편되는 중이다. 즉 매니지먼트 회사들도 연예인 관리 단계에서 이제는 콘텐츠 생산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그렇게 생산된 콘텐츠에는 소속 연예인들이 포진하기 마련이다.

 

기획사들이 매니지먼트에 머물지 않고 콘텐츠를 생산해 납품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건 유재석처럼 어느 방송국이든 러브콜을 하는 연예인에게도 변화를 요구한다. 기획사들의 콘텐츠는 방송사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콘텐츠를 제작 납품하는 기획사들의 힘에 따라 연예인들의 캐스팅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된다.

 

SM C&CYG 같은 기획사는 이미 연예인들의 소속사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다. 드라마에서 예능 프로그램까지 제작하고 자신들의 소속 연예인에 맞는 맞춤형 콘텐츠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사실상 혼자 기획하고 혼자 방송국과 제작 편성을 논의하는 방식은 이런 달라진 환경 속에서는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유재석이 소속사를 생각하게 된 계기다.

 

하지만 유재석이 소속사를 찾는다고 하자 당장 대중들은 우려 섞인 시선부터 보냈다. 왜 그랬을까. 그 첫째는 먼저 유재석 정도의 스타라면 제 아무리 달라진 환경이지만 혼자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대중들은 여전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유재석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은 굳건하다는 것을 이번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유재석이 가진 이미지가 대형 기획사와는 좀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잖아도 갑으로 대중들에게 이미지화된 대형 기획사에 유재석 같은 거물이 들어가는 건 늘 낮은 곳을 향해 있는 그의 이미지와는 사뭇 상반되는 행보처럼 보인다. 기획사를 통해 체계적인 매니지먼트를 받는 것이 연예인으로서 무에 잘못된 일일까 하지만 슈퍼 갑에 대한 대중정서는 확실히 좋지 않다.

 

셋째는 최근 기획사들이 콘텐츠까지 손을 대며 대형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반감이다. 기획사들이 콘텐츠로 나가려는 건 어찌 보면 미래의 생존을 위한 안간힘이기도 하지만 대중들에게 그것은 독식의 이미지로도 다가간다. 이른바 콘텐츠 생산과 소속 연예인 끼워 넣기는 그래서 소속 연예인을 띄우기 위한 콘텐츠 생산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유재석에 지지를 보내던 대중들로서는 그가 이러한 기획사에 들어가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질 것이다.

 

넷째는 기획사가 유재석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오히려 이용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데 대한 우려다. 유재석이 한다면 단박에 대중들의 관심과 호감도를 가져가는 것이 현재의 정서다. 그러니 그 힘을 활용한다면 기획사들은 자사의 소속 연예인들을 함께 띄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유재석만이 아니라 유재석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유재석의 새로운 기획사 찾기는 애초부터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몇몇 기획사들이 접촉했지만 그것이 실효를 얻기 위해서는 결정이 나기까지 언론을 통해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유재석의 나 홀로 선언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그 안에 많은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현 대형 기획사들의 독식이미지에 대한 불편한 정서는 이번 유재석의 소속사 해프닝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남극'의 딜레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남극의 눈물'(사진출처:MBC)

'남극의 눈물' 김진만 PD는 이 '눈물' 다큐멘터리를 찍어 오면서 늘 갖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고 했다. 이 지구의 눈물을 포착하고 증언하기 위해 문명 저 편의 세계로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지만, 어쩌면 그것 자체가 파괴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남극의 눈물' 세 번째 이야기의 말미에 내레이션을 통해 들어간 질문, 즉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라는 그 물음은 바로 이 김진만 PD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극의 눈물' 3편 '펭귄행성과 침입자들'은 먼저 이 남극을 자신들의 행성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다양한 펭귄들의 생태를 보여주었다. 그 펭귄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키워드는 두 가지. 즉 '협동과 배려'다. 자이언트 패트롤 같은 육식성 천적들이 새끼 펭귄을 공격하면 그것이 제 새끼가 아니라도 어른 펭귄들이 나서서 방어하고 보호해주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생존능력을 보면서, 잠깐 우리 사회의 가족 이기주의가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이들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내 일 아니면 지나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이 그러할진대 타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이기주의가 오죽할까. 2편에서 나왔던 고래잡이와 물개 잡이로 학살당한 수백만 남극의 종족들은 그래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혹등고래의 그 아름다운 노래가 처절한 절규로 들리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물론 포경이 국제협약으로 금지되는 등 환경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이 침탈이 끝난 것은 아니다. 펭귄행성에 들어온 침입자들, 즉 인간의 파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쪽은 얼어가고 다른 한쪽은 녹아가는 남극의 상황은 먹이를 찾아 바다로 떠나야 하는 펭귄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의 확산은 펭귄들의 알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하고, 오지의 땅이 갖는 그 신비로움을 관광하기 위해, 혹은 그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때 아닌 남극에 쥐들을 들끓게 만들었다. 쥐는 생태계를 교란할뿐더러 그 자체로 세균을 전파한다는 데서 치명적이다.

김진만 PD는 2003년에 2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전재규 대원을 얘기하면서 그 고민스러운 딜레마를 꺼내놓았다. 세종기지에서 세상을 떠난 전재규 대원 때문에 이슈가 많이 됐고, 그 덕에 '아라온'이라는 쇄빙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익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목숨 걸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대원들을 보면서 환경 파괴 운운하기도 어렵다는 얘기였다. 알다시피 특정 국가의 땅이 아닌 남극은 각국의 영토권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있다.

'남극의 눈물'은 물론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서 지구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다큐멘터리가 굳이 카메라를 들고 남극까지 들어가 그 눈물을 포착해내는 것은 답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아프리카의 눈물', 그 아름다움과 슬픔 사이

이건 겨우 프롤로그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음은 혼란스럽다. 막연히 '아프리카' 하면 누구나 자연을 떠올린다.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이기에 살풍경한 것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곳. 그래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피조차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 '아프리카의 눈물'은 지금까지의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래왔듯이 그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야생과 그 위를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수줍어하며 데이트를 하는 우바가 이제 곧 소 뛰어넘기 성인식을 마치고 다르게와 혼인할 날을 기다리며, 유목민인 풀라니족들은 가장 아름다운 남성이 되기 위해 몸을 가꾸는 것처럼.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움으로만 연상되는 '아프리카'만을 담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창과 화살이 들려진 손이 떠올리는 신성한 피는, 이제 그 손 위에 대신 총을 얹어놓음으로써 더럽혀진다. 왜 평화롭게 공존하던 그들은 서로 총을 겨눌 정도로 생존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까.

'아프리카의 눈물'은 그 눈물의 진원지를 찾아간다. 아프리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덜 문명화되고 환경과 자연이 보존되어 있던 아프리카가 무슨 죄가 있어 피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그것은 결국 지구의 다른 한 편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도시인들의 죄다. 물이 점점 말라버리고 바닷물의 수위가 올라가 살 터전이 물에 잠기고, 땅이 타버리는 것이 농담이 아닌 진짜 현실인, 그들 표현대로 '죽어가는 땅'이 되어버린 아프리카는.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서 반제나 호수로 몰려들고, 가는 도중에 낙오된 어린 코끼리들이 말라 죽어가며, 말라버린 땅에 목말라 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가축이 마지막 물기를 눈물로 떨굴 때, 그 가축의 주인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이제 갓 아이를 낳은 엄마는 물을 찾아 나서고 도무지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물을 마시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일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가 그 곳에서 막노동을 하고, 그러다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분노하는 도시의 일꾼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급기야 어떤 이는 차가운 한 줌의 재로 돌아오고, 그 아버지의 묘 앞에서 소년은 분노 반 슬픔 반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 모든 재앙들... 이건 그들의 죄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눈물'은 잔인하게도 이 아름다운 아프리카와 눈물 흘리고 있는 아프리카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 혼돈스런 상황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맺고 있고, 그 고리가 바로 TV 앞에 앉아 '아프리카' 하면 연상되는 평화로운 자연을 떠올리고 있던 시청자들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총을 쥐게 된 것도, 어린 코끼리가 죽어간 것도 모두 그 현실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마치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아름다움으로만 아프리카를 기억했던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을 이 다큐는 보여준다.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공간을 상정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본 후,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 눈물 흘린다. 따라서 감성적으로 그 곳의 삶들에 공감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그 밑바닥에 깔려진 이성적인 각성에 도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아름다움과 슬픔의 파괴력이 강력하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움과 슬픔을 포착하기 위해 총알이 날아다니는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간 제작진의 용기가 영상 곳곳에 진심으로 묻어난다는 것. 현빈의 내레이션은 '아마존의 눈물'을 빛나게 했던 김남길의 목소리만큼 차분하고 호소력이 느껴진다. 혼란스럽지만 이것이 다시 눈물로 돌아온 '아프리카의 눈물'을 기꺼이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건 겨우 프롤로그에 불과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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