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잡는다’, 스릴러도 따뜻하게 바꾼 백윤식의 아우라

스릴러가 어떻게 이리도 따뜻할 수 있을까. 영화 <반드시 잡는다>는 그 예고편만 보고 나면 “또 연쇄살인이야?”하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고나면 그 선입견이 틀렸다는 걸 확인하게 되게 나아가 스릴러라는 장르 속에서도 이토록 따뜻한 이야기와 사회적 함의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배우가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심덕수 역할을 연기한 백윤식이다. <반드시 잡는다>가 색다른 스릴러가 될 수 있었던 건 출연자들의 특별함 때문이다. 이 영화는 백윤식을 비롯해, 성동일, 천호진, 배종옥, 손종학 같은 중견 배우들이 대부분의 역할을 채우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어른’에 대한 남다른 시선 덕분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서민들이 살아갈 것 같은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벌어지는 연쇄살인. 처음에는 어르신들의 고독사이거나 비관자살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차츰 그것이 연쇄살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범인을 찾아 나선 심덕수와 전직 경찰 박평달(성동일). 영화는 살해된 피해자들의 가난하고 고독한 삶의 편린들을 훑어내며 우리 사회가 마치 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혹은 ‘꼰대’로 치부하곤 하는 노인들의 자화상을 아프게도 잡아낸다. 

처음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처지는 아랑곳없이 그저 월세나 독촉하는 구두쇠 영감으로만 알았던 인물이 차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위협받는 그들의 생명을 위해 죽을 위기 속으로까지 뛰어드는 그 면면들은 그래서 스릴러 장르 속에서도 어떤 따뜻한 감동 같은 걸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그래서 이 스릴러의 해결과정은 마치 진정한 어른이 어른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스스로 나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그 과정처럼 보인다.

놀라운 건 이 작품에서 젊은 용의자들을 추격하고 범인과의 사투를 벌이는 그 심덕수를 연기하는 백윤식이다. 70세의 노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온몸을 던지는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이 배우는 그 안에 깊은 페이소스 같은 걸 새겨 넣는다. 그래서 조금은 힘겨울 수 있는 추격과정이나 추리가 오히려 스릴러로서의 긴박감을 더욱 높여주는 장치로서 활용되고, 동시에 순간순간 나이든 어른이 갖는 삶에 대한 경의 같은 것이 뭉클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잡는다>가 그런 휴먼드라마적인 요소가 부각된 스릴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작품은 스릴러로서 가져야할 긴박감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 또한 잘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시작은 다소 걷는 느낌으로 흘러가지만 차츰 달려가는 이야기의 속도감에 빠져들게 되고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적절한 자극을 제공한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건 인생 경험이 풍부한 노인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와 ‘여유’ 같은 것들이 특별한 스릴러의 경험을 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손에 땀을 쥐는 스릴러의 긴장감 속에서도 심덕수라는 어른의 관점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관객들은 조금은 느긋한 시점이 가능해진다. 스릴러지만 이 작품이 이렇게 따뜻하고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인 통찰까지 담아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심덕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걸 200% 연기해낸 백윤식이 있어서가 아닐까. 실로 ‘노장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사진:영화 '반드시 잡는다')

‘추리의 여왕’, 어째서 스릴러 아닌 휴먼드라마를 선택했나

“뒤통수치는 사람만 있는 거 아냐. 목숨 걸고 당신 구하려던 사람도 있어. 당신 인생 그렇게 후지지 않아.” KBS 수목드라마 <추리의 여왕>에서 연쇄살인범으로부터 생매장될 위기에 처했던 호순(전수진)을 구해낸 완승(권상우)은 그녀에게 설옥(최강희)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마음을 줬던 사람이 연쇄살인범이었다는 사실에 황망해하는 호순을 위로하는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갖고 있는 방향성을 잘 드러낸다. 

'추리의 여왕(사진출처:KBS)'

끔찍한 살인사건이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추리의 여왕>이 갖고 있는 정서는 어찌 보면 너무나 편안하다. 물론 사람을 생매장하는 범죄자의 범죄 행각은 소름끼치는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 자극적인 사건에 그다지 카메라를 집중시키지 않는다. 대신 호순을 구하기 위해 살인범의 동선을 추리하는 설옥과 그녀를 도와 범인을 잡고 호순을 구해내는 완승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리고 그렇게 만조가 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작은 섬에서 열린 바닷길로 두 사람이 호순과 연쇄살인범을 손수레에 싣고 나오는 장면은 금세 이 스릴러적인 장르를 코미디로 바꿔놓는다. 완승은 은근히 자신이 설옥을 구해줬다는 생색을 내고, 설옥은 뭐하러 구했냐고 툴툴 대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살인사건이 터지는 드라마지만 긴장감보다는 인물들이 추리과정에서 엮어지는 알콩달콩한 관계가 드라마 전체의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면서 호순이 겪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완승과 설옥은 ‘사랑의 감정’의 정체에 대한 언쟁을 벌인다. 완승은 사랑은 알면서도 속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설옥은 사랑이란 호르몬 작용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또한 은근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자기도 모르게 완승은 설옥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고 있고, 설옥은 완승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어떤 완강한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자들이 주목하는 점도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밝혀내는 그 자체보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는 양상이다. 그리고 사건 속에서 피해 당사자들이 겪는 어떤 인간적인 감정들이 <추리의 여왕>에서는 더 많이 드러난다. 바로 이전에 다뤄진 보험금을 노리고 아내를 죽인 비정한 남편의 이야기 속에서도 사건의 끔찍함만큼 주목됐던 것은 남겨진 아이와 아들의 허물까지 덮으려 하다 결국은 살인을 저지르게 된 부모의 그 감정들이다. 

<추리의 여왕>이 이러한 편안한 범죄물의 기조를 유지하는 건 KBS라는 보편적 시청층을 갖고 있는 플랫폼에 잘 어울린다. 끔찍한 사건들을 자극적인 틀로 보여주는 건 케이블에서는 통해도 지상파 그것도 공영방송인 KBS에서는 통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아줌마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웠고 사건 수사보다는 ‘추리’라는 요소를 넣어 훨씬 더 게임적인 재미를 부가하려 했다는 건 괜찮은 선택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사건에만 집중하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변화나 관계변화를 보여주려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늘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첫 번째 사건으로 등장했던 장도장(양익준)의 마약사건이나 그 이후에 등장했던 보험금을 노린 남편의 아내 살인사건은 어떤 긴박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설옥의 시누이이기에 더 몰입될 수밖에 없는 호순의 납치사건은 사건 이야기보다 설옥과 완승의 밀고 당기는 부차적인 이야기들에 너무 많이 집중하다보니 긴장감을 전혀 느끼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러한 긴장감이 이 드라마가 추구하려는 방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늘어지는 전개는 너무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편안한 전개는 나쁜 게 아니지만 그래도 시누이가 납치되어 생매장 당할 위기에 처하는 사건마저 별다른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문제가 아닐까. 휴먼드라마의 방향성을 선택했다고 해도 작품은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추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가의 역량은 어떻게 최대치로 발휘되는가

 

종영한 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아마도 박찬홍 감독-김지우 작가 콤비의 인생작이 아니었을까. 이토록 시작부터 끝까지 얼개가 갖춰지고 완성도도 높은데다 대중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콤비가 만들어낸 <부활>, <마왕>, <상어> 3부작의 총아가 모두 결집되어 있는 듯한 작품이 <기억>이다. <기억>은 복수극의 틀에서조차 벗어나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회극이면서도 동시에 한 가장의 인생을 깊이 들여다보는 휴먼드라마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인생작을 작가들이라고 늘 내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억(사진출처:tvN)'

사실 <시그널>이라는 작품이 tvN에서 방영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을 때도 이것이 김은희 작가의 인생작이 아닐까 여겨진 면이 있었다. 장르물의 대가라는 건 이미 지상파에서 그녀가 해온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는 감지된 바 있다. 하지만 지상파에서 했던 그녀의 작품들이 좋은 기획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빈틈이 많이 보이거나 일관된 메시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 하나의 완성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에 반해 <시그널>은 마치 억눌렸던 예술혼이 터져버린 듯 거침이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완성도와 통일성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장르물이 갖는 재미를 소화하면서도 그 안에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이러니 <시그널>을 보며 시청자들이 인생의 작품이라고 얘기했던 것일 게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김은희 작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물론 인생작이라고 해서 그걸로 작품의 성장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거기서부터 어떤 터닝포인트를 만들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시그널>에 이어 <기억>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갖게 되는 건 그래서 tvN이라는 채널의 무언가가 이들 작가들로 하여금 인생작을 뽑아내게 하는 힘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다. 도대체 이토록 역량 있는 작가들에게 tvN은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율성이다. 자신이 애초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끝까지 다 밀어 붙일 수 있게 하는 자유. 물론 그렇다고 기획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기획의 방향성이 갖춰지면 역량을 최대치로 뽑아낼 수 있게 하는 자율성은 작가들이 흔들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는 작품을 그려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지상파의 드라마들이 상당히 기획에 휘둘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최근 들어서 중국의 영향으로 많은 드라마들이 사전 제작되고 있지만, 우리네 드라마들은 지금껏 실시간 제작이 그 현실이었다. 그러니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대본이 수정되거나 심지어 새로운 작가가 투입되고 나아가 작가가 교체되는 경우까지 비일비재하게 생겨났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KBS <동네변호사 조들호>의 경우 메인작가인 이향희 작가를 제외하고 무려 5명의 작가가 교체되었다고 한다. 과거 개연성 없는 전개로 호화캐스팅에도 초라한 성적을 냈던 SBS <너를 사랑한 시간>은 작가가 교체된 후 기획PD가 작가로 참여하는 파행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작품에 시청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시청률을 만들기 위한 간섭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면 작품은 사라지고 상품만 남겨지게 될 것이다. 작가가 애초에 생각했던 작품이 이리저리 휘둘리다 엉뚱하게 끝나버리는 결과가 생기는 것. 이것은 작가에게도 또 시청자에게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최근 tvN에서 방영된 일련의 드라마들, 이를테면 <시그널>이나 <기억> 같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건 작가의 색깔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에는 영화 제작 인력이 투입되어 대본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연출의 공적이 있지만, 그래도 작품의 근간이 되는 작가 역량이 100% 발휘되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주효한 면이 있다.

 

시청자들도 달라졌다. 그저 시청률이 높다고 시청자들이 다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 상업적인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결과로 돌아오지도 않는다. 시청자들은 좀 더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언제부턴가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이제는 지상파 드라마에서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지상파 드라마에서도 인생작을 내는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도대체 <언브로큰>의 무엇이 일본 극우세력을 자극 했나

 

‘19세 최연소 올림픽 국가대표, 47일간의 태평양 표류, 850일간의 전쟁 포로.’ 영화 <언브로큰>은 이 몇 줄만으로도 충분히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가늠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건 실화다. 1940년대 미국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던 루이 잠페리니가 실제 겪었던 삶.

 

사진출처: 영화 <언브로큰>의 안젤리나 졸리 감독

이 드라마틱한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하지만 강렬하다. “버텨낼 수 있다면 할 수 있다는 것. 우리 식으로 미생의 삶도 버텨내면 완생이 될 수 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루이가 그 고난의 삶을 버텨내는 장면들은 아무런 삶의 목표가 없이 부유하던 그가 형의 충고로 하게 된 달리기를 닮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 순간을 버텨냄으로써 승리의 영광을 차지한 것처럼, 그의 삶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포기할 줄을 몰랐다.

 

루이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하다보니 영화는 마치 세 개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한 인상마저 준다. 그가 달리기를 하는 앞부분이 인간승리를 보여주는 스포츠 휴먼드라마라면 전쟁에 참전했다가 바다에 표류해 47일간을 버텨내는 중간 부분은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는 듯한 서바이벌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리고 850일 간의 전쟁 포로 생활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은 마치 일제 치하의 암울했던 우리네 역사를 보는 듯한 참혹한 전쟁물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일본 내 상영금지와 감독인 안젤리나 졸리의 입국금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이 영화에서 라고 불리는 잔인한 일본군 와타나베 역할을 한 록스타 미야비를 추방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게 된 건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일본 수용소 이야기 때문이다. 일본 극우세력들은 미야비가 재일교포 3세라는 사실을 들먹이며 영화의 이야기가 완전한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마루타> 같은 고전영화를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언브로큰>이 그리고 있는 일본군의 이야기는 오히려 너무나 순화된 느낌마저 준다. <언브로큰>의 원작에는 생체실험과 인육을 먹이는 장면까지 들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이런 장면들을 영화 속에 담지 않았다.

 

안젤리나 졸리는 이런 민감한 역사적 사안을 피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일본을 적대적으로 그리려고도 하지 않은 흔적이 역력하다. 영화 속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일본 민간인 시체들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장면도 살짝 들어가 있다. 그만큼 어느 한쪽의 편을 든다기보다는 전쟁 자체의 참혹함을 다루려 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일반화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루이 잠페리니가 겪은 개인사에 집중되어 있다. 그 드라마틱한 생존의 과정들을 담으면서 전하려는 메시지는 위대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것이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잔학함을 폭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의 루이의 고난을 다루면서 그것이 일본군 전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와타나베라는 개인적인 인물의 문제로 그리려한 점도 그렇다.

 

안젤리나 졸리는 일본을 일반화하려 하지 않았다. 루이가 겪은 특별한 사건으로 다루려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런 일반화를 하지 않으려는 선택으로 인해 영화는 심지어 조금 담담한 느낌마저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이를 문제 삼고 있는 건 이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오히려 <언브로큰>이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최근 우리네 대중문화에도 똑같이 불어 닥친 버텨내는 삶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삶이 혹독한 현실 앞에서 포기된 건 전 세계적인 경향이 아닐까. 이제는 어디서든 버텨내라 그러면 해낼 수 있다는 미생의 삶을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