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이 대세라면, <슬로우비디오>는 만만찮다

 

요즘 과도한 홍보는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다. 과도한 홍보가 만들어낸 잔뜩 커진 기대감을 작품이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그 실망감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태현이 동체시력(남들은 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까지 보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는 <슬로우비디오>는 그 첫발을 잘 디딘 작품이라고 여겨진다.

 

사진출처:영화 <슬로우비디오>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차태현이 <슬로우비디오>의 김영탁 감독에게 천만 영화 죽어도 안 나올 거다라고 일종의 셀프 디스를 한 것은 어쩌면 대단히 적절했다고 여겨진다. <슬로우비디오>는 그의 말대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현란한 영화가 아니다. <라디오스타>에 차태현과 함께 나온 김영탁 감독이 자신은 돈 벌면 지루한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얘기는 틀린 말이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블록버스터들의 틈바구니에서 보면 지루한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이 영화가 지루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슬로우비디오>는 재미있다. 이것은 김영탁 감독이 말하는 지루한 영화라는 뜻이 진짜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자극의 방정식 같은 영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슬로우비디오>는 독특한 영화이고, 그러면서도 그 안에 충분히 대중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다 나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부터 감동까지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지나친 설레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차태현이 출연해 입소문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과속스캔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도 만일 그 입소문이 작용한다면 충분히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영화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가 바탕으로 깔려 있고, 그 위에 휴먼드라마의 따스함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이것은 그저 사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미와 삶의 본질까지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차태현의 시선을 따라 남상미와의 멜로 구도를 차근차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한 로맨틱 코미디의 바탕 위에 감독이 가진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덧칠해 놓았다.

 

CCTV라는 관찰 카메라의 시대에 차태현이 그려 넣는 동네와 사람들의 그림들은 영화 연출적으로도 참신하고, 그 자체로도 괜찮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주인공의 동체시력이라는 설정과 CCTV, 그리고 그림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모든 곳을 카메라가 들여다보는 시대에 본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하는 꽤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모든 것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비춰지고, 그렇게 비춰진 것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 전시가치의 시대에, 카메라 바깥으로 탈주하고 차츰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유쾌하면서도 따뜻함을 선사한다. 그 따뜻함은 거창한 것이 아닌 소소한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움직이는데서 드러난다는 점에서 <슬로우비디오>의 세계가 얼마나 디테일의 감동을 포착하려 애쓰고 있는 지를 느낄 수 있다. 차태현의 동체시력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지나쳐버리는 세상의 기적 같은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영화적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태현의 전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슬로우비디오>는 그렇게 요란하지 않다. 마치 모든 영화가 천만영화가 되어야 할 것처럼 만들어지고 홍보되지만 <슬로우비디오>는 언감생심 천만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이 작지만 훈훈한 감동이 전해지는 느린 세계를 들여다보라고 속삭인다. <슬로우비디오>는 그 요란하지 않음이, 또 그 속삭임이 더 잔잔하면서도 먹먹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영화다. 이런 영화들이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천만영화같은 거창한 영화들 말고.

 

<목소리>의 이종석, 진실과 진심을 보는 소년

 

만일 누군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이하 목소리)>는 바로 이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가정법의 드라마가 새로운 건 아니다. SF 판타지 장르에서나 판타지 멜로 등에서 자주 봐왔던 설정이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이것과는 결을 달리 하는 새로운 이종결합이 시도되고 있다. 바로 사회극과 멜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끔찍한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는 수하(이종석)는 바로 그 사건 현장에서 타인의 속내를 읽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한 혜성(김소현, 이보영)이 자신을 죽이겠다 협박하는 살인범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수하를 위해 증언에 나서면서 수하의 사랑이 시작된다. 결국 범인으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는 어린 수하의 말 한 마디가 이 드라마의 사회극과 멜로가 엮어지는 부분이다.

 

그래서 수하가 누군가의 속내를 읽는다는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진심이다. 즉 진실 쪽으로 무게중심이 기울게 되면 드라마는 사회극으로 치닫게 되고, 반면 진심 쪽으로 기울게 되면 휴먼드라마나 멜로로 흘러가게 된다. <목소리>는 그래서 이 사회극이 만들어내는 정의의 문제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수하와 혜성의 멜로가 엮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약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그려낸다.

 

사실 우리네 드라마에서 멜로는 가장 흔한 소재이면서도 여전히 고정적으로 먹히는 소재다. 제 아무리 식상하다고 해도 멜로가 빠져버리면 보편적인 시청층을 가져가기가 어려운 게 우리네 드라마 현실이다. 그러나 정통 멜로는 역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멜로의 변형으로서 사회극이라는 보다 서민들에게 현실적으로 공감대를 줄 수 있는 장르가 덧붙여지면 드라마는 그만큼 힘을 얻게 된다.

 

달달한 수하와 혜성의 연상연하 멜로가 주는 풋풋함을 즐기면서 동시에 그들이 목격하는 사회정의의 진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진지함이 곁들여지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판타지의 설정은 멜로나 사회극이 그 자체로 빠질 수 있는 드라마의 공식을 탈피하게 해준다. 세월이 흘러 국선변호사가 된 혜성 앞에 수하가 나타나 자신의 친구의 억울함을 증명하는 방식은 구태의연한 증거 제시나 증언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수하와 혜성이라는 두 축으로 움직이게 마련이지만, 두 사람 중 더 집중되는 것은 역시 수하다. 그만이 볼 수 있는 진실과 진심이 먼저 우선되는 것이고, 그 진실과 진심을 혜성에게 전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래서 그들이 함께 어떤 문제를 풀어나갈 때 그것은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면서 동시에 두 사람의 멜로가 작동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 드라마가 가진 거의 모든 요소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된 데는 이종석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매력이 절대적이다. 이종석은 <학교 2013>에서 풋풋하면서도 자못 심각한 우리네 청춘의 자화상을 잘 소화해낸 경험이 있다. 특히 장난기 어린 모습과 절절한 감정이 뒤섞인 이중적인 이미지는 그가 이 드라마에서 소화해내야 할 연상연하의 멜로와 사회극의 진지함에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종석의 이 양면을 동시에 끌어안는 이보영의 연기변신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지만.

 

단 2회 만에 <목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간 수목극들이 너무 전형적인 장르의 틀 속에서 전형적인 이야기만을 전해주거나 지나치게 이질적인 것을 섞어 너무 낯설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목소리>는 멜로와 사회극을 판타지로 엮는 신선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사랑과 정의 문제를 보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르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묶어지는 지점이 바로 이 진실과 진심을 보는 매력적인 소년, 이종석이다.

 


'고지전', 원근법이 백미인 전쟁영화

'고지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은 무엇을 보는가 하는 점만큼 중요하다. 멀리서 볼 것인가, 아니면 가까이서 볼 것인가. 또 어느 쪽의 시점으로 볼 것인가. 그것이 전쟁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쟁영화를 먼 거리에서 보다보면 스펙터클의 덫에 걸릴 수 있고, 너무 가까이서 바라보면 지나치게 인물들의 감정 속으로만 매몰될 수 있다. 전쟁영화는 스펙터클이 될 때 비판받을 수밖에 없고, 감정에만 매몰될 때 소소해질 위험성이 있다. 또 실제 겪었던 전쟁을 다루는 경우 어느 한쪽의 시각에 맞추다보면 다른 편의 시각이 소외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지전'만큼 적절한 원근법을 고수하고 있는 전쟁영화는 보기 드물다. 일단 그 '애록고지'라는 영화의 공간이 그렇다. 한국전쟁의 끝 무렵 남북분계선을 가름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애록고지. 그 고지를 중심으로 영화는 시선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영화는 이 애록고지를 지도 위에 놓여진 하나의 점으로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 지도 위의 몇 미리에 불과한 땅을 더 갖기 위해 남과 북의 대표자들은 격렬한 언쟁을 벌인다. 그러나 이 다소 심심해 보이는 협상의 결과는 실제 애록고지로 날아가면 살벌한 결과로 이어진다. 지도에서 현장으로 다가가는 이 시선의 전환은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 메시지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애록고지의 전황을 포착하는 시선 역시 이 지도에서 전장으로 가는 시선과 동일하게 이동한다. 방첩대 소속으로 후방에 있던 강은표(신하균)의 시선을 쫓아가기 때문이다. 강은표는 뭔가 적과 내통하는 편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수사하기 위해 애록고지에 주둔한 악어부대로 들어간다. 즉 철저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애록고지에서 과거 친구였던 김수혁(고수)을 만나고, 그 하루에도 주인이 몇 번씩 바뀌는 애록고지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차츰 그들과 동화되어가는 과정은, 멀리서 봤던 풍경과 가까이서 보는 현실 사이에 괴리감을 만들어내며 한국전쟁으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만큼의 거리를 갖고 있는 현재의 관객들을 좀 더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든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악어부대의 병사들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총알 사이를 달려가는 장면은 원경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흙더미 위에 개미들이 뒤엉켜있는 것처럼 누가 누구편인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그 원경의 그림은 그러나 이미 관객들에게 익숙한 이 영화의 몇몇 주인공들의 사투를 따라가는 근경에 이르면 하나의 지옥도로 다가온다. 셀 수 없을 정도의 인물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가는 현실을 그 원근법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셈이다.

흥미로운 건 뺏고 빼앗기는 끝없는 전투장면의 반복 속에서 변해가는 이 전쟁에 대한 생각이다. 그들은 이제 차츰 이 전쟁이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전쟁 자체와 자신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록고지를 중심으로 남과 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몇몇 시퀀스들은 그래서 이 전쟁영화를 휴먼드라마로 만드는 이유다. 고지는 그저 거기 우뚝 솟은 땅일 뿐이고 이쪽에서 노래하면 저쪽에서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대치하고 있는 병사들은 점점 자신들이 왜 싸우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한다. 그래서 군인으로서는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밀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서로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는 궁극적으로 이 멀고 가까움과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놓여진 대결구도의 간격을 공감의 시각으로 채워놓는다.

고지 하나를 놓고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포착해내는 원근법이 있을까. 그 원근법은 공간적으로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도, 남과 북이라는 대치 상황 속에서도, 또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다양한 시각들을 포섭해낸다. 그리고 이 원근법은 전쟁영화가 가진 위험성과 한계를 ‘고지전’이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멜로, 현대물보다 사극에서 빛나는 이유

멜로가 사극과 바람이 났다. 전통적으로 현대물과 조우하던 멜로드라마는 좀처럼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통 멜로의 부활을 예고했던 ‘못된 사랑’은 출연진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틀에 박힌 설정과 스토리로 오히려 ‘못된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고있고, ‘불한당’은 애초에 기획했던 휴먼드라마보다는 멜로드라마의 성격을 보이면서 여전히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반면, 현대물들이 성공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멜로는 오히려 사극 속에서 더 빛나고 있다. ‘이산’의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 그리고 효의왕후(박은혜)의 삼각 멜로가 그렇고, ‘쾌도 홍길동’의 홍길동(강지환)과 허이녹(성유리) 그리고 이창휘(장근석)의 삼각 멜로가 그렇다. 무엇보다도 이런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현대물에서 보여지는 멜로가 식상한 느낌을 주는 반면, 사극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멜로드라마는 왜 늘 식상하다 욕먹나
멜로드라마는 그 성격상 사랑을 중심에 두고 그 빗나감과 마주침을 연속적으로 만들어가면서 극을 발전시켜나간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 속에 웃음과 눈물을 교차시켜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공식 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것을 감지해버린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처음부터 만들어가거나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못된 사랑’의 처음 1,2회는 이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나인정(이요원)의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 이 2회분에는 사실상 작품 전체가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모든 단서들이 놓여져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부분이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며 보여졌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이 예측된 흐름 위에 새로운 어떤 틀이 마련되지 않고 예측한 대로 흘러갔을 때, 드라마는 식상한 것이 되어버린다. ‘못된 사랑’이 가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이런 문제는 대부분의 멜로가 가미된 현대물들이 안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확보한 ‘뉴하트’같은 작품에도 마찬가지다.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가 이미 의학드라마 속 멜로의 전통 속에서 익숙한 구도이기 때문에 ‘뉴하트’는 긴박한 병원이야기가 돌아갈 때는 참신함을 느끼다가(물론 이것이 ‘뉴하트’의 경우는 익숙한 스토리가 많다), 멜로로 돌아올 때는 무언가 축축 쳐지는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멜로와 전문직의 봉합이 이루어졌을 때 ‘무늬만 전문직’이란 비아냥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는 전문직의 디테일을 잘 못 살려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멜로 또한 천편일률적인 구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사극 속의 멜로가 다른 이유
하지만 이러한 멜로도 사극을 만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먼저 몇 가지 제한점이 생겨난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 자체로는 만들어지기가 어렵다. 시청자들의 인식 자체가 사극은 역사적인 이야기의 재미를 가진 드라마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이 될지언정 본 재료는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 이러한 사극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제한점으로 인해 사극의 멜로는 스토리와 함께 굴러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산’의 성송연과 이산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이를 정확하게 잘 보여준다. 이 둘은 신분상의 거리만큼이나 서로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 사랑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 보여지는 것들은 직접적인 대사보다는 사건 속에서 인물의 행동으로 처리된다. 이산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미거한 힘이지만 그 일을 해결하려 성송연이 뛰어다닐 때 그 멜로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또한 성송연이 이국 땅으로 떠났을 때, 이산이 말을 달려 그녀를 쫓아간다거나, 그 먼 길을 오로지 이산만을 생각하며 걷는 성송연은 그 자체로 시청자들에게 사랑의 강도를 전한다. 그 둘은 서로 만나지 않아도 멜로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막상 만난다 하더라도 신분상의 차이가 있기에 하는 대사 또한 우회적이다. 성송연이 돌아와 죽을 고비를 넘겨 깨어났을 때, 이산이 그녀에게 말하는 “네가 가고 나는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더냐”는 대사는 직설어법이 아닌 간접어법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은 ‘쾌도 홍길동’에서 홍길동과 허이녹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코믹이라는 장르적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직접적으로 서로를 향해 애정행각을 벌이는 낯간지러운 대사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홍길동이 허이녹에게 ‘멍청이’이라고 말할 때, 먼 길 떠나는 길에 어머님의 무덤가 흙을 조잡하게 수놓은 주머니에 허이녹이 퍼담아 줄 때 그 사랑의 마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사극이 멜로를 제대로 품어줄 수 있는 것은 멜로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운명적인 사랑이 현대의 가치관으로는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사극은 그 시점을 과거로 돌려 운명적 사랑의 시대에 맞춰준다. 물론 지금의 가치에는 맞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사극이니까’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멜로, 그 진화의 길들
이러한 사극과 멜로가 만나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진화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멜로드라마가 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운명적인 사랑에 호소하는 순전한 멜로드라마에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멜로드라마는 그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고 타 장르와 몸을 섞는 실험이 필요하며 그것은 사극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면 이것은 사극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지 않다.

멜로드라마가 현대물로서 진화의 몸부림과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휴먼드라마이다. 작년 ‘고맙습니다’가 그 첫 번째 길을 열었고, 그 이후 ‘인순이는 예쁘다’가 그 계보를 이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불한당’ 역시 휴먼드라마를 표방했지만 그 진화의 계보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휴먼드라마가 가진 가능성은 멜로드라마의 구도가 가진 남과 여의 만남을 사회적인 이슈로까지 확장시켜나간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의 영신(공효진)과 기서, 그리고 ‘인순이는 예쁘다’의 인순이(김현주)와 상우(김민준)의 만남은 멜로드라마로서의 남녀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몰이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멜로드라마는 미스테리와 몸을 섞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사랑을 넘어 사람을 포착하는 멜로드라마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사극이 끝없이 진화의 길을 걸어오는 것처럼, 장르드라마가 늘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하는 것처럼 이제 멜로드라마도 변화하지 않으면, 실험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것이 장르적인 퓨전이든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이든지 간에 분명한 점은 멜로드라마도 진화해야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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