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의 미래병원, 우리 사회의 자화상

 

병원이 이 모양인데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119 구급대원이 응급환자를 구조해 왔지만 대량수혈이 필요한 환자는 받지 않는다는 게 방침이라는 의사에게 구급대원은 그렇게 말한다. 지진으로 정상적인 운용이 어려운 병원이라지만 환자를 길거리에서 죽어가게 만든다는 건 의사로서 아니 인간으로서는 비상식적인 일이다. 그래서 의사가 내세우는 건 이른바 병원의 방침이다. 그 결정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병원이 내리는 것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디데이(사진출처:JTBC)'

JTBC 드라마 <디데이>의 이 구급대원이 던지는 질문은 마치 우리 사회에 대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이 드라마에서 미래병원(이름에 미래를 붙인 건 의도적이었을 게다)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즉 병원이 이 모양인데 무슨 희망이 있냐는 일갈은 재난으로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방침 운운하며 생명을 방치하는 우리 사회의 절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식으로는 미래병원의 희망, 아니 이 사회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미래병원의 이 이야기는 재난 대책 마련을 위해 대통령이 각 부처 장관들과 회의를 하는 장면에서도 그대로 연출된다. 지금 저 바깥에서는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장관들은 이 일의 책임 소재를 피하려고만 안간힘이다. 서로 자신의 부처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며 다른 부처에 일을 떠넘기는 걸 보다보면 정말 이 나라가 희망이란 건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래병원에는 두 종류의 의사들이 있다. 그 놈의 방침에 철저히 입각해 환자가 설혹 수술 중 사망하게 되더라도 책임 소재를 없애려는 박건 병원장(이경영)이 있고 그에 동조하는 한우진(하석진) 같은 의사가 있는 반면, 눈앞의 환자를 외면하지 않고 1%의 가능성도 버리지 않으려는 이해성(김영광) 같은 의사가 있다. 박건은 사람 목숨이 다 똑같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재난 속에서도 보건복지부 장관을 살리는 일에만 열중한다. 그것이 병원 경영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난이 터지자 미래병원의 문을 닫아걸면서 박건은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 이런 재난은 국공립병원들이 짊어져야할 일이라고. 자신들처럼 사립병원들은 재난상황에 환자들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것. 이것은 철저히 상업 논리다. 의료민영화가 만들어낼 미래의 풍경을 미래 병원 박건 병원장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병원은 돈을 버는 곳이지 생명을 살리는 곳이 아니다.

 

<디데이>는 물론 서울 한복판에 벌어지는 지진이라는 가상의 재난상황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지금 현재 우리들 이야기다. 여기서 병원과 국가와 인간은 거의 동격이나 마찬가지다. 환자를 살리기보다는 돈 버는 게 우선인 병원이나 당장 힘겨워 죽음 같은 생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을 살리기보다는 나라 경제 운운하며 돈 버는 일을 전면에 내세우는 국가, 아니 나아가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 살기 위해 생존경쟁을 벌이게 되어버린 시스템 속에서 비정해져버린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건넨다.

 

재난이 말해주는 건 위기상황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인간의 증명이다. 평상시에는 수면 밑에 깔려 있어 잘 보이지 않던 일들이 위기를 맞게 되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해성의 어머니가 사실은 한우진의 의료과실에 의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지만 미래병원장 박건이 병원의 입장에서 이를 덮어버린 일은 그래서 사실 재난은 터지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들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디데이>가 보여주는 인간의 증명은 또한 병원의 증명이기도 하고 국가의 증명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이 드라마는 아프게도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선택하라고 한다.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낼 것인가.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지만 묻혀지고 있는 비인간적인 일들. 결코 드라마를 드라마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징비록>, 선조에 실망할수록 광해를 희망하게 되는 까닭

 

세상에 이런 통치자가 있을까. KBS <징비록>의 선조(김태우)는 임진왜란의 전란 통에 도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또 개성을 버리고 평양으로, 심지어는 평양마저 버리고 의주로 도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명나라로의 망명을 시도하려는 선조는 명나라 황제가 관전보(여진족과의 국경지대)의 빈 관아를 빌려주겠다는 굴욕적인 이야기까지 들어야 했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자기 안위만을 위해 도망치며 절치부심운운 변명만 늘어놓는 선조에게 가까운 신하들조차 등을 돌렸다. 명나라 망명에 극렬하게 신하들이 반대하자 선조는 급기야 광해군(노영학)에게 조정을 맡기고 떠나는 분조(조정을 둘로 나눔)를 단행한다. 이런 선조에게 류성룡(김상중)필부처럼 행동 한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선조의 행동은 백성들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명나라 황제가 위로조로 보내온 은자를 신하들에게 포상으로 내리자 오히려 신하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 포상은 왕과 함께 도주하고 있는 자신들이 아니라 왜군과 싸우고 있는 병사들에게 가야 하는 것이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구휼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걸 선조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백성들이 관아를 털어 군량미를 탈취하자 그들을 회유해 그 죄를 사해주는 대신 군량미를 회수한 류성룡의 처사에 선조는 발끈하는 모습이었다. 관아를 턴 백성들이 왜 그랬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처벌하지 않은 류성룡의 처사와 이를 허한 광해군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긴 것.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왕으로서의 존중을 받으려는 통치자. 도대체 그 누가 이런 통치자에게 지지를 표할 것이며, 존경을 표할 것인가. 게다가 선조는 백성들의 마음이 점점 광해군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며 분조를 거두고 자신이 국사를 맡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신하들의 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이런 행동은 이미 광해군을 중심으로 민심이 모여 국난 극복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터에 찬물을 뿌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선조를 보면 왜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게 됐는가 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제 안위만을 살피는 통치자가 위에서 군림하는 한 그 국가가 온전할 리가 만무다. 심지어 평시에 그를 따르던 신하들조차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은 전시에 그 통치자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조의 무능을 넘어선 무개념은 새롭게 등장한 광해군의 행보를 하나의 희망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는 도망치기 보다는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진을 혼란시키고 관군을 독려하는 길을 선택하려 한다. 그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류성룡의 마음은 아마도 당대의 백성들의 마음이자 지금 현재 이 사극을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것이다.

 

MBC 사극 <화정>은 바로 그 선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죽어가는 선조 앞에서 광해는 절규한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선조에 대한 깊은 원망을 광해는 드러낸다. 역사는 광해를 이라는 호칭을 붙여 폭군으로 기록하지만 <징비록>을 통해 선조의 행위를 보다 보면 광해의 깊은 고통이 이해가 된다.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는 도대체 무얼 했단 말인가. 그러면서 그 위기에 맞섰던 광해를 내치려 한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징비록><화정>이 기묘하게도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그 이야기에 지금의 대중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들이 이 두 사극을 통해 많은 것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선조에 대해 실망할수록 광해에 대한 지지의 마음이 커져가는 건 그래서 당대의 백성이나 지금의 시청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징비록>, 류성룡보다 강한 이순신의 존재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이 주인공인건가. KBS <징비록>의 주인공은 이 제목의 책을 쓴 류성룡(김상중)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가면 갈수록 이순신에 대한 갈증이 깊어진다.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이순신 역할을 누가 연기할 것인가가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다. 거북선 건조를 선조(김태우)가 후원한 걸로 알고(사실은 류성룡이 왕의 이름으로 보낸 것) 이순신이 감사의 서신을 보내온 장면에서 잠깐 등장한 목소리에 시청자들이 귀를 쫑긋 세운 건 그래서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지주들만 배를 채우고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과 이를 바로 잡지 못하는 왕과 신하들, 전운이 감돌고 있음에도 나라살림이 엉망이라 축성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 심지어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자는 얘기까지 꺼냈다. 수군을 폐지하자는 건 고스란히 바닷길을 열어주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발끈한 이산해(이재용)는 이를 매국이라고까지 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 혼돈의 시기에 당파나 왕,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는 인물은 류성룡이 유일하다. 그러니 그는 선조가 반대한 거북선 건조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게 왕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었던 것. 모두가 당파로 인해 이순신을 등용하려 하지 않을 때도 유일하게 그를 지지한 인물이 바로 류성룡이다.

 

그래서 <징비록>은 이렇게 백성들의 안위와 왜세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진 소신 있는 정치가 류성룡을 다루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더 희구되는 인물은 아무래도 이순신인 것 같다. 이순신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렇게 된 건 <징비록>이 다룰 수밖에 없는 임진왜란이라는 소재에 걸맞는 스펙터클로서 이순신만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인 실패가 있었고 어째서 외세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냉엄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 정치적인 대결구도와 왕과 신하의 역학관계가 드라마의 주 골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런 정치적인 입장과 대결에 일종의 혐오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지금 현재의 정치 현실 안에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흔하게 보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TV 뉴스만 들여다보면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정치인들의 공방을 드라마를 통해서 또다시 보기 싫은 까닭이다.

 

대신 대중들이 드라마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이순신 같은 희망이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서로의 이권을 두고 다투고 있을 때 묵묵히 바다를 지키기 위해 준비에 준비를 다하는 그런 인물. 이순신에 대한 열망에는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판타지적인 해소에 머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지긋지긋해도 그 식상한 정치를 아프게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나 대중들의 각성을 이뤄내는 일은 이순신이라는 정해진 영웅담의 쾌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징비록>이라는 책은 그래서 써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순신이라는 인물로 빨려 들어가는 건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당대의 임진왜란 직전처럼 서민들의 마음을 실망감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오죽 지긋지긋하면 들여다보고 싶지 않겠는가. <징비록>에서 류성룡의 정치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희망을 더 보고 싶어 하는 데는 이런 대중들의 헛헛한 정서가 깔려 있다.

 

<미생> 신드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이제 <미생>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끝날 때가 다 됐지만 정작 주인공인 장그래(임시완)의 위치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인턴으로 들어왔다가 겨우겨우 계약직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그에게 아직 정규직 소식은 없다. 오히려 그 정규직을 억지로라도 만들려고 위험성 있는 사업을 덜컥 하려는 오차장(이성민)과 그 사실을 알고는 퇴사를 고민하는 장그래가 갈등을 일으키는 중이다.

 

'미생(사진출처:tvN)'

그나마 만년 과장이었던 오과장이 오차장이 된 게 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의 성취다. 물론 풋내기 신입사원이었던 장그래나 안영이(강소라), 장백기(강하늘), 한석률(변요한) 같은 인물들이 이제 제법 회사에 적응해 척척 자기 몫을 해내는 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그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미생들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 <미생>이 왜 그토록 신드롬을 만들었는가를 의아해 한다. 하지만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말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사실 직장생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커다란 성공이나 성취를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저 그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섣부른 판타지는 헛웃음을 만들 수밖에 없다. <미생>은 그런 점에서 보면 헛된 희망을 얘기하지 않은 드라마다. 거기에는 그 흔한 멜로적 성취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사회현실 속에서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면 멜로 같은 사적인 성취라도 취하는 것이 기존 드라마들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미생은 그런 곁가지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사원과 대리, 팀장 사이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그 미생으로서의 삶에 자그마한 숨통을 만들었을 뿐이다.

 

멜로도 없고 가족도 그렇게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 일중독자들의 세상이 그토록 우리를 잡아끌었던 건 거기에 직장인들의 디테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직장인이란 유리지갑월급쟁이과로과음으로 점철된 어떤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일 속에 푹 빠져 살아가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미생>은 달랐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뻔하게 치부해 왔던 직장인들의 면면을 깊숙이 들어가 자세한 디테일로 그려냈다. 거기에 특별한 판타지는 없었지만, 바로 이 디테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안과 위로를 주는 힘을 발휘한다. 누구도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던 삶을 조명해준다는 것. 그리고 그 미생의 삶에 나름의 가치 부여를 한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왜 직장인들에게 그토록 큰 공감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미생>의 인물들은 그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변함없음을 보여주지만, 이런 헛된 판타지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직장인들의 삶이다.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바둑에는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오차장의 이 말에서 방점은 우린 아직 다라는 단어에 찍힌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아픈 현실에 대한 공감. 그것이 <미생>이 신드롬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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