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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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으로 재해석한 ‘기생수:더 그레이’, 반가운 연상호 감독의 귀환

D.H.Jung 2024. 4. 8.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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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의 ‘기생수:더 그레이’, 원작과 달리 가족, 조직에 집중한 건

기생수:더 그레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간도 기생을 합니다. 인간은 조직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기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조직이라는 무형의 존재에 기생을 하며 그것을 위해 희생을 하고 자신의 생존과는 아무 상관 없이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며 그것을 위해 그 조직을 위해 충성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우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유입니다.” 

 

넷플릭스 시리즈 ‘기생수:더 그레이’에서 기생생물의 우두머리이자 세진교회의 목사인 권혁주(이현균)는 자신들의 종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간이 다른 점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 여러모로 이 작품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의 초창기 애니메이션인 ‘사이비’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에서 목사가 꺼내놓는 연설은 이 작품이 원작과는 어떤 차별성을 갖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연상호 감독은 ‘기생수:더 그레이’를 통해 원작이 가진 설정만을 가져와 그 ‘기생’의 의미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즉 갖가지 ‘조직’의 의미로 해석해낸다. 

 

그 조직은 가족일 수도 있고, 범죄 조직일 수도 있으며, 경찰 조직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묶여지는 한 마을 전체일 수도 있다. 기생생물이 인간의 몸에 들어와 완전히 뇌를 장악하려 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의 몸을 살려내지 않으면 자신도 죽을 수 있어 공존의 길을 선택하며 생겨난 변종이라는 기발한 설정의 원작처럼, ‘기생수:더 그레이’도 정수인(전소니)의 몸에 깃든 기생생물은 칼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그를 살려내려다 그와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공존의 의미는 ‘기생수:더 그레이’에서는 인물들간의 관계로 확장된다. 

 

즉 정수인은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해 아빠를 신고한 인물이다. 그 때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정수인을 구해낸 형사 김철민(권해효)은 그 후로도 정수인과 유사 부녀지간 같은 관계로 이어져 있다. 이것은 마치 ‘기생수’에서 기생생물과 그것이 깃든 인간 사이의 설정을 인간관계로 치환해낸 것처럼 보인다. 정수인이 폭력적인 아빠의 세계 속에 어쩔 수 없이 ‘기생’하며 그 폭력에 잠식당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스스로 신고하고 벗어났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렇다. 

 

물론 자신의 아빠를 신고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괴물’ 취급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그는 배척받아 홀로 살아가는 인물이 되지만, 그럼에도 그가 살아갈 수 있었던 건 그를 구해내주고 그를 이해하는 김철민과의 유사 부녀 같은 ‘공생’ 관계 때문이다. 이 설정은 정수인이라는 인물이 기생생물이 들어왔어도 다른 길을 가는 존재가 될 거라는 걸 암시하면서, 그런 존재가 됨으로써 조직(사회)에 배척당하면서도 그만의 공존의 길을 찾아갈 거라는 걸 말해준다.  

 

이건 조직에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망나니파 조직원 설강우(구교환)에게도 똑같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 역시 고립된 인물이고 그래서 도망쳐 가족을 찾지만 이미 가족들도 모두 기생생물에 희생됐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역시 혼자 살아남지만, 정수인이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인격을 오가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돕는다. 그는 정수인에게서 기생생물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여동생을 본다. 그래서 그 관계는 유사 남매 관계처럼 보인다. 

 

남편이 기생생물에 잠식당한 후, 그레이팀 팀장이 되어 기생생물들에 유난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최준경(이정현)은 죽은 남편을 이용해 기생생물 위치를 파악하고 소탕하는 일을 하는데, 이 관계 또한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는 심지어 기생생물이 잠식한 남편을 고문하면서까지 적들을 찾아내려 하는데, 그 유난한 적개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 대한 애정 또한 그만큼 컸다는 걸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전을 할 때 보이는 이상할 정도의 명랑함도 마찬가지다. 그가 보이는 모습은 어쩌면 내면의 상처를 애써 숨기거나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 최준경과 남편의 독특한 관계는 기생수의 관점으로 보면 새삼 인간만이 가진 이상한 관계로 다가온다. 

 

따라서 원작을 이미 접한 시청자들이라도 ‘기생수:더 그레이’는 기생과 공생의 관점으로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들여다보는 재미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정수인과 김철민의 유사부녀 관계나 정수인과 설강우의 유사남매 관계는 물론이고, 최준경과 죽은 남편, 김철민과 동료형사인 강원석(김인권), 설강우와 그의 친구인 기석(유용), 설강우와 같은 망나니파의 규민(이요섭) 등등 다양한 인간군상의 관계를 ‘기생’과 ‘공생’의 관점으로 새삼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역시 한국적인 해석으로서 사회 시스템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이러한 조직 시스템에 대한 서사는 아무래도 시즌2에서 더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한동안 지나친 다작으로 연상호 감독의 많은 작품들이 애초 갖고 있던 매력을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오랜만에 돌아온 연상호 감독의 색깔을 다시 보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도 워낙 원작의 마니아라서 스스로도 이번 작업을 ‘성덕’이라고 표현했던 데서 느껴지듯이, 오래도록 꿈꿔왔던 일을 드디어 꺼내놓은 데서 생겨난 반가운 귀환이 아닐까 싶다. (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