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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넘버 원'의 높은 완성도와 남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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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넘버 원'(사진출처:MBC)

"봉순아. 보이는 겨. 이놈들이 사람이었구먼.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어.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어느 날 갑자기 징집되는 바람에 가족과 헤어져 전장에 와 있는 박달문(민복기) 이병이 적의 참호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북한군 병사의 사슬을 풀어주며 하는 대사는 '로드 넘버 원'이 어떤 드라마인가를 잘 드러내준다. '로드 넘버 원'을 가지고 애초에 '반공으로의 회귀'를 걱정했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있고, 남과 북이 서로 총칼을 들이밀고 싸우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서로에 대한 증오보다 더 절실해 보이는 건 생존이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승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바로 그 길, 가족으로 가는 길과 다름 아니다.

그 길은 단순해보이지만 험난한 여로다. 만일 평시였다면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그 길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된다. '로드 넘버 원'은 강물 하나를 건너는 에피소드에 드라마의 시간으로서는 꽤 긴 30분 이상을 쓰고, 진지 하나를 넘어서기 위해 한 회 분의 시간을 사용하는 드라마다. 평시라면 단 몇 분의 에피소드에 그쳤을 길이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겹기 만한 그 길은 이다지도 새로운 의미들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죽으며, 또 길 위에서 가족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길 위에서 동료에게 총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 평범한 길이 예측불가능해진 건 전쟁 때문이다. 그러니 '로드 넘버 원'은 전쟁물이면서도 또한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그렇게 힘겹게 찾아간 고향은 또 어떨까.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선을 넘어 찾아온 오종기(손창민) 앞에 놓여진 고향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다. 가족이 마을사람들의 내부고발로 몰살된 것. 이것은 아마도 오종기 개인의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지목하는 그 상황의 기억은 당대를 살아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남아있을 트라우마일 테니까. 이미 그들이 찾아갈 고향의 모습은 그들이 길 위에서 상상하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 무엇도 희망이 되지 못하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전쟁물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마저 던지는 것만 같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군인들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계급이라는 구조는 종종 불합리한 그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장우(소지섭)와 신태호(윤계상)의 계급 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신태호가 이장우의 상관이었지만, 고지 점령의 전과를 올린 이장우는 중대장이 되어 이장우의 직속상관이 된다. 하루아침에 호칭을 달리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허용되는 그 길. 바로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그 길의 법칙이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내는 모습들도 흥미롭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그 계급의 허용은 상관의 리더십이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말해준다. 혹자는 계급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하고 혹자는 승리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려 한다. 물론 이장우처럼 모든 이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세운 이들도 있지만.

'로드 넘버 원'은 사전제작 드라마로서 꽤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는 드라마다. 이것은 단지 뛰어난 영상의 완성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스토리구조에 있어서도 '로드 넘버 원'이 거두고 있는 휴머니즘적 시각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 역시 사전제작이라는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초반부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전체적인 스토리의 균형을 흔든 이장우와 신태호 그리고 김수연(김하늘)의 멜로 라인은 옥에 티를 넘어서 드라마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려 놓았다. 왜 멜로를 그처럼 내세웠을까 하는 이유는 일면 이해가 된다. 전쟁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전쟁드라마라면 떠올리던 반공이라는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또 도외시될 수도 있는 여성 시청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멜로는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은 '로드 넘버 원'의 한계로 작용했다. 오로지 김수연을 만나기 위해 전쟁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이장우와 신태호의 모습은 지나친 멜로로의 귀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멜로가 아니라 휴머니즘 자체에 천착했더라면 어땠을까. 부대원들 개개인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멜로를 대체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서 아이러니하게 갖게 되는 생각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만들어낸 사전제작 드라마가 또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만일 '로드 넘버 원'이 사전제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초반부 멜로에 쏟아진 비판을 받아들여 어떤 궤도 수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로지 길 하나에만 집중해도 충분했을 이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못내 남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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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일으킨 가족애, 그 가능성과 한계

'자이언트'의 시청률은 최근 몇 회 동안 갑자기 올랐다. 10% 언저리에 머물던 시청률은 18%대까지 올랐고, 현재는 16%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대작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자이언트'의 초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유는? 국책성 드라마라는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런 오해는 눈 녹듯 풀렸다. 복마전을 방불케 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사건들의 연속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흘러갔다.

강남땅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각축전은 사극의 전투를 연상케 할 정도. 하지만 국책성 드라마라는 오해가 풀리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건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정체상태였다. 이런 멈춰선 '자이언트'의 거대한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도대체 뭘까. 바로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차례차례 재회하는 장면에서 좀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자이언트'의 무거운 시청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1빌딩 앞에서 미주가 그녀를 바라보는 강모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눈을 보면서 "오빠?"하고 말했을 때, 미주 앞에 나타난 성모가 옛날 사진관에서 찍었던 빛바랜 사진을 꺼내들 때, 그리고 강모를 구해낸 성모가 동생에게 "내가 네 못난 형이다"라고 말할 때 드라마의 집중도는 극에 달했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이라는 코드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가족 코드가 '자이언트'에 부여한 힘은 그간 끝없이 벌어졌지만 깊은 감정이입을 만들지는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남다르게 만들었다. 잡혀온 강모를 폭행하는 조필연(정보석)을 바라보는 성모의 눈빛에는 불꽃이 튀었고, 이것은 그간 묻혀있던 성모라는 캐릭터를 재발견하게 만들었다. 박상민의 연기가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재발견된 캐릭터의 힘이기도 하다. 한편 연기력 논란까지 불러 일으켰던 황정음 역시 가족을 만나 미주라는 캐릭터가 살아나면서 '눈물의 여왕'으로 재탄생되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코드가 그저 뿔뿔이 흩어져만 보이던 사건들 사이에 어떤 강력한 접합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캐릭터는 감정선이 녹여진 사건들 속에서 살아나기 마련이다.

'자이언트'의 시청률이 급상승한 또 하나의 이유는 멜로다. 그간 겉으로만 빙빙 돌던 강모와 정연(박진희)의 멜로가 급물살을 타면서 드라마는 좀 더 애틋해졌다. 정식이 저지른 살인누명을 뒤집어쓰고 도망 다니는 강모를 위해, 정연은 머뭇대던 감정을 드디어 드러낸다. 멜로 역시 가족 코드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건들에 깊은 감정선을 부여한다.

물론 가족코드나 멜로코드가 가진 단점도 있다. 그것은 사건을 단순화시키고, 선악구도를 너무 뚜렷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가족으로 뭉치기 전에는, 또 멜로로 서로를 사랑하기 전에, 이 드라마는 어떤 방향으로 튈 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선악구도가 불분명했다. 하지만 관계가 명확해지자, 이제 가족을 중심으로, 또 연인을 중심으로 선악구도는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된다. 선악구도보다는 권력과 욕망을 두고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의 양상이 장점이던 '자이언트'라는 시대극에는 조금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결국 '자이언트'의 시청률 급상승에는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코드와 멜로코드가 왜 그리도 오래도록 반복되는 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에게 이 두 코드는 식상하면서도 강력하다. 따라서 적절히 사용된다면 큰 효과를 가져오지만, 지나치게 매몰되면 오히려 식상해질 위험성도 생긴다. '자이언트'가 계속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건과 이들 코드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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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이언트' 의외로 그 흥미로운 신파의 정석

    Tracked from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삭제

    이강모(이범수)가 드디어 만보건설의 황태섭(이덕화) 회장이 조필연(정보석)과 함께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믿고 의지하며 진심으로 모셔 온 황태섭이 원수였다는 사실은 이강모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원래 이성모(박상민)는 동생을 복수극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지만, 동생이 결혼해서 함께 도망치려는 여자가 바로 황태섭의 딸 황정연(박진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잔인한 비밀을 털어..

    2010/07/20 15:05

'로드 넘버 원'은 시사회에서 한지훈 작가가 말한 것처럼 쿨하지 못하다. 한 작가는 "동창과 친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자신이 공부했던 학교와 생활한 마을에 폭탄이 터지는" 한국전쟁을 다루는 작품은 할리우드 전쟁 영화처럼 쿨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맞는 이야기다. 도대체 참혹한 전쟁을 다루면서 액션영화처럼 멋진 장면들을 어찌 연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로드 넘버 원'이 쿨하지 못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국전쟁이라는 소재가 가진 함의, 한때 반공용으로 거의 다루어지면서 생겨난 편견, 그런 것들의 강박 때문일까. 이 작품은 서두부터 장우(소지섭)와 수연(김하늘)의 멜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장수 감독은 "전쟁 같은 멜로"라고 했지만, 그것은 연출과 연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장우와 수연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지독히도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장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장우가 수연을 몰래 그리고, 그걸 수연이 받아들이며, 성장한 두 사람이 갑자기 "사랑한다!"고 외치고, 갑자기 장우가 수연의 학비를 위해 빨치산 토벌을 위해 떠나고, 또 갑자기 전사통보를 받고는 자살을 하려는 수연을 태호(윤계상)가 구하고는 둘이 결혼식을 준비하는데 살아 돌아온 장우가 그걸 막아서고... 장우와 수연이 다리 위에서 격렬하게 서로를 껴안고 키스하는 행위는 말 그대로 '전쟁 같은 멜로' 같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드라마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인상적인 '로드 넘버 원'만의 멜로이야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장수 감독과 한지훈 작가가 시사회에서 밝힌 것처럼 '추억이 담긴 나무'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그 정서적 공감대가 '로드 넘버 원'이 취하는 자세라면, 이 멜로는 실로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의 멜로가 전쟁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흩어지는 것이 결국 그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드 넘버 원'은 급하게 관습적인 장면으로 멜로를 구성해놓고, 이제 곧바로 전쟁으로 들어간다. 장우와 수연은 그 전쟁 속에서 어떤 멜로를 통해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것인가.

전쟁은 분명 쿨하게 다룰 수 없는 것이지만, 멜로는 좀 더 쿨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전쟁 같은 멜로'는 겉으로 드러내는 것보다는 속으로 꾹꾹 눌러줄 때 더 폭발력이 생기지 않았을까.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재성과 채시라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키스를 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명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 단계에 오기까지 두 인물의 멜로가 꽤 쿨하게 접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느 결정적인 순간, 그것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며 드러났던 것.

'로드 넘버 원'은 이제 그 1번 국도에 첫 발을 디디고 있다. 멜로가 여전히 아쉽지만, 그래도 남은 것은 '휴머니즘'이다. 전쟁 속에서 두 사람의 멜로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의 휴머니즘이 녹아난다면 '로드 넘버 원'은 어쩌면 본래 의도했던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아름다운 장면이 밑그림이 되고, 그 위에 전쟁이라는 폭탄을 떨어뜨려 궁극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는 드라마다. 그러니 이 밑그림을 얼마나 잘 제시하느냐가 성패를 가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밑그림은 전쟁 앞에서 쿨하지 못함을 더 강하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쿨해야 하지 않을까. 그저 먼저 인물들이 우는 것만으로는 정서적으로 공감하기가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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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27회의 스토리는 무엇이었을까. 장희빈(이소연)이 동이(한효주)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가 돌아와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스스로 독약을 마시는 자작극을 벌인 것? 그래서 향후 폐비(박하선)에게 누명을 씌워 아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던 사건? 만일 이것이 '동이'가 한 회분 사건이라면 이 스토리는 과거 흔하디 흔한 장희빈 이야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동이'는 스스로 기획의도에서 밝힌 듯이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가 될 동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27회 한 회 동안 동이가 겪은 사건은 무엇일까.

궐 밖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이(한효주)가 의주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도성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동이는 무수리가 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폐비의 누명을 벗겨줄 증좌를 왕에게 직접 건네기 위함이다. 한 회분의 스토리로 치자면 지나치게 단순하고 새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다. 게다가 왜 동이가 꼭 스스로 궁으로 들어가 그것도 숙종(지진희)에게 직접 증좌를 건네려는 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장희재(김유석)와 오윤(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동이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동이는 왜 다른 인물을 통해 증좌를 대신 왕에게 건네려 하지 않는가. 또 궁에 들어왔다면 감찰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들을 동이는 왜 찾아가지 않는가.

서용기(정진영)와 차천수(배수빈)는 왜 갑자기 동이가 찾을 수 없게 사라졌는가. 우연히 도성 저자에서 보게된 주식(이희도)과 영달(이광수)의 뒤를 좇는 인물들은 왜 갑자기 생겨난 것일까. 그들이 주식과 영달을 미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이'의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은 의문을 남긴다. 논리적으로 비약도 많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모든 사극이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짜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 사극은 좀 더 인물의 감정라인을 통해 논리적인 허점을 메워야 한다. 즉 동이가 왕을 직접 만나려 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동이의 왕을 만나려는 그 애틋한 마음을 감정이입시켜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동이'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지금 '동이'는 스토리가 잘 보이질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스토리는 있지만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야기다. 동이가 활에 맞고 거의 사경을 헤매다가 의주의 한 상인에 의해 살아남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또 그 상인이 동이를 붙잡아 두려하고 마침 나타난 장희재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또 갑자기 심운택(김동윤)이 나타나 그녀를 돕는 이야기도 새롭지 않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들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동이가 왕의 행차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애끓는 토로를 하는 장면이거나, 심운택의 캐릭터다. 즉 이야기보다는 외적인 것들에 더 치중해 있다는 것이다.

'동이'가 초반부에 그나마 촘촘했던 스토리에서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두드러지는 것은 연출이다. 사실 동이가 도성으로 돌아와 궁으로 들어간다는 이 한 회 분의 간단한 스토리를 그나마 긴박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의 힘 덕분이다. 동이가 돌아오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왕의 심경이나 장희빈의 심경을 배치하면서 그 단순함을 조금씩 비껴가게 만들고, 결정적으로 엔딩 부분에서 마치 숙종이 동이를 보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장면 같은 것이 삽입되는 것은 연출을 통해 지속적인 시선을 잡아끌려는 목적이 다분하다.

하지만 사극이 연출의 힘만으로 굴러갈 수는 없다. '동이'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예상을 깨는 의외성이 없을 때, 이 사극은 그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왕실암투에서 중간자 역할을 하며 성장하는 동이의 심심한 이야기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흔히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할 때, 쉽게 멜로라인으로 회귀하려는 욕망은 이 사극이 처한 가장 큰 위기다. 숙종과 동이의 멜로는 이 사극에서 중요한 것이지만, 거기에만 매몰될 때 이 사극은 아무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해내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심지어 차천수라는 인물까지 동이의 오라버니에서 남자로 변하려는 모습은 그래서 위험하다.

'동이'는 지금 스토리 실종상태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결구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동이만의 스토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동이의 캐릭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동이만이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또 동이의 약점은 무엇일까. 이런 부분들이 다시 세워지고 그 위로 이야기가 다시 구축될 때 '동이'는 잃었던 스토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동이'가 그저 숙종과의 멜로드라마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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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프린세스'가 종영했다. 그저 가볍게만 여겨졌던 드라마는 그러나 차츰 진지해지면서 결국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흔히들 이 드라마를 통해 '서변앓이'를 경험했다고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혜리(김소연) 옆에 나타나 가벼운 농담처럼 다가왔던 서인우(박시후).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서변앓이'를 시작했던 마혜리처럼, 그걸 바라보면서 똑같이 '서변앓이'를 했던 시청자들처럼, 이제 '검사 프린세스'의 갑작스럽게만 느껴지는 종영 앞에 뒤늦은 '검프' 앓이를 하는 이유는 왜일까.

'검사 프린세스'의 시작은 경쾌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였다. 미니스커트 차림에 "야근을 왜 하냐"며 6시면 땡하고 회사를 나서서는 명품 가방이나 챙겨드는 무개념 검사 마혜리(김소연)는 그 어이없는 행동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것조차 무개념이던 그녀는 그저 멋져 보이는 윤세준 검사(한정수)를 제멋대로 좋아하고, 그 옆에 늘 공기처럼 서서 자기 방식대로 사랑해온 진정선 검사(최송현)의 마음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게다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챙겨주는 서인우라는 남자를 아무 생각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랑인지도 모른 채.

하지만 이 경쾌하기 그지없는 로맨틱 코미디는 중반을 거치면서 서서히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마혜리는 조금씩 사회를 보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검사로서의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사람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 그걸 알게되자 마혜리는 차츰 주변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죽은 아내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윤세준 검사와, 그를 그저 해바라기하며 마음 속으로만 사랑하는 진정선 검사의 진심이 보이고, 무엇보다 언젠가 갑자기 자신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이제는 없으면 못 견디게 된 서인우가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검사 프린세스'가 이 즈음에서 멈췄다면 보통의 성장드라마를 내재한 멜로드라마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현재가 어떤 과거를 통해 세워졌으며 또 앞으로 미래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마혜리의 그 사회에 대한 무개념과 기득권을 갖게 된 현재에, 아버지 마상태(최정우)의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거가 자신이 사랑하는 서인우의 불행한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재의 마혜리를 과거와 마주보게 만든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 했던 마혜리의 아버지와 그로 인해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서인우의 아버지라는 과거의 망령들은 현재의 마혜리와 서인우를 갈라놓는다.

이 지점은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의미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마혜리와 서인우의 개인사는 이 과거와 만나면서 성공을 위해 앞만 보고 뛰었던 우리 아버지 세대의 죄의식과 아픔으로 그 의미가 넓혀진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증오하기보다는 사랑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며 과거를 덮자고 하는 서인우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도 과거의 진상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말하는 마혜리는 모두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게 된다. 마혜리는 검사로서 15년 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서인우의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내려 하고, 서인우는 거꾸로 마혜리의 아버지의 사건이 과실치사였음을 밝혀내려 한다.

'검사 프린세스'의 멜로는 이렇게 해서 세대 통합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남녀 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처럼 선명한 주제의식을 갖고 엮어지는 것은 '검사 프린세스'가 거둔 최고의 성취라고 할 것이다. 멜로에서 사회극으로 확장되면서, '검사 프린세스'는 현재의 우리가 과거에 빚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 과거의 빚을 지금 현재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갚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한때 가난이 싫어 성공을 향해 무슨 짓이든 했던 그 시대의 아픔은, 이제 성공을 넘어 행복을 꿈꾸는 시대를 맞아 자꾸만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마혜리 검사 말대로 그 아픔은 "덮는다고 덮어지는 게" 아니니까.

우리가 '검프' 앓이를 했던 이유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이는 우리의 현재가 사실 꽤 많은 과거의 질곡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주장이 아니라 마혜리의 변화를 통해 그 시선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현재를 대변하는 듯한 마혜리가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서인우를 바라보면서 '서변앓이'를 하듯,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계층과 세대를 넘어서 아무 상관없다 치부하며 살아왔던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상태는 서인우에게 잘못을 빌고, 마혜리는 서인우에게 미안하다 말하며 서인우와 마혜리는 결국 서로를 껴안는다. 마치 현재가 과거에게 잘못을 빌고, 현재와 과거가 서로를 껴안듯이. '검사 프린세스'는 끝나지만 '검프' 앓이는 한동안 계속될 것만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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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투에 나온 캐릭터와 똑같아 놀라운 마검 김소연-검사 프린세스

    Tracked from 노천카페에서 상상을 즐기며  삭제

    1... 정말 요즘 드라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진리이네요. 제가 요즈음 오랫만에 드라마 보는 재미에 빠졌는데요. 월화는 새로 시작한 국가가 부른다를 1회부터 정식으로 집중해서 보고 있구요. 수목은 신데렐라 언니를 극 초반에는 왔다 갔다 하면서(지난 글과 에러난 글들 정리하는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구요)보다가 제 글 작업이 끝난 후로는 제대로 몰입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두 드라마의 리뷰도 쓰고 있구요. 두개만 보고 쓰는데도..

    2010/05/21 09:37
  2. 난다날아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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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검프' 앓이를 했던 이유」 http://bit.ly/9jp5yR #tattermedia

    2010/05/21 22:54

'검사 프린세스', 소현경표 멜로드라마의 사회성

"좀 전에 골라든 그 수백만 원 하는 가방, 그 동안 당신의 명품들, 인우 인생 짓밟은 대가라는 거 알아요? 인우 거 뺏은 거라는 거." '검사 프린세스'에서 인우(박시후)의 친구인 제니(박정아)가 마혜리(김소연)에게 던지는 이 말은 드라마의 시점을 살짝 돌려놓는다. 그동안 마혜리의 입장에서 진행되어오던 드라마는 제니의 이 역지사지를 제안하는 대사를 통해 인우의 입장을 풀어놓는다. 수백만 원 하는 가방에 명품들 속에서 공주로 검사로 살아오던 마혜리가, 자신의 삶이 사실은 한 가족의 인생을 파탄 낸 대가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 드라마를 개인적인 차원을 다루는 멜로에서 사회극으로 옮겨놓는다.

마혜리는 사회화가 덜 된 무개념의 공주 검사로 드라마에 등장한다. 검사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고, "예쁘게 하고 다니는 게 뭐가 나빠"하고 말하며, 산적한 업무에도 6시면 무조건 칼퇴근을 주장하는 이 무개념 공주 검사는 사회를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삶 속에 머물며, 그 삶이 사회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마혜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녀는 부모가 만들어놓은 단단한 출세 코스의 길 안에서만 자라왔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삶(즉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지 않고 개인적 삶에 몰두하는 마혜리의 모습은, 고속 경제 성장 끝에 부자의 반열에 오른 부모를 갖고 걱정 없이 자라온 이른바 상류층 자제의 모습을 표상한다. 그 부모인 마상태(최정우)는 대물림되는 그 가난이 싫어 독하게 한 시대를 살아내고 결국 성공의 길에 선 이전 세대의 치열한 삶을 담고 있는 인물이다.

"가난이 좋았다 이거야? 나는 아니야? 진짜 싫었어. 아주 끔찍하고 징그럽게 싫었어. 5대를 머슴살이에 날품팔이만 하는 집안, 그 대물림된 가난을 내 대에서 끊기 위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당신 아냐? 내 자식부터는 이 마상태를 믿고 태어난 새끼, 토실토실한 살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석보다 더 예쁜 눈에 해리부터 그 새끼도 그 새끼의 새끼들도 떵떵 거리고 대대손손 잘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뭔가 잘못됐어. 이럴려구 한 게 아닌데 내 딸을 망치게 생겼어."

마상태가 던지는 참회 섞인 이 말은 '검사 프린세스'를 그저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마상태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만들어놓은 그 부 위에서 마혜리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나 누구나 우러러보는 검사라는 직업에 선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로서의 직업조차 부에 의해 대물림되는 우리네 사회를 잘 보여준다. 그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갖게 된 그네들의 검사라는 직업에서 진정한 사회정의를 행하는 일이 어찌 쉽게 바랄 수 있는 일일까.

하지만 '검사 프린세스'는 이 대물림되는 부와 지위의 세상에서 그래도 희망을 꿈꿔보는 드라마다. 마혜리는 차츰 검사로서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성장하는 캐릭터. 그녀가 '무늬만 검사'에서 차츰 진짜 검사가 될 때, 그녀가 궁극적으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숨겨진 과거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서 있는 부가 사실은 개인적인 성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인식은 아프지만 이 단단한 대물림의 시스템에 균열을 낸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마혜리 곁에 생겨난 윤세준(한정수) 검사와 서인우 변호사라는 존재는 그래서 단순히 '검사 프린세스'라는 드라마의 삼각 멜로 구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윤세준 검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한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물이고, 서인우 변호사는 이제 검사로서의 삶을 이해하게 된 마혜리가 가족과 사회정의 사이에서 갈등할 때, 복수나 미움이 아닌 사랑으로 그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검사 프린세스'는 어쩌면 소현경 작가의 일관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은 대물림 되는 유산으로 표징되는 우리 사회의 진한 핏줄의식을 가족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었다면, '검사 프린세스'는 부는 물론이고 지위까지 대물림되는 사회 속에서 세워지기 어려운 사회정의를 멜로드라마라는 틀 위에서 뒤집고 있다. 무개념으로 시작한 마혜리라는 캐릭터의 성장과정 속에서 우리는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사회성을 띠는 소현경표 멜로드라마가 가진 진면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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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투에 나온 캐릭터와 똑같아 놀라운 마검 김소연-검사 프린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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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요즘 드라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진리이네요. 제가 요즈음 오랫만에 드라마 보는 재미에 빠졌는데요. 월화는 새로 시작한 국가가 부른다를 1회부터 정식으로 집중해서 보고 있구요. 수목은 신데렐라 언니를 극 초반에는 왔다 갔다 하면서(지난 글과 에러난 글들 정리하는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구요)보다가 제 글 작업이 끝난 후로는 제대로 몰입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두 드라마의 리뷰도 쓰고 있구요. 두개만 보고 쓰는데도..

    2010/05/19 19:09

시트콤과 정극의 균형을 잃은 '지붕킥'

"이거 시트콤 맞아?"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의 초반부에 이 질문에 담긴 뉘앙스는 칭찬 반 놀라움 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붕킥'에 이 질문은 질책 반 실망 반이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일까.

'지붕킥'은 여러모로 기존 시트콤과는 궤를 달리 했다. 시트콤 본연의 웃음 코드를 캐릭터들을 통해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정극의 분위기를 접목시켰던 것. 세경과 동생 신애의 상경기는 신파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이 시트콤은 절묘하게도 신파가 갖는 감정 과잉을 또한 웃음의 코드와도 연결시켰다. 즉 동생 신애에게 학용품을 사주기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식의 설정은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이끌어냈다.

이것은 희비극은 한 가지에서 나온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본 결과였다. 희비극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시트콤은 웃음과 눈물 양쪽이 모두 강화되었다. 웃다가 울리고, 울리다가 웃기는 시트콤을 보며 "이거 시트콤 맞아?"하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매일 방영되어야 하는 살인적인 제작 환경 속에서 '지붕킥'은 그 본연의 힘이 조금씩 소진되어 갔다. 물론 멜로의 등장은 시트콤이라는 요리에 맛을 더하는 향신료 같은 요소지만, 그것보다는 매번 웃겨야 한다는 강박을 덜어줄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용해 보였다. 초기 정음과 지훈(최다니엘), 지훈과 세경, 세경과 준혁(윤시윤), 심지어 준혁과 정음 같은 거의 모든 관계들을 엮어 멜로를 보여준 것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것은 그 멜로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질척거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기 세경과 신애의 신파가 시트콤과 잘 어우러진 이유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시트콤은 울리다가도 본연의 자세인 시트콤으로 회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웃음과 눈물의 균형은 유지되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오면서 '지붕킥'은 웃음의 코드 보다는 멜로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매일 방영되는 시트콤에서 우리네 제작환경(거의 실시간 촬영에 가까운) 속에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뽑아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이 아이디어가 고갈되면 결국 쉬운 길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 멜로가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게 된다.

웃음이 빠져버린 시트콤에서의 멜로는, 더 이상 향신료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저 설정된 관계의 반복으로 보여질 뿐이다. 그러니 그 멜로는 더 이상 거리두기 같은 쿨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세경은 변화 없이 그 자리에서 계속 지훈만을 해바라기 하고 있고, 준혁 역시 그런 세경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갑자기 등장한 정음 집의 파산 설정은 이 반복적인 멜로에 어떤 변화를 주기 위함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관계의 질척거림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해리가 점점 아이다워지고, 정음이 된장녀의 습성을 버리며, 세경이 차츰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를 하는 모습은 인물들의 성장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어쩌면 시트콤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보인 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인물의 부족함에서 그 웃음을 끄집어내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극에서 인물의 성장은 재미를 주지만, 시트콤에서 인물의 성장은 재미요소를 반감시킨다. 따라서 지금 황정음이나 해리는 초창기처럼 우리를 웃기지 못한다. 현재도 여전히 우리를 웃기는 인물은 정보석이나 이순재 같은 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처럼 정극적인 요소와 시트콤적인 요소를 엮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되면 웃음도 감동도 모두 주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이르기 때문이다. '지붕킥'은 초반부에 이 쉽지 않은 선택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 시트콤은 차츰 지쳐가면서 결국 멜로에 지나치게 기대게 되었다.

펀(fun)했던 '지붕킥'이 뻔하게 된 것은 아마도 열악한 제작환경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작진들의 책임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나머지 남은 기간이라도 '지붕킥'의 초심, 즉 시트콤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대미를 장식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이거 시트콤 맞아?"하고 칭찬 반 놀라움 반으로 묻던 그 질문을 다시 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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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신경쓰인다"는 말은 정지우 작가의 작품에서는 "사랑하게 됐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멜로드라마를 그리지만, 그 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간의 관계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인간애를 바탕에 깔고 있죠. 그래서 그녀의 드라마는 '측은지심의 드라마'가 됩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될 그 마음을 이끌어내는 드라마죠.

변호사 원강하(김지훈)는 스스로 자신을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맞았다"고 술회하며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말하죠. 그의 집은 그 마음이 없는 원강하의 그 텅빈 공허를 형상화해낸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으로 진빨강(최정원)과 동생들이 불쑥 허락도 없이 들어오죠. 그러면서 이 '마음 없는 공간'은 질서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원강하의 단단한 방호벽(?)을 뚫고 진빨강과 아이들은 무차별 진격해 들어옵니다. 처음 진빨강은 그 '염치없음'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차츰 과감(?)해집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간신히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얻은 그녀는 어차피 쫓겨날 거, 이 '마음이 없는 인간'에게 대들기 시작합니다.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가정부로 들어온 여자가 가사일을 전혀 모르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들까지 줄줄이 숨겨서 들어와 버젓이 살아보겠다고 주장하는 건 몰염치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타산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쿨한 이 집의 원강하 같은 인간에게는 엄청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죠. 그런데 원강하는 이들의 침범에 조금씩 동화되어 갑니다.

몽유병을 갖고 있어 매일 밤 자신의 침대로 침범해들어오는 파랑(천보근)을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 호의를 가진 그에게 그러나 아이들은 아랑곳없이 괴롭힙니다. 호의로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음식을 시켜주면, 자장면을 뒤집어쓰게 만드는 식입니다. 그런데 이 몰염치는 단단한 원강하의 방호벽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정재영(채영인)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지만 진빨강에게는 결국 "당신이 신경쓰인다"고 말합니다.

'별을 따다줘'의 몰염치가 기분좋은 것은 이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회를 침범해들어오는 그 인간적인 염치없음이 보기좋기 때문입니다. 쿨한 사회. 상대방을 위해 웃음을 지으면 마치 자신이 지는 것이라도 되는 양 무표정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진빨강과 아이들의 도발은 신선하기 그지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배경이 보험회사라는 설정은 이러한 드라마의 메시지를 잘 보여줍니다. "가족처럼!"을 늘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 이면에는 돈의 논리가 꿈틀대는 JK생명의 일단은 우리 사회의 차가움을 대변해줍니다. 그 속에 들어간 진빨강은 마치 마음 없이 살아가는 원강하의 마음 속에 들어간 것처럼 사회에 따뜻함을 전하려 합니다.

멜로에서부터 인간애를 얘기하는 것은 정지우 작가 작품의 특징입니다. 조금은 세련되지 못해 보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드라마만이 갖는 매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는 이 사회가 얼마나 차가운 것인가를 절감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차갑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허락없이 불쑥 발을 디디는 작가입니다. '몰염치'조차 인간적인 매력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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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는 어느 길을 가게 될까

사극이 과거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지났다. 사극은 이제 과거를 가지고 현재를 이야기한다. 사극 ‘추노’가 그렇다. 이 사극에서 역사는 한 발짝 저 뒤로 물러나 있고 대신 그 역사적 시점 위에 현재적 의미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 양반이었으나 추노꾼으로 전락한 이대길(장혁), 한 때 타고난 무사로 소현세자와 함께 꿈을 꾸었으나 도망노비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 한 때 태하와 동문수학하던 사이였으나 이제는 그를 누명에 빠뜨리고 스스로 암살자가 되어버린 황철웅(이종혁). 이들은 모두 ‘전락한 인물’들이다.

이대길은 송태하를 추격하고, 송태하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인 석견을 제거하려는 황철웅을 추격하며, 황철웅은 송태하와 맞서며 석견을 추격하는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 목숨을 걸고 행하는 일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한 일이어야 하는 상황에 이들의 비극이 있다. 그 이면에는 이경식(김응수)이라는, 이 시스템을 쥐고 있는 희대의 권력자가 자리한다. 그는 대길을 시켜 태하를 추노하게 하고, 철웅을 시켜 석견을 제거하려 한다. 태하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의를 위해서’ 석견을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건다.

이 자신이 소외되어 있는 상황은 바로 이 사극이 그리려는 노비의 상징적인 의미를 캐릭터를 통해 그려낸다. 드라마가 어떤 캐릭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성을 지닌다고 볼 때, 이 사극은 자신이 소외된 노비적인 상황 속에 갇힌 캐릭터들이 그것을 뚫고 나오는 지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고 볼 수 있다. 즉 대길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추노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찾게 될 때, 태하가 대의라는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 될 때, 철웅이 누군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때, 이들 캐릭터들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것은 결국 이 정교한 시스템 속에 있어 그 시스템을 보지 못하는 이 인물들이 바깥에서 그것을 통찰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밖에서 보면 대길이나 태하나 철웅은 결국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아니라 권력에 휘둘려 비극적 운명에 던져진 자. 결국 시스템의 꼭대기에 있는 이경식이라는 인물이 자신들의 엇갈린 운명을 조종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향해 동시에 칼을 겨누게 될 때 이 ‘추노’가 현재에 던지는 결코 작지 않은 질문은 해결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의식은 이미 ‘양반을 죽이고 상놈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당’과 그 속에 들어가는 업복이(공형진)라는 캐릭터로 극단화되어 있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에 휘둘리는 자들과 그 권력에 반기를 드는 이 세 축의 힘은 결국 말미에서 하나로 부딪치면서 해결책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드라마의 영상미학이라고 불리는 이 사극이 소재나 주제의식에 있어서도 충분히 걸작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와 그 시스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게 살아가는 이 땅의 민초들에게 이 사극은 충분히 시사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 걸작이 될 수 있는 ‘추노’에 드리워진, ‘범작으로의 후퇴’도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멜로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길의 문제가 시스템 속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엇갈린 사랑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그려질 때, 태하의 대의명분 속에서 희생된 개인의 행복이 섣불리 길에서 만난 혜원(이다해)과의 사랑으로 채워질 때, 이 사극은 걸작의 길에서 범작의 길로 내려서게 될 위험이 있다. 과연 ‘추노’는 어느 길을 걸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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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멀리서 보면 즐겁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프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오현경과 정보석이 눈밭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땐 저랬었지”하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막.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찰리 채플린.’ 이 말은 지금 희비극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준다. 희극과 비극은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에 달린 것일 뿐, 서로 다른 삶의 현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시트콤이냐 드라마냐는 정체성 논란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시트콤은 역시 코미디여야 한다는 대중들의 바람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초반의 코미디 분위기에서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사각 멜로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 정음과 지훈(최다니엘), 지훈을 바라보는 세경, 그리고 그런 세경을 바라보는 준혁(윤시윤)의 엇갈린 마음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통상 두 가지 에피소드를 병치하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던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제 하나는 전형적인 코미디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들의 멜로를 병치시키곤 한다. 이 희비극의 교차가 가져오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만 맞춰진다면 희극과 비극 양쪽을 모두 강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 속에서 발견하는 눈물, 눈물 속에서 찾아지는 웃음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균형을 맞췄을 때의 이야기다. 이 시트콤의 멜로가 코미디와 이질적이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개에 있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초반부 세경에게 마음을 전하는 준혁은 멜로 특유의 가슴앓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저 스스로 안하던 공부를 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였다. 정음과 지훈의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른 것이 아니라, 늘 툭탁거리며 싸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유일하게 진짜 멜로의 틀로 사랑을 보여준 이는 세경이었다. 그녀는 이 시트콤에서 정극을 연기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멜로가 무르익으면서 지훈에 의해 상처를 입는 세경과, 그런 세경을 점점 안타깝게 바라보는 준혁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이 시트콤은 때론 웃음보다 눈물을 더 많이 보여주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쿨한 관계가 조금씩 사라지고 인물들이 서로 끈끈해지기 시작하자, 이제 시트콤으로서의 거리두기는 가끔씩 그 선을 넘는다. 채플린이 말한 대로 멀리서 바라봐야 할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

이것은 시트콤의 새로운 실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간 시트콤은 드라마가 아닌 예능의 하나로 치부되며 폄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시트콤의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희비극의 형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코미디에 멜로가 깊숙이 자리하게 된 데는 더 단순한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멜로가 코미디보다 쉽다는 것이다.

정음과 지훈, 세경과 준혁의 안타까운 멜로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기본적인 구도의 틀이 완성된 위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도리라는 오브제는 이 멜로가 생겨나고 깊어져가는 과정에서 꽤 여러 번 사용되었고, 무심한 지훈과 그에게 상처받는 세경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준혁의 에피소드도 계속 반복되었다. 이것은 멜로의 틀이다. 구도의 완성, 상황의 반복을 통한 감정의 몰입.

하지만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로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코미디는 상황이 다르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디어에 의해 좌우되는 것들이다. 게다가 매일 방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 시트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를 가늠하게 만든다. 매일 같이 새로운 상황의 웃음 코드를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니 멜로는 물론 이 시트콤의 별미 같은 맛을 주지만, 또한 어쩌면 이 시트콤 제작자들에게는 겨우 숨 돌릴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드라마 작가들은 말한다. 사실 웃음을 만드는 것이 눈물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그래서 시트콤에 대한 낮은 시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진 희비극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웃음은 멜로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시트콤은 드라마와 비교해 절대 쉽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드라마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제작비로 매일 편성되어 지옥 같은 제작의 고통을 감내하게 만드는 그 시선에도, 마치 시트콤을 하나의 그저 그런 쉬운 작업으로 바라보는 그 낮은 시선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황정음의 신종 플루 감염으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 한 주를 스페셜로 대체한다고 한다. 물론 이 시트콤의 한 팬으로서 한 주의 안타까움이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 끝없이 달리기만을 종용받아온 이 시트콤에 작은 재충전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시트콤이 드라마 이상의 대중적 지지도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 그 희비극 속에 담겨진 고충을 이제는 이해해야할 때도 온 것 같다.

오현경과 정보석이 사투를 벌이는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음 짓는 노부부처럼 우리는 어쩌면 전쟁 같은 제작현장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편안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채플린의 말처럼, 시트콤의 제작여건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즐겁게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픈 현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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