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만기’ 김현주, 흔들리지 않는 그에게 기대고픈 건

김현주가 이런 정도의 존재감을 가진 배우였던가. KBS 월화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에서 물론 단연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건 김명민이다.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김명민은 영혼이 바뀐 송현철의 역할을 진짜로 두 사람이 섞여있는 듯 연기해내고 있다. 간간히 김명민의 얼굴에서 영혼이 빙의된 고창석의 표정이나 모습이 보일 때는 실로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며 직장에서나 직장 밖에서나 좌충우돌의 시간을 보내는 송현철(김명민)의 모습이 보이면 보일수록 자꾸만 그 옆에 서 있는 선혜진(김현주)이 눈에 띈다. 아마도 개차반이었던 지점장 송현철과의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을 그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굳건히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니 “나 좀 도와줘요”하고 애원하는 송현철에게 이 침착하고 단단한 인물에 대한 신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선혜진은 처음부터 주목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저 송현철의 아내로서 마치 도우미 취급을 받으며 힘겹게 살아가는 그런 정도의 인물로 슬쩍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물이 이혼을 결심하고 있고, 돈 많은 남편으로부터 먼저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해 마트에서 일하는 모습을 통해 그 존재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보통 선혜진 정도의 사모님이라면 정반대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식으로 마구 살아갈 것 같지만, 이 인물은 정반대다. 고객의 불편을 들어주고 그 편의를 해결해주는 일을 하는 선혜진은 단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마트의 대표인 금성무(조셉 리)가 해외입양아였다는 사실을 듣고는 부모를 찾는 방법까지 알려주는 친절은 물론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이 인물이 가진 ‘선함’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이 인물이 그저 선하기만 해서 무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마트의 진상 고객에게는 확실하게 매뉴얼에 따라 거부할 건 거부하고 잘못된 건 지적하는 그런 강단을 보인다. 이른바 ‘갑질’ 아래 무작정 고개 숙이고 당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일반적으로 드라마가 그리는 풍경(이건 최근 신문 사회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일이지만)이지만, 선혜진은 다르다. 그는 사태를 들여다보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 말하는 인물이다.

학교에서 아들이 친구에게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 부리나케 학교에 와서도 선혜진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사모님의 모습과는 다른 면면을 보여준다.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자기 자식 편만 드는 그런 사모님이 아니라, 먼저 앞뒤 정황을 다 살핀 후 자기 아들이 친구에게 “못생겼다”고 놀린 사실이 문제의 발단이었다는 걸 이해하고 오히려 사과한다. 

게다가 선혜진은 남편과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해서 또 다른 관계의 틈입을 허용하는 인물도 아니다. 금성무의 과한 친절에 대해 그는 선을 긋는다. 사장과 직원 사이에 그 이상의 친절은 불편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 남편과 사이가 소원해졌지만, 그래도 그가 일말의 기대 같은 걸 갖고 있는 것도 남다른 면모다. 영혼이 바뀐 송현철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그는 다시 이 남편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이혼장을 내밀지만.

<우리가 만난 기적>은 영혼이 바뀐 송현철이 만들어내는 변화들을 기적 같은 사건들을 통해 그려내는 드라마다. 그런데 송현철만큼 이 드라마에서 주목을 끄는 인물은 선혜진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좀체 발견하지 못했던 가졌지만 따뜻하고 올곧은 생각을 가진 ‘기적 같은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김현주는 큰 과장 없이 이 인물을 깊이 있게 연기해냄으로써 다소 판타지와 과장이 많아 들뜰 수 있는 이 드라마에 안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정체성 혼돈으로 힘겹게 버텨가던 송현철이 선혜진에게 “나 좀 도와줘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다른 의미로도 읽힌다. <우리가 만난 기적>이라는 드라마에 김현주라는 배우의 도움은 앞으로 기대이상으로 필요해질 것으로 보인다.(사진:KBS)

‘우만기’, 김명민이 만들어가는 두 개의 기적 그 묘미

육체는 같지만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얼굴에 늘 짜증이 가득하고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찌들어 아내를 도우미 정도로 생각하던 지점장 송현철(김명민)이 달라졌다. 그의 육신에 따뜻하고 인간적인 주방장 송현철(고창석)의 영혼이 들어가게 되면서다. KBS 월화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은 이 판타지적인 설정을 ‘육체 임대’라고 표현했다. 

어찌 보면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육체지만 그 외견으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규정되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래서 육체 임대를 통해 다시 태어난 송현철은 그 정체성을 뛰어넘는 지점에서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하게 된다. 

이제 막 중국집 만호장을 인수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꿈꾸었지만 졸지에 사망해버린 주방장 송현철은 지점장 송현철의 육체를 임대해 깨어나자마자 가족 걱정이다. 비통해할 가족들과 당장 잔금을 치르지 않으면 넘어가 버릴 만호장과 집에 대한 걱정 때문에 무작정 아내 조연화(라미란)를 찾아간다.

하지만 다른 육체를 가진 그를 조연화가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결국 그는 지점장 송현철의 어머니 황금녀(윤석화)에게 1억 원을 빌려 조연화에게 직접 배달해준다. 동봉한 편지를 통해 마치 주방장 송현철에게 도움을 받았던 친구가 보내준 것처럼 꾸며서. 이 상황은 조연화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기적 같은 일’이 된다. 어찌 보면 죽은 남편과 아빠로부터 온 선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점장의 아내 선혜진(김현주)에게도 벌어진다. 자신을 아내가 아니라 도우미 취급하며 벌어다 주는 돈으로 조용히 살라고 막말을 해대던 송현철이 존칭을 하며 “죄송합니다” 같은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내에게 고압적이던 그의 육체에 주방장 송현철의 영혼이 들어가면서 생긴 변화다. 

“그런데 아침밥은 드셨어요?” 그 기적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런 작은 말 한 마디에서 비롯된다. 자립하기 위해 마트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선혜진에게는 송현철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그 말이 기적 같은 변화로 느껴진다. 늘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먹어야 한다는 주방장 송현철의 영혼이 한 말이지만 선혜진으로서는 지점장 송현철이 단 한 번도 건넨 적이 없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침밥은 제가 할게요.”라는 그 말도 그렇다. 그 말은 아내가 아닌 도우미를 부리듯 해왔던 지점장 송현철에게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이혼을 준비 중이고 그래서 차갑게 대하는 선혜진은 어쩌면 이렇게 달라진 송현철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낼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우리가 만난 기적>이 말하려는 건 외모나 부유함 혹은 사회적 지위 같은 겉으로 드러난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인성이 얼마나 많은 걸 행복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일 게다. 그것은 심지어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니. 

죽음을 통해 행복과 기적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만난 기적>은 우리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희비극을 통해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비극이 거기에는 드리워져 있지만 그래서 벌어지는 행복한 기적들이 모두를 따뜻하게 만든다. 한 사람의 따뜻한 인성은 이처럼 가족들, 아니 나아가 주변사람들과 사회까지 변화시키는 진정한 기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돈이면 다되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현실이지만.(사진:KBS)

‘우리가 만난 기적’, 김명민이라 더 기대되는 기적들

나는 도대체 왜 나인가. 그것은 내 육체일까 아니면 내 영혼일까. KBS 새 월화드라마 <우리가 만난 기적>은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 설정을 갖고 있다. 이름과 생일이 같지만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남자. 한 남자는 명문대를 졸업하고 냉혹한 사회생활로 신화은행 최연소 지점장이 된 송현철(김명민)이고 다른 한 남자는 고생 고생해 이제 겨우 은행 대출로 중국집 만호장의 주인이 된 송현철(고창석)이다. 두 사람은 같은 날 교통사고를 당하고 ‘신의 실수’로 죽어야 할 지점장 송현철 대신 만호장 송현철이 죽게 된다. 육체가 사라져버리자 만호장 송현철은 지점장 송현철의 육신을 빌어 겨우 살아나고, 그래서 벌어지는 일이 이 드라마가 그리려는 이야기다. 

육체는 지점장의 몸을 갖고 있지만 영혼은 만호장 주인의 것이 된 송현철. 이 공유된 육체와 영혼은 그래서 의도치 않은 ‘두 집 살림(?)’을 하게 된다. 최근 들어 많이 등장한 영혼 체인지 같은 판타지 설정이지만 이 드라마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건 이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이 너무나 상반된 면을 갖고 있고 그래서 부딪치게 되는 가치관과 정체성의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 다시 태어난 송현철은 지점장의 화려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만호장 주인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다시 태어난 송현철 앞에는 그래서 두 개의 상반된 삶이 놓여진다. 하나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저 돈의 세계의 이전투구 속에서 냉혹해도 성공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굉장히 부유하거나 성공하진 못했어도 노력한 만큼 얻은 작은 성취와 행복을 가진 삶이다. 두 삶에서 당연히 후자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디 현실과 부딪쳐 생겨나는 욕망들이 그걸 쉽게 결정할 수 있게 해줄까. 

평생 조연화(라미란)만을 사랑해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렇게 살아왔던 만호장 송현철이지만 막상 지점장 송현철의 아내인 선혜진(김현주) 같은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된 그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사람 일이란 알 수 없어 지점장 송현철과의 결혼 생활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왔던 선혜진에게 이 정 많고 착한 만호장 송현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눈에 들어오는 육체의 아름다움 또한 그를 흔들어댈 수밖에.

즉 다시 태어난 송현철은 자신의 달라진 육신과 영혼 사이에서 그 정체성을 두고 갈등하게 되는 동시에, 두 집이 보여주는 외적인 것들과 내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갈등하게 된다. 부유한 집, 성공한 삶, 아름다운 아내 같은 누구나 선망하는 외적으로 보이는 남자의 삶과 부유하진 않아도 행복한 삶,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아내 같은 내적인 가치들이 빛을 발하는 남자의 삶.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찌 보면 한 편의 ‘인생극장’ 같은 비현실적인 판타지 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주는 건 역시 김명민 같은 연기자의 내공 덕분이다. 일과 가정 모두에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차가운 모습을 보이던 그가,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친구 딱풀이(최병모)앞에서는 의외로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도 김명민의 남다른 연기력의 공이 크다. 특히 염을 하다 벌떡 일어난 송현철의 표정을 보여주는 김명민의 연기는 압권이다. 거기에는 기묘하게도 김명민의 얼굴과 고창석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영혼이 엉뚱한 육체에 들어간다는 판타지 설정을 무겁지 않은 코미디로 엮어내면서도, 동시에 그 설정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육체인가 영혼인가를 묻는 질문에 도달한다는 것. 나아가 그것이 우리가 선택하는 두 가지 삶, 즉 외면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삶과 내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키는 드라마의 발랄한 문제의식도 김명민이라는 든든한 배우를 만나니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향후 그가 보여줄 기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 기대되는 대목이다.(사진:KBS)

‘지만갑’, 소지섭·손예진의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어린 아이에게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죽은 엄마가 장마가 시작되자 돌아와 아이를 만난다는 동화. 우진(소지섭)의 어린 아들 지호(김지환)는 세상을 떠난 엄마 수아(손예진) 역시 장마가 시작되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런 아들이 못내 안타깝지만 어느 장마가 막 시작하던 날 우진과 지호 앞에 진짜 수아가 나타난다. 

설정부터가 동화 같은 판타지지만, 관객들은 의외로 이 이야기에 몰입한다. 돌아온 수아는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렸고, 우진으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게 되었는가를 하나하나 듣게 된다. 판타지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관객들은 그런 판타지는 어느 순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건 우진과 지호가 얼마나 절절하게 수아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는가가 충분히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어느새 이들의 바람에 몰입하게 된 관객은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 설정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담으려는 건 단지 죽은 인물이 돌아와서 다시 이어지는 사랑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기억을 잃은 수아가 우진으로부터 다시 듣게 되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이별과 재회 그리고 결혼까지 해 아이를 갖게 되는 그 과정의 이야기들은 새삼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다보니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지워버린 젊은 날의 설렘과 절절했던 사랑이 이 영화를 통해 새록새록 떠오를 수 있다. 

과거와는 기억이 단절되어 살아가던 수아는 우진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랑을 다시금 느끼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 그건 이제는 무뎌진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지 추억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옆에 그 사람이 있었다는 걸 수아와 우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첫 사랑의 이야기는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가진 동화 같은 마력적인 힘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작과 함께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가 가진 힘이 그렇고, 후반부에 이르러 수아가 써내려간 일기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이 맞나 싶은 아련함으로 다가와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힘겨운 삶을 지금껏 지탱해주고 있는 숨은 힘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마치 진짜인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었던 그것들이 있어 결국은 누구나 이별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굳건히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Be with you’다. 지금 옆에 없어도 항상 당신 옆에 있다는 것. 그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기억이자 이야기가 가진 마력 같은 힘을 말하는 것일 게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 겨울 같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몸도 마음도 식어버린 삶이라면, 그들에게도 찬란했던 한 여름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고 때론 촉촉하게 쏟아져 내리던 장마 같은 감정들이 폭발했던 때가 있었다는 걸 끄집어내주는 영화다.(사진:영화'지금 만나러 갑니다')

‘효리네 민박’, 폭설에 고립도 판타지로 만든다는 건

어찌 보면 JTBC 예능 <효리네 민박>이 처한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제주에 폭설이 내리고, 그로 인해 ‘효리네’는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고립되어버렸다. 첫 손님으로 찾아와 이제 서울로 돌아가야 할 유도소녀들은 공항으로부터 날아온 결항 소식에 난감해 했다. ‘효리네’도 아침을 챙겨 먹이며 고립된 상황에 비축해놓은 식량 걱정을 했다. 

든든히 아침을 챙겨먹는 와중에도 눈은 그칠 줄 몰랐다. 그래도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려 노천탕에 들어가려 했지만 꽁꽁 얼어버려 물조차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이상순과 임윤아는 그걸 녹여보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래도 공항으로 가보기 위해 나선 유도소녀들은 미끄러운 언덕길을 차가 오르지 못해 결국 이상순이 직접 와 차를 몰고 소녀들이 뒤에서 밀어 가까스로 그 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래도 눈발이 조금 잠잠해지자 ‘효리네’에 고립된 손님들은 슬슬 주변을 둘러보기로 나섰지만 역시 여의치 않아 가까운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집을 나선 이효리와 이상순, 임윤아도 그 음식점을 찾아 식사를 했다. 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는 그 상황에 이효리의 한 마디 제안이 반전을 만들었다. 갑자기 눈썰매를 타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모두가 기대감에 찾은 언덕은 아이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언덕 위까지 걸어 올라가는 일은 힘들었지만, 거기서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길은 모두를 까르르 웃게 만들었다. 이상순은 이효리와 임윤아의 동영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찍어줘 그 즐거운 눈썰매의 추억을 담아냈고, 이효리는 그 곳에서 만난 한 귀여운 아이와 함께 눈썰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핑을 하기 위해 ‘효리네’를 찾은 서퍼 청년들은 눈보라에 서핑을 갈 수는 없었지만 대신 눈썰매를 서프보드처럼 타고 내려오는 멋진 장면을 보여줬다. 

한바탕 눈썰매를 타며 신나게 놀고 난 후 카페에서 마시는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의 맛은 보는 이들조차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모두가 다시 ‘효리네’로 돌아왔다. 귀경하려다 결국 비행기를 타지 못한 유도소녀들도 다시 ‘효리네’로 왔고 그래서 집은 북적북적했다. 저마다 하나씩 챙겨온 음식들로 저녁이 차려지고 모두 둘러앉아 함께 하는 식사자리. 어찌된 일인지 그 장면은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라 외부와 단절된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사실 ‘고립’이라는 상황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더 다가온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립’의 의미는 정반대 느낌으로 도시인들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어디를 가든 연결되어 버리는 ‘초연결사회’에서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진 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픈 욕망이 하나의 판타지가 되기 마련이다. 최근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이 직접 시도하지 못하는 고립과 야생의 시간들을 대리경험 해줌으로써 인기는 끌고 있는 건 그래서다. 

<효리네 민박> 겨울편은 뜻하지 않게 쏟아진 폭설로 인해 고립된 상황이지만, 의외로 그 고립조차 하나의 판타지로 전해진다. 외부와 단절된 그 곳에서 서로가 나누는 음식과 대화와 놀이가 더더욱 즐거운 일로 다가오는 것이다. 먼 곳까지 왔는데 폭설을 만난 손님들에게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이효리는 끊임없이 그 고립에서의 ‘즐거움 찾기’를 시도한다. 쏟아지는 눈발이 그냥 보면 ‘폭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그걸 슬로우모션으로 포착해내면 그림 같은 장면이 되는 것처럼, 고립의 상황에 그걸 즐기려는 노력의 필터를 끼워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 그렇게 이효리와 함께 하니 고립도 판타지가 된다.(사진:JTBC)

‘흑기사’, 장미희와 서지혜가 바로 숨은 흑기사

사실 판타지 장르에서 그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도깨비’나 ‘저승사자’ 캐릭터는 실제적이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다. 결국 두 역할을 소화해낸 공유와 이동욱이 그 캐릭터들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면 그 작품은 애초 성립 자체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라는 판타지 드라마를 성립시키는 건, 다름 아닌 샤론과 백희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서지혜와 장미희가 아닐 수 없다. 이 드라마가 가진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200년 넘게 불멸하는 존재가 갖는 남다른 시간관념, 그래서 전생과 후생을 동시에 들여다보는 관점 등이 모두 가능해진 건 다름 아닌 샤론과 백희라는 두 신비한 존재가 납득되고 있어서다.

장미희는 사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는 미모와 스타일을 보여줌으로써 <흑기사>가 갖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을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도 이해시키는 면이 있다. 시대가 지나도 변함없는 외모는 이 작품이 가진 ‘불멸의 존재’라는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게다가 장미희라는 배우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 역시 현실감을 뛰어넘어 이야기에 신비한 느낌을 부여한다. 

그가 연기하는 백희는 사실상 문수호(김래원)와 정해라(신세경)의 흑기사 같은 인물이다. 어린 시절 수호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에게 다가와 앞으로 모든 일들이 다 잘될 것이고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말해줌으로써 실제로 수호가 큰 성공을 갖게 된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한 마디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만큼의 힘을 발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누군가의 성공이나 실패가 어쩌면 “운이 좋거나 나빠서 생긴 일”일 뿐이니 거기에 교만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백희는 문수호와 정해라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덕담과 기도를 반복함으로써 진짜로 그들이 행복해지는 삶의 신비함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러면서 그런 덕담과 기도가 늙지 않는 천형으로부터 자신을 변화시켜 나이 먹기 시작한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훨씬 원숙해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장미희가 아니라면 이만큼 잘 소화해내기가 어려운 캐릭터다. 

하지만 <흑기사>에서 진짜로 더 칭찬을 해주고 싶은 배우는 바로 서지혜다. 물론 과거 자신의 잘못 때문에 불멸의 존재로 살아가는 벌을 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샤론은 이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판타지적 느낌을 가장 잘 만들어내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서지혜는 이 캐릭터가 가진 차가움과 쓸쓸함 그러면서도 어딘지 아이 같은 천진함 같은 것들을 실제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신비롭게 소화해내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샤론양장점은 그래서 이 캐릭터 자체처럼 느껴진다. 전생의 악업을 끊어내기 위해 옷을 만드는 샤론이란 인물은 마치 동화 속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주고, 마치 그의 시종처럼 일하는 양승구 역할을 소화해내는 김설진은 현대무용의 대가답게 일상과 춤동작들을 엮어 비현실적인 느낌을 더해준다. 하지만 이 모든 판타지적 느낌을 하나로 묶어내고 있는 건 역시 서지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대신 해주는 인물로서 ‘흑기사’를 지칭하곤 한다. 그런 뜻에서 보면 장미희와 서지혜는 이 드라마의 확실한 흑기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보인다. 주인공들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겪는 판타지적인 사랑과 운명의 이야기에 신비로운 분위기의 밑그림을 그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이 드라마의 숨은 흑기사들이라고 느껴질 만큼.(사진:KBS)

‘흑기사’가 말하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KBS 수목드라마 <흑기사>, 이 드라마 수상하다. 판타지 로맨스인데 난데없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자본화 현상이 거론된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등장하는 이 용어는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고 결국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을 뜻한다.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문수호(김래원)가 한국에 들어와 벌이고 있는 사업이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공간에서 원주민들을 지켜내는 사회사업이다. 그는 특색 있는 전통을 유지한 동네에 건물과 집들을 사들여 예술가들에게 장기 임대를 해주고 이를 여행 상품으로도 만들겠다고 했다. 

조금은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그렇게 맥락 없는 설정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정해라(신세경)가 절망하게 되는 사건으로 이모가 반전세금을 빼고 대출까지 받아 오래된 한옥집을 덜컥 사버린 일이 이미 이 드라마가 공간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지려는 사전포석이었기 때문이다. 재개발 자체가 묶여버린 그 한옥집을 결국 문수호가 사고 정해라와 이모가 머물 셰어하우스를 제공하는 스토리 전개도 그래서 그냥 전개된 것이라기보다는 의도된 것이라 보인다. 

도시 한 가운데 남아있는 샤론양장점이라는 다소 고풍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적인 공간도 그래서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양장점’이라는 문구가 드러내는 전통적인 방식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버린 기성품의 자본적 냄새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곳을 지키고 있는 샤론(서지혜)은 그래서 그 공간과 하나 된 인물처럼 보인다. 200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불멸의 존재. 물론 죽고 늙고 하는 생멸의 문제는 다소 세속적인 것일 수 있지만, 어쨌든 지켜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그 공간의 상징은 남다르다.

그러고 보면 슬로베니아에서 문수호와 정해라(신세경)가 만난 기사의 성이 그런 공간이다. 사람은 100년을 넘어 살기가 힘들지만 그런 성은 몇 백 년을 그 모습 그대로 버텨내기도 한다. 물론 그 성 이전에 공간은 더 오랜 세월들을 머금었을 게다. 다만 그 위에 인간들이 나타나고 누군가는 집이나 성을 짓고 또 누군가는 그걸 부수고 새로 짓고 하는 걸 반복했을 따름이다. 

불멸의 존재와 수백 년을 버티고 있는 건물들은 그래서 그 존재 자체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벌어지는 도시의 자본화 현상을 마치 허망한 짓이라는 듯 비웃는다. 100년을 못사는 인간의 얕은 욕망이 만들어내는 안타까운 파괴의 양상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문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메시지에는 그래서 이 드라마의 공간에도 어떤 울림을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려 욕망과 자본이 몰리고 그래서 예술가들 같은 원주민들이 밀려나지만, 알고 보면 그 곳이 그렇게 생기를 갖게 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술가들의 혼 같은 것이다. 만일 공간과 건물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사람의 흔적이나 온기 혹은 사랑 같은 것들이 퇴적해 만들어진 총체라고 생각한다면 함부로 그걸 밀어버리거나 그 안의 사람들을 내모는 짓은 할 수 없으리라. 

이것은 <흑기사>가 그려내는 판타지적인 사랑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채워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많은 것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지만, 또한 거기에는 사랑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있어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한다. 자기 존재의 귀함과 아름다움을 잊은 채 살아가던 정해라에게 문수호가 당신은 귀한 존재라고 말해주는 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그가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말도 안되는 판타지를 꿈꾸고 그게 마치 실제 있는 일이나 되는 것처럼 빠져드는 건 눈앞에 보이는 것들로만 가득 채워진 비정한 세상이 그저 전부라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비참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꿈꾼다.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어찌 보면 결국은 모두가 사멸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저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몇 세기를 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불멸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흑기사>의 판타지 로맨스가 젠트리피케이션을 얘기하는 건 엉뚱한 일이 아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눈에 보이는 세속적 현상이라면 판타지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일 수 있으므로.(사진:KBS)

‘흑기사’, 절망 속에서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뭘까

절망의 끝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도대체 뭘까. KBS 새 수목드라마 <흑기사>는 바로 그 절망의 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들은 해외여행을 다녀올 때, 자신은 여행객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처지에 난데없이 들이닥쳐 뺨부터 후려치는 갑들이 넘쳐나는 일터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살아가는 정해라(신세경). 그런데 불행은 마치 폭풍처럼 한 번에 겹쳐져 그에게 몰아친다. 검사인 줄 알았던 남자친구 최지훈(김현준)이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고, 자신도 버거운 처지에 부양하던 이모 이숙희(황정민)는 그의 전 재산을 날려버린다. 

<흑기사>가 정해라의 이 몰아닥친 불행을 그 시작점으로 삼는 까닭은 이 드라마의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그를 이 불행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줄 흑기사에 대한 강렬한 판타지와 욕망을 끄집어내기 위함이다. 죽기 직전 자신이 살아왔던 생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는 이야기처럼, 절망의 끝에서 정해라가 떠올리는 건 그래도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다. 죽겠다 먹은 약에 취해 그 때로 되돌리고픈 마음이 그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툭툭 건드리고, 그는 그 때 집이 망하지만 않았어도 입게 되었을 샤론양장점에서 맞춘 자주색 코트를 떠올린다. 그 옷을 입기만 했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

마치 꿈같은 그 기억 속에서 정해라는 샤론양장점에 들어가 미스터리한 인물 샤론(서지혜)을 만나고 그의 은밀한 제안을 듣게 된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정해라에게 샤론은 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주면 자신이 원하는 걸 한 가지 달라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서로의 인생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마치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처럼 달콤한 그 제안을 정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한다. 이미 절망의 끝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그에게 못할 선택이 무에 있을까.

꿈처럼 느껴지는 그 일을 겪고 깨어난 정해라는 그러나 자신의 집에 놓여져 있는 자주색 코트를 보며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코트의 힘이었을까. 전날만 해도 모든 걸 끝내려 했던 그는 코트를 입고 별다른 일도 없었다는 듯 회사에 출근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전날과 달리 그에게 계속 행운이 찾아온다. 점심시간에 재료가 떨어져 혼자만 먹지 않았던 오삼불고기가 탈이 되어 전 직원이 식중독 증세를 보이고, 어쩔 수 없이(?) 정해라는 해외출장을 가게 되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 그 출장에서 어린 시절 헤어졌던 성공한 젊은 사업가 문수호(김래원)를 만나는 행운까지.

<흑기사>는 시작부터 판타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정해라라는 인물 앞에 나타난 샤론이라는 불사의 존재가 등장하고, 그의 신탁처럼 정해라는 불행의 끝에서 행운의 시작을 맛보게 된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흑기사>는 왜 이런 판타지를 지금 이 시대에 꺼내놓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무얼 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겪으며 스스로를 불행의 아이콘으로 여기게 된 많은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그래도 우리가 포기하기 않고 버텨내야 하는가 하는 작은 위로를 던지기 위함이 아닐까. 판타지는 그저 환상이 아니라 어쩌면 도저히 버티기 힘든 현실을 그나마 버텨내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을 끝장내려던 그 지점에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한 자락 기억이 꺼져가는 삶의 불씨를 다시 지펴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정해라는 자신의 흑기사가 되어줄 문수호를 만나게 된다. 불행의 끝이 행운으로 이어지고, 그래서 삶의 행복을 이어줄 인연을 맺게 해주지만 그러한 행운은 그 후로도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어쩌면 불행과 행운은 동전의 양면처럼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정해라가 처한 불행이 남일 같지 않고 그래서 그의 행복을 기원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흑기사>의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못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 지쳐 잘 보지 못했던 삶의 비의를 보여주고 그것을 관조하게 해줄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사진:KBS)

‘저글러스’ 백진희, 신데렐라 로코물에 담긴 불편한 현실

보스를 위해 양손과 양발로 수십 가지 일을 해낸다? 우리가 흔히 ‘비서’라고 부르는 지칭을 어째서 KBS 새 월화드라마는 굳이 <저글러스>라 이름 붙였을까. 거기에는 일종의 인식차가 존재한다. 좌윤이(백진희)는 그것이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이라며 ‘저글러스’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언제 어느 때곤 단물 빠지면 팽 당할 처지에 놓이는 비서일 뿐이라는 것.

좌윤이는 봉상무(최대철)의 비서로서 별의 별 일들을 다한다. 심지어 상사의 애인까지 챙기고 봉상무의 아내(정영주)의 의심으로부터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007 작전 같은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흔히 ‘오피스 와이프’라고 불릴 정도의 선을 넘어버린 일들을 하고 있는 이유는 상사의 성공이 바로 자신의 성공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결국 상사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받으며 팽 당하기에 이르지만.

그 정도면 자신이 저글러스가 아닌 그저 지나치게 충성하는 비서이고 그런 방식으로 자기 성장을 한다는 것이 환상이라는 인식을 가질 만하지만, 회사에서 다시 그를 부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원점으로 돌아간다. 남치원(최다니엘)의 프락치로 조상무(인교진)가 자신을 그의 비서로 붙인 것이라는 걸 좌윤이도 알고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인물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남치원을 잘 보좌하고 하나하나 챙기려는 이른바 ‘서포터 정신’이 아예 습관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결국 <저글러스>라는 드라마는 바로 이 자신에 집중하지 못하고 타인을 위해 수동적으로만 살아오는 것이 타성화되어 버린 좌윤이라는 문제적 인물의 변화와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물론 그 틀은 조금은 뻔해 보이는 ‘신데렐라’ 코드를 가져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결국은 좌윤이가 보좌하게 되는 남치원과의 갑을 관계를 넘나드는 말랑말랑한 썸 타기가 이 드라마의 또 한 줄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뻔한 신데렐라 코드를 조금 다르게 만드는 건 남치원이라는 인물이다. 무슨 일인지 등에 화상을 입고 있는 이 인물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철벽을 치며 살아간다. 차갑고 사무적인 태도는 결국 이 상처로 인해 비롯된 것이라는 점이다. 멜로 코드로서 철썩 달라붙으려는 좌윤이와 철벽을 치는 남치원의 관계가 주는 밀당이 존재하지만, 그것보다 주목되는 건 남치원의 개인주의적 경향이 자신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가는 좌윤이에게 어떤 변화를 예고하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상사밖에 모르는 삶을 타성화해 온 좌윤이와 자신밖에 모르는 삶을 트라우마 때문에 살아가는 남치원은 그래서 각각 저마다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멜로적 관계를 넘어서 서로를 성장시켜줄 수도 있는 상보적 관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닌다. <저글러스>가 뻔해 보이는 신데렐라 코드를 가져오면서도 참신해 보이는 지점은 바로 이 캐릭터들 덕분이다. 

사실 <저글러스>의 시작점으로서 좌윤이가 보여주는 비서로서의 삶은 보기에 불편한 지점들이 많다. 모든 비서들이 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사적인 것들까지 상사를 챙기고, 상사는 마치 하인이나 되는 듯 비서를 마구 대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당연한 상사와 비서 사이의 관계인 것처럼 드라마는 보여준다. 물론 이렇게 극화되어 관계를 다소 과장되게 보여주는 건 그것이 상사와 비서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직장생활에서 어디서나 보여지는 상하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불편함들이 좌윤이가 겪는 난관들 속에서 피어오르고, 시청자들이 심지어 이 인물에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답답한 면을 느끼게 만드는 건 사실은 향후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좌윤이는 종속적인 인물이 아닌 보다 능동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는 인물로 변화할 수 있을까. 그저 단순한 신데렐라가 아닌 진짜 이 인물의 성장담을 보고 싶다.(사진:KBS)

신원호 PD의 마법, ‘감빵생활’이 주는 판타지라니

도대체 이 따뜻함의 정체는 뭘까. tvN 수목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다보면 감방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교도소는 구치소와는 공기 자체가 다르다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제혁(박해수)이 지내게 된 감방 안 사람들은 의외로 따뜻하고 인간적이다. 

감방에 처음 들어가게 된 제혁이 보게 되는 첫 번째 에피소드로 라면을 끓여먹는 이야기는 이들의 반전 매력을 드러낸다. 마치 탈옥이라도 할 것처럼 쉬쉬하며 무언가를 공모하던 이 감방사람들은 그러나 그것이 뜨끈한 물에 라면을 끓여먹으려는 ‘작전’이었다는 걸 보여주며 이들이 꿈꾸는 것들이 이런 소소한 것이 주는 행복이라는 걸 알려준다. 

그 감방의 방장격인 장기수(최무성)는 겉보기에 무시무시한 포스를 풍기지만 장발장(강승윤)이 아버지라 부를 만큼 방 사람들을 챙기는 인물이다. 장발장은 닉네임처럼 빵을 훔치다 감방에 들어온 인물이고, 고박사(정민성)는 기업사기 전과로 들어왔지만 고발 고소 전문이다. 카이스트(박호산)는 도박으로 들어왔지만 뭐든 뚝딱 뚝딱 만들어내는 만물박사. 풍기는 포스와 달리 혀 짧은 소리로 ‘신라면’인지 ‘진라면’인지 알 수 없는 말이 웃음을 주는 캐릭터다. 그리고 이 방에 들어오게 된 몽롱한 정신으로 할 이야기는 다 하는 나름 귀여운 캐릭터 뽕쟁이(이규형)도 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주는 따뜻함의 원천은 이런 정이 가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소박한 욕망들이다. 마침 방영하는 <영웅본색>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장기수를 위해 카이스트가 한 채널 밖에 나오지 않는 감방의 TV를 어떻게든 건드려 다른 채널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훈훈함을 준다. 결국은 장발장이 슬쩍 해온 리모콘으로 쉽게 채널을 돌려버리지만. 

모가지 밖에 나오지 않는 닭볶음이나 일주일에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는 온수 샤워를 위해 끝없이 민원을 넣어 상황을 호전시키는 고박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닭요리가 나오고 매일 온수 샤워를 할 수 있게 되는 그 상황만으로도 커다란 행복감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이 교도소에 위기상황이 없는 건 아니다. 가구를 만드는 작업실의 반장(주석태)은 제혁에게 처음에는 호의를 베풀지만 제 맘대로 되지 않자 그 어두운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제혁을 성추행하려 하지만 그 때 마침 이 교도소로 오게 된 교도관 준호(정경호)에 의해 불상사를 피하게 된다. 제혁의 오랜 친구인 준호가 애써 힘을 써 이 교도소로 오게 된 건 오로지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교도소가 제혁에게 주는 위기상황과 또 그를 보호해주려는 인물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긴장감이 이 드라마에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그 느낌이 주는 소박함과 훈훈함은, 사회와는 유리되어 있고 살벌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곳에서도 ‘슬기로운’ 방식으로 인간적인 삶을 희구하는 인물들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의 감방생활을 보고 있는 것이지만 또한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다시금 보게 되는 것. 

하는 일이 잘 안되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좌절되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 감방생활에서 라면 하나를 끓여먹기 위해서, 제대로 된 닭요리를 먹기 위해서, TV의 채널을 돌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또 온수 샤워를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래서 그것이 관철됐을 때 굉장히 행복해하는 모습에서 어떤 위로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상상도 못하고 가는 건 엄두도 못내는 해외의 유명 리조트 같은 곳을 날아가야 판타지를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감방 같은 뭐 하나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공간에서 아주 소소한 것들을 여럿이 힘을 합쳐 해결해내는 그 장면은 그 어떤 판타지보다도 크게 다가오니 말이다. 역시 신원호 PD답게 감방이라는 차가운 공간조차 사람 사는 따뜻함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왜 신원호의 마법이라 부르는 지 알 것 같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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