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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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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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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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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만이 사는 세상? 아니 그들이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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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구글검색 ^^; 삶 사랑 사람.. 이란 그룹(가수) 이름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드라마'라는 말을 발음하면 어째 이 세가지 'ㅅ'이 떠오르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라는 소리가 내 귓가에 그런 세가지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왔다. 1. 드라마는 그들만의 이야기일뿐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을 자꾸 '그들만이 사는 세상'으로 기억하게 될 만큼, 이 드라마에 펼쳐진 사람들의 세상은 '나'라는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어떤 공감을 불러..

    2008/11/27 00:33

왜 지금, 신윤복인가

네모난 세상/네모난 세상 2008/11/24 17:41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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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간송미술관 앞은 때아닌 관객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미술관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줄은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고적하기로 유명한 그 미술관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이유는 단 한 점의 그림 때문이었다. 신윤복의 ‘미인도’. 지금껏 다른 화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된 적이 없는 신윤복, 게다가 조선시대의 춘화(?)로까지 오도될 정도로 흔하게 보여진(그래서 본격적인 미적 가치에 대한 조명은 덜 된) 그의 ‘단오풍정’, ‘과부탐춘’, ‘월야밀회’같은 그림이 아닌 ‘미인도’에 대한 관심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이 신드롬이라고까지 지칭할 수 있는 신윤복에 대한 열기를 만들었던 것일까.
그것은 한 편의 팩션에서부터 비롯됐다. 바로 ‘바람의 화원’이다.

미술관 풍경이 말해주는 신윤복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줄선 사람들은 본래부터 고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며 주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박신양의 연기가 어떻고 문근영이 진짜 소년 같다는 그런 이야기들. 그리고 막상 미술관에 들어서게 된 그들의 발걸음이 먼저 닿는 곳은 오로지 ‘미인도’였다. 간간이 보이는 신윤복과 김홍도의 작품들이 발길을 끌뿐, 웅장한 자태로 서 있는 겸재 정선의 산수화나 추사 김정희의 글씨, 혹은 김명국의 그림은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미인도’나 ‘단오풍정’같은 신윤복의 그림 앞에서는 저마다 한 마디씩 감탄을 하거나 평을 보태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고는 “신윤복은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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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의 신윤복에 대한 각별한 관심은 바로 그 지점, 쉽게 단평까지 내릴 수 있는 그 친근함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이것은 물론 우리네 고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흔히들 무언가 선비정신이나 단아함, 혹은 추상적인 세계관 같은 것으로 오인되는 우리네 고미술에 대한 편견. 따라서 그런 그림들 앞에 서게 되면 친근함보다는 어딘지 올려다봐야만 할 것 같은 위압감 같은 것. 하지만 이것은 우리네 겉핥기식 미술교육이 만들어놓은 편견이다. 우리가 익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을 통해 만난 장승업을 보고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혹은 그 이하였다, 환쟁이라 불릴 정도로)이었다. 장승업과 또 한 명의 조선시대 신필로 불리는 김명국 역시 마찬가지. 그는 주광(酒狂)이라 불릴 정도로 술을 마셨는데,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까지 있을 정도다. 그만큼 당대의 화원들이란 환쟁이로 천시되던 풍토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신윤복에 유독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드라마나 책을 통해 박제된 천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한 위대한 인간으로 재조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신윤복의 그림과 지금 시대의 코드가 맞닿는 지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미인도’를 보면 그 한 올의 터럭까지 잡아내는 그림의 섬세한 필치와 다소곳이 서 있는 여인의 자태가 주는 미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신윤복 스스로 “그녀의 마음까지 잡아넣었다”고 만족해했을 만큼 그 그림의 여인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방 살아날 것 같은 생생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미적인 성취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 놀라운 저널리스트로서의 신윤복의 가치가 드러난다. 바로 그 ‘미인도’의 주인공이 기생이라는 사실. 여인조차도 그림의 한 구석에만 자리해야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시대에 당당한 화제로서 그려진 기생의 초상은 저 양반들의 초상이나, 어진의 그것과의 대결의식을 그 자체로 담고 있다. 즉 신윤복의 그림의 화제는 늘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건져 올려진 것들이다. 서민들이 보기에 속시원했을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그 속에 담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미적인 성취를 이뤄내는 신윤복의 그림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의 정서와 맞닿는 대목이 있다. 신윤복은 그렇게 수백 년을 지나 지금 시대에 다시 걸어 들어온 것이다.

팩션과 영상 시대가 요구한 천재
유독 신윤복이 팩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 시대에 재조명된 이유는 무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팩션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흔히들 팩트(사료)+픽션(상상)을 팩션이라 생각해, 여기저기 팩션이란 용어를 남발하고 있지만, ‘바람의 화원’의 원작자인 이정명 작가는 팩션을 역사소설 혹은 소설과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상 소설이란 어느 정도의 팩트(그것이 작가 개인의 것이든)에 상상을 더한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팩트+픽션이 아닌 소설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팩션은 역사적 사실에 추리형식을 곁들여 상상력으로 풀어낸 이야기로서, 하나의 새로운 장르라는 것. 이정명 작가는 굳이 표현하지만 팩션은 ‘역사추리’에 가깝다고 했다.

따라서 이미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팩션의 소재가 되지 못한다. 차라리 역사적 사료가 누락된 부분에서 팩션은 탄생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하면서 생겨난 욕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푸코가 주장하는 권력으로서의, 지배자들의 전유물로서의 역사가 가진 한계를 상상력을 동원해 뒤집어보는 것으로서 팩션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신윤복은 그런 면에서 이 팩션의 시대가 요구한 천재이다. 동시대의 화원으로서 김홍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해 있는 반면, 신윤복은 그렇지 못하다. 도화서 화원이었다가 술과 여자, 혹은 난잡한 그림(?) 때문에 쫓겨났다는 식의 단편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료뿐만 아니라 신윤복은 그 흔한 일화조차 남아있질 않다. 사료에 기록이 선연히 남아있는 김홍도나 기록이 별로 없어도 수많은 일화로 그 면면을 짐작하게 해주는 연담 김명국 같은 다른 화원들과는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바람의 화원’ 원작의 이정명 작가는 바로 이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이 오히려 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오로지 남아있는 그림들을 통해 신윤복을 상상해야 하는 그 지점에서 작가는 그 그림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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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윤복이 화원이라는 사실, 즉 그림이 소재가 된다는 점은 영상 시대에 걸맞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읽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더 익숙해진 요즘, ‘바람의 화원’이라는 팩션은 영상화하기에 최적의 컨텐츠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드라마가 원작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이정명 작가는, 세세한 일상까지를 잡아내는 리얼리티의 힘을 영상 컨텐츠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지 영상화하기 좋은 미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신윤복의 그림이 주목되었을까.

여기에는 한 가지 더 부가되는 점이 있다. 이것은 이미 전술했듯 신윤복의 그림 속에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시선이 있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보면 ‘그리움’이라는 제목의 그림 속에는 여염집 아낙네가 고개를 돌리고 서 있는 모습이 어떤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내게 만드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낙네가 들고 있는 모자가 송락이라 불리는 것으로 스님들이 쓰는 것이다. 그 하나의 오브제만으로 이 그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런 점은 역사 속에 숨겨진 그 어떤 것을 상상력을 통해 추리해가는 팩션의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다. 거기서 발전된 형태가 ‘미인도’에 대한 ‘바람의 화원’의 해석이다. ‘미인도’를 통해 신윤복의 자화상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다빈치 코드’에서 모나리자의 그림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을 연결시키는 것과 갖은 맥락이다.

드라마가 살려낸 박제되었던 천재
그렇다면 이런 팩션을 드라마는 어떻게 시각화했을까. 드라마는 팩션이 구상했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것은 그 중심에 그림을 세워두고 그 안에 있는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는 식이다. 먼저 신윤복의 ‘기다림’이라는 그림은 드라마 속에 들어오면 외유사생(생도들이 하루 바깥에 나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신윤복(문근영 분)이 담아온 그림으로 표현된다. 소설에서는 그 그림의 음란성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정도에서 그치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이 사실은 정순왕후였다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극적으로 설정되자 정순왕후는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 그림을 그린 생도를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된다는 조금은 과장된 스토리. 하지만 이것은 드라마 초반부의 시선을 잡아두기 위한 방편의 설정일 뿐, 진짜 그림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은 이후에 등장하는 ‘군선도’에서 보여진다.

‘군선도’편에서 신윤복과 김홍도(박신양 분)는 먼저 함께 저잣거리를 활보하며 거기서 장사치들과 서민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모습들을 보게된다. 그 하릴없이 지나치는 듯한 하루의 일과는 그러나 빈 화폭 앞에 서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김홍도는 군선도(群仙圖), 즉 신선들의 무리를 그리는 그림 속에 그 저잣거리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을 잡아넣는다. 그러면서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말로 화법의 기본을 신윤복에게 설명한다. 즉 화원의 눈이란 저잣거리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신선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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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오랜 세월이 지나온 그림 한 장 속에 잠들어있는 이야기를 깨어내기 위해 ‘바람의 화원’은 초현실적인 연출을 활용한다. 그림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실사로 변하거나, 실사가 화원의 붓끝에 의해 그림으로 변하는 식이다. 신윤복의 ‘기다림’이라는 그림은 정순왕후가 나무 곁에 서서 잠깐 동안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크로키처럼 빠르게 신윤복이 그리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여기서 실사는 그대로 붓끝의 질감으로 서서히 변하면서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김홍도의 ‘군선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은 단오에 계곡에 모여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는 여인네들을 드라마 속 에피소드로 풀어냄으로서 정지된 그림 속의 이야기를 눈앞에 생생히 보여주었다. 기생 정향(문채원 분)과 신윤복이 함께 그네를 뛰면서 그 부서지는 풍광들 속에 계곡의 여인네들이 하나하나 그림의 부분으로 바뀌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가진 연출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화원들의 철학까지 담아낸 팩션 드라마
이러한 연출은 그저 볼거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스토리와 함께 당대 화원들의 화풍과 철학까지도 담아낸다. 그 대표적인 것이 김홍도와 신윤복이 같은 소재로 다르게 그려낸 주막 그림 에피소드이다. 그들은 정조에게서 동제각화(同題各畵 : 같은 화제로 각자 그림을 그리는 것)를 명 받고는 뭘 그릴까 고민하다가 선술집을 보며 때아닌 그림 논쟁을 벌인다. “저 주모 얼굴을 좀 봐라 밤낮으로 술을 팔아서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었지 않느냐? 술장사가 잘 안 되나보다. 아이고 저 양반 놈 보게. 대낮부터 불콰하게 취해 가지고 헤롱헤롱 아이고 꼴 좋다. 야 저 얼굴 저 표정 저 몸짓에 모든 게 다 들어있지 않느냐?” 하지만 여기에 대해 신윤복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 지를 화폭에 담아야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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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간단한 대사 속에는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관이 들어있다. 즉 김홍도는 배경보다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그 성정이 다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신윤복은 그 사람만 봐서는 그 사람이 뭐를 원하는 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배경이 그 마음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김홍도의 반박에 신윤복은 주막 평상 위에 물로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새는 이렇게 있으면 그저 새일 뿐입니다. 무엇을 원하는 지 이 그림만 봐서는 알 수가 없죠. 허나 이렇게 새장을 그려놓으면 그저 새이기만 했던 이 새가 무엇을 원하는 지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배경 그림 없이 인물에 더 집중했던 김홍도와 달리 배경을 통해 그 안에 갇힌 대상의 마음을 잡아내려 했던 신윤복은 그만큼 조선이란 사회가 가진 틀과 억압에 민감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저 스스로도 조선에 갇힌 새였으며, 그림을 통해 그 새장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그리움은 바로 이 떠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족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와 ‘무녀신무’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 그림이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단초를 제시한다. 즉 대낮에 일은 하지 않고 선술집에서 불콰한 모습을 취해있는 이들과 혹세무민하는 무당들이 담겨진 그림을 보고 정조는 그 풍경이 말하는 고발정신을 읽어낸다. 이 저널리스트의 눈을 가진 신윤복의 면모를 드러내주는 에피소드는 정조가 신윤복과 김홍도를 불러 “너희들은 내 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림이 마치 지금의 사진처럼 그 이미지 이상의 의미를 전달해준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역사왜곡과 재해석 사이
하지만 팩션이 아무리 없는 사료 속에서 상상력으로 그 빈곳을 채운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신윤복을 왜 남장여자로까지 그렸어야 했을까. 이것은 지금 학계에서 ‘지나친 역사왜곡’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빌미가 되고 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사극의 역사왜곡 논란이 ‘바람의 화원’을 통해 또다시 고개를 쳐든 것. 문화재 위원장인 안휘준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백 번 양보해도 남자를 여자로 그리는 건 과하다”고 지적하면서 “국민에게 역사를 알게 하려면 그 작업을 제대로 해야지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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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준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문화재 위원장으로서 어쩌면 타당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가 한 가지 사실로만 받아들여졌던 시대에는 온당하지만, 지금처럼 한 가지 사실에 대한 한 가지 기록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는 그다지 효율적인 태도가 아니다. 역사왜곡과 재해석의 차이는 그렇게 이미 가까워져 있다. 안휘준 위원장의 발언은 학자의 절대적인 텍스트가 되어야 하는 역사를 뒤흔드는 팩션이나 드라마에 대한 당연한 입장일 것이다. 그 말은 거꾸로 보면 ‘사극이 국민들에게 역사공부를 시켜줄 정도의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다. 영상매체로서의 사극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자인해주는 셈.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신윤복 신드롬으로 드러난 바 있다.

정통사극이 이미 사라져버린 요즘, 사극을 두고 역사왜곡을 말하는 것은 이제 좀 식상한 논쟁이 되어버렸다. 퓨전 사극이 대세로 자리잡은 요즘의 사극트렌드에서 사극은 역사 그 자체보다 오히려 상상력을 더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사극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그만큼 달라졌다. 사극이 역사 그 자체라면 그것은 재연 다큐멘터리이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사극은 더 이상 역사공부가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바로 그 역사를 버림으로 해서 사극이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진위를 떠나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을 제고한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 역사에 대한 주의 환기로서만 사극은 그 효용성을 가진다.

‘바람의 화원’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신윤복이나 김홍도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끌기 위해 학계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왔던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극이 이처럼 역사공부를 시켜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동안, 학계에서는 대중들을 방치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달라진 대중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할 때 이제는 하나의 사극을 역사왜곡이라 일축하는 식이 아니라, 좀더 사극의 상상력 또한 가슴에 품어주는 넓은 도량으로서의 접근이어야 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극 혹은 팩션을 통해 환기된 역사와 함께, 동시에 정확한 역사로 바로잡아주는 학계의 노력이 공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신윤복의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촉발된 간송미술관의 성황 속에서 안타까웠던 점은 바로 이 점이다. 대중들은 신윤복을 통해 우리네 고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미술관에서는 정작 그림 감상을 돕는 어떤 설명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만일 거기 있는 다른 미술작품들에 대한 설명 같은 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면 신윤복 신드롬이 신윤복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고미술에 대한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한국민족연구소 연구실장은 이런 현상에 대해 “드라마의 영향으로 전시의 가치나 내용을 잘 모르고 오는 손님들도 꽤 있지만, 어떻든 우리 문화재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은 일(한국일보 10월15일자)”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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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왜 꼭 남장여자여야 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휘준 위원장의 표현처럼 “백 번을 양보해도” 왜 꼭 남장여자였을까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이것의 효용성은 아마도 작품 속에서 이 남장여자가 기능하는 바를 찾아내야 드러날 것이다. 즉 작품 내적인 문제라는 말이다. 만일 그것이 단지 안휘준 위원장의 말대로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하지만 작품이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설정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 상상력으로서 포용되어야 한다.

이정명 작가는 여기에 대한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어린 시절 보았던 성냥갑에 그려진 신윤복의 섬세한 필치와 분명한 색조가 드러나는 ‘단오풍정’을 통해 작가 자신은 신윤복을 여성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교과서를 통해 신윤복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되고는 오히려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즉 이정명 작가가 본 것은 그 여성성이 묻어나는 신윤복의 그림이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남자와 여자가 확연히 대비된다. 즉 남자, 양반들은 그 위선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여자 기생들은 자유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파격을 보여준다. ‘미인도’가 그저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것이라 생각한다면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이나, 그 그림의 주인공이 기생이라면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기생을 그림의 소재로 세우지 않던 시대에 신윤복은 그 기생을 그림으로써 아름다움이란 신분이나 지위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또한 신분, 지위 같은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아름다움과 생산성, 창조성을 내포한 여성성을 그리워한 신윤복의 마음이 담겨진 그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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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이 이 시대의 컨텐츠 속에서 남장여자로 되살아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장여자는 단지 사료부족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든가, 그림의 필치가 여성적이라는 데서 착상한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다. 여성이지만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남장여자는 분명 여성성을 희구하지만 남성성의 사회 속에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과의 공감이 바탕에 깔려있다. 즉 여성성의 삶,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희구하지만 현실은 남성성의 삶, 경쟁적인 삶 속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공감 말이다. 이것은 또한 당대 신윤복이 가졌던 배경(사회환경의 현실)과 그 배경을 화폭 속에 비틀어 그려내면서 그 구속을 벗어나려 했던 욕구와 같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적 구분이 역할 구분과 맞닿아있었던 과거 농경사회 속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엄격했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성별과 상관없이 각각의 능력으로 인정되는 정보화 사회 속에서는 그 생물학적 구분은 문화 컨텐츠 속에서 그렇게 엄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남성과 여성의 시대가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의 시대다. 신윤복이 팩션과 드라마 속에 들어와 남장여자로 설정됨으로써 본질은 여성이지만, 여성으로 살 수 없는 상황을 극대화하고, 따라서 자신 스스로에 내재된 여성을 표현할 수 없는 그 마음을 그림 속에 더 절실하게 구현한다는 것은 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것은 또한 남성성의 사회 속에서 여성성의 사회로 변화해 가는 지금, “왜 신윤복인가”하는 질문에도 충분한 답변을 제공하는 대목이다.
(이 글은 월간중앙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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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상업적인 선택 다른 선택은 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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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대는 가고 예능 시대가 오나. 한 때 드라마는 방송사의 얼굴이었다. 어떤 드라마가 방영되고 얼마만큼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느냐는 그 자체로 방송사에 수익을 올려주면서 동시에 방송사의 이미지를 제고시켜주었다. 하지만 경제상황 악화로 광고시장이 위축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으로 드라마는 상업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떨어져 가는 수익성은 방송사에 이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드라마는 더 이상 수익도 이미지도 올려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빠진 자리에 채워질 것이 예능 프로그램이란다. MBC는 주말 특별 기획 드라마를 폐지하는 대신 그 자리에 ‘명랑히어로’를 전진 배치하고, ‘무한도전’은 5분을 더 연장시킨다고 한다. 금요드라마가 사라진 SBS는 대신 그 자리에 오락 프로그램을 편성할 예정이다. 드라마 시대는 가고 예능 시대가 도래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예능이 대안이 된 것은 상대적으로 제작비를 줄일 수 있고, 안 돼도 기본 시청률은 하는 그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 대안이 굳이 예능이었어야 하며, 또 예능 역시 지금 드라마와 같은 경쟁으로 천정부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방송사가 외치는 건, 결국 돈돈돈일 뿐이다
드라마가 지나치게 많고 경쟁 또한 지나쳤던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 공화국’이라는 말  속에 비아냥의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라질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면 늘 있어왔던 드라마 시간대 이외에 추가로 배치되었던 드라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BS 금요드라마는 그간 없었던 금요일 시간대의 드라마였고, MBC의 주말 특별 기획 드라마도 예능의 자리를 차고앉았던 것이었으며, 또 상업성을 노리고 KBS2에 신설되었던 일일드라마도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이 드라마들의 폐지는 드라마 세상에 낀 거품을 제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수익성 약화와 함께 방송사가 일제히 들고 나온 건 결국 상업성이다. 드라마가 상업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이니 수지가 맞는 예능으로 눈을 돌린 것뿐이라는 것이다. 평균 잡아 회당 6천만 원, 적게는 3천만 원 정도만을 갖고도 최소 10%에서 20%까지의 시청률을 올릴 수 있으니 예능은 여러모로 드라마보다는 확실히 되는 장사다. 드라마에 낀 거품이 가져온 수익성의 약화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방송국의 상업성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그 빈자리에 참신한 교양이나 다큐 같은 것을 배치하는 것은 이제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인가.

덩치 커지는 예능,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덩치가 커져 가는 예능의 버라이어티화는 드라마의 부실만큼 큰 뇌관을 안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SBS의 ‘일요일이 좋다’는 회당 제작비로 1억3천만원이 투여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MBC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역시 회당 제작비가 1억2천3백만원. ‘해피선데이’가 방송3사 주말 예능 중 가장 적은 제작비를 기록했으나 그것도 미술비와 협찬을 제외한 비용으로 9천2백만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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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예능들이 이처럼 많은 제작비를 투여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도전’은 상대적으로 적은 6천5백만원, ‘스친소’는 6천3백만원, ‘개그야’5천8백만원, ‘스타킹’5천7백50만원, ‘야심만만-예능선수촌’5천6백80만원이 회당 제작비로 들어간다. 하지만 점차 버라이어티쇼에 입맛을 들이게 만드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상업적인 선택을 좋다고만 볼 수 있나
제작비를 좌우하는 연예인의 출연료와 야외촬영은 바로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누가 출연해 어딜 가느냐가 관건이 된 예능 시장은 점차 이 부분에 대한 제작비 투여를 어떤 식으로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캐릭터 중심에 이야기가 매회 구성되는 버라이어티쇼는 점차 드라마화 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것은 어쩌면 또 다른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항간에는 벌써부터 웰 메이드 드라마보다는 광고주 입맛에 맞는 드라마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무리 잘 만든 프리미엄 드라마보다 욕은 먹어도 시청률은 나오는 투자대비 효율이 높은 그런 드라마들이 판을 칠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다. 앞으로 TV에서 좋은 드라마는 점점 사라지고, 반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더 많아지며, 그 중간을 상업적으로 무장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장악한다? 상상만 해도 TV가 풍길 돈 냄새가 물씬 퍼지는 느낌이다.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 방송사가 어떤 식으로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TV가 온통 상업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역시 좋다고 볼 수 있을까. 프로그램 몇 개 없애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드라마보다 상대적으로 수지가 맞는 예능을 채운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까. 진짜 문제는 드라마든 예능이든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거품들, 예를 들면 과도한 출연료나 작품보다는 외형에 치중하다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는 그런 왜곡된 시장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아닐까. 이 위기의 상황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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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객’과 ‘타짜’, 드라마와 영화 그 엇갈린 반응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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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이면서 드라마 ‘식객’은 되고 ‘타짜’는 잘 안 되는 걸까. 또 아이러니 하게도 이 상황은 왜 영화에서는 거꾸로, 즉 ‘타짜’는 되고 ‘식객’은 안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작품은 그 소재에 있어서 각각 적합한 매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식객’은 드라마가 더 적합했고, ‘타짜’는 영화가 더 적합했다.

‘식객’과 ‘타짜’, 그 다른 이야기 구조
‘식객’이 드라마에 더 적합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 원작의 특징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병렬적으로 이어놓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시리즈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담기에 더 유리했고, 상대적으로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을 소화해내기가 부담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운암정을 사이에 둔 봉주와 성찬의 대결구도가 그 메인이 되고 그 뼈대 위에 소소한 이야기들이 살처럼 박혀있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서로 다른 매체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타짜’는 그 이야기 구조가 ‘식객’과는 다르다. 물론 허영만 화백 특유의 취재에 근거한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즉 편편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결고리를 유기적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평경장 같은 한 인물의 이야기는 ‘식객’처럼 그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짜여진’ 구조는 드라마처럼 늘여서 보는 것보다 영화처럼 압축적으로 보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기 마련이다.

영화여서 담을 수 있는 것, 드라마여서 못 담는 것
‘식객’은 그 소재 자체가 음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TV 방영에 있어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타짜’는 다르다. 도박이라는 소재는 여러모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손가락이나 손목을 걸고 하는 도박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영화는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다. ‘타짜’가 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 홍콩도박 영화들이 가진 선악구도의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도박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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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타짜’에도 주인공이 있고 그와 대립하는 아귀라는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해서 선한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도박이라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 ‘타짜’는 바로 이런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아귀나 정마담은 악한 인물이면서도 이 타짜의 세계를 통해 보면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에는 분명한 선악 구도가 나뉘어져 있다. 고니(장혁)는 ‘착한 타짜’고 아귀(김갑수)는 ‘악한 타짜’가 된다. 고니가 도박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것이지 도박 자체에 매료된 탓은 아니다. 이것은 드라마로서 도박이라는 사행심리를 자칫 부추기는 결과를 피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타짜’가 영화의 그것처럼 리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분명한 선악구도를 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타짜라는 소재는 매력적이다. 즉 도박의 세계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끌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TV에 적합한 소재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시청연령을 제한하는 고지가 나오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방영되는 TV드라마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아직까지 도박과 폭력을 용인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식객’과 ‘타짜’, 모두 좋은 소재의 작품이지만 저마다 적합한 매체는 달랐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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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드라마 식의 어법과 운명적 장면의 어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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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은 시청률면에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첫 회에 10%대를 가볍게 넘겼고 6회에 20%를 넘기고 나서 현재 12회에 이르러 27%(AGB 닐슨)로 30%대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시청률과 함께 점점 이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대사’다. 어째서 이 나연숙이라는 베테랑 작가의 작품을 두고 때아닌 대사 논란이 불거지는 걸까.

오랜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형제가 만나는 장면에서 동생 동욱(연정훈)은 형 동철(송승헌)에게 연거푸 “형 맞아!”하고 소리친다. 어두컴컴한 그 장면에서 절절한 동욱의 외침과 “동욱아, 형이야!”하고 답하는 동철의 대사는 그 상황 자체로 보면 극적이고 가슴 절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장면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차안에서 그 장면을 보던 국회장(유동근)의 “불 좀 켜 줘라”하는 대사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보는 이에게 참았던 실소가 터지게 만든다.

이런 장면은 이 드라마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마카오에서 동철이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들은 그렇게 “동욱아!” “형!”을 반복해 소리쳤다. 오랜 세월을 지나 동철이 어머니 춘희(이미숙)를 다시 만나는 장면 역시 지나칠 정도로 길게 장면을 잡았다. 한참을 서로 쳐다보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을 떼면서 다가오는 동철에게 춘희는 “어딜 갔다 이렇게 지 아부지 마냥 훌쩍 커서 온겨!”, “왜 말을 못하냐! 예전처럼 말문이 막힌겨!”하고 반복해서 소리친다. 이 장면은 역시 극적이지만 떠오르는 건 멀리 서서 반복해 소리치는 “동욱아!” “형!”의 변주처럼 들린다.

이 절절한 가족애가 ‘에덴의 동쪽’이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 김범이 연기했던 어린 시절의 동철이 동생 대신 방화의 죄를 뒤집어쓰고 기차에 올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다!”라고 외칠 때 그 울림은 실로 컸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표현 자체가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적인 대사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어색하기 마련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런 극적인 대사의 활용은 적절하게 사용될 때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의도적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강박관념이 작용할 때, 이 대사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드라마의 현실성을 무너뜨린다. 거의 매 시퀀스마다 극적 상황을 연출하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거기 활용되는 대사들도 비일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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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연기력 부재에서 비롯한 바가 크지만 이연희의 연기력 논란은 이 비일상적 대사가 더 부추긴 이유도 있다. “벌써 날 사랑하게 된 거니?”같은 대사나, 혼자 읖조리는 듯한 톤의 대사들, 예를 들면 “충성스런 사냥개로군”처럼 “∼군”같은 어미로 끝내는 대사들은 연극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일상언어를 추구하는 드라마로서는 부적격하다.

만일 지금이 8,90년대라면 이런 대사들과 어법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드라마들은 아직까지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들을 다룰 만큼 극적 스토리가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호응을 얻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8년이다. 운명적 사랑은 사극에서나 겨우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이 드라마는 여전히 2008년도에 묶여있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더 보편적인 이 시대의 드라마에 있어서 과도함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에덴의 동쪽’은 스토리나 연기자들 소재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드라마임에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극적 장면에 집착하고 있다. 사실상 스토리 자체가 극적인 이 드라마는 오히려 좀더 절제하는 맛이 필요하다. 과도한 대사와 과도한 연출은 극적 상황마저 과장된 것, 혹은 우스운 것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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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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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죽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처럼.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가 뿔을 내는 동안,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늘 그 엄마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거나 혼자 씩 웃고 있거나 가족 대소사에서 한 걸음 뒤편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는 뿔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1년 간의 휴가’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엄마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

‘엄뿔’이 보여준 아버지의 존재감
이 가족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족의 변화형태를 가장 잘 포착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주말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중장년 여성이란 점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겠지만, ‘엄마가 뿔났다’에서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의 시점으로 타자화되어 그려진다.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독백으로 설명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엄마의 시선으로만 채워진다. 장남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이며, 맏사위는 이혼남이고, 둘째 사위는 어딘지 부모의 치맛폭에 사는 듯한 엄친아다. 반면 맏며느리는 생활력 강한 여성이고, 장녀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며, 차녀는 성격 좋고 늘 밝고 솔직한 여성이다.

이것이 엄마의 시선이기 때문에 여성을 좀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선 속에서 제외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나일석이다. 한없이 열려진 마음을 가진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은 아직까지 집안의 어르신으로 서 있는 반면, 나일석은 늘 그 바깥에 존재한다. 김한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그 허락을 구하는 당사자는 나일석이 아니고 나충복이다.

이 시대 드라마가 향수하는 아버지
최근 이 같은 아버지 부재의 신호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드러난다. ‘에덴의 동쪽’은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그 빈자리에 대한 향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비극적인 가족의 탄생은 시대가 살해한 아버지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강한 엄마, 양춘희(이미숙)가 탄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해체된 가족을 묶어두려 안간힘을 쓰는 이동철(송승헌)이 자리한다. 이 드라마의 힘은 시대를 과거로 돌려 현재에는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 데 있다.

이렇게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드라마들이 거의 시간대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주말 저녁을 오랜 시간 점유하던 KBS 사극은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간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주말 밤에 대거 포진되어 점차 사세를 넓히고 있는 엄마들의 드라마(이것은 엄마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말할 뿐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제 아버지들도 즐기는 드라마가 되었다)가 그걸 말해준다.

사극이 그리는 왕은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대왕 세종’은 물론 신하들과의 우여곡절이 많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펼쳐나가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한다. 주중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유리왕(정진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지만, 국가의 존폐를 위해 자식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다. 즉 사극 속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는 왕이라는 직능과 늘 부딪치는 거추장스런 옷이 되고 있다.

나일석의 어깨가 쓸쓸해보이는 이유
이것은 가족드라마가 아닌 현대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짐이 부여되지 않는다. 강마에(김명민), 두루미(이지아), 강건우(장근석)의 가족들은 드라마를 위해서 거세되었다. 반면 아버지의 모습은 ‘똥 덩어리’라 모욕을 당한 정희연(송옥숙)의 남편 박진만(이봉규)이나, 가족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꿈을 접고 후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사회생활을 해온 박혁권(정석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현실이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는 꿈을 향해 달려간다.

‘타짜’에서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돈도 다 날리고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존재다. 고니(장혁)가 잡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 돈을 가지려는 것이며, 따라서 도박판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생사를 건 생존경쟁의 축소판이 된다. 속고 속이는 현실 속에서 늘 손모가지든 목이든 걸어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상황, 그것이 바로 ‘타짜’의 세계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삶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팍팍해졌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아버지가 짊어졌던 현실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위의 시대가 가버린 그 자리에 남겨져 아내에게 구박을 들어도 뭐가 그리 좋은 지 킥킥 혼자 웃는 나일석의 어깨가 가끔씩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갖게되는 상반된 두 감정, 즉 해방감과 함께 솟아나는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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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에 따라 달라지는 ‘식객’의 맛, 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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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만화 ‘식객’이 영화화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 많은 에피소드들을 과연 영화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제대로 배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였다. 원작 만화 ‘식객’의 묘미는 편편이 음식 하나하나로 끊어지는 그 독자적인 에피소드들의 상찬에 있다. 거기에는 고구마, 부대찌개, 김치 하나에도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따라서 만화로 ‘식객’을 볼 때 우리는 마치 뷔페식당에 온 듯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당신이 고기류를 좋아한다면 ‘쇠고기 전쟁’을 골라보면 되고, 토속적인 맛을 즐긴다면 ‘청국장’이나 ‘메생이’같은 음식편을 찾아 읽으면 된다.

‘식객’의 영화화는 왜 실패했나
하지만 이 만화라는 매체만이 갖는 찾아보고, 다시 보고 하는 묘미는 영화 속으로 들어가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그것도 두 시간 내외) 안에 한정된 공간에서 상영되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주제를 향한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해진다. 영화‘식객’이 처한 불리함은 오히려 너무나 많은 반찬들 때문에 오히려 주요리가 묻혀질 수도 있는 ‘식객’만의 풍족한 재료에서 비롯된다. 어느 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따라가자니 영화 전편으로 꿰뚫기에는 좀 약한 듯 싶고, 그렇다고 몇 개의 에피소드를 가져가자니 얼기설기한 느낌을 주게 된 것이다. 아예 형식 자체를 만화가 가진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상업영화로서는 거의 시도하기 어려운 모험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영화화된 ‘식객’이 지나친 대결구도에 몰두하면서 오히려 ‘식객’만의 묘미였던 서민적인 밥상이 외면되었던 것은, 사실은 원작 만화의 진짜 맛이었던 이 소소해 보이는 에피소드들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남겼다. 여러모로 ‘식객’의 영화화가 실패한 점은 그 매체의 다른 특성을 영화적으로 해석해내기가 쉽지 않은 ‘식객’ 원작 만화가 가진 에피소드별 구성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드라마화된 ‘식객’, 어떻게 재료의 균형을 맞췄나
그렇다면 드라마화된 ‘식객’은 어떨까. 같은 영상으로의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와 드라마는 그 매체 특성이 다르다.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해야 하는 반면, 드라마는 시간적 흐름(몇 달 동안) 위에 에피소드들을 구성할 수 있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 리메이크의 관건은 따라서 드라마적 특성인 메인 뼈대(이것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된다)를 세우고, 그 위에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살처럼 붙여놓는 작업에 있었다.

드라마‘식객’이 뼈대로 세운 것은 운암정 후계자를 두고 벌이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대결구도다. 드라마 초반부 거의 숨 쉴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들어낸 ‘식객’은 그 위에 하나씩 살을 붙이기 시작한다. 그 살이란 성찬과 봉주의 대결 구도 밖에 있는 서민들과 음식에 관련된 에피소드들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테드 오가 그리워했던 부대찌개에 관한 에피소드,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유순철)의 애끓는 부정(父情)을 얘기해준 게장 에피소드, 직업적인 편견을 넘어선 정형사 강편수(조상구)의 에피소드, 며느리와의 정을 녹차김치에 담아 얘기해준 치매할머니(김지영) 에피소드, 음식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는다는 걸 말해준 진수(남상미)의 어머니 에피소드 등등. 원작만화 ‘식객’이 가진 진짜 맛은 바로 이 살을 구성하는 에피소드들이 내는 깊은 맛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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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식객’의 첫맛과 중심 그리고 끝맛
너무 흔한 구도라 하여 식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 전통적으로 드라마 문법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대결구도를 뼈대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 쉬운 구도 덕분에 드라마는 폭넓은 시청층의 눈을 일단 잡아끄는데 성공했고, 그것을 통해 ‘식객’ 본연의 맛으로 시청자들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음식이 가지는 첫맛과 중심의 맛, 그리고 여운의 맛을 구성을 통해 연결해낸 것 같다. 첫맛은 대결구도로 강렬하게 잡아끌고 중심의 맛에서는 음식에 대한 성찬의 철학(서민적인 맛을 지키는)과 봉주의 철학(맛의 세계화)의 부딪침을 보여주며, 마지막 여운으로 음식이 가진 삶의 이야기를 남겨주었던 것이다.

컨텐츠의 융복합이 문화의 한 경향이 되는 요즘, 이처럼 다른 매체는 거기에 담겨지는 컨텐츠의 맛에 영향을 끼친다. 같은 제목이라도 서로 다른 맛을 우리에게 선사한 ‘식객’은 만화와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리메이크가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한번쯤 매체가 가진 융합가능성과 그 한계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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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에어’ 의 다중창 전략, 어떻게 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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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드라마라는 은막의 창은 늘 이편이 아닌 저편에서 신비로운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TV라는 창은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졌고, TV 이외에 다른 창들이 수시로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드라마에 몰입하고픈 시청자들은 따라서 좀더 창이 투명해져서 거기에 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질 정도로 드라마가 리얼하기를 원한다. 창에 리얼함을 깨는 먼지 한 톨에 대해서도 시청자들은 인터넷으로 달려가 그 먼지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드라마는 퓨전이니 환타지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사극들처럼 아예 투명함을 포기하거나, 전문직 장르 드라마처럼 투명해지거나 해야 한다. 적당한 멜로는 금세 탄로 난다. ‘온에어’는 이런 상황에서 좀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은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창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중창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전략이다. 이 드라마는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그러니 믿으라고 시청자들에게 강변하지 않는다. 대신 드라마 속에 다른 창을 하나 띄워놓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시청자들을 믿게 만든다.

첫 번째 창, 드라마의 앞모습을 잡는 창
‘온에어’는 드라마에 대한 드라마.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중의 창을 가지고 있다. ‘온에어’는 먼저 우리가 믿지 않는 드라마(혹은 연예계)에 대한 창을 먼저 보여준다. 그것은 첫 회에 등장한 시상식 에피소드다. 그 시상식은 우리가 TV를 통해 불신감을 갖고 보아왔던 바로 그것이다. 조작가능성, 나눠 먹기식 시상이 우리가 시상식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온에어’는 먼저 그 시상식을 통해 드라마의 앞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뒤집어 말해 시상식의 뒷모습에 우리가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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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에서 수상거부를 하는 오승아(김하늘)가 제일 먼저 드라마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온에어’의 네 인물인 오승아, 이경민(박용하), 장기준(이범수), 서영은(송윤아) 중 시청자들에게 TV 화면으로 친숙한 인물은 배우인 오승아다. 나머지는 모두 TV 뒤편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인물들이다. 그러니 TV의 앞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오승아를 주목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오승아에 대한 주목, 즉 시청자들이 믿지 않는 TV의 내용에 대한 장면들은 그것을 깨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오승아라는 배우의 진짜 모습, 그리고 TV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었다. 시상식에서 오승아를 찍는 카메라에서 한 걸음 뒤로 빠져나오면 그 카메라를 잡는 새로운 시선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제 그 새로운 시선은 자유롭게 배우와 PD, 작가, 매니저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방송계와 연예계의 뒷모습을 포착한다. 바로 이 시선이 이 드라마의 두 번째 창인 셈이다.

두 번째 창, 드라마의 뒷모습을 잡는 창
이렇게 시점이 첫 번째 창에서 두 번째 창으로 넘어오면서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온에어’라는 드라마를 조금씩 믿게 된다. 그것은 진짜로 알고 싶었던 드라마의 뒷모습이 펼쳐지기 때문이다(사람들은 보고싶은 걸 믿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시종일관 툭탁거리며 말다툼을 해대는 작가와 배우 간의 줄다리기가 있고,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엮어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PD와 매니저가 있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끊임없이 현재의 드라마들에 대한 논쟁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못해도 CF 많이 찍으면 스타인 줄 알지만, 미국 배우들은 쓰지도 않는 제품 홍보하는 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작가 서영은이나, 여기에 맞받아 “그러는 작가님은 왜 작품마다 PPL로 도배를 하죠?”라 말하는 오승아가 그렇다. 또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서작가 작품에는 명대사만 많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하는 이경민 PD의 말도 그렇다. 이렇게 드라마에 대한 논쟁이 오고갈 때, 시청자들에게 묘한 착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