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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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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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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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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만이 사는 세상? 아니 그들이 사는 세상

    Tracked from nooegoch  삭제

    출처: 구글검색 ^^; 삶 사랑 사람.. 이란 그룹(가수) 이름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드라마'라는 말을 발음하면 어째 이 세가지 'ㅅ'이 떠오르게 된다. 정말 오랜만에 '드라마'라는 소리가 내 귓가에 그런 세가지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왔다. 1. 드라마는 그들만의 이야기일뿐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을 자꾸 '그들만이 사는 세상'으로 기억하게 될 만큼, 이 드라마에 펼쳐진 사람들의 세상은 '나'라는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어떤 공감을 불러..

    2008/11/27 00:33

환타지 시대극 ‘에덴의 동쪽’, 역사왜곡보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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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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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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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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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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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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