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장 기안장

“사람들이 집에 쉽게 들어가는 게 싫었거든.”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기안84가 상상해 지은 민박집의 문이 2층 꼭대기에 달려 있는 이유가 그렇단다. 기안84가 슥슥 상상해서 그려놓은 민박집 기안장은 들어가려면 벽에 만들어놓은 클라이밍을 해서 문까지 기어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든 들어가보려 클라이밍을 시도하던 직원 역할의 진이 진입에 실패하고 기안84가 실소를 터트리며 하는 그 말에 또 다른 직원인 지예은이 투덜댄다. “아 집에 못들어가잖아요.” 

 

이것은 넷플릭스 예능 ‘대환장 기안장’의 기막힌 민박집 광경이다. 바지선 위에 지어져 바다 위에 떠 있는 이 민박집은 일단 들어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잠도 테라스처럼 생긴 바깥에 고치처럼 매달려 자야한다. 그래서 비라도 오면 쫄닥 젖을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클라이밍을 해 들어가면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야 숙소 겸 주방이 있는데 거기도 계단 따위는 없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따온 오르내리는 봉이 있을 뿐이다. 그 봉을 타고 내려갔다 화장실이라도 가려고 올라오려면 다른 사람들이 밑에서 받쳐주고 올려주고 해야 하는 생고생이 펼쳐진다. 물론 야외에 워터슬라이드까지 갖춰진 ‘5성급’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걸 타고 내려오면 바다로 뛰어들게 되어 있다. 이러니 이런 상상을 구현해놓은 기안장 앞에서 푸념이 터져나올 수밖에.

 

기안장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건, 기안84가 만화적인 상상력으로 마구 그려낸 ‘낭만’의 결과다. 클라이밍이 숙소에 쉽게 들어가는 게 싫었다는 다소 위악스런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2층과 1층 사이를 연결하는 봉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낭만이 만들어낸 결과다. 고치처럼 매달려 자는 잠자리는 밤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며 잠든다는 낭만이 빚어낸 것이고, 워터슬라이드도 숙소에서 바다로 뛰어드는 낭만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만화적 상상이 현실과 마주하면 어떤 불협화음을 낼 것인가. ‘대환장 기안장’은 바로 이 지점을 예능적 재미의 포인트로 만들었다. 

 

진짜 현실이라면 이런 민박집이 가능할 리가 없지만 그 상상을 진짜 울릉도 앞바다에 구현해낸 건 우리에게는 ‘효리네 민박’으로 잘 알려진 제작진의 공이다. 정효민 PD와 윤신혜 작가의 이 합작품은 그래서 ‘효리네 민박’의 기안84 버전처럼 보인다. 기안84와 월드스타 방탄소년단의 진 그리고 ‘SNL코리아’의 뜨는 별 지예은이 운영하는 기안장에 일반인 투숙객들을 모집해 함께 지내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은 정반대다. ‘효리네 민박’이 힐링 그 자체였다면 ‘기안장’은 ‘킬링’에 가까우니까.

 

실제 현실이 다르다는 건 울릉도에 첫 입도한 세 사람이 마주한 태풍 앞에서다. 바다 위에 떠있는 기안장에서 지낼 수 없게된 이들은 대안으로 마련해 놓은 산 속 별장(?)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이 곳 역시 만만찮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아슬아슬한 레일 위를 기묘한 기구를 타고 들어가야 하고, 주방과 옛 군대 내무반 같이 꾸려진 잠자리가 한 공간에 있는 숙소는 굴뚝없는 아궁이 때문에 요리를 하면 연기에 질식할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젠틀하고 긍정적인 진의 입에서도 “인간아-”라는 볼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첫 손님들 역시 그 불편함에 역시 기안84라는 긍정과 이건 너무했다는 부정이 오간다. 

 

그런데 우리가 상상하는 여행과 편안한 숙소에 대한 기대를 깨버리는 이 불편함 속에서 간간히 기안84식 낭만이 고개를 든다. 불편한 잠자리를 보내고 맞이하는 아침에 저편 밑으로 펼쳐진 압도적인 바다풍경이 그렇고, 배 위 야외에서 하늘에 지천으로 떠있는 별자리들이 그렇다. 그 불편함은 숙소들이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니 지워낸 자연적인 것들을 오롯이 다시금 눈앞으로 끌어내는 요소가 된다. 또 프라이빗을 강조하는 숙소들이 투숙객들 간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과 달리 이 곳은 뭐 하나를 해도 같이 해야 하는 새로운 경험들이 생겨난다. 

 

물론 날 것의 만화적 상상을 구현하다 보니 다소 위험해 보이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그것 또한 우리가 편리함과 안전함 속에만 있다 보니 느끼는 위화감이 아닐까 싶다. 기안84의 만화적 상상은 그렇게 우리의 인공적인 편리함에 갇힌 삶을 오히려 되돌아보게 만드는 면이 있다. 물론 그 자체가 주는 포복절도의 웃음과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만.(글:일간스포츠, 사진:넷플릭스)

트리거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다. 일단 정보가 너무 많아졌고, 비슷한 정보들을 똑같이 복제해 쏟아내는 매체들도 많아졌다. 그러니 뭐가 실체적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슬쩍 가짜뉴스를 띄워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이들이 많아질 수 있는 환경이다. 대중들은 혼란스럽다. 명백한 진실조차도 믿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거짓에 휘둘리는 현실. 뉴스의 공신력은 갈수록 떨어진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던 것만 듣다 보니 이를 이용하는 이들도 많아진다. 답답한 속을 뻥 뚫어주는 ‘진실 보도’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는 바로 그 갈증을 정곡으로 찌르는 작품이다. 탐사보도팀 ‘트리거’를 이끄는 오소룡(김혜수) 팀장이 바로 그 시원한 사이다 역할이다. 진실 추적을 위해서는 패러글라이드를 타고 잠입할 정도로 열정적이고, 보도하면 죽인다며 총구를 들이 밀어도 물러서지 않는 패기를 가진 PD. 심지어 사장이라고 해도 진실보도를 가로막으려 하며 맞서 싸운다. 다소 과장되게 그려지긴 했지만, 실제로 이런 인물이나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현실에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과거 MBC <PD수첩>이 이런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도 마찬가지였다. 탐사보도가 가진 뾰족함에 방송사가 곤혹스러워지기도 하고, 그래서 아예 대표를 갈아치워 보도국 사람들을 좌천시키는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했다. 과잉 취재로 몰려 세상의 지탄을 받게 된 오소룡이, 팀에서 좌천되어 아이스링크 관리하게 되는 장면이 그저 웃고 넘길 농담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건 그래서다. 한때 방송장악을 하기 위해 교양 PD들을 아이스링크 관리로 보냈던 MBC 사태가 떠올라서다. 트리거팀이 창고 같은 곳에서 일하는 광경 또한 그 시절에는 실제 현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장면들은 결코 우리네 언론에 있어서는 드라마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오소룡 같은 돈키호테에 대한 갈증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진실을 가리려는 권력자들과 돈키호테 한 명만으로는 대적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트리거>는 여기에 조직과 스스로 선을 그어 왕따를 당하는 한도(정성일)와, 계약직이라 더 절실하게 취재에 임하며 그런 그를 챙겨주는 오소룡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강기호(주종혁)를 팀으로 꾸려 놓는다. 자발적 왕따거나 타의적 왕따이기 때문에 오히려 조직의 논리와는 다른 언론으로서의 소신을 다할 수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방송사가 가진 경영적 선택과 공영적 선택 사이에서 언론이 가진 딜레마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팀원으로서 베테랑 작가 홍나희(장혜진)는 프리랜서 작가라는 점에서 한도나 강기호와 비슷한 위치에 서있다. 

 

하지만 이들이 모두 조직에서 밀려난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은 이들의 인간적 한계이자 약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겠다는 윗선의 청탁 앞에 중요한 인터뷰 내용을 고의로 누락시키는 강기호의 모습은 PD로서는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이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또 탐사보도 베테랑 작가가 드라마 작가가 되기 위해 대본을 쓰는 일은 실제로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닌가. 프리랜서인 작가들은 아마도 이런 선택을 통해 실제 탐사보도에서는 채워지지 않았던 갈망들을 드라마를 통해 풀어냈을게다. <트리거>는 이같은 개개인의 약점들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소신과 자존심이 진실 보도라는 대의를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돈키호테처럼 혼자 돌진하는 오소룡을 붙잡아주는 것도 바로 이 팀이 가진 힘이다. 

 

<트리거>는 극 초반까지만 해도 ‘활극’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오소룡과 트리거팀의 활약을 극적으로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에게 시원한 사이다를 안겨주는 이 캐릭터들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건들은 무거웠지만 이를 풀어가는 과정은 경쾌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드라마는 점점 무거워진다. 활극적인 판타지 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채워넣는다. 트리거팀의 맹활약은 이를 저지하려는 세력에 의해 ‘무리한 취재 방식’이라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활극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이러한 극 구성은 아무래도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실 보도라는 언론의 문제가 그저 가벼운 판타지로만 다룰 수는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일게다. 현실의 갈증이 빚어낸 드라마지만, 드라마는 이를 통해 현실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글:일간스포츠, 사진:디즈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하려고 했던 이야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글 중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마히토가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이라는 시기는 그것이 그냥 발생한 화재라기보다 폭격의 여파라는 걸 상상하게 한다. 마히토는 그 불길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머니는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상황과 화재라는 충격,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은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의 전제가 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결핍이나 충격에 의해 촉발되어 이세계(異世界)로의 통로를 통과하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들이 장롱을 통해 나니아라는 곳으로 떨어지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라는 충격, 장롱이라는 통로, 그리고 이세계의 모험. 이건 판타지의 중요한 구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판타지의 세계들을 보면 그래서 터널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도 무성한 수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 역시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서였다. 터널은 일종의 판타지의 통과의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치를 가져와 이세계로의 모험을 풀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어머니가 화염 속에서 죽는 충격을 겪은 마히토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 말을 하는 왜가리의 인도를 받아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역시 터널을 통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아마도 실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거나 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회복시키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으로 그려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 부모들을 구하려는 치히로의 절박함으로 그려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특이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 충격과 상실에 더해져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가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미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는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감정한 건 아니다. 특히 금세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마히토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예의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분노 또한 감춰져 있다. 

 

전쟁 상황에 전투기 덮개를 제조해 납품하는 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전쟁은 결국 그런 무기들의 개발, 제조와 관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유신을 촉발시킨 쿠로후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을 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새로운 무기 기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고 심지어 동생까지 임신하게 된 데 대해 갖는 마이토의 복잡한 감정은, 그 개인서사를 넘어서 그 이면에 담긴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학교의 첫 등교 때부터 자동차를 끌고 가 시골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는 아무 생각 없는 아버지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기술과 그걸로 갖게 되는 힘을 낙관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지만 마히토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만든 전투기 덮개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칼로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재능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상처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원거리 샷으로 동네 아이들과 마히토가 실랑이를 벌이다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건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된 갈등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동네의 유지지만 무기 제조를 해서 전쟁에 일조한다는 사실이나, 어머니가 죽고 곧바로 새엄마를 들인 사실은 마히토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나서 그 이유를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돌멩이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린다. 

 

마히토가 가진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새로운 기술과 그 혁신을 통해 만들려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는 양가적 감정 그대로다. 그것에 매혹되거나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파괴한 것들(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 감정은 마히토가 이제 사라진 새엄마를 찾아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탑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모험하게 되는 이세계의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마히토가 만나게 된 이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고, 인공과 자연이 뒤엉켜 있으며,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세계를 인도하고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왜가리, 펠리컨, 잉꼬 같은 새들이라는 점도 그렇다. 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오가는 은유적 동물이다. 마히토가 만나는 새들은 그래서 자유의 상징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먹을 것이 없어 저세계의 생명으로 변화할 와라와라까지 잡아먹는 생존에 구속된 존재로도 또 떼로 몰려다니며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와라와라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솟구치게 해 펠리컨을 공격하는 히미 역시 펠리컨만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불타 죽게 되는 것. 불을 만들어내는 무기로도 활용되는 기술은 그렇게 무차별적이다. 심지어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세계로 표현되는 마히토의 감정은 그래서 아버지가 낙관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낸다. 

 

결국 그 세계로 들어간 새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서, 마히토는 그 곳에서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그곳에서, 도형으로 된 블록을 쌓아 균형을 맞추려는 오랜 선조인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탑에 매혹되어 그 탑을 둘러싸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아마도 막부 시절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등장은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하려했던 그 혁신의 끝단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세계로 넘어와 서구의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완벽한 세계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 아래 놓여있다. 그걸 상징하듯 도형모양으로 쌓여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을 후대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펭귄 대왕이 휘두른 단칼에 그 블록이 무너져 내리고 그래서 이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일인가를 드러낸다.

 

결국 판타지는 떠났던 자가 그 환상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히토는 이세계의 대혼돈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새엄마를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마히토가 가졌던 그 복잡한 심경들은 이세계의 모험 과정을 통해 정답은 아니지만 어떤 해답을 찾아낸다.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 모험이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소녀였던 엄마가 결국 훗날 화염 속에서 죽을 걸 알면서도 현실로 돌아가는 그 선택을 통해서다.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파괴하기도 하는 이 혼돈 속에서도 판타지라는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수업자 아버지의 모습이나,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목 등을 통해 이 작품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사적 경험들을 모티브로 해서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오는 일본의 역사적 변화가 만들어낸 현재를 판타지를 통해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건 군국주의 미화보다는 그런 선택이 결국은 실패했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친절한 작품이 아니고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어 있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호불호도 나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사적인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판타지의 세계까지 하나로 품어낸 야심작이 아닐 수 없다. (사진: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낭만닥터 김사부3’, 유연석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바뀐 돌담병원 공기

낭만닥터 김사부3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왜 죽는 줄 알아? 보폭 때문이 아냐. 황새를 쫓겠다고 종종 거리고 달리다가 방향을 잃기 때문이야. 방향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끝이거든. 이 세상에서 사부님처럼 될 수 있는 사람은 사부님 한 사람 뿐이야. 괜히 그 걸음을 쫓겠다고 정신없이 달려가지 마. 다음엔 손이 아니라 다른 걸 잃을 수도 있어.” 

 

SBS 금토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3>에서 돌담병원으로 돌아온 강동주(유연석)는 그에게 반기를 드는 서우진(안효섭)에게 그렇게 일갈한다. 당장 눈앞에 있는 위급한 환자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의사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마저 위험할 수 있는 붕괴 현장에도 뛰어들었다가 손을 다치는 사고를 당했던 서우진이었다. 서우진은 강동주의 그 말에 주춤한다. 

 

떠나간 차진만(이경영) 대신 돌담병원 외상센터를 맡게 된 강동주가 처음 가져온 변화는 ‘원칙’대로 센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간 위급한 환자가 오면 외상센터에서 받지 않아야 될 환자들도 받아서 치료를 하곤 했지만, 강동주는 그런 환자들을 모두 돌담병원 응급실로 보내버렸다. 마침 서우진도 손을 다쳐 재활을 하고 있는 상황, 김사부(한석규)는 쏟아져 들어오는 환자들을 받아내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마침 위급한 환자가 생기자 외상센터의 차은재(이성경)는 강동주가 지키라고 한 룰을 어기고 돌담병원 응급실로 가 수술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순간 강동주가 왜 그토록 원칙을 강조했고 그래서 비외상 환자를 외상전담 전문의가 치료하면 안된다고 했는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인근 터널에서 발생한 3중 추돌사고로 외상센터에 위급한 환자들이 쏟아져 들어온 것. 차은재는 뒤늦게 상황이 잘못된 걸 알게 됐지만 이미 수술에 들어가 외상센터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강동주는 수술을 하는 차은재에게 전화해 그를 질책했고, 그 이야기를 듣다 못한 서우진이 나서자 강동주는 사부님을 쫓기만 하는 일이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는 일이라며 일갈한 것이었다.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1을 이끌었던 강동주가 돌아왔다. 그는 돌담병원에 등장하자마자 순식간에 공기를 바꿔 버렸다. 연애 리얼리티에서 뒤늦게 나타나 관계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메기처럼, 강동주의 존재감은 향후 돌담병원에서 벌어질 새로운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거 아십니까? 사부님은 우리의 정신은 될지언정 우리의 목표가 돼선 안됩니다. 그래선 아무 것도 성공시킬 수 없을 겁니다.’

 

시즌3의 이야기가 이전 시즌보다 더 깊어질 수 있었던 건 ‘가치관의 대결’을 다뤘기 때문이다. 현실닥터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차진만과 낭만닥터 김사부의 대결구도가 드라마의 전반부를 이끌었다면, 이제 후반부는 강동주가 가진 새로운 가치관이 만들어낼 돌담병원의 성장통이 될 거라는 걸 이 에피소드는 보여준다. 

 

강동주는 김사부의 낭만과 차진만이 주창했던 현실을 봉합하려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김사부가 가진 환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하는 그 낭만이 의사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정신인 건 틀림이 없지만, 그것을 외상센터 같은 의료기관을 통해 실현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원칙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김사부의 낭만이란 그의 초능력 같은 실력이 전제됨으로써 현실화가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강동주의 말처럼 모두가 김사부 같은 실력을 가질 수는 없고 또 그처럼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각자 의사들이 김사부 같은 인물을 통해 본분을 잊지 않으면서도 보다 현실적인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게 합리적이다. 강동주는 이런 방식으로 낭만과 현실의 균형을 맞추려 한다. 

 

과연 강동주는 돌담병원 외상센터를 통해 자신의 이러한 가치관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김사부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강동주를 지지할까 아니면 자신의 낭만을 밀고 나갈까. 강동주라는 존재감 확실한 메기의 등장으로 <낭만닥터 김사부3>의 후반부 서사가 다시 쫀쫀해졌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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