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9천억과 행복한 기억의 대결구도가 말해주는 것
“평생을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모은 돈 안 뺏기려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발악을 했지. 그러느라 내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렸어. 그래서 무엇이 남았나. 나는 내가 잘못 살았다는 이 고백을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고 싶구나. 너희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기 바란다. 그리하여 허무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홍만대(김갑수) 회장은 홍해인(김지원)이 남겨 둔 녹음기에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그 유언을 통해 홍만대 회장이 유산으로 남긴 건 재산 같은 돈이 아니다.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고백’이다. 퀸즈가 저택 지하의 비밀 공간에 9천억이나 되는 비자금을 현금으로 쌓아뒀지만 그는 재산이 아닌 삶의 지혜를 유산으로 남겼다. 돈 때문에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 그래서 허무하지 않은 삶을 살라는 것이 그것이다.
홍만대 회장을 묻는 묘소에서 홍해인은 이것이 마치 리허설 같다고 말한다. 그 역시 시한부 인생으로 홍회장의 죽음이 남일 같지 않아서다. 자신 역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 그렇게 관 하나에 들어가 묻히고, 유족들이 울다가 결국 떠나가면 혼자 덩그라니 남게 될 거라는 걸 그는 홍만대 회장의 죽음을 통해 실감한다. 결국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 수천억을 가진 부자든 아니면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자든 죽음 앞에 공평하다. 그러니 새삼 삶에서 진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백현우(김수현)가 찾아내고, 홍해인은 “앞으로”라는 말이 너무나 좋다는 걸 실감한다. 백현우와 앞으로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 속에 홍해인은 진짜 소중한 것이 ‘행복한 기억’을 많이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살다보면 고비가 올지도 모르지만 그 때마다 “달콤했던 기억들을 유리병에서 사탕 꺼내 먹는 것처럼 하나씩 까먹으면서 힘들고 쓴 시간을 견딜” 거라고 말한다. 그러니 좋을 때 행복한 기억들을 잔뜩 모아둬야 한다고. “나 이제 주식이랑 지분 모으는 것보다 행복한 기억들을 모으는데 더 집중해 볼 거야. 나한테는 이제 그 유리병을 채우는 일이 제일 중요해.”
수술을 받으면 살 수 있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기억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 홍해인이 ‘행복한 기억들’을 유리병에 채우겠다고 말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백현우는 머리가 복잡하다. 당연히 홍해인을 살려내고 싶지만 그로 인해 자신과 있었던 모든 기억들을 잃게 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홍해인에게 야구연습장에 자주 왔던 이유에 빗대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말한다. “그냥 복잡할 땐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게 좋더라고. 지금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거 딱 하나만 보는 거지.” 그 중요한 거 딱 하나는 바로 홍해인을 살리는 것이다. “난 그것만 중요해. 난 그것만 볼거야.”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눈물의 여왕’은 ‘행복한 기억’이라는 삶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그려온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본격적으로 꺼내놨다. 홍만대 회장이 죽으며 남긴 유서가 그 뚜껑을 열었다. ‘허무하지 않은 마지막’이라는 화두는 수천억의 돈을 벌고 갖고 있어도 허무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역설이다. 그것보다 더 소중한 건 홍해인이 수술 후 기억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현우가 행복한 기억들을 채워주려는 그 노력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수술을 앞두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홍해인이 죽어도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며 수술을 거부하려는 모습이나, 그러는 홍해인을 붙잡고 “너는 살아. 사는 거야. 제발 살자.”고 말하면서도 기억을 잃을지도 모르는 홍해인을 위해 비디오에 마음을 기록해 담는 모습 모두, 이들이 쌓아온 기억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9천억의 비자금을 찾아내고 훔친 모슬희가 윤은성에게 그것이 자신이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막대한 유산 대신 허무하지 않은 마지막을 맞이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홍만대의 사랑하는 방식과 대비되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윤은성이 백현우의 기억을 가로채려 하는 모습과 기억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행복으로 채워주려 하는 백현우의 모습이 대비된다. 모슬희가 채우려는 9천억 비자금과 김수현이 채워주려는 행복한 기억. 동화처럼 익숙한 대결구도지만 어쩌다 돈이면 뭐든 되는 것처럼 여기게 된 우리네 세태 때문일까. 이 대결이 작지 않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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