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매일 새벽 아픈 어깨를 이끌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내게 묻곤한다. 미력하나마 무언가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하다못해 작은 날갯짓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미세한 떨림이나마 전해져 죽지 않았다는 걸 드러낸다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믿고 보는 고선웅이 각색하고 연출한 연극 ‘퉁소소리’는 바로 그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끝내 버텨낸 이들의 대서사시를 통해 유쾌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려낸 희비극이다.
아마도 현재의 청년들은 수능시험에 지문으로 등장하곤 했던 ‘최척전’을 기억할 게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의 전쟁 통에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는 최척과 옥영 그리고 그 가족들의 대서사시다. 조선에서부터 명나라, 일본, 안남(베트남)까지를 넘나드는 이 소설은 1621년 조위한이 당대 벌어졌던 전쟁의 참상 속에서 민초들이 겪은 고통을 최척과 옥영의 파란만장한 삶과 사랑으로 그린 작품이다. 극작가이자 연출자인 고선웅 서울시극단 단장은 그 최척전을 원작으로 가져와 특유의 유머와 풍자를 섞은 기발한 연극무대로 내놨다.
엄청난 스케일을 가진 원작이 가진 감동은 이 작품이 ‘기우록(奇遇錄)’이라 불리는 것처럼 기막힌 이별과 만남의 과정에서 나온다. 물론 그건 우연적 요소가 짙지만,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운명들이 전하는 연민의 정서와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헤어진 자들은 그렇게 다시 만나고, 만났던 이들은 또다시 헤어지며 끝끝내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만나게 된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즐거운 일이 있다”는 일관된 메시지는 수백 년 전에 나온 이 작품이 현재에도 울림을 주는 이유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과, 그곳에서 죽어가는 무수한 생명들이 있지만 그저 글 한 줄, 뉴스 한 대목으로 치부되는 세태에 이 작품은 거기 소중한 삶들이 있다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이건 딱히 전쟁이 아니라도, 저마다의 치열한 각자도생의 전쟁을 각자의 삶에서 치르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든 생존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살아남아라. 그러면 끝내 즐거운 일 있을 것이니.
‘퉁소소리’가 놀라운 건 이 아시아를 넘나드는 엄청난 스케일의 서사를 작은 무대 하나 위에서 생생하고 또 속도감 있게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고선웅 연출은 자칫 비감으로만 흐를 수 있는 서사에 특유의 유머 감각을 더한 연출로 발랄함을 더했고, 그 발랄함은 어느 순간에는 희극과 비극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사태의 다른 면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묵직한 울림으로 변모한다.
속도감을 만들어낸 건 막과 장의 구분을 만드는 연극의 암전을 지워내고, 무대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보조자들이 극이 진행되는 동안 무대 위 소품들을 옮겨줌으로써 극이 끊어지지 않게 해주는 연출방식 덕분이다. 이것은 고선웅 연출자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연출(완벽함이 가진 인위성을 덜어내고 성기지만 자연스러운)철학이 투영된 것으로, 이 검은 옷의 보조자들이 가진 이미지는 삶 저편의 어떤 힘(운명이나 죽음 같은)을 상징하는 듯한 뉘앙스까지 담긴다. 그래서 후반부에 가면 최척이 그 검은 옷으로 상징되는 자들을 뚫고 나오려 안간힘을 쓰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소름돋는 감동이 생겨나기도 한다.
사실 이처럼 전쟁으로 멀리 떠났던 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담은 조선시대판 오딧세이는 최근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2’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여정 속에서 헤어졌던 부부가 만나고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운명적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엄청난 스펙터클로 막대한 물량의 자본을 통해 연출된 영화 ‘글래디에이터2’가 끝내 보고나면 뻔한 복수극의 허무함으로 남는대신, 그저 소박한 무대 하나지만 그 광대한 서사들을 물 흐르듯이 들려주는 ‘퉁소소리’는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그 이유는 ‘살아있다’는 그 의미에 대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깊이 있는 시선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살아있다는 건 숨쉰다는 뜻이고, 퉁소소리는 바로 그 숨을 불어 넣음으로써 만들어내는 음악이다. 누군가 숨을 불어넣어야 그건 살아있는 게 되는데 그건 또한 예술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척이 그 멀고도 먼 외딴 나라에서 퉁소를 불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드러내고, 그 소리를 듣고 아내 옥영이 기적처럼 나타나는 장면은 그저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의 비의처럼 다가온다. 소리내어라. 그래서 살아있다는 걸 드러내는 일은 기적 같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고 ‘퉁소소리’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퉁소소리’는 또한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또한 던져 놓는다. 그건 삶을 담는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그 무대를 통해 증언하는 것이다. 매일 아픈 어깨를 이끌고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아주 미력하고 소소한 세상 어느 누군가의 작은 소리와 몸짓 하나도 그래서 예술 아닌 게 없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연극'퉁소소리')
없던 카드나 동전이 나타나고,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순식간에 옮겨가며, 비둘기가 튀어나오고 그 비둘기가 둘로 갈라져 두 마리가 되는 마술의 세계. 그 신기함에 시선을 빼앗기던 마술쇼는 한 때 방송가에서도 뜨거웠던 프로그램 트렌드이기도 했다. 마술, 기예 심지어 서커스까지 방송을 통해 보여지며 온 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옛날 일이 됐다. 때때로 데이비드 커퍼필드가 나타나 만리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블록버스터 마술을 보여주거나, 유리겔라가 스푼을 휘는 마술로 전 국민을 놀라게 만들었던 이른바 ‘마술의 시대’는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 때 이은결과 최현우가 나타나 다시 국내 마술을 부흥시켰지만, 그 빛에 가려져 후예들의 이름은 좀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 빛나는 후예들은 없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마치 마술처럼.
SBS ‘더 매직스타’는 대단한 마술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다시 우리 앞에 보여주는 매직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오디션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그러하듯이, 이미 존재하는 실력자들이 이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경쟁이라는 틀을 통해서가 됐다. 하지만 ‘더 매직스타’는 그 경쟁의 무대 위에 현재의 마술이 어째서 다시 재조명되어야 하는가를 증명한다. 그건 그저 눈앞에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나타나게 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위에 얹어진 스토리와 메시지를 비주얼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이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더 매직스타’가 보여주는 무대들이 하나하나가 작품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실제 경험이나 삶에서 모티브가 된 어떤 순간들을 무대로 가져와, 매직 기술을 더한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스토리가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유호진이 어린 날의 꿈을 형상화해 종이접기라는 소재로 가져와 비행기, 배, 바람개비 등을 매직기술로 만들고 날리는 과정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보는 것도 즐겁지만 저마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스토리로 마음을 설레게 만든다. 또 그가 두 번째 무대로 가져왔던 ‘프리덤’이라는 제목의 마술에서 프레임에 갇힌 깃털이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결국 훨훨 날아가는 광경은 1년 내내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는 자신이 갖게 됐다는 갇힌 느낌을 그대로 표현해낸다. 어려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힘들어하다 마술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영민이 보여주는 모래를 활용한 마술은 그 모래라는 오브제 자체가 주는 덧없음이나 쓸쓸함, 슬픔 같은 것들을 뒤집어 어떤 꽃 같은 희망으로 빚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어려서 자폐를 가졌지만 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세계 무대에도 나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킬리언 오코너의 마술은 어떤가. 이건 기술의 차원이 아니다. 이들의 진정성이 들어있는 서사와 그걸 하나의 퍼포먼스로 눈앞에서 형상화해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이 아닐 수 없다.
또 매직바를 운영하며 손님들 앞에서 마술을 선보여 왔다는 임홍진의 ‘컵&샷&볼’은 컵과 볼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걸 반복하는 기술들 위에 그가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기도 했던 그 생업의 과정들 또한 녹여냈다. 마지막에 빨간 볼이 붉은 색 칵테일로 변화하고 그걸 내놓으며 그 술의 이름은 ‘마술’이라고 하는 대목은 깔끔한 엔딩으로 긴 여운을 남긴다. 마술은 누군가에게는 생업이기도 하다는 걸 풀어낸 내용이지만, 그 생업은 그래서 마술이라는 틀을 통과해 예술적인 작품이 된다.
궁극적으로 마술이 좋은 점은 그저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만이 잘 사는 것이라 말해지는 세상에 그 선 바깥의 세상 또한 존재한다는 걸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 바깥은 결국 환상으로도 나아가는 상상의 영역이고, 그 상상은 어쩌면 삶의 현실이 채워주지 못하는 우리의 꿈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상상을 통해 꿈을 꾸게 하는 일. 마술은 그래서 그저 트릭이 아니라 보여지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아닐 수 없다. ‘더 매직스타’는 오디션이라는 형식 속에 마술이 가진 이 놀라운 무대들로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들의 상상력을 부드럽게 풀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세상에 이토록 빛나는 마술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그들이 보여주는 예술적인 마술의 무대로 보여준다는 건 너무나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일간스포츠, 사진:SBS)
“공연하면서 알았어요.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데 왜 위로받는 느낌이 드는지. 이렇게 내가 별거 아닌 말을 해도 한 단어, 한 단어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들어주는 사람이니까.”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연극을 보러와준 차진우(정우성)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친 배우 대신 갑작스레 오르게 된 무대. 정모은은 그 낯설음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 순간 객석에 있는 차진우가 정모은에게 수어로 말한다.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라고. 정모은은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연기를 하게 된다.
이 장면은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그리고 있는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의 특별한 결을 보여준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인 정모은과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인 차진우의 사랑. 그들은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그러니 그 일상적 관계조차 편할 수가 없다. 정모은이 애써 배운 어설픈 수어로 소통하려 해도 엇나가기 일쑤고, 보다 정확한 표현을 전하기 위해 핸드폰에 글자를 찍어가며 소통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소통하는 것이 반드시 말을 통한 표현일 필요는 없다고 이 장면은 말해준다. 정모은의 말처럼, 듣지 못하는 차진우는 그렇기 때문에 더 열심히 정모은이 말할 때 그 입모양을 읽으려 집중한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읽어내려 한다. 말이 너무나 익숙해 아무렇게나 내뱉고 아무렇게나 지나치곤 하는 우리에게 차진우의 ‘애쓰는 집중’은 그 마음을 읽게 만든다. 한 단어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사랑한다 말해줘>가 정모은이라는 인물을 굳이 스튜어디스 일을 포기하고 대신 연기의 꿈을 시작하려는 배우로 세운 것도 그런 의미가 있다. 그는 배우라고는 하지만 단역, 엑스트라로 불린다. 그래서 배역의 이름도 없고 심지어 대사도 거의 없다. 그러니 그 세계에서는 마치 차진우처럼 침묵 속에 있는 사람 같다. 대사가 없어도 배역의 이름도 없어도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해내려는 마음이 있고, 그렇게 꿈을 향해 가는 진심이 있지만 그걸 알아주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듣지 못하는 침묵의 세상에 사는 차진우는 정모은의 연기를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그 마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래서 말이 아니다. 누군가의 몸이 하는 말을 애써 들어준다. 제주도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보다가 끝내 생을 마감한 어느 사내가 온 몸으로 전하는 말을 들을 줄 알고, 몸이 아파 친구와 함께 학교 가는 게 소원이었지만 끝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아이가 생전에 전한 말을 들을 줄 안다.
그는 부재한 것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침묵한다고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지 못한다고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또 사라졌다고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이제는 부재한 그들을, 그들이 평소 마음이 머물던 그 곳에 벽화로 되살려 놓는다. 그 마음들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걸 새겨 넣는다. 한 단어 한 단어 애써 들으려하듯, 붓 한 획 한 획에 애를 쓰며.
하지만 세속적인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함부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차별한다. 오랜만에 스튜어디스 제복을 입고 공항에서 그 역할을 연기하는 정모은을 본 옛 회사 동료 스튜어디스는 단역에 대사 하나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실망한다. 그 모습 이면에 존재하는 정모은의 연기에 대한 꿈이나 노력 같은 걸 보지 못한다.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고 들을 수 있지만 듣지 못하는 세상이다.
반면 진정한 예술의 세계는 이런 속물적 관점을 벗어나 보지 못해도 볼 수 있고 듣지 못해도 들을 수 있다.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과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만나 그 불편할 수 있는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건 그래서 이들이 세속적인 세상 바깥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굳이 드라마가 정모은을 연기의 세계에 꿈을 가진 인물로 세우고, 차진우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세운 이유다.
예술은 속물적 세상에 무뎌진 우리의 감각들을 다시금 깨워주는 힘이 있다. 그래서 정모은과 차진우가 하는 사랑과 소통의 과정은 바로 그 예술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하는 과정을 통해, 속물적 세상에 무뎌졌던 우리의 눈과 귀를 다시 열어주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놓여진 마음들을 읽게 해준다. 사랑스런 것들 앞에서조차 그걸 보지 못하고 사랑한다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과 귀를 열어준다. (사진:지니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