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가 그리는 지옥 속의 행복 찾기

“은행부행장이었다가 지금은 모텔에 수건 대고 계시고, 자동차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지금은 미꾸라지 수입하고 계시고, 제약회사 이사였다가 지금은 백수, 알지 형이랑 나는 청소. 야 좋겄다. 너는. 여기 네가 좋아하는 망가진 인간들이라.”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망가진 게 좋다”며 쫓아다니는 최유라(나라)에게 박기훈(송새벽)은 그렇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고 보면 정희네라는 선술집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아저씨들이 몰려오는 그 집에서는 ‘망가짐’의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한 때는 잘 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한참을 망가져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그들. 술 마시는 걸로 전쟁을 하면 무적일 거라며 호기롭게 웃으며 술을 마시지만 그게 어딘가 짠하게 다가오는 그들이다. 

그러니 “망가진 게 좋다”는 말이 박기훈에게는 마치 ‘나보다 못한 인간이 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좋다는 뜻으로 다가왔을 게다. 하지만 유라는 정색하며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은 거기 있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하며 살아요. 전 그랬던 거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게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구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망가져서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으로 행복을 찾는 것. 이 ‘행복론’은 어쩌면 <나의 아저씨>가 그리려는 세계일 것이다. 드라마는 좀체 밝은 희망이나 행복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건 아저씨들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선술집에서 장사하고 그 곳에서 사는 정희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 돌아갈 집이 없이 괜스레 아저씨들과 선술집을 나선다. 집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퇴근 기분을 내지만 그는 결국 빙 돌아서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온다. 돌아가려 해도 다시 일터로 돌아오는 삶이 그가 겪는 현실이다.

박동훈(이선균)은 아내가 자신의 후배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건 후배에게 아내와 조용히 헤어지라고 엄포를 놓는 일이다. 박동훈, 박기훈, 박상훈(박호산)의 엄마 변요순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겪는 일들을 보며 가슴 아파한다. 살기 위해 청소일을 하는 것도 그런데 건물주에게 아들이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본 이 엄마는 애써 활짝 웃으며 아들을 맞는다. 그 눈에는 아프게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눈물이 숨겨져 있다.

이지안(아이유)은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낮에는 회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남들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봉양해야 하는 할머니 봉애(손숙)는 돈이 없어 요양원에서 쫓겨나 하루 종일 그 어두운 방안에서 누워 자그마한 창으로 들어올 달을 보고 싶은 게 소망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망가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망가져 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은 살아간다. 정희네 같은 술집에서 술 한 잔에 아픔을 털어내면서 오히려 웃는다. 박동훈이 말하듯 그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진 않는다. 벌도 받다 보면 왜 받는지 알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문득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묻는다. 자신을 왜 뽑았냐고. 박동훈은 이력서 특기란에 써놓은 ‘달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슨 특기가 ‘달리기’냐고. 그러자 이지안이 말한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박동훈과 아저씨들이 망가져가고 있는 사이, 이 청춘은 투명인간처럼 되어버렸다.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건배를 제안하며 “행복하자”고 한 마디 던지는 게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그리고 그건 이 드라마가 그려나가는 세계다. 지옥 속의 행복 찾기.(사진:tvN)

<낭만닥터>, 리더십 부재인 현재의 결핍을 건드리다

 

우리에겐 제대로 된 리더가 있는가. 사실 이 질문은 지금 현재 우리네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열망일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5% 밑으로 떨어져 연일 역대 최저를 기록하고 있고 그럼에도 총리라는 사람은 국민을 대변하기보다는 대통령의 심기만 헤아리려 한다. 100만 촛불을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폄하하는 시대착오적 정치인이 있는가 하면 여러분이 시위 나갈 때 참가하지 않은 4900만 명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기업인도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사진출처:SBS)'

이런 시기가 만들어낸 거대한 결핍 때문이었을까. SBS <낭만닥터 김사부>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김사부(한석규)라는 인물이 리더십 부재인 현재의 결핍을 툭툭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결속력이 기득권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군림하는 그 곳에서 밀려난 인물이 김사부다. 하지만 그는 돌담병원이라는 버려지다시피 한 자그마한 시골병원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잠룡이다. 거대병원 이사장이 자신의 수술을 해달라고 김사부에게 요청하자 그는 그동안 속에만 두었던 큰 그림을 꺼내놓는다.

 

9.5%(닐슨 코리아)로 첫 회가 나갔을 때만 해도 조금은 불안했다. 요즘처럼 사회적 이슈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에 첫 회에 시선을 잡아끌지 못하면 불안했던 탓인지 이 드라마는 그 첫 회에 너무 많은 것들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그 빠른 전개 뒤에 김사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2회부터 드라마는 안정을 찾아가며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회에 10.8%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 <낭만닥터 김사부>는 매회 시청률을 경신하더니 6회에 무려 18.9%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 흐름은 무엇을 말해줄까. 첫 회만 해도 의학드라마에 멜로가 섞여 있는 그저 그런 드라마가 아닐까 생각됐지만, 차츰 이 드라마가 대결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부조리한 시스템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김사부라는, 어찌 보면 지금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인물이 가진 힘은 절대적이다. 그가 중심에 서 있는 돌담병원과 어쩌다 그 병원에 합류하게 된 윤서정(서현진), 강동주(유연석)는 하나의 팀이 되어 새로운 병원을 만들어가려 한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병원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병원.

 

김사부의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그와 맞서는 도윤완 거대병원 원장은 환자의 생명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다. 대신 병원이 취할 이득과 자신의 권력만을 추구하는 인물. 그리고 이런 대결구도는 김사부의 밑으로 들어온 강동주와 도윤완 원장의 아들인 도인범(양세종)의 대결로 이어진다. 어쩌다 거대병원에서 돌담병원으로 파견 오게 된 도인범과 그 일행들은 그래서 김사부를 위시한 돌담병원 사람들과의 일전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들이 집중하는 건 김사부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병원을 나라로, 의사를 공직자들로, 그리고 환자를 국민으로 치환해 놓고 보면 <낭만닥터 김사부>가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시국의 어떤 지점을 건드리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게 나라냐고 물을 정도로 드러난 실체에 쏟아진 실망감은 그래서 이 돌담병원이라는 소외되어 퇴락해버린 작은 병원이 김사부라는 새로운 리더십을 만나 어떻게 큰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에 작은 위안을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질문한다. 우리에겐 과연 김사부 같은 리더가 있는가

<공항 가는 길> 김하늘에 대한 깊은 공감이 말해주는 것

 

어쩌다 그녀는 모든 걸 잃어버렸을까. KBS <공항 가는 길>의 최수아(김하늘)에게 남편 박진석(신성록)당신이 생각하는 방식, 움직이는 소리도 싫다.”는 막말을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침착하다.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싫다는 소리 직접 듣는데 진상 손님 같아. 아무 느낌이 없어.”라고 말한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늘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는 남편의 존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공항가는 길(사진출처:KBS)'

그녀는 박진석이 자신의 절친인 송미진(최여진)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그러데 그 절망은 남편에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남편보다 더 오래 알아왔던 송미진이 자신에게 그녀와 남편 사이의 오랜 관계에 대해 숨겨왔다는 것에 대한 절망이다. 송미진은 박진석이란 인간이 자신과 동거하면서도 최수아를 만나는 나쁜 인간이라는 걸 숨겼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최수아와 송미진의 그 끈끈했던 우정은 금이 가 버린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 그녀에게 필요한 건 모든 걸 잊고 빠져들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 때문에 딸 효은(김환희)이 방치되는 걸 새삼 깨닫고 왜 이렇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회의를 느껴 회사에 사표를 낸다. 그러니 이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 그녀에게 기댈 곳은 자신을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서도우(이상윤)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것 때문에 그에게도 이별통보를 한다. 망쳐진 모든 관계들이 마치 자신이 부적절한 관계를 시작한 것 때문인 것처럼 여겨져서다.

 

<공항 가는 길>은 애초부터 최수아의 비극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남편은 그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없었고 젊은 여자들이나 힐끔거리며 심지어 그녀를 멀리 보내려고만 했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녀의 절친이었던 송미진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딸 효은을 제대로 챙겨주는 사람도 없으면서, 일하면 일한다고 구박하고 일 그만두면 그만뒀다고 뭐라 하는 시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서도우라는 인물은 위안이자 위로일 수밖에.

 

결국 불륜이라는 틀을 가져오긴 했지만, <공항 가는 길>이 전하고 있는 건 결코 살기가 녹록치 않은 중년의 삶에 어떤 작은 위로와 위안이다. 최수아의 표현대로 하루하루를 미친 년처럼 뛰어다니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버텨내는 삶에 던지는 작은 위로. 그것은 그녀를 누군가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때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떤 것일 수도 있고, 피곤한 삶에서 잠시 비껴나 낯선 고택의 아무 것도 없는 방안에서 취하는 잠깐 동안의 낮잠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 가는 길에서 느끼는 그 감정들. 도시의 피곤과 그 속에서 관계들이 만들어냈던 수많은 상처들, 게다가 부지불식간에 영혼을 잠식해가는 일상의 권태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들 같은 것들로부터 잠시 동안이지만 떠날 때 느끼는 그 위안. 물론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그래도 그런 작은 위안들이 있어 버틸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닌가.

 

최수아에게 공항 가는 길은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가 중첩된다. 승무원일 때는 그것이 일터로 가는 길이지만, 거기서 서도우를 만나 새벽 내내 이야기를 나눌 때는 힘겨운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일탈의 길이 된다. 그리고 남편도 친구도 잃은 채 딸 효은과 제주도로 가는 길은 아마도 이 도저히 버티기 힘든 고통에서 벗어나 그만큼의 거리를 가지려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공항 가는 길>이 단순한 불륜 소재가 아니라 어떤 위로와 위안을 주는 드라마라 여겨지는 건 바로 이 최수아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대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그저 하루하루의 일상을 버텨내며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그래서 최수아의 절망적 상황에 던져진 작은 위로에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게다. 그것마저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공항 가는 길>, 공간이 주는 위안과 기억들

 

비행이 있어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최수아(김하늘)는 서도우(이상윤)가 보낸 메시지를 받는다.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것. 그런데 그 때 딸 효은(김환희)에게서 전화가 온다. 텅 빈 집에 아이가 혼자 서 있다. 기장인 아빠는 시드니에 있고, 승무원인 엄마는 이제 비행을 하기 위해 공항으로 간다. 그런데 문득 최수아는 그 텅 빈 집에 홀로 있을 아이의 잔상이 마음에 못내 가시처럼 박힌다.

 

'공항가는길(사진출처:KBS)'

버스에서 내린 최수아는 갑자기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현주언니한테 효은이 데리고 병원 가서 진단서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걸 깜박 했다. 하 김밥. 속은 만들었는데 효은이 한테 말도 못했고. 아 밥을 안했다. 아 김도 없지. 아 내가 뭘 해놓고 나온 거지?’ 그녀는 갑자기 모든 일들이 낯설어진다. 그러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이불 빨래를 햇볕에 너는 아줌마를 보고는 어느 날 불쑥 사표를 내버린 선배 현주(하재숙)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무 평온해 보이는 거야. 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았구나. 그때서야 하늘도 보이고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왜 이렇게 하루하루 미친년처럼 사나...”

 

KBS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의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는 정서의 많은 것들을 담아낸다. 최수아에게 공항 가는 길은 이중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우리가 공항을 갈 때 느끼곤 했을 어떤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설렘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집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부채감 같은 것이기도 하다. 챙겨줘야 할 아이가 있는 집. 그 곳은 벗어나고픈 곳이기도 하지만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최수아의 일상은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되어 있다. 그 발단은 딸 효은이를 해외 유학시키려 보냈다가 그 룸메이트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다시 귀국하게 되면서부터. 부부 둘 다 일을 하는 통에 딸 봐줄 사람을 구해야 하는 입장이 되고, 시어머니에게 부탁하지만 도리어 다치게 됨으로써 그녀 역시 최수아가 챙겨야 하는 입장이 된다. 게다가 효은이의 룸메이트였던 애니가 하나의 인연이 되어 그 아빠인 서도우(이상윤)와도 선을 넘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그 복잡한 일상들로부터 최수아는 도망치고 싶다. <공항 가는 길>이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이 공항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출구로서의 공간을 통해 최수아의 감정과 갈등을 담아낸다. 서도우와의 첫 만남과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게 되는 공간이 공항이라는 건 이 드라마가 얼마나 공간이 주는 상징과 느낌, 감정들을 이야기의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한강을 바라보며 전화 통화를 할 때의 그 느낌이나, 햇살 좋은 어느 날 고택의 툇마루에 앉아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때의 그 좋은 느낌, 골목길을 걸을 때 그 좁은 공간이 주는 아늑함, 허허벌판에 불어오는 조용한 바람과 하늘을 가르는 전깃줄들 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새들... ‘조종실에서 본 밤하늘, 알래스카의 연어 맛, 시드니의 맥주 한잔, 두바이 사막의 해질녘, 그리고 지금 여기 이층에서의 여명같은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공간에 서 있을 때 느껴지는 자유로움과 따뜻함과 설렘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이 드라마에는 배경이 아닌 주요 이야기로 다뤄진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애니가 왜 아빠도 없는 그 낯선 곳의 작업실로 때만 되면 갔을까 하는 점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미스테리면서 동시에 주제의식이 될 것이다. 공간은 결국 누군가에 대한 기억이고 그리움이 아닌가. 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남아서 그 곳의 만남과 헤어짐과 아픔과 그리움을 담아내기 마련이다. 좋은 기억을 담은 공간은 자꾸만 발길을 잡아끌게 하기도 하지만, 힘겨운 기억들이나 복잡한 일상들은 그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게 한다.

 

<공항 가는 길>이 놀라운 건 바로 이 공간이 주는 일탈과 위로의 미학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벗어나려 하면서도 이끌리는 공간. 결혼이나 집, , 일상 등은 우리를 응집시켜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그 곳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게도 만든다. 그 사이에서 최수아라는 인물이 갈등하고 화해하는 모습은 그래서 우리에게 깊은 공감과 작지않은 위안을 준다. 복잡한 현실이 주는 힘겨움과 그 곳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의 위로.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그런 잠시간의 위로가 힘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 잊지 말아요. 두고두고 힘이 될 거예요.”라고 서도우가 말하듯.

<슈스케>의 부활, 관건은 역시 출연자

 

아마도 잠시 채널을 돌리다 어 슈퍼스타K?” 했던 분들이 많았을 게다. 그만큼 이번 <슈퍼스타K 2016>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대대적인 홍보를 하지 않았다. 언제 시작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슬그머니 시작하게 된 건 지금의 <슈퍼스타K>가 처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확실히 오랜 시즌을 거듭한 것도 있지만 이제는 오디션 트렌드가 한 물 지나간 요즘, <슈퍼스타K>는 이제 뜨거운 아이템은 아니다.

 

'슈퍼스타K2016(사진출처:Mnet)'

그런데 그렇게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걸린 <슈퍼스타K 2016>에서 지리산에서 왔어요라며 자신을 소개한 한 소년이 시선을 잡아끈다. 시즌3 때부터 출전했지만 2차 예선에서 떨어졌다는 김영근이라는 소년. 영 노래 잘 할 것 같지 않은 모습인데다 시골스러움이 묻어나는 어눌함이 오히려 시선을 끄는 건 오디션이 반복되면서 이른바 오디션 준비생들이 그토록 많아졌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이 소년 준비한 곡이 예사롭지 않다. 샘 스미스의 ‘Lay me down’. 무반주로 웅얼대는 듯한 시작 부분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지만 고음으로 치고 올라가는 부분에서 알 수 없는 소름이 돋는다. 분명 소울이 가득한 목소리의 울림이지만 그 소울은 길이 말한 것처럼 듣도 보도 못한영근이만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 소년이라는 자막이 그 목소리와 너무나 딱 어울린다. 아직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

 

그러려니 했던 심사위원들의 눈이 번쩍 떠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샘 스미스의 팝송이 주는 어떤 느낌 때문이 아닐까 의심스런 심사위원은 우리 노래를 한 곡 더 청해 듣기로 한다. 시청자가 원하는 바다. 그런데 웬 걸? 영근이가 부르는 윤종신의 탈진은 그 소울에 가사가 주는 맥락까지 얹어져 더 마음을 쥐고 흔든다. 잠깐 채널을 돌리다 만나게 된 <슈퍼스타K 2016>.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된 건 영근이 같은 출연자 덕분이다.

 

<슈퍼스타K 2016>은 심사위원도 방식도 많이 바꾸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출연자가 노래할 때 오른쪽 하단에 시한폭탄이 돌아가듯 시간이 뚝뚝 떨어진다는 점이다. 노래를 들으며 심사위원이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간이 더해져 노래를 더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못하면 반주가 끊기고 자동 탈락된다. 아마도 훨씬 더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일 게다.

 

심사위원들도 인원이나 구성이 바뀌었다. 용감한 형제는 예전 <위대한 탄생>에서 했던 심사에 있어서도 어떤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심사위원으로 이번에 역시 새로 참여한 FNC 엔터테인먼트 한성호 대표와 때때로 각을 세운다. “똘끼가 장난이 아니다”, “미쳤다같은 거침없는 발언으로 <슈퍼스타K><쇼미더머니>처럼 만드는 인물이다.

 

마치 보스처럼 앉아 참가자들을 동생 대하듯 얘기하는 길은, 리액션에 있어서 거침없고 솔직한 에일리와 마치 삼촌-조카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김범수나 김연우는 보컬에 집중한다. 거미는 노래와 노래 부르는 사람의 소울에 깊게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근이가 노래할 때 그녀는 그 친구에게 노래가 어떤 위안을 줬을 지까지를 미루어 짐작한다. 울컥해지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런 심사위원 구성과 오디션 방식의 변화들이 제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역시 <슈퍼스타K>를 주목시키는 건 출연자다. 지리산 소울을 단박에 보여준 영근이나, 4차원의 가벼움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노래를 할 때는 놀라운 연주 실력과 그루브를 보여준 18세 소년 김예성, 버클리 음대 출신으로 시원시원한 가창력으로 귀와 눈을 번쩍 열리게 만든 이지은 같은 보물들이 <슈퍼스타K 2016>을 새삼 기대하게 만들었다. 역시 <슈퍼스타K>의 부활의 관건은 보물 같은 출연자들에 달렸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 무대였다

<닥터스>, 박신혜와 이성경의 변화가 의미하는 것

 

이제 SBS 월화드라마 <닥터스>는 종영을 앞두고 있다. 20%를 넘긴 최고시청률. 최근 지상파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그 능선을 <닥터스>는 어떻게 넘었던 걸까. 흔한 의학드라마처럼 보였지만, 또 달달한 멜로드라마처럼 보였지만 <닥터스>는 여타의 의학드라마와도 또 멜로드라마와도 다른 결을 보여줬다. 그건 관계를 통한 인물의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닥터스(사진출처:SBS)'

<닥터스>의 여자주인공인 유혜정(박신혜)과 그녀와 대립적 위치에 서 있던 진서우(이성경)의 변화와 성장은 이 드라마의 색다른 주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 때문에 불량하게 살아가던 유혜정은 할머니인 강말순(김영애)과 선생님 홍지홍(김래원)을 만나 좋은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좋은 영향에는 친구였던 진서우 또한 일조한 면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선생님 홍지홍과 유혜정이 가까워진 것을 본 진서우는 그 질시가 그녀를 엇나가게 만든다.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유혜정의 비극(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현실과 마주하게 된)은 그녀가 의사가 되게 한 원동력이 된다. 드라마는 좋은 영향뿐만 아니라 나쁜 영향도 어떤 면에서는 그 사람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게 의사가 된 유혜정은 진서우의 아버지인 진명훈(엄효섭)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되면서 본인도 고통스러워진다. 그런 그녀를 다시 되돌리는 건 다름 아닌 홍지홍의 사랑이다. 홍지홍은 복수가 그녀 자신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끝내는 건 진서우의 변화다. 늘 대립하는 위치에 서 있으면서도 친구로서의 관계 또한 유지해온 진서우는 유혜정을 통해 아버지의 잘못을 알게 되고 결국 그녀에게 사죄한다. 진서우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유혜정 역시 변화하고 성장하게 됐다는 것.

 

사실 이런 화해적인 결말이 조금은 미진함을 남길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봐왔던 많은 드라마들 속에서 악역의 최후나 몰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닥터스>가 본래 드라마를 통해 하려던 이야기는 복수극이 아니다. 그건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영향을 받고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그걸 뉘우치면서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적 갈등이 드라마의 관건이라고 얘기되는 현실에서 이 같은 화해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닥터스>는 극으로 치닫는 이야기보다는 그래도 희망적인 화해를 담는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래서 <닥터스>가 얻어낸 것은 특유의 따뜻함이다. 아마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쳤던 건 바로 그 위로와 위안의 느낌이 충분했던 따뜻함이 아닐까.

 

무엇보다 연기자로서 한 단계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 박신혜와 어깨에 힘을 뺌으로써 훨씬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김래원의 공이 크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 윤균상과 이성경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의학드라마지만 의술 그 자체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의 치유를 보여주었고, 멜로드라마지만 남녀 간의 사랑만큼 인간과 인간의 휴머니즘을 보여준 하명희 작가의 따뜻한 대본의 힘은 힘겨운 현실을 마주한 서민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김우빈, 수지라 가능한 <함부로 애틋하게>의 옛 감성

 

시한부 선고를 받은 까칠한 톱스타 남주인공,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는 가난한 여주인공, 남주인공의 출생의 비밀, 부모와 얽혀 원수지간이 된 남녀, 일주일간의 계약연애 등등. KBS <함부로 애틋하게>에는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봐왔던 너무 익숙한 설정들과 클리셰들이 가득 하다. 익숙한 설정과 클리셰는 그만큼 극적 상황들을 손쉽게 만들어낸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투성 때문에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함부로 애틋하게(사진출처:KBS)'

이러한 익숙한 극적 상황과 상투성은 향후 드라마가 어떻게 굴러갈 것인가를 쉽게 예측하게 만들기도 한다. 까칠한 톱스타인 신준영(김우빈)과 가난한 여주인공인 노을(수지)은 악연으로 얽혀있지만 함께 다큐 작업을 하면서 가까워질 테고, 그렇게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두을 갈라놓는 상황들(이미 들어가 있는 시한부나 부모 간의 악연, 나아가 빈부 격차까지)로 인해 안타까워질 것이다. 만일 시한부 선고가 실제로 벌어진다면 드라마의 비극적 엔딩은 이미 결정 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함부로 애틋하게>가 보여주는 이런 익숙한 전개들은 그래서 이 드라마에는 그리 유리하게 작용하지 못한다. 지금의 시청자들에게 이런 면들은 기대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게다가 드라마의 판타지를 통해 짧아도 어떤 위로와 위안을 그 때 그 때 받기를 원하는 시청자들에게 비극의 비장함은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하지만 <함부로 애틋하게>라는 제목이 담고 있듯이,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건 함부로라도 애틋함을 그려내는 일이다. 그래서 드라마는 시간을 되돌려 현재의 상황보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오래도록 보여준다. 고교시절로 돌아가 노을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는 과거를 들춰보고, 20대 시절로 돌아가 신준영이 자신의 친부가 노을의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증거물을 빼앗으려다 노을이 사고를 당하는 끔찍한 순간을 돌아본다.

 

드라마가 애틋함을 만들어내는 건 그 사람의 아픈 삶을 하나하나 새삼 들춰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길거리에서 지나쳤다면 몰랐을 사연들을 알게 되고 다시 돌아보게 되며 나아가 걱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애틋함의 실체다. 요즘처럼 쿨한 세태에게 그래서 애틋함이란 감정은 다소 옛날 느낌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함부로 애틋하게>에 대한 호불호가 나뉘는 지점은 그 애틋함을 절절한 휴머니티로 느끼는가 아니면 올드한 감성으로 느끼는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건 이러한 옛 감성을 지금의 시청자들에게 설득하는 일이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과거로 회귀해 당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지금의 시청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건 그 옛 감성이 주는 따뜻함같은 것들이 어떤 위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함부로 애틋하게>는 그러나 그 옛 감성이 따뜻함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익숙한 비극 속에서의 애절함이나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트렌디한 부분은 김우빈과 수지다. 이야기는 옛 감성으로 가득 차 있고 설정도 익숙하지만, 그걸 연기해내는 인물들이 다름 아닌 김우빈과 수지라는 현 세대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물이라는 것. 그래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까칠한 스타 역할이 조금은 새롭게 보이고, 얼굴에 잔뜩 낙서를 해놓고는 그걸 보고 웃다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트렌디함은 과연 <함부로 애틋하게>의 옛 감성을 살려낼 수 있을까. 지금의 시청자들은 과연 김우빈과 수지를 통해 함부로 애틋해지는 감정에 빠져들 수 있을까

<응답하라1988>의 중심 축 라미란의 존재감

 

<응답하라1988>에서 라미란은 굉장한 부자는 아니다. 어쩌면 천재 바둑기사 택이(박보검)네 집이 더 대단한 부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처럼 보이는 인물이 바로 라미란이다. 그는 쌍문동 골목집에서 이웃들에게 뭔가를 항상 퍼주는 인물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물론 그것은 돈이 드는 일이지만 라미란이 퍼주는 것은 돈만은 아니다. 그녀는 베풀어도 그것이 돈을 썼다는 느낌보다는 정을 나누었다는 느낌을 더 준다. 부유층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어설프고 그래서 오히려 서민적인 구석이 엿보인다.

 

드라마 초반에 스파게티를 먹자고 라미란이 이웃들을 모아 놓고 나눠주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마치 비빔국수를 비벼먹듯 손으로 쓱쓱 스파게티를 비벼 엄청난 양을 나눠주는 모습이라니. 또 최근 방영분량에서 그녀가 함박스테이크를 이웃들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이일화가 거의 양푼에 스프를 내놓고 라미란은 함박스테이크에 총각김치를 얹어 내놓는다. 부유해보이지만 이런 일들이 라미란에게는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그건 사실 당대에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진짜 부유층들이야 이태리식 스파게티를 먹고 정식으로된 함박스테이크를 먹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서민들은 그렇게 나름대로 양식을 흉내 내곤 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건 어설픔보다는 훈훈한 사람 냄새다. 라미란은 대단히 부유하진 않아도 그 훈훈함을 음식 하나에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복권 당첨으로 졸부가 됐지만 라미란은 이웃들 이야기처럼 찢어지게 가난을 경험했던 인물이다. 금융권에 종사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녀는 일수꾼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해 영어 한 줄 읽을 줄 모르는 그녀가 아들 정환(류준열)에게 사실은 영어를 못 읽는다고 말하고 어색하게 웃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순박함이 묻어난다.

 

<응답하라1988>은 쌍문동 골목집들 자체가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지금의 대중들에게 로망을 준다. 너무나 훈훈하고 따뜻한 이웃들이 함께 하고 있는 그 골목이 하나의 판타지를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살아가는 이들은 결코 부유하지만은 않다. 덕선(혜리)의 집은 보증을 잘못 서 늘 가난에 허덕이고, 선우(고경표)네 집은 홀로 남은 엄마가 목욕탕 청소 알바를 해가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도 이 골목에 사는 그들은 이상하게도 걱정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것은 이들을 마치 가족처럼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고민해주는 이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라미란이 있다. 뭐든 이웃에게 퍼주는 그녀이기 때문에 한 겨울 그녀가 연탄을 가득 채워놓으면 왠지 그것이 필요할 때는 이웃에게 갈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의 서민적인 부유함은 그래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강력한 판타지가 된다. 우선 나와 내 가족이 살고 봐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현실에 놓여진 우리들에게 <응답하라1988>이 주는 위로와 위안은 그래서 더 깊고 크다.

 

<응답하라1997><응답하라1994>에서 그 중심축은 성동일과 이일화가 잡아주었다. 이 부부가 좌충우돌하는 청춘들을 떡하니 보듬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가족적인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응답하라1988>에서 그 역할을 맡은 건 라미란이다. 쌍문동 골목은 그녀가 떡하니 앉아 이웃들까지 가족처럼 대하고 나누는 그 모습에 의해 훈훈해진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부유한 그녀야말로 서민들의 진정한 판타지다.



<유혹>과 <운명>이 제시하는 10억의 사회학

 

요즘 드라마가 제시하는 액수는 1억도 아니고 100억도 아닌 10억이다. 10억이라는 돈이 제시될 때는 그만한 조건이 따라붙기 마련. MBC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이건(장혁)이 김미영(장나라)에게 10억을 주는 조건은 이혼합의서다. 아이를 낳으면 자동적으로 이혼이 되는 합의서. 10개월 동안 위자료로 10. 한 달에 1억씩 받는 셈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사진출처:MBC)'

SBS <유혹>에서 세영(최지우)이 석훈(권상우)에게 10억을 제시하면서 붙이는 조건은 3일 간의 시간을 자신에게 팔라는 것이다. 육체적 관계를 상상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세영이 석훈 부부를 일종의 시험에 들게 한 대가로 보인다. 완벽하다는 그 신뢰가 얼마나 돈 앞에서 무력한가를 실감하게 하려는 것. 하지 않겠다던 석훈도 계약금으로 1억이 즉시 입금되자 눈빛이 흔들리고 결국은 먼저 아내를 귀국하게 만든다. 그리고 3일 동안 나머지 9억을 받는다.

 

두 드라마는 서로 다른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것은 또한 비슷한 정황이기도 하다. 10억이면 사람을 사고 팔 수도 있다는 것. 돈 가진 자들의 사고방식이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져 있다. <유혹>의 세영은 돈 앞에 완전한 사랑 따위는 없다는 것을 석훈의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으로 증명하려 하고 이것은 그대로 실제가 된다. 불편한 일이지만 ‘3일에 10은 하루하루를 빚쟁이에 끌려 다니며 사는 삶에게는 유혹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혼합의서를 내밀며 10억을 제안하는 이건의 제안에도 그대로 들어가 있다. 본뜻은 그게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돈 10억에 아이도 산다는 얘기다. 물론 <유혹><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상황은 다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모성애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10억은 유혹적이지만 그렇게 강력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거부하고 진심을 드러내는 김미영 앞에 그런 제안을 한 이건이 머쓱해지는 상황이다.

 

<유혹><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장르가 다르지만 그 주제의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혹>이 일종의 치정극을 보여주면서 드러내려는 건 10억으로 표징되는 자본 앞에 얼마나 우리가 무력해지는가 하는 그 불편한 진실이다. 반면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여전히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현실에서 그래도 사람의 가치를 지키고 살아가려는 김미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오히려 이건의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이야기다. 전자가 현실적이라면 후자는 판타지적이다.

 

장르적 차이 때문에 선택과 양상은 다르지만 드라마가 드러내는 현실은 같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씁쓸한 세태가 그 바탕에는 깔려 있다.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세월호 참사 같은 비극이 벌어져 실종자들을 찾지도 못한 와중에도 보상금을 얼마 받을까를 보도하는 세상이다. 사람의 가치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 몇 푼으로 환산되게 되었을까.

 

실로 돈이면 안되는 게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가 제시하는 10억 속에는 그 개탄할 세상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유혹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하필 10억일까. 몇 년 전에는 아예 <10>이라는 우승상금을 두고 벌어지는 서바이벌 소재의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출판가에 가보면 ‘10억 모으기비법을 알려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자리해 있다. 그것은 10억이라는 액수가 이제 서민들이 인생역전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액수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유혹적이지만 어찌 보면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놓여진 그런 액수.

 

한때는 연봉 1억이 성공한 직장인의 기준처럼 제시되곤 했지만 요즘처럼 물가와 세금이 갈수록 많아지고 벌이는 시원찮은 시대에 이들 또한 그저 샐러리맨의 하나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니 이제 누군가 갑자기 제시하는 10억 정도는 되어야 마음이 움직이게 된 것. 사실 자신의 몸값을 연봉으로 환산하는 그 때부터 이미 우리는 돈에 포획된 삶을 살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유혹>의 석훈의 선택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김미영의 선택에 그나마 위안을 받는 것은. 10억 앞에 무릎 꿇는 현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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