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도 그랬는데 왜 '브이아이피'만 문제 삼느냐고?

영화 <브이아이피>는 북한에서 내려온 고위급 자제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져왔다. 누아르 장르를 표방하는 만큼 피가 튀는 총격전이나 칼부림은 심지어 미학적 액션으로까지 담아진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이었던 <신세계>가 그러하듯이 이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는 누아르를 통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미국, 북한의 외교적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사진출처:영화 <브이아이피>

연쇄살인범을 잡았지만 북한의 고위 정보를 가진 그에게서 그 정보를 빼내기 위해 그를 보호하는 미국 측에 의해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 누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연쇄살인범이 버젓이 일가족을 처참하게 유희를 위해 살해해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못하는 북한의 비뚤어진 권력 체계. 그 안에서 피해를 보는 건 북한이든 남한이든 평범한 서민들인 상황. 이건 마치 사드 배치와 미사일 위협의 갈등 사이에서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으로 돌아가는 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정세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한 흥미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누아르에 덧댄 현실적 정경들 같은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브이아이피>는 비뚤어진 여성에 대한 의식을 담고 있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연쇄살인범이 저지르는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여성 살해 장면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그저 살인이 아니라 유희에 가깝기 때문에 특히 관객들은 왜 저런 장면이 저렇게 적나라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중이다.

사실 폭력적인 장면이 수반되기 마련인 누아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소재로 다뤄진 건 한두 번이 아니다. <추격자>도 그랬고, <살인의 추억>도 그랬다. 그러니 그 장면만으로 섣불리 이 영화가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을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그런 장면이 굳이 들어가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과연 <브이아이피>는 적절한 답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추격자>나 <살인의 추억>의 경우 이 여성 피해자들이 더 이상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형사들의 간절함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즉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런 일들을 벌이는 살인자에 대한 공적인 분노 같은 것들을 영화가 그 정서적 기저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이아이피>는 이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형사나 국정원 요원도 또 북한에서부터 내려온 보안요원도 분노하는 건 이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대신 동료가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사적 분노가 더 크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의 동력이 브이아이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굳이 그토록 잔인한 여성 피해자에 대한 묘사가 왜 필요했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영화가 중반 이상을 지나고 나면 여성 피해자에 대한 감정보다는 저들끼리의 대립에 의한 감정이 더 전면에 등장한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가서 연쇄살인범이 최후를 맞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남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그 불편함은 처절하게 당한 피해자가 있지만 그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결론적으로 이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대신 저들끼리의 액션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는데 머무른다.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나아가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관점이 투영되었다고 느끼는 건 바로 이 소외된 피해자라는 지점 때문이다.

<살인의뢰>, 범죄물에 담긴 사형제에 대한 질문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마에 의해 희생되고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 무너지는 억장과 고통을 과연 시간이 치유해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살인마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세상을 비웃으며 버젓이 교도소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당사자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인의뢰>는 이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담은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살인의뢰>

여기 출연한 김상경은 과거 <살인의 추억>의 그 형사를 떠올리게 하는 어딘지 탱자 탱자 형사 일을 하는 인물처럼 등장한다.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다만 살인범의 단서가 아니면 살인범 비슷하게 생긴 놈이라도 잡아오라고 쪼아대는 반장 때문에 등 떠밀려 현장을 하릴없이 도는 그런 인사다. 그런데 이런 한가로움은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이 그의 안온한 삶은 송두리째 깨져버린다.

 

살인을 즐기는 초유의 연쇄살인마의 잔인함과 그를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는 <살인의뢰>가 전형적인 범죄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실제로 영화는 그 범죄물의 전개양상인 격투와 추격 같은 액션들이 전체 내용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살벌할 수밖에 없는 범죄물이 사형제에 대한 담론을 담아내고, 그간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고통을 강도 높게 다루면서 이야기의 정서는 조금씩 변해간다.

 

처음에는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한 살육과 보복의 이야기처럼 다가오지만 차츰 그 연쇄살인마를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간절한 심정에 동조하게 되면서 영화는 먹먹하게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그 먹먹함은 자연스럽게 현재 우리네 사형제가 갖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살인마들은 저렇게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그것도 아주 잘) 피해자들은 이토록 깊은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피폐해져야만 하는 걸까.

 

우리네 영화판에서 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물들은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게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이 어떤 깊이 있는 울림을 가진 범죄물의 시작을 보여줬고 <추격자>가 장르적으로 성공한 이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싸이코패스들이 등장하는 범죄물들을 접했다. 그 범죄물들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했던 흉흉한 연쇄살인사건과 맞물려 대중들에게는 부채감과 분노를 풀어내는 일종의 대체물처럼 흥행을 가능하게 했다. <아저씨> 같은 영화는 범죄물에 이제 판타지적 요소를 덧붙여 현실에 부재한 정의를 대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이 쏟아진 범죄물들의 리스트에 <살인의뢰>가 올라간다는 건 결코 좋은 시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의뢰>는 기존의 범죄물이 주는 분노와 카타르시스적인 효과 이상의 새로운 정서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피가 튀는 끔찍한 범죄물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지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극화된 면이 있지만 <살인의뢰>는 범죄물 그 이상의 진지한 질문을 담아낸다. 사형제 폐지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인권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면 전혀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해준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떤 주의 주장이 아니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정서적인 틀로 전해주고 있다는 것. 게다가 범죄물이 가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는 건 이 영화가 가진 중요한 성취로 여겨진다.

 

<표적>, 공권력에 맞서는 히어로는 어떻게 가능한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거두절미하고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쫓기는 여훈(류승룡)으로부터 시작되는 <표적>의 장르적 방점은 물론 액션에 찍혀 있다.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일단 기본 먹고 들어가는 류승룡이라는 배우는 이 영화를 위해 특공무술 특훈을 받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몸의 액션을 보여준다. 총에 맞서 맨 몸으로 부딪치는 류승룡표 액션은 화려함보다는 묵직함이 어울리고, 특유의 감정 선이 덧붙여져 타격감에 통쾌함을 더해준다.

 

사진출처: 영화 <표적>

하지만 온전한 액션 영화 한 편을 보는 와중에도 흥미로운 설정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역전이다.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추격전 속에서 쫓기는 자들은 자신이 왜 쫓겨야 하는 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희생양이 되어버린 쫓기는 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게 되면서 여훈의 분노가 터져 나온다. 류승룡의 액션이 폭발하게 되는 건 그 분노가 대중들의 정서를 끌어안기 때문이다.

 

왜 무고한 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조폭과 비리경찰은 액션 범죄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악역들. 경찰이 비리경찰로 돌변하고 공권력이 주인공을 위협하는 요소로 돌변하는 순간, 류승룡의 액션은 틀에 박힌 추격전 양상을 벗어난다. 이제 이 안티 히어로는 공권력과 맞서 싸우는 인물로 돌변한다.

 

돈만 된다면 제 어머니도 죽일 존재들이라는 이 비리경찰들은 이 영화만의 특별한 장면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범죄물에서 흔히 생각하는 경찰서라는 안전을 상징하는 듯한 공간이 오히려 살육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여훈이 경찰서 하나를 완전히 때려 부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추격자>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능한 공권력은 이제 어느새 비리로 점철된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때때로 누가 범죄자고 누가 경찰인지 아리송해지는 코미디 같은 설정이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건 지금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표적>은 그 서민들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오히려 그들을 표적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상황을 그려낸다. 쫓기던 류승룡의 반격이 서민들의 분노를 덧붙여 통쾌함을 만드는 이유다.

 

류승룡과 더불어 김성령, 유준상의 기존 이미지를 깨는 반전 연기는 영화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가장 큰 요소다. <7번 방의 선물>에서 당하기만 하던 바보 연기를 했던 류승룡은 이 영화에서 분노의 히어로로 돌변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줄곧 고수해왔던 김성령은 이 영화를 통해 거친 액션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착하고 선한 이미지의 유준상? 그의 변신은 그 이미지 때문에 더욱 큰 반전효과를 만들어낸다.

 

<표적>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추격 액션 정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반에 일어나는 반전 이후 마지막까지 흘러가는 류승룡의 액션은 기막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영화가 건드리는 현실에 대한 대중정서 덕분이다. 공권력과 맞서는 히어로라니. 그 설정에는 영화 속에서나마 답답한 현실을 풀어내주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절에.

<추격자>에서 <괴물>까지 인재를 꼬집는 영화들

 

그랬다면 어땠을까. 배에 화물을 과적하지 않았다면, 화물들과 자동차를 좀 더 단단히 고정했다면, 배의 무게를 잡아주는 밸러스트 탱크에 제대로 물을 채워 넣었다면, 배가 기울었을 때 제주가 아닌 진도에 바로 구조요청을 했다면, 승객들에게 서둘러 대피 공지를 냈다면, 선장이 선원들만 챙기지 않고 끝까지 남아 승객들을 먼저 챙겼다면 어땠을까.

 

'사진출처: 영화 <괴물>'

또 사고가 난 후에도 곧바로 정부가 자기 자식을 잃은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면, 발표에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초동대처에 재빨랐다면, 애초부터 바지선과 오징어잡이배를 동원하는 생각을 실종자 가족들이 아닌 정부가 먼저 해냈다면, 또 이제야 투입되는 각종 첨단 장비들이 좀 더 일찍 투입되었다면 어땠을까.

 

세월호 참사를 되짚어보면 어째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선택들을 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있었다. 거기서 제대로 된 선택들을 했다면 조금은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재난이 천재가 아닌 인재의 축적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왜 우리네 참사는 늘 인재일까. 영화가 현실일 수는 없지만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그대로 말해주는 건 사실이다.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공권력의 무능이다. 결국 경찰에 잡히게 된 연쇄살인마가 풀려나게 되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게 되는 상황은 대중들이 바라보는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공권력은 믿을 수 없다. 결국 믿을 건 나 자신 뿐이다.

 

<괴물>에서 문제가 되는 건 한강에 출몰한 괴물 그 자체가 아니다. 괴물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가 더 큰 문제다. 결국 정부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이들을 격리하고 심지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양산해낸다. <괴물>이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정부의 공권력인 셈이다.

 

<변호인>에서 멀쩡한 청년을 파괴하는 건 역시 잘못된 공권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다고 용공세력으로 몰려 고문당하는 현실. <변호인>의 분노는 국가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공권력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카리브해에 있는 외딴 섬에서 통역 서비스조차 없이 수감생활을 하게 된 건 당시 재외공관의 무능 때문이다. 국민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할 당시 프랑스 한국대사관은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인재 중의 인재다.

 

이것은 그저 영화의 이야기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때때로 벌어지는 홍수나 폭설로 인한 재난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늘 듣는 단어가 있다. ‘인재라는 것이다. 사고는 물론 미리 대비하고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터졌을 때 그 대응체계는 실로 중요하다. 그 체계에 따라서 천재보다 더 큰 인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만 터지면 정부의 무능을 발견하게 되는 끝없는 인재의 연속. 언제쯤 이 단어를 더 이상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스타들은 많아도 연기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또 연기자들은 많아도 다양한 연기변신이 가능한 진정한 의미의 연기자들은 많지 않죠. 또 아무리 다양한 연기변신이 가능한 전천후 연기자라 해도 우리의 정서를 대변하는 듯한 연기자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북이 달린다'의 김윤석은 그 몇 되지 않는 연기자에 속하는 배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다채로운 연기변신을 끊임없이 해오면서도 그 속에 우리 식의 정서가 늘 배어 있으니 말입니다.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대중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해가 2006년도 일 것입니다. 그 해 그는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를 통해 먼저 그 얼굴을 알렸습니다. 주말이면 리모콘 쥐고 방바닥 뒹구는 전형적인 뺀질남이지만 속내는 아내를 사랑하는 그가 연기한 강윤호라는 캐릭터는 시청자들을 꽤나 울게 만들어버렸죠.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해 그의 존재감을 알린 '타짜'의 아귀라는 변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김윤석이 가진 연기의 폭을 실감하게 됐죠. '그 뺀질남이 저 살벌한 인간?'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김윤석은 폭발적인 연기로 주인공 못지 않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수더분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은 우리네 가장의 역할과 너무나 잘 어울렸죠. 그래서 '즐거운 인생'에서는 밴드의 꿈을 잊고 택배와 대리운전으로 살아가는 한 아버지의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글서글한 인상이 또 '추격자'에 와서는 강인한 카리스마로 바뀌었죠. '추격자'의 엄중호는 꽤 건들대는 건달이면서도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입니다.

김윤석이 그려낸 엄중호라는 캐릭터는 실로 복합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귀차니스트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현실에 노회한 그저그런 삼류인생처럼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끈기와 분노의 힘을 내면에 숨기고 있는 그런 인물이었죠. 그 이미지가 깨나 서민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이윤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그간의 아우라가 작용한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서민의 아버지 역할을 해오곤 했으니까요.

'거북이 달린다'의 조필성은 그런 면에서 보면 엄중호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그의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캐릭터라 할 수 있습니다. 엄중호의 어딘지 힘껏 들어가 있는 듯한 긴장감과 힘은, 조필성에 와서는 거의 풀어져 있고 심지어 연기하지 않는 듯한 편안함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충청도 사투리가 가진 적당히 느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또 적당히 웃기면서도 나름 깊은 의미를 가지는 그 특성은, 조필성이란 캐릭터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조필성은 (충청도의 겉 이미지가 그렇듯)허술해보이지만 한 가족의 가장이라는 입장이 부각되면서 엄청난 의지력(충청도의 힘!)을 가진 인물로 연기되죠.

'거북이 달린다'를 통해서 우리는 김윤석이라는 우리 식의 영웅을 제 옷처럼 연기할 수 있는 배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지극히 서민적이면서, 그 서민들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던 잠재력을 끄집어 낸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김윤석이 해나갈 연기의 세계에 많은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또한 이것은 이런 배우를 갖게 된 우리 영화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토끼처럼 늘씬하진 않아도, 토끼보다 더 멋진 거북이 같은 배우가 바로 김윤석입니다.

축구에는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과장되게 넘어지거나 쓰러져 반칙을 유도하려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은 때론 진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도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합니다. '엑스맨 탄생-울버린'의 주먹을 뚫고 나오는 칼날이나, 아무리 해도 죽지 않는 그래서 심지어는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린 '터미네이터'의 로봇들을 보다보면 그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스피드와 장쾌한 액션에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는 허무감에 빠질 때가 많죠.

그런 면에서 볼 때, '거북이 달린다'는 이 할리우드 액션이 갖는 약점을 정곡으로 찌르는 우리식 토속 액션영화로 보입니다. '거북이 달린다'에는 '스타트랙 - 더 비기닝'같은 우주적 공간도 없고, '터미네이터-미래전쟁의 시작' 같은 어마어마한 전쟁도 없습니다. 당연히 화려한 CG같은 것도 있을 리 없고 엄청난 능력이나 힘을 가진 주인공도 없습니다. 그저 소싸움 대회 정도에도 들썩거리는 충청도 한 마을과 그 마을에서 말 그대로 찌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시골형사 조필성(김윤석)이 동네로 들어온 탈주범과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거북이처럼 별볼일 없을 것 같은 영화가 저 토끼들 같은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이 주지 못하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건 왜일까요. 그것은 지독하게도 토속적인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엮어나가는 역시 토속적인 이야기가 갖는 리얼함 때문일 것입니다. 지구를 지켜내기 위해 싸우는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이 주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마누라의 빵구난 팬티 하나가 짠하게 가슴에 남아 죽도록 싸우는 우리네 액션 스타 조필성 같은 캐릭터가 주는 공감일 것입니다.

우주적 공간이 아닌 충청도라는 공간은 이 영화의 토속적인 맛을 우려내는 최적의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충청도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특유의 지역 정서는 형사물이라는 조금은 긴박한 상황과 대비되면서 충분한 웃음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이 웃음은 주인공들이 억지로 끌어낸 것이 아니라 지역 정서 자체가 주는 웃음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진지할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느린 듯 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충청도 사투리 특유의 정서는 이 영화의 액션 속에서도 대사 속에서도 묻어나면서 보는 이를 웃기면서도 찡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충청도가 주는 중심에서 밀려난 듯한 외곽의 정서는 이 독특한 형사물에 서민적인 정서를 결합시킵니다. 혼자서 여럿을 때려잡은 탈주범을 두고 반장이라는 사람이 "그런 놈을 우리가 어떻게 잡냐?"고 말할 때, 우리는 빵 터지면서도 그 리얼함에 서민적 동지의식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거북이를 닮아잇는 충청도 정서와 충청도식 사투리와 그걸 모두 체화한 듯 비틀대며 찌질하게 살아가면서 그래도 가족 앞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지키려하는 조필성은 서민적 정서의 표징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조필성이라는 거북이 정서에 우리가 공감하는 순간, 별 것 아닌 것 같은 액션과 추격전이 주는 쾌감은 극대화됩니다. 마치 '추격자'에서 헛다리만 짚는 형사들을 대신해 연쇄살인범을 쫓는 김윤석을 관객이 애타게 응원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이 한편으로는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얼굴이 되어 있는 거북이 조필성이 잘난 척하는 권력있는 도시의 형사들을 앞질러 그 지긋지긋한 탈주범을 잡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분명 할리우드 액션이 갖는 과장됨은 그 자체가 대중들을 사로잡는 힘일 것입니다. 하지만 '거북이 달린다'에는 그런 할리우드 액션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이 할리우드 액션과는 정반대 같은 충청도식(?) 액션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은 말입니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정말 우리 얘기를 우리 식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참을 웃고, 마지막에 가서는 찡한 이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며 어딘지 찜찜하거나 허무한 느낌을 주었던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올드보이’, ‘괴물’을 잇는 ‘추격자’의 영웅

‘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가 갑작스런 납치 감금으로 15년 동안의 감금을 당하며,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순식간에 한강에 출몰한 이상한 괴물에게 금지옥엽 딸을 납치 당한다. ‘추격자’의 중호 역시 평범한 보도방 사장에서 괴물 같은 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추격자가 된다.

즉 이들 우리네 서민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개가 납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납치로 인해) 사라질 때, 이 서민들은 그 소중한 평범함을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대수에게는 세월 속에 지워진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며, 강두에게는 딸이고, 중호에게는 미진이다. 그 소중함이 가족이나(유사가족을 포함) 자기 자신 같은 일상의 가치를 조명할 때, 이 서민적 영웅은 휴머니티를 좇는 영웅이 된다. 거창한 것이 아닌 최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일을 하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종 이 영웅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적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결국 진짜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괴물’과 ‘추격자’의 강두네 가족과 중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괴물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공권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회적인 메시지는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서민적인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상반되게 미션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적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던 소중함을 잃고 만다는 점에서 실패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고는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고, ‘괴물’의 강두나 ‘추격자’의 중호는 결국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서 납치된 그녀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실패의 지점은 이 영웅들의 행보에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리얼리티를 구축해내는 힘이 된다.

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주목하게 만드는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갖게된다. 영화는 끊임없는 추격의 과정을 그리는데 목표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바로 그 추격의 이유, 즉 휴머니티가 이들 영웅의 특징이 된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담론으로 허황된 영웅상을 정치적 논리와 섞어 세계에 배포하는 헐리우드식의 영웅을 유치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 지극히 가족적이며 자성적인(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반영웅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에 쏟아지는 일련의 세계적인 관심은 이제 새로운 영웅상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추격자’의 엄중호와 ‘노인을 위한...’의 안톤 시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묘하게도 유사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다. 거기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등장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즉 이 영화들은 모두 고전적인 형사물이나, 스릴러에 단골로 등장하는 ‘추격과 도망’이라는 장르적 모티브를 잘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들은 그 장르적 틀 위에서 어떤 의미망을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추격자’에서 추격자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이고 도망자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것은 정반대다. 추격자는 희대의 살인마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이고 도망자는 그다지 선해 보이지만은 않은 모스(조쉬 브롤린)다. 한쪽은 살인범이 쫓기고 또 한쪽은 정반대지만 둘 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쫓는다는 설정은 유사하다. 물론 여기서 형사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늘 뒤늦게 나타나는 존재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영화가 모두 추격하는 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인데, 그 추격자는 도망자보다 더 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감정이 없는 살인마다. 반면 엄중호는 희대의 살인마인 지영민에 비해 약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늘 지영민을 구타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인물은 다름 아닌 엄중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변수가 작용한다. 센 놈이 약한 자를 잡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그 변수가 작용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어려워진다.

‘추격자’에서 그 변수는 무능한 공권력이다. 엄중호는 그 탁월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지영민을 떡 하니 경찰서 안에까지 끌고 가지만, 경찰은 눈앞에 혐의가 분명한 살인자를 버젓이 거리로 내보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변수는 조금 철학적이다. 그것은 안톤 시거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자로서 자신만의 룰을 따르는 자이다. 그런데 그 룰은 어떤 인과가 있는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다. ‘추격자’의 지영민은 포획한(?) 미진(서영희)에게 “네가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봐”하고 묻지만 안톤 시거는 그런 이유는 묻지 않는다. 대신 동전던지기로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할 뿐이다.

물론 지영민은 그 이유가 타당하면 살려주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일 뿐이다. 그러니 그 이유로 충분한 “딸이 있어요”라는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안톤 시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그는 동전이 정하는 우연에 따를 뿐이다. 인과과정으로 수사를 하는 형사들에게 인과가 없는 그는 좀체 추격하기 어려운 존재다. 어찌 보면 그는 인과관계에 잔뜩 얽매여 있는 사회적 그물망을 벗어나 있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절대 자유의 사냥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안톤 시거 역시 그 우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그를 옭아매는 것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보안관 같은 법망이 아니라 그 우연 자체다. 쫓고 쫓기고 하던 추격전이 결국 누가 잡히고 누가 죽었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걸 다 해치워버린 안톤 시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은 바로 이 우연의 법칙 속에서 그 무엇도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전언이다. 결국 이 추격전이라는 우리네 삶의 메타포는, 어느 날 우연히 현장에서 돈을 발견한 모스가 그 날 밤 물 한 모금을 전해주러 갔다가 우연히 발각되고, 살인자에게 쫓고 쫓기는 과정 자체가 허무하게도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추격자’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리고 있는 추격전은 그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 각각의 메시지를 포착한다. ‘추격자’는 엄중호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그 일면 견고해 보이는 사회적 시스템의 무능함을 추격하는 격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톤 시거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우연의 법칙 속에 무력하기만 한 필연적 삶의 시스템을 추격하는 격이다.

이 두 영화가 흥행에 있어 전혀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국 극장가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추격자’가 곧 2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CGV 인디영화관에서만 개봉하고 있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만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관객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객수의 차이는 물론 개봉관 수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역시 추격하는 그 대상 때문이 아닐까. 우리네 관객들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사변적이지 않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비판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철학적 사유보다는 더 마음에 와 닿나 보다. 어쨌든 두 영화 모두 요즘 들어 보기 드문 수작인 것만은 틀림없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괴물’을 좇는 ‘추격자’, 그 흥행의 이유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물결. 인파로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남녀. 그리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 골목길. 담벼락에 대충 세워지는 차. “차를 저렇게 세우면 어떻게 하냐”는 사내의 말, “금방 나올 건데요”하는 여자의 답변. 하지만 이어지는 담벼락에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차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출장안마사 명함들. 이 짧지만 함축적인 영상의 연결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 설명한다. 누군가 사라졌고, 그 사내는 여자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

원경에서 잡을 때는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이었던 것이 차츰 가깝게 심도를 잡아가자 특정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영상 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거리에서 어쩌면 우리가 희대의 살인마와 옷깃을 스쳤을 지도 모를 아슬아슬함을 전해주기도 하며, 그렇듯 타인으로서 극장문에 들어선 관객을 영화 속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 원경에서 점점 가까운 곳으로 옮아가는 카메라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다. 그리고 거기에는 출장안마소를 차려놓고 여자를 파는 비열한 인간, 엄중호(김윤석)의 시선이 겹쳐진다.

사라진 여자를 엄중호가 좇는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에게 여자란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손님에게 보내진 미진(서영희) 역시 마찬가지. 엄중호가 미진과 막연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진을 찾아 헤매던 엄중호는 미진을 근거리에서 보게되고, 미진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붙잡혔다는 심증이 갈수록 마음은 더 절박해진다. 그 근거리에서 엄중호는 돈으로서의 미진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미진을 좇게 된다. 이것은 엄중호의 시선에 포획 당한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범인을 추격하는 엄중호가 쉬지 않고 달릴 때, 그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카메라가 점점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가가면서 엄중호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듯 보았던 인물들을 역전시켜 놓는다. 이 영화 속에는 엄중호, 지영민(하정우), 그리고 경찰, 이렇게 세 부류가 부딪치는데, 초반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정반대로 바뀌어 나간다. 한없이 비열해 보였던 엄중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는 반면, 겉보기에 마음 여린 사내로 보이던 지영민은 희대의 살인마로 변신한다. 경찰은 그 직업상 무언가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경찰이 하는 일이란 엄중호가 기껏 잡아놓은 살인마를 풀어주는 것이다.

이 역전된 상황은 저 ‘괴물’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괴물(지영민)이 있고, 괴물에게 딸을 잡혀 애타게 괴물을 추격하는 강두네 가족들(엄중호)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도와주어야 할 경찰은 강두를 감금해버리는 상황. 따라서 이 유사한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은 늘 같다는 것이다. 무능한 정부, 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정부 양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서민이 구조의 본질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괴물’과 다른 점은 괴물의 실체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강변으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습격하는 괴물은 나타나기만 해도 그것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도심 속, 그 사람들 속에 꼭꼭 숨어있는 지영민이라는 괴물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지영민을 추격하는 것이고, 그 추격하는 엄중호를 쫓아다니는 것이며, 그 엄중호의 변해가는 마음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추격자’가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고 하지만 ‘추격자’는 ‘괴물’의 구조 또한 닮았다. 나홍진 감독이 밝힌 바대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추격자’의 전범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추격자’에 대한 평단과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 또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닮은 것은. 한국영화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불쑥 나타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괴물 같은 나홍진 감독의 출현이 반가울 따름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BLOG main image
더키앙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by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216)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006)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달력

«   2018/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12,921,354
  • 180661
textcubeget rss

더키앙

더키앙's Blog is powered by Tistory.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더키앙 [ http://dogguli.tistory.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