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마이’ 박서준, 무심한 듯 애틋하고 웃긴데 설레는

이쯤 되면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에서 박서준 파워를 인정해야 할 듯하다. 아예 남녀 관계에 있어 쑥맥이라 그런지 그것이 우정인지 정인지 아니면 사랑인지도 헷갈려하는 고동만 역할을 박서준이 이토록 잘 소화해낼 것이라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지난 작품이었던 <화랑>의 잔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 있어서다. 물론 당시에도 무명 역할을 연기한 박서준의 연기가 나빴다고는 볼 수 없었다. 다만 사극의 그 이미지가 박서준에게 잘 어울리지 않은 면이 있었을 뿐이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쌈마이웨이>의 박서준이 돋보이는 건 고동만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무심한 듯 애틋하고, 웃긴데 설레는 그 면면들을 너무나 잘 소화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와 호흡을 맞추고 있는 김지원의 공 역시 적지 않다. “그러지 마. 나 자꾸 설레”라고 말하는 그녀가 있어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고동만이 “어쩌냐. 이젠 우는 것까지 예뻐 보이니.”라고 하는 대사가 확 살아난다. 

온 시청자가 다 알고 있지만 두 사람만 모르는 것 같은 연애감정이다. 그래서인지 드디어 고동만의 “썸이고 나발이고 키스 했으니 오늘부터 1일이다”라는 직진 멘트를 하고 공식적으로 사귀는 걸 인정하는 그 순간, 시청자들 역시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귀니까 또 하자”는 그 말에서는 고동만이라는 인물의 순진함과 순수함이 묻어난다. 

오래도록 친구 사이로 지내 자신들도 모르게 남사친, 여사친 관계가 되어버린 그들이 보여준 건 사실상 썸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연인 사이를 오가는 썸. 그래서 최애라(김지원)의 아버지에게 두 사람이 한 침대에서 잤다는 걸 들켰을 때 고동만이 “애라하고는 무인도에 가도 원숭이나 원주민처럼 지켜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여러 감정들을 수반한다. 

그런 말이 웃기기도 하지만, “뭘 지켜주냐”며 발끈해하는 최애라에게서는 서운함이 묻어나고 최애라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우리 딸이 뭐가 모자라서?’ 하는 마음이 생긴다. 물론 그렇게 애써 변명을 하고 있는 고동만도 슬쩍 한 발 물러나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하는 그 속내를 숨길 수 없다. 바로 이런 지점이 <쌈마이웨이>에서 박서준과 김지원의 멜로가 갖는 남다른 묘미다. “썸이고 나발이고”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들은 그 이상의 썸을 보여줘 왔던 것.

하지만 일단 마음을 확인하고 나면 앞뒤 재지 않고 직진하는 게 바로 고동만의 스타일이다. 이런 남자다움은 친구 사이에서 갑자기 연인 사이로 훅 들어오는 그 순간의 가슴 두근거림을 더 강렬하게 만든다. 

박서준이 로맨틱 코미디 장인이라는 건 사실 <그녀는 예뻤다>의 지성준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확인된 바 있다. 거기서도 친구였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연인으로 다가올 때의 그 설레는 순간을 그는 제대로 연기해 보여줬다. 하지만 이번 <쌈마이웨이>에서는 이런 로맨틱 코미디의 밑그림으로서 현실에 날개가 꺾였지만 그래도 고개 숙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당당한 청춘의 자화상까지 덧붙여 놓았다. 

<쌈마이웨이>의 고동만이라는 캐릭터에 그래서 시청자들은 사랑과 꿈 두 가지가 모두 성취되기를 바란다. 동생 수술비 때문에 포기했던 꿈을 격투기라는 새로운 세계에서 얻기를 바라고, 힘들 때 항상 옆에서 친구처럼 지지해줬던 최애라와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지금의 힘겨운 청춘들에게 기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박서준은 그 청춘의 초상을 제대로 연기해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며.

사극은 무조건 장편? 늘어뜨리기보단 더 압축할 필요 있다

우리네 사극은 아직도 그 앞에 ‘대하’라는 수식어를 붙이길 좋아한다. 그래서 사극이라고 하면 적어도 30부작, 길게는 50부작 정도의 장편이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선입견 같은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하사극’의 시대가 여전히 유효할까. 최근 방영되었거나 방영되고 있는 사극들, 이를테면 KBS <화랑>, MBC <역적>, SBS <사임당, 빛의 일기>를 보면 사극이라고 무조건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임당, 빛의 일기(사진출처:SBS)'

종영한 <화랑>의 경우 20부작이었지만 굵직한 이야기는 실종되고 대신 인물들의 멜로와 소소한 미션들이 매회 배치되면서 기대이하의 성적으로 끝나버렸다. <화랑>이라고 하면 삼국통일을 이룬 그 인물들의 장중한 이야기가 있어야 했지만 이 사극은 화랑을 ‘꽃미남’ 아이돌처럼 해석함으로써, 애초에 하려던 신분으로 좌절된 청춘들의 현실을 담아내려던 의도마저 흐려져 버렸다. 이런 이야기라면 굳이 20부작이 필요했을까. 

30부작 <역적>은 역사에 기록된 실존인물 홍길동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것이지만 그 절반에 해당하는 16부 동안 길동의 아버지 아모개(김상중)의 이야기로 채워졌다. 물론 이 사극이 갖는 현재의 현실을 빗댄 해석들은 실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늘어진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주인공 홍길동의 활약과 이야기들이 생각만큼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괜찮은 기획의도를 가진 작품의 시청률이 왜 갈수록 꺾어져 8%대까지 주저앉았는가를 설명해준다. 

역시 30부작인 <사임당, 빛의 일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이 사극과 현대극을 뒤섞은 드라마는 벌써 17부가 방영되었지만 애초에 그리려던 사임당(이영애)의 예술혼은 아직까지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고려지를 재현해내려는 사임당의 이야기가 치열한 대결구도로 그려지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애초 기획의도였던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로서의 워킹맘 사임당의 일과 사랑, 그리고 예술의 세계를 얼마나 잘 구현하고 있는가는 미지수다. 

사실 30부작은 그나마 과거의 사극들이 대부분 50부작을 기점으로 만들어졌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방영되고 있는 <역적>이나 <사임당>을 두고 보면 그 30부작도 너무 느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매회 한 가지씩의 굵직한 사건들이 전개되며 밀도 있는 드라마를 기대하는 시청자들로서는 “아직도 그 얘기야?”라는 답답함을 토로하는 게 당연하다 여겨진다. 

지상파에 종편, 케이블까지 합쳐져 우리네 드라마 편수는 과거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지상파가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를 빼고도 한 주에 6편을 내놓고 있고, 케이블이 월화와 금토 또는 토일 편성으로 3편을 종편은 매 주 한 편씩을 내놓고 있다. 이것만 해도 일주일에 시청자들에게 보여지는 드라마가 10편에 달한다. 

이처럼 늘어난 드라마 편수는 시청자들이 더 압축적인 드라마를 요구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괜스레 질질 끌기보다는 한 편을 봐도 몇 편을 본 것처럼 확실한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 그게 아니라면 굳이 채널을 고정시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극은 그래서 과거의 연속극의 특성에서 더 과감한 탈피를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사극이 그래야한다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은 50부작이었지만 매회 빈틈이라는 걸 느끼기 어려울 만큼 압축미가 있었다. 그렇지만 <역적>이나 <사임당> 같은 사극은 굳이 30부작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느슨함을 보이고 있다. 이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이탈하는 시청자를 잡기는 어렵지 않을까.

사전제작드라마 참패와 대비되는 '김과장·피고인'의 성공

여러모로 중국이 남긴 생채기는 국내 산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중에서도 드라마업계가 겪은 파장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이른바 ‘중국발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연이은 실패를 겪으며 만든 파장이 그것이다. <함부로 애틋하게>, <화랑>, <사임당, 빛의 일기> 같은 100% 사전 제작드라마들이 국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더 이상 사전제작이 드라마의 대안이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김과장(사진출처:KBS)'

하지만 사전제작 그 자체가 무슨 죄가 있으랴. 그것이 우리네 제작사들의 현실적인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의 사전검열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족쇄로 작용했다는 게 문제의 본질이다. 사전검열을 통과한 대로 수정하지도 못하고 찍어 내야 하는 상황은 현실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유기체로서의 드라마를 박제화 시켜버린 결과를 낳았다. 

연이어 이러한 중국발 사전제작 드라마들에 실망감을 느낀 시청자들은 이제 이런 대작 프로젝트 자체에 시큰둥해하는 모양새다. 최근 시청자들의 각광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나 <김과장> 같은 드라마들의 선전은 거꾸로 대작 프로젝트에 그다지 큰 기대를 갖지 않는 시청자들의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피고인>은 사전제작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시청자들의 반응을 봐가며 만들어가는 ‘실시간 드라마’의 실험을 단행했다. 물론 완성도가 떨어져 막장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지만, 그래도 시청자들과의 밀당이 힘을 발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과장> 역시 스토리만으로 보면 그 완성도가 높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김과장이라는 명쾌한 사이다 캐릭터를 세워놓고 지금의 대중들이 열광할만한 상황들을 스토리로 풀어냄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급박하게 기획된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지만, 사실 이미 사전제작이 완료된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SBS <엽기적인 그녀>가 그렇고 이연희, 정용화 주연의 JTBC <더 패키지>가 그렇다. 이미 제작이 완료되었지만 사드 보복으로 인해 중국 시장 자체가 경색된 상황에서 방송사들은 편성을 주저하고 있는 상황이다. 애초에 <더 패키지>는 <힘쎈 여자 도봉순> 후속으로 거론되었지만 역시 사전 제작된 <맨투맨>이 후속작으로 확장되면서 방영시기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JTBC의 <더 패키지>나 MBC의 <군주>, <왕은 사랑한다>, KBS의 <안단테>, tvN의 <비밀의 숲> 같은 사전 제작된 드라마들은 그나마 방송사가 정해졌다는 점에서 나은 편이다. 김희선, 김선아 주연의 <품위 있는 그녀>는 이미 촬영이 끝났지만 방송사마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중국에 특히 인기가 높은 장나라 주연의 <열혈주부 명탐정> 역시 현재 촬영 중이지만 방송사가 확정되지 않았다.

중국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졌던 100% 사전제작드라마들에 시청자들이 이미 시큰둥해하고 있는 상황이고, 사드 보복으로 인해 중국시장 자체도 막혀버린 상황이지만 여전히 사전제작드라마들이 대기하고 있고 또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는 건 관성 때문이다. 지금의 사전제작된 드라마들은 사실 사드 보복이 가시화되지 않았던 시기에 기획되었던 것들이다. 그러니 이미 대세는 바뀌고 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여파가 여전히 우리네 드라마업계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

이미 중국시장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다. 하지만 한때 만들어졌던 차이나 드림의 여파는 올해도 여전히 드라마업계에 생채기를 남길 것으로 보인다. 여러 모로 이번 사드 보복을 통해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있는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고 우리 것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화랑’, 문제는 사전제작이 아니라 완성도다

KBS 월화드라마 <화랑>은 결국 7.9%(닐슨 코리아)의 시청률로 동시간대 지상파 경쟁에서 꼴찌를 기록하며 쓸쓸히 종영했다. 사실 시작부터 그리 좋은 출발은 아니었다. 첫 회 시청률 6.9%. 100% 사전 제작에 중국과의 동시방영 등을 내걸었던 작품인지라(물론 이건 틀어져버렸지만) 기대감이 높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청자들은 그리 반색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도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고 시청자들의 반응은 갈수록 식어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던 걸까.

'화랑(사진출처:KBS)'

혹자는 <화랑>의 추락의 이유로 사전제작이 가진 한계를 지목한다.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없는 게 아니다. 즉 문제가 초기에 발견됐을 때 100% 사전 제작 드라마는 이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 <화랑>의 경우 만일 사전 제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첫 회 시청률이 6%대가 나왔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문제를 인식하고 대본 수정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화랑>은 안타깝게도 100% 제작이 완료된 드라마였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사전 제작 드라마의 한계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사실 <화랑>의 이야기구조를 보면 100% 사전 제작 드라마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느슨하게 드라마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된다. <화랑>은 안지공(최원영)의 아들 막문(이광수)이 죽자 대신 그의 친구인 무명(박서준)이 그가 되어 살아가면서 차츰 화랑으로 거듭 난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신라의 골품제도라는 틀이 있고 천민 출신인 무명이 실력으로 다른 화랑들의 귀감이 된다는 이야기는 금수저 흙수저로 얘기되는 현재의 청춘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태생으로 결정되는 계급 시스템과 대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그려졌을까. <화랑>은 이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악역들이 제대로 서지 못했고, 그러니 이 주인공이 대결구도로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주제의식도 잘 드러내지 못했다. 이렇게 되니 이야기는 소소해지고 틀에 박힌 멜로가 빈자리를 채웠다. 여기에 천민인 줄 알았던 주인공이 본래 성골이었다는 출생의 비밀까지 등장하면서 시스템과 대결하는 문제의식은 퇴색해버렸다. 결국은 잘난 출생이 숨겨져 있었다는 귀결은 얼마나 허탈한 이야기인가. 

주인공인 선우가 이렇게 제 캐릭터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 드라마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삼맥종(박형식)은 어미이지만 이상하게도 아들을 왕으로 즉위시키지 않고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려 하는 왕비 지소(김지수)로 인해 전혀 캐릭터가 전면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왕이면서도 왕임을 밝히지 못하는 그 설정 때문에 늘 뒤편에 숨어 있게 됐던 것. 이런 캐릭터는 마지막에 진짜 자신이 왕이라는 게 밝혀지는 그 순간 잠깐 주목되지만 그 과정들에는 대부분 묻히게 될 수밖에 없다. 

<화랑>의 문제는 사전제작으로 인해 수정을 할 수 없었다는 점도 컸지만, 애초에 만들어진 작품이 너무 안이했다는 걸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설정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게 구성됐고, 드라마의 전개과정은 너무 느슨했으며 애초의 주제의식도 사라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퇴보하는 양상을 보여줬다. 사실 이건 사전제작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드라마가 가진 완성도 부족의 문제라고 해도 될만한 사항이다. 

연달아 사전제작 드라마들이 고배를 마시는 상황이라, 마치 그 사전제작 시스템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전제작 시스템은 어쨌든 과거 쪽대본 시절을 떠올려 보면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제작 환경이다. 다만 중요한 건 그 사전제작을 제대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장치들이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확인하지 못하고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그 자체가 리스크일 수 있다. 그러니 그럴수록 더 많은 사전 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기획단계에서부터 대본, 그리고 촬영 후 갖는 1차 편집본 등등 단계별로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다면 사전제작은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화랑>의 쓸쓸한 종영은 그래서 사전제작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애초에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완성도 부족이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화랑’과 ‘미씽나인’, 어째서 소외됐을까

지상파 방송3사의 드라마 경쟁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애초에 기대작이었던 작품은 의외의 실망감을 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은 갑자기 주목받는다. 어째서 이런 배반과 반전이 생겨난 걸까. 

'화랑(사진출처:KBS)'

월화드라마는 애초에 KBS <화랑>이 확실한 주도권을 가질 것처럼 여겨진 바 있다. 100% 사전 제작되어 중국 한류를 넘보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화랑들을 미소년들이나 아이돌처럼 해석하기도 하고, 당대의 골품제도를 현재의 금수저 흙수저라는 청춘들의 현실로 그려낸 것도 기대를 자아내게 한 대목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와 달리 시청자들의 반응은 갈수록 미지근해지고 있다.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가 자꾸만 멜로 쪽으로 기울고 무엇보다 드라마 전체를 꿰뚫는 간절한 이야기의 극적 구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화랑>이 주춤하는 동안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이 펄펄 날아 시청률 수위를 차지해버렸다. 

여기에 같은 시간대 새로 시작한 MBC <역적>이 호평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화랑>에 대한 화제성은 더욱 줄어들었다. <피고인>과 <역적>의 대결처럼 보이는 월화드라마의 구도 속에서 <화랑>은 소외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 것. 

이런 흐름은 수목드라마 경쟁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애초에는 SBS <사임당, 빛의 일기>의 독주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KBS <김과장>이 시청률을 앞지르는 놀라운 반전을 기록했다. 물론 <사임당>이 계속 이 흐름에 끌려갈지는 알 수 없다. 향후에도 <김과장>과 <사임당>의 대결구도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전망이 많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MBC <미씽나인>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가고 있다. 애초에 MBC는 <미씽나인>이라는 본격 생존 장르물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네 드라마로서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로서 그 자체로도 어떤 가치가 있다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인도 생존기라는 낯선 이야기가 마니아적인 느낌을 주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지목되었다. 여기에 <사임당>과 <김과장>의 대결구도라는 악재까지 끼어들게 된 것이다. 

요즘은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바뀌는 걸 발견하곤 한다. 과거에는 드라마가 첫 회에 어느 정도 시청률을 내면 그 흐름이 유지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첫 회에 모든 걸 쏟아 붓는 경향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제 아무리 재밌고 기대를 하게 했던 작품도 몇 회가 지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이 확인되면 가차 없이 채널이 돌아간다. 

유명 배우가 캐스팅 됐건, 엄청난 제작비를 투여했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관건이 되는 건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임당>을 이긴 <김과장>이나 <화랑>을 눌러버린 <피고인>이나 <역적>을 보면 확실히 지금의 시청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방식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만큼 보는 눈이 높아져 있다는 것. 

안타깝게도 <화랑>과 <미씽나인>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타 방송사들의 대결구도 속에서 소외되는 양상을 보이게 됐다. 하지만 이 또한 끝이 아니라는 건 지금의 시청자들의 조변석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제든 긴장감 있는 이야기를 끌어 오기만 한다면 반전은 가능하다. 물론 한 번 꺾인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화랑',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타령만 하고 있을 건가

방영 전 KBS 월화드라마 <화랑>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작품보다 높았다. 중국과 동시방영을 추진했고, 따라서 100% 사전 제작된 작품이다. 한류를 노리는 드라마였다는 것. 게다가 신라의 화랑을 본격적인 소재로 삼아 꽃미남들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도 시선을 잡아끌었다. 박서준과 박형식은 물론이고 도지한이나 김태형 같은 새 얼굴들도 기대되는 지점이었다. 

'화랑(사진출처:KBS)'

그리고 첫 회는 이런 기대감이 실제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저 꽃미남들의 화랑이라는 소재를 빙자한 연애담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무명(박서준)의 등장과 그의 친구 막문(이광수)의 죽음이 전하는 골품이라는 신분제에 억눌린 청춘들의 현실이 단박에 날려주었기 때문이다. <화랑>은 현재의 금수저 흙수저로 대변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신라의 골품제도 안에서 숨막혀했던 청춘들 이야기로 풀어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막문의 죽음으로 그를 대신해 선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무명은 그 신분을 뛰어넘어 화랑에 들어왔고 성골인 삼맥종(박형식)과 많은 진골 출신 화랑들 속에서 남다른 재능과 생각을 드러낸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신분이 그러한 것처럼, 골품제의 틀에서 훌쩍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이 갈수록 꺾어지게 된 건 드라마가 확실한 추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면서부터다. 결국 드라마의 힘은 극적 갈등에서부터 비롯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화랑>은 그러한 갈등이 그다지 절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확실히 도드라지지 않는 악역 때문이다. <화랑>에서 선우와 삼맥종이 가려는 그 길을 막아서는 존재는 바로 왕비이자 삼맥종의 모후인 지소(김지수)와 그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권세가 박영실(김창완)이다. <화랑>의 추동력이 나올 수 있는 건 바로 이들 악역의 힘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존재감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강한 대립자가 서지 않기 때문에 선우와 삼맥종이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간절함 같은 것이 생겨날 수 없다. 바로 이 핵심적인 드라마의 추구점이 잘 보이지 않게 되면서 드라마는 소소하고 잔잔한 사랑이야기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로(고아라)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삼각관계를 이루는 선우와 삼맥종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게다가 강렬한 악녀의 모습을 보여야 될 지소가 어째서 안지공(최원영)에게 멜로 감정을 드러내는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드라마는 그래서 힘이 실릴 수 있는 상황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극적 상황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맥이 빠진다. 

백제 남부여에 화랑사절단이 가는 에피소드에서 선우가 “자신이 왕”이라며 거짓말을 하게 되는 그 이유가 단순히 붙잡힌 아로를 구하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은 그래서 <화랑>의 이야기가 왜 소소해졌는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일국의 왕임을 거짓말로 하는 장면의 근거가 ‘사랑’이라는 단순한 이유라면 <화랑>이 그리는 세계는 삼한일통을 꿈꾸거나 아니면 골품 같은 신분제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것과는 다른 소소한 것으로 전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뜨거웠던 <화랑>이 미지근해진 건 그 본래 하려던 이야기에서 한참 벗어났거나 너무 잔잔한 가지들을 재미요소로 많이 끼워 넣다보니 그 본래의도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회를 보고나면 결국 사랑타령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으로는 이 드라마가 회생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꽃미남들의 면면을 보는 것만으로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화랑>이 유골무죄 무골유죄 청춘을 보듬는 방식

 

유골무죄 무골유죄.” 골품이 있으면 죄가 없고 골품이 없으면 죄가 있다? 이 조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삼국시대 신라의 골품제도에 빗댄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금수저 흙수저의 신라 버전쯤 될까. KBS 월화드라마 <화랑>이 그려내는 청춘들은 당대의 골품제도라는 태생적인 틀에 묶여 꿈이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화랑(사진출처:KBS)'

무명(박서준)은 그 골품제도에 의해 많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인촌에서 함께 자라온 둘도 없는 친구 막문(이광수)이 그 신분제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누이를 찾기 위해 왕경을 넘었다는 죄로, 또 절대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얼굴을 봤다는 죄로 막문이 죽음을 맞이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무명은 본래 안지공(최원영)의 아들이었던 막문의 진짜 이름 선우를 자신이 대신 쓰기로 한다.

 

꽃다운 청춘들, 화랑이 모이는 선문이 겉으로 표방하는 것이 골품의 차별이 없다는 건 그래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론 그 안에서 뼛속까지 골품의 틀에서 살아왔던 진골들이 선우 같은 반쪽(반만 진골)을 집단적으로 따돌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오로지 실력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 기준들이 제시되는 건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현재에 어떤 판타지를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골품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의 화랑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하다못해 빨래까지) 상황은 진골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지만, 애초에 천인으로 살아왔던 선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건 여전히 귀천을 따져 자신을 능멸하고 나아가 여동생인 아로(고아라)까지 희롱하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류(도지한)는 마치 현재의 비뚤어진 상류층들의 갑질 행태를 고스란히 재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우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반류가 선우에게 너 같은 반쪽이 시궁창이라고 말하자 선우는 이렇게 일침을 가한다. “시궁창은 너지. 스스로 뭘 해본적도 없고. 그 자리에서 썩고 있는 너 같은 고인 물.” 이 대사가 말해주듯 이 귀족 자제들이 화랑으로 모인 선문에서 선우라는 이질적인 인물은 그래서 향후 이들 화랑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라는 골품의 틀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들을 다시 흐르게 만들어줄.

 

선우가 온 몸에 상처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라는 건 이런 그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다. 흥미로운 건 그에게 마음이 설레는 아로가 의원 아버지인 안지공에게 곁눈질로 의술을 배운 인물이라는 것. 아로의 캐릭터는 다친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이다. 아로를 구하다 손바닥을 칼에 베인 선우를 치료하면서 다치지 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그것이 마치 상처받은 청춘을 보듬는 치유의 손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선문에서 벌어진 화랑들의 집단 난투극으로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로가 나서는 장면은 그래서 이 캐릭터를 보다 명확히 해준다. 또한 잠 못 드는 삼맥종을 옆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치유의 캐릭터 아로는 선우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주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삼맥종을 잠시 쉬게 해준다.

 

이것은 <화랑>이라는 사극이 신라의 화랑들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청춘들을 보듬는 방식일 것이다. 물 수()를 보여주며 이것의 성격을 묻는 위화공(성동일)에게 삼맥종은 물은 선하다고 말한다. 늘 자신을 낮추고 밑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선우는 물이 고단하다고 말한다. 물은 몸속에서 금이면 금, 물고기면 물고기를 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위화공이 물 수()자와 함께 내놓은 표제어 왕()의 역할을 묻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우의 심경이 담겨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춘들의 고단함. 그 고단함을 없애줄 수 있는 건 더 고단하게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왕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그런 질문.

<화랑>은 어째서 청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천인은 그냥 짐승처럼 죽어야 하는 거야? 그깟 성문 좀 넘은 게 죽을 일인가.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건데!” 둘도 없는 친구 막문(이광수)의 죽음 앞에 무명(박서준)은 절규했다. 그 절규에 대해 막문의 아버지인 안지공(최원영)은 이렇게 얘기했다. “그게 이 신국의 구역질나는 질서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화랑(사진출처:KBS)'

KBS <화랑>은 이렇게 한 청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죽음을 맞은 막문이 원했던 건 그저 아버지와 누이를 만나는 것이었다. 천인 출신인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 망망촌에 버려졌고, 가족을 찾기 위해 넘어서는 안되는 왕경을 넘어 들어온 것이지만, 그는 삼맥종(박형식)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유일한 성골인 삼맥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살수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굴을 숨긴 채 살아가는 인물. 막문이라는 한 청춘의 어이없는 죽음과 이를 목도한 무명의 절규는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골품제라는 걸 명확하게 해준다. 무명은 막문의 죽음 앞에 각성하게 되고 이 무참한 신분제 속에서 현실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된다.

 

<화랑>이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물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보다 더 참혹한 신분사회다. 그래서 천인으로 태어나면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이 정해진다. 만일 왕경 같은 곳으로 마음대로 들어왔다가는 죽음을 맞이해도 항변할 길이 없다. 무명은 하지만 이런 한계와 경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막문이 왕경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귀족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무명은 말한다. “왕경에 들어온 천인을 베는 게 니들 법이면 이 선을 넘어온 귀족을 베는 건 내 법이다. 베고 싶으면 넘어와서 베. 다 상대해줄 테니까.”

 

무명이 주령구(지금으로 치면 16면체 주사위)를 던지는 인물이라는 건 그가 정해진 운명을 걷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성골이냐 진골이냐 아니면 반인이냐 천인이냐 같은 것들이 모두 운명을 결정해버리는 사회. 그 곳에서 이제 앞날이 창창한 청춘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태생으로 정해지는 사회에서 무명은 그걸 거부하고 주령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태후는 신라를 보다 강성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화랑을 모집하려 한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위화공(성동일)화랑(花郞)’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냈다. “꽃같이 아름다운 사내. 지혜롭고 어진 제상. 아름답고 특별한 존재. 신국의 미래”. 그것은 아마도 청춘이라면 누구나 추구할 수 있어야할 존재일 것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무명이나 막문 같은 청춘들에게 화랑이란 언감생심 꿈꿔서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화랑>은 신라시대의 화랑이란 특수한 청춘들을 통해 현재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반추하게 하는 드라마다. 골품제라는 견고한 신분제도는 지금의 현실로서는 금수저 흙수저로 나뉘는 자본의 신분제로 재현되고 있다 말할 수 있다. 능력이 있어도 노력을 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보이는 현실. 이것이 골품제와 무엇이 다를까.

 

세상에는 너 따위가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이 있다. 네가 그 문 앞에 있다.” 삼맥종의 엄포에 무명은 말한다. “사람이 넘지 못하는 길, 가지 못하는 곳, 열어서 안 되는 문, 그딴 게 있어도 된다고 생각 하냐. 다 개소리라 생각한다.” 그가 던지는 일갈이 지금의 현실에도 귓가에 쟁쟁하다.

<화랑>, 박서준은 왜 주령구를 굴릴까

 

난 인생 운빨이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너 오늘 운 없다.” 진골들의 연회장에 들어선 무명(박서준)은 친구인 막문(이광수)을 흠씬 두들겨 패는 귀족에게 그렇게 첫 마디를 던진다. 달려드는 그를 가볍게 제압한 무명은 바닥에 칼로 둥그런 원을 그어놓고 말한다. “왕경에 들어온 천인을 베는 게 니들 법이면 이 선을 넘어온 귀족을 베는 건 내 법이다. 베고 싶으면 넘어와서 베. 다 상대해줄 테니까.”

 

'화랑(사진출처:KBS)'

KBS <화랑> 첫 회의 이 마지막 장면은 이 사극이 앞으로 전개해나갈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야기해준다. 그것은 천인의 신분이자 이름조차 없어 무명이라 불리는 이가 왕경의 진골들만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와 그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기만의 독보적 위치를 세워가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의 모습이 진골 중의 진골인 수호(최민호) 같은 인물도 호감어린 시선을 던지는 걸 보면 신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무명이라는 인물에는 존재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건 바로 운빨이라고 말하는 그가 생각하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정해진 운명을 그저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주사위를 던질 것인가. 무명이 항상 주령구를 들고 다닌다는 건 이 인물이 주사위를 던지는캐릭터라는 걸 말해준다. 주령구는 신라인들이 놀이로 사용했다는 14면체 주사위. 무명은 주령구를 굴려보고 거기 나오는 괘에 따라 행동한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주사위를 굴린다는 이 캐릭터 설정은 이 <화랑>이라는 사극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이 사극의 기본 구조가 골품제도라는 신라의 태생부터 정해지는 운명과, 그것을 깨치고 나가는 무명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로 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회에 이미 드러난 것들이지만 이 사극에는 성골인 지뒤(박형식)가 베일에 싸인 인물로 서 있고, 그를 돕거나 해하려는 파로 나뉜 진골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여자주인공인 아로(고아라)는 진골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진골도 천인도 아닌 경계인의 위치에 서 있다.

 

이처럼 <화랑>에서 신분은 이야기 구조상 중요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이름조차 없는 무명이라는 것과 그가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굴리는 것이라며 주령구를 들고 나타났다는 건 그가 이 틀에 박힌 신분제를 깨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사극이지만 현대극을 사극버전으로 옮겨놓은 듯한 장소와 상황과 설정들이 등장하는 <화랑>은 그래서 그 신분제를 갖고 지금 현재 우리에게 던져진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의 시대를 얘기하는 중이다.

 

태생으로 정해진 삶이란 무명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난 이들만 힘겨운 건 아니다. 어쩌면 성골로 태어났으나 그래서 늘 자객의 칼날 아래 위협받으며 숨겨진 채 살아가는 지뒤도, 그렇다고 귀족의 양자가 되어 살아가면서 진골로서 자신을 세워야 하는 운명에 독한 현실적인 선택들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반류(도지한)도 그 운명이 좋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이 골품제라는 시스템은 운명을 태생적으로 결정짓는다는 그것 때문에 그 테두리 안에 살아가는 청춘들을 질식시킨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사는 현실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화랑>의 첫 방송은 6.9%(닐슨 코리아)의 시청률로 생각만큼 좋은 성적은 아니다. 물론 전작이었던 <우리 집에 사는 남자>보다는 높은 수치지만 사극인데다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됐던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낮은 수치다. 아무래도 경쟁작인 <낭만닥터 김사부>의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극의 운명이 이대로 끝날 것이다 단정하긴 어렵다. 무엇보다 무명이 들고 있는 저 주령구가 의미하는, ‘태생적 운명과 대결하는모습이 얼마나 지금의 현실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공감시키는가에 따라 운명은 바뀔 수도 있다. 과연 <화랑>이 던지는 주령구의 괘는 어느 쪽으로 굴러갈까

KBS <무림학교>의 지옥에서 <태양의 후예>의 천국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아마도 KBS 드라마국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학원물과 판타지를 접목한 <무림학교> 역시 애초의 기획은 야심찼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는 첫 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여지없이 무너져 내려 시청률은 거의 3%대를 전전하다 2.8%(닐슨 코리아)로 종영했다. 조악한 CG와 병맛을 추구했다기보다는 너무 엉성한 스토리. 시청자 반응 또한 최악이었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뒤집는 구세주로 등장한 게 <태양의 후예>. 수목극에 들어오자마자 <태양의 후예>는 첫 회에 14.3%로 가뿐히 두 자릿수를 넘어섰고 고작 4회 만에 거의 10%가 오른 24.1%를 기록했다. 김은숙 작가표 멜로 특유의 맛깔 나는 대사와 그리스에서 찍은 화보 같은 영상들, 스케일과 디테일을 모두 잡으며 <태양의 후예>는 대중문화의 가장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다.

 

광고 완판은 물론이고 재방송까지도 75%의 광고 판매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는 극히 드문 사례다. 100% 사전 제작되어 중국과 동시 방영되고 있는 <태양의 후예>에 대한 중국 반응 역시 뜨겁다고 한다. 아직 정확한 수치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제2<별에서 온 그대> 신드롬이 생기는 건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측이 들려온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그간 너무나 오랫동안 고개를 숙여왔던 KBS 드라마가 이 한편의 드라마가 거둔 2주간의 성과로 그 이미지 쇄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 고정적인 시청층을 갖고 있는 KBS 드라마는 늘 괜찮은 시청률을 냈지만 그래도 드라마는 트렌디한 주중 미니시리즈에서 성과를 내야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주중드라마에서 두 자릿수 시청률도 달성하기 힘겨워했던 KBS 드라마는 그 수모를 <태양의 후예>를 통해 시원하게 날려 보냈다.

 

<태양의 후예>의 성공은 또한 최근 지상파 드라마를 위협해오던 tvN 드라마의 독주를 잡았다는 데서 단지 KBS의 차원을 넘어 지상파 드라마들 전체에도 고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상파 플랫폼의 한계처럼 지목되며 늘 비슷비슷한 형태의 드라마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지상파 드라마들은 <태양의 후예>의 성공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은 지상파 플랫폼에서도 먹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궁금해지는 건 KBS가 어떻게 <태양의 후예> 같은 보물을 잡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정도 작품이라면 타 방송국에서도 충분히 탐을 냈을 만한데 어째서 KBS였을까. 13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가 투여된 작품이다. 보증수표라고 하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방송사로서는 고민이 될 만한 작품이다. 특히 블록버스터드라마는 의외로 성공확률이 낮았다는 것이 방송가의 공공연한 이야기다. 드라마적인 스토리보다 볼거리에 치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양의 후예>는 달랐다. 볼거리도 있지만 그 안에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있다.

 

<태양의 후예> 역시 여러 타방송사에서도 고민을 했던 작품이다. 하지만 타방송사들이 아닌 KBS가 이 작품을 선뜻 편성하게 된 건 보다 더 절실한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너무 오랫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KBS 드라마로서는 보다 과감한 투자가 되더라도 확실한 성공을 통한 이미지 제고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KBS의 선택은 옳았다. <태양의 후예> 한 편의 뒤집기로 KBS 드라마의 위상은 확실히 제고되었다. 이어지는 KBS 드라마의 라인업들에 대한 기대감도 한껏 높아졌다. 김우빈과 수지가 캐스팅된 <함부로 애틋하게>, 박서준, 박형식의 <화랑 : 더 비기닝>, 박보검을 캐스팅한 <구르미 그린 달빛>까지. <태양의 후예>를 통해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한 KBS 드라마들이 올해 어떤 행보를 그려나갈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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