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가 왈츠풍의 클래식이라면 표민수 PD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코믹하고 경쾌한 스타카토풍의 소품이다. <봄의 왈츠>가 하나의 운명적인 서사시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쿡쿡 대며 웃다가 눈물이 나는 순정만화이다.
<봄의 왈츠>의 시작이 청산도의 바다를 잡아, 섬에 갇혀 점점 섬이 되어가는 한 사내의 어린시절을 그렸다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강원도 오지 첩첩산골에서 다시 만나는 과거의 아우라다. <봄의 왈츠>의 주인공들이 과거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듯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김래원 역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교통사고로 애인이 죽은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상처를 다루는 방법은 <봄의 왈츠>와 같은 정공법이 아니다. 상처를 보여주고 그 기저의 감성을 갖고 다음의 드라마를 엮어간다기 보다는,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면서 언뜻언뜻 보이는 상처의 모습으로 드라마를 엮어간다. 따라서 드라마의 힘은 <봄의 왈츠>와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서로 다르다. 전자는 과거의 상처에 힘의 근원이 있고, 후자는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그 힘이 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김래원은 뮤직비디오 촬영차 산골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죽은 애인과 똑같은 정려원을 만난다. 잘 나가는 영화감독과 시골소녀의 만남.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릴 것 같은 그 만남은 표민수 PD 특유의 만화적 구성으로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표민수 PD는 한 공간에 이질적인 신분의 남녀를 집어넣고 그 톡톡 튀는 대결구도를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풀 하우스>에서 비와 송혜교의 만남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김래원과 정려원의 만남 또한 익숙하다. 이질적인 만남을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것은 장소와 유머다. 우여곡절 끝에 정려원의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는 김래원의 모습은 저 도시에서 잘나가던 PD가 시골집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반면 정려원은 시골소녀지만 그 시골에서는 김래원을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에 정려원이 도시로 왔을 때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하는데 고스란히 활용될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은 만화적인 화면 배치를 통해, 풋풋한 동화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동시에 신분이 다른 남녀의 대결양상은 물론이고, 자연스러운 관계의 끈을 만들어낸다. 표민수표 드라마의 공력이다. 하지만 이 가벼운 이야기와 경쾌한 농담은 동시에 그 기저에 있는 캐릭터들의 무거운 아픔이 전제되어 있기에 힘을 발한다. 이것은 순정만화 속에 심각한 표정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옆에서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키득대는 망가진 캐릭터가 공존하는 풍경과 같다. 요는 ‘뭐 그렇게 심각하게 폼을 잡냐. 누구는 안 아픈 줄 아냐.’는 식의 이야기다.
정려원의 캐릭터는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김삼순의 모습을 닮아있다. 시골에서 도시의 잘 나가는 PD,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인 정려원은 이제 도시로 와서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을 것이다. 하지만 정려원이 누군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촌스러움으로 힘으로 맞서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표면적인 달콤함을 바르고 있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걸 헤쳐나가는 정려원의 모습이 관건이다. 물론 현재지향적인 표민수 PD 특유의 톡톡 튀는 대결구도가 흥미를 제공한다.
<봄의 왈츠>의 구도는 어린시절의 우화가 만들어낸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구도는 산골오지에서 김래원이 정려원과 만나 벌이는 해프닝이 차지한다. 전자가 어린이를 내세웠지만 어른들의 드라마를 보여준 반면, 후자는 어른들이 나오지만 어린아이들 같은 대결구도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전자가 인파이터로 첫주먹을 날렸다면, 후자는 변칙복싱으로 대응했다. 첫 대결은 1:1 무승부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다음주부터가 될 것이다. <봄의 왈츠>의 재하는 죽은 걸로 알고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왔던 은영을 만나러 달려갔고.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과 김래원은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섰다. 이제 드라마의 구도는 완성되었고, 2라운드의 흥미진진한 전개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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