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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블로거의 시선

'하하하'가 우스운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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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를 본 지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제목이 '하하하'이고 그래서 여름처럼 밝은 웃음을 연상시키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꽤 유쾌하게 웃었더랬습니다. 홍상수 특유의 냉소적 시선이 거둬지고 어떤 세상에 도통한 듯한 허허로움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유쾌함은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정도가 흐르면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웃었던 그 순간적인 유쾌함이 조금씩 기억에서 상쇄되어갈 즈음, 그 웃음 뒤편에 숨겨져 있던 허무가 조금씩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 문경(김상경)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이 만나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난 여름 다녀온 통영에서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재의 장면들은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동영상이 아니고 정지된 사진을 이어붙인 것입니다. 그것도 흑백사진. 그 위로 이들의 대화가 흐릅니다. 그 과거를 짧게 술 마신 자의 특유한 유쾌함을 섞어 단평하는 내레이션은 과거의 한 여름 통영에서 있었던 일로 관객을 인도합니다. 현재를 포착하는 흑백사진과 과거를 포착해내는 컬러 동영상은 실로 아이러니한 대조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 선명한 과거라고 여겨졌던 사건들이 사실은 불투명한 현재의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는 허무가 깔려 있습니다.

문경과 중식이 통영에서 겪은 일들은 무엇일까요. 문경이 한 것이라고는 관광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난 것이고, 결혼한 중식은 애인 연주(예지원)와 함께 불륜의 한 때를 보내면서 후배이자 시인인 성옥의 애인 정호(김강우)와 술마시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통영에서 서로 얼키고 설키면서 벌이는 이야기들은 홍상수식 자잘한 일상 스케치로 그 내용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얼키고 설킨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현재의 문경과 중식이 각각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막걸리를 마시면서 과거를 얘기하는 그들은 저마다 자기의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을 뿐, 사건의 진짜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즉 그들에게 벌어진 일상의 사건들은 오리무중입니다. 사건들은 어떤 인과에 의해 벌어지기보다는 그저 불쑥불쑥 솟아나는 본능적인 감정에 의해 일어납니다. 과거를 회고하는 현재의 시점에서의 스토리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부여된 현재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사건은 그저 벌어지는 것이고, 인간은 그 우연히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의미화하려 애씁니다. 우리 삶의 일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벌어지는 일들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절망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성옥이 관광해설을 할 때, 이순신 장군이 했던 업적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여행객에게 과도할 정도로 흥분하면서 "어떻게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의심할 수 있냐"고 말하는 장면은 우습지만, 한편으로 보면 쓸쓸한 삶의 한 자락을 잡아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있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살아가지만, 실상 그것이 그렇게 의미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질문에 딱히 정확한 답변을 해줄 수 없을 때, 그래서 자신의 삶이 사실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성옥이 그랬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죠.

시인 정호가 "이 꽃이 뭐냐?"고 계속 질문하면서 "너희는 모른다"고 말하는 장면도 우스꽝스럽지만, 바로 우리가 그의 그런 행동을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는 그 대목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의미화를 통해 우리네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려 노력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세상의 본질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문경이 꿈 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는 장면 역시 우습기 짝이 없는 장면이지만, 그렇게 꿈 속에서라도 의미화를 꿈꾸는 인간의 삶은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재의 탁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과거를 이야기하는 '하하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스토리는 과거를 소재로 해서 의미화가 덧붙여진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삶이 들어가 해석되어 있는 과거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술자리의 안주거리 정도가 되는 것이죠. 지난 여름의 들떴던 청춘 같은 삶의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여름이 지난 자리 어떤 술자리에서 가벼운 농담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던 어떤 막걸리 자리의 취기어린 기억 또한 빛바랜 사진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 '하하하'는 그렇게 그저 의미없이 지나간 과거를 밝은 한 때 여름 날의 유쾌했던 시간으로 반추하려는 안간힘이 우리네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유쾌하게 웃고 나면 아련한 슬픔이 남는 건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영화를 회고하며 글을 쓰는 저의 이 모습이 영화 속 문경과 중식이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나누던 그 장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처럼 프레임 속에 담겨진 그 영상들을 기억해가며 무언가 의미화를 시키려는 안간힘.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 사이에 벌어지는 의미화. 어찌 보면 하하하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그 장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