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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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의 숙종, 깨방정이어도 되는 이유

D.H.Jung 2010. 5. 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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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명실공히 한국방송사극의 개척자인 신봉승 작가에 대한 저의 기억은 좀 엉뚱합니다. 오래 전 잡지사에서 일할 때, "조선의 임금들은 왜 단명했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어서죠.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이 작가의 임금에 대한 새로운 식견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왜 단명했을까요? 지나친 격무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신하들과의 줄다리기 때문에? 글쎄요. 의외로 답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운동을 안한다. : 운동할 일이 별로 없었겠죠. 행동반경도 궁이 전부였으니.
둘째. 섹스가 잦다. : 왕은 무치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원하면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 고단백의 음식을 많이 먹는다. : 산해진미를 원하는 대로. '대장금'이 증명해주죠.

새로 시작한 사극, '동이'를 보면서 그 숙종(지진희)의 깨방정을 보면서 저는 제일 먼저 이 신봉승 작가가 썼던 그 글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동이(한효주)와 숙종이 도망치는 장면에서 "이렇게 멀리 달려본 적이 없다"며 헉헉대는 숙종을 볼 때, 저게 '리얼이다'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최근에 신봉승 작가가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를 읽고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신봉승 작가는 '동이'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 사극에는 국가적 맥락이 없다"면서 "적어도 사극이라면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저변에 까는 역사인식이 기본"이며 "이런 역사인식은 정확한 사실과 적절한 해석이 조화됨으로써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숙종을 '깨방정'과 연결시킨 것에 대해서 그것은 "역사인물을 친근화"하는 것이 아니고 "위엄과 카리스마를 갖춰서 숙(肅)이라고 했다는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왜곡된 군주상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죠. 나아가 신 작가는 "요즘 사극들은 역사 속의 이름만 빌려왔을 뿐 한편의 활극이나 사랑타령일 뿐"으로 "재미만 추구"하며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작진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전문 : [조선인터뷰]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 신봉승 작가)

신봉승 작가가 우리네 사극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한글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신 작가는 손수 그 많은 책을 독파하면서 우리 사극의 밑거름을 쌓았죠. 하지만 민족주의 시대도 아닌 지금,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 국가적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서울, 1945'가 KBS가 좌파를 미화하고 건국대통령을 비하하는 작품이라 폄하했고, 반면 일본 NHK에서 방영한 '언덕 위의 구름(명치유신기 새나라 건설을 위해 몸바친 이들을 재조명한 작품이라고 합니다)'같은 '국가맥 맥락에 기여'하는 작품을 높이 평가했죠. 이런 시선으로 현재 '동이'에서의 깨방정 숙종이 주는 대중적인 공감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봉승 작가가 말하는 현 사극들의 '정사(正史)를 훼손하는 행위'는 수차례 논의가 되어진 것들이지만 '사극이 역사를 대변한다'는 그 인식이 바뀌어진 현재 그다지 의미있는 해석은 아닙니다. 사극은 과거 사(史)에 더 쏠렸던 무게중심을 극(劇)쪽으로 옮겨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극을 역사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새로운 인식에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역사란(특히 정사란) 기득권자의 시선일 뿐, 당대를 살아간 수많은 민초들의 이야기들을 모두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의 사극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과거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죠. 이 상황에서 역사의 실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극 자체가 역사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수용됩니다.

깨방정 숙종을 보면서 물론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극적 이야기 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과장이 있겠지만 어쩌면 저게 실제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숙종이 낮은 자들에게 털털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또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쟁만을 일삼는 중신들에게는 지엄하게 꾸짖는 그 상반된 태도는, 숙종이란 왕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던가를 에둘러 말해줍니다.

역사가 하나의 시각이라면,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누군가를 가슴 뛰게 사랑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어떤 면으로 보면 신적으로 이미지화된 엄숙하고 돌 같은 왕을 우리는 더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왕정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존엄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극이 점점 역사의 엄숙주의의 박제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상상력으로 살아움직이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힘겨웠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서 우리는 이제 다양성의 사회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민주화 운동 역시 아무리 무거운 역사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좀더 작고 일상적인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침 올해 처음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5월10일부터 6월15일까지 <제1회 민주주의 UCC 공모전>http://civicedu.tistory.com/15을 가진다고 하는데요, 그 취지를 들여다보면 역시 거창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의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여해 자신만이 느꼈던 작은 민주주의를 피력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사람이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임금은 늘 한 가지 이미지로만 굳어져서 우리에게 보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양성이 민주화의 한 잣대로 제시되는 현 시대에 어울리는 진정한 이해와 소통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