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파괴된 사나이', 스릴러가 공포물이 된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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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스릴러가 공포물이 된 이유

D.H.Jung 2010. 7. 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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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들이 거의 매일 뉴스로 방영되는 요즘, '파괴된 사나이'는 스릴러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포물에 가까운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어느 날 다섯 살 짜리 혜린이가 유괴되고 그 후로 신실한 목사였던 영수(김명민)는 믿음을 버리고 파괴된 삶을 살아갑니다. 아내인 민경(박주미)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 딸을 찾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오고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유괴범 병철(엄기준)은 8년 간을 감금해놓고 키워온 영수의 딸을 놓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영화는 저 스릴러의 한 장을 세웠던 '추격자'와 '그 놈 목소리'를 이어붙인 느낌이 나지만, 디테일은 상당히 다릅니다. 일찌감치 범인을 드러내놓는 이 영화는 미스테리를 벗어내고 딸을 찾는 아버지와 범인 사이의 팽팽한 대결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소리'에 집착하는 범인은 잘만 살렸다면 꽤 괜찮은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였던 영수의 설교(성서에는 말씀이라는 청각적 기호가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죠)와 범인의 음에 대한 집착.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이지, 영화에서는 그게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들은 꽤 긴박하지만 또한 관습적이기도 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장면들이 반복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김명민의 연기입니다. 아이를 잃은 후의 아버지의 변화(여기에는 목사에서 막 사는 의료기기업자로의 변화도 포함됩니다)는 꽤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무표정하면서도 어딘지 냉소적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은 죄의식이 담겨진 그 얼굴. 역시 김명민이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되는 그런 역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절박함은 작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분노, 적개심, 죄의식, 무력감 같은 것이 거기에는 뒤범벅되어 있죠. 어찌된 세상인지 이제는 불안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 입구에 서 있는 것조차 다른 학부모들의 의심스런 눈총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안한 사회 속에서 학교 입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그런 처지가 되어 있죠.

'파괴된 사나이'는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스릴러로 즐길 수 없는 영화가 됩니다.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반복일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 영화는 꽤 디테일하게 아이가 당하는 폭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화관을 찾는 아버지들에게는 굉장한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는 꽤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네 스릴러 영화들이 다 그렇죠. '살인의 추억'에서도, '추격자'에서도 경찰들은 도대체 뭘 하기 위해 그런 제복을 입고 있는 존재들인지 알 수 없게 그려집니다. '파괴된 사나이'에서도 결국 이 범인과의 사투 끝에 딸을 구하는 것은 당사자인 아버지입니다. 즉 아버지를 구원해준 것은 종교도 아니고 사회의 따뜻한 시선도 아니며, 정의 또한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괴로운 건, 이 공권력이 이런 끔찍한 범죄에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영화 속의 사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최근 공공연히 벌어지는 '고문 경찰'의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럴 볼 때마다 범인은 잡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진짜 범인은? 아마도 저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요.

'파괴된 사나이'가 공포물이 된 것은 물론 의도된 연출 탓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화적 현실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