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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당신만의 미친 존재감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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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사진출처:MBC)

정형돈의 패션 감각은 누가 봐도 꽝이다. 먼저 그 주체할 수 없는 뱃살이 망할(?) 패션의 종결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패션 꽝의 정형돈이 누가 뭐래도 연예계 패션 리더로 지목하는 지드래곤에게 지적질을 한다. 패션이 영 아닌 것 같다며 그는 자신의 엉망진창 옷차림을 자랑한다. "지드래곤 보고 있나? 이게 패션이다." 이런 도발적인 선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조정특집’에 출연한 조인성에게 정형돈은 몸매 관리를 조언하는 망언(?)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도발이 의외의 반향을 만들어낸다. 대중들을 정형돈의 이른바 ‘보고 있나’ 지적질에 열광하며 각종 패러디를 쏟아낸다. ‘무한도전-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정형돈과 듀엣을 이뤘던 정재형은 이 정형돈의 역발상 개그를 그대로 패러디해 보여줌으로써 똑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정형돈의 개그를 그대로 이용해 "유희열은 나부랭이, 김동률은 조무래기, 자신은 신"이라고 표현한 정재형은 후에 유희열 팬 페이지에 "유희열 보고 있나..."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무엇이고, 여기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열광은 또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미친 존재감’이라는 단어다. ‘웃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개그맨’, ‘무존재감’을 캐릭터로 만든 정형돈은 이 역발상을 좀 더 공격적으로 활용한다. 즉 ‘무존재감’을 거꾸로 무기 삼아 존재감 있는 이들을 도발하는 것. 이것은 이 변화된 시대의 요구다. 주연이 중심에 서고 조연들은 그 그늘에 가려지던 과거에서 이제는 조연들도 각각의 미친 존재감으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끄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정형돈의 조금은 과장된 자신감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감의 소유자들 앞에 당당하게(어찌 보면 무모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이 웃음 이상의 공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정형돈이 보여준 것은 바로 이 미친 존재감의 시대가 요구하는 역발상이다.

미친 존재감은 어떻게 탄생했나
최근 들어 TV나 영화를 보다보면 의외의 발견(?)에 즐거워질 때가 있다. 주연이 아니지만 절로 "어 저 친구 대단한 걸!"하고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조연을 보게 될 때다. '넘버3'에서 송강호가 그 유명한 자장면 먹는 장면을 보일 때 그랬고, '왕의 남자'에서 유해진이 육갑이 역할을 진짜 이름에 딱 맞춘 듯 질펀하게 풀어낼 때 그랬다. '방자전'에서 변학도 역할로 방자, 춘향이 혹은 이몽룡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는 '부당거래', '해결사',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연달아 조연으로 출연한 송새벽은 대표적인 씬 스틸러(scene stealer)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씬 스틸러는 '추노'의 성동일이었다. 장혁, 오지호, 한정수 같은 멋진 사내들이 그것도 식스팩을 드러내며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 불룩 튀어나온 원 팩(?)에 칫솔질 한 번 안했을 것 같은 누런 이를 하고 머리는 산발한데다가 하는 짓도 영락없는 악당인 성동일에게 우리는 매료되었다. 왜? 그에게서 우리네 민초들의 정서를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드라마 속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주연의 죽음 못지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주연보다도 더.

사람들은 그래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그들만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른바 '미친 존재감'이라는 왕관이다. 기존의 주연과 조연으로 나뉘던 구분은 이로써 '존재감이 있는' 배우와 '존재감이 없는' 배우로 나눠지게 되었다.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그 역할을 해낸다면 이제는 그걸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대중들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작금의 달라지고 있는 대중심리이기도 하다. 과거의 대중들은 주목받는 것에만 지나치게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또 내가 가진 것보다는 타인이 가진 떡을 더 크게 보는 심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수평적인 시선으로 나와 타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친 존재감'은 바로 이 변화된 대중심리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신만의 미친 존재감을 찾아라
왜 꼭 1인자만 성공한다고 믿어온 걸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늘 주인공에 집착하던 시절을 발견한다. 학교에서도 반장을 해야 하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골목대장이 되어야 하며, 하다못해 연극을 하더라도 꼭 주인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며, 명문대학을 가지 못하면 주인공이 못되고 낙오되는 것으로 알았던 시절, 심지어 얼굴도 개성보다는 이미 정해진 미적 기준에 맞춰 순위를 매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주인공만 되려고 안달일밖에.

하지만 어디 세상이 1인자만 존재하는 것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1인자를 받쳐주는 2인자도 필요하고 묵묵히 3인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소중한 존재들이다. ‘무한도전’에서 1인자인 유재석을 견제하는 2인자 박명수는 호시탐탐 1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즉 그는 2인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박명수가 1인자보다 더 주목되는 2인자의 역할을 해내는 이유다.

그토록 교육열이 뜨거웠던 시대, 우리는 오로지 주연의 자리만을 원했다. 주연의 자리는 딱 하나 밖에 없는데 전부 주연이 되려고만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았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주연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엘리트라고 불리는 주연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오인되었으니까. 수직적인 사회 체계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주연만큼이나 조연들을 주목해주었다. 주연 조연으로 나뉘는 '높고 낮고'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바라봐주는 그런 세상. 세상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것을 해냄으로써 움직이는 것이었다.

'미친 존재감'을 발견하게 된 대중들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의 가치도 바꿔가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넓혀가고 있고, 이미 '만들어진' 삶에서 차츰 '만들어가는' 삶으로 가치가 이동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미친 존재감'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저 길거리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들이나, 한 자리에서 몇 십 년 동안 구두수선을 해가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오신 분들이나, 시장통 한 구석에서 현재는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분들 모두는 이 사회의 '미친 존재감'들이다. 그러니 멀리 볼 것 없이 바로 당신 속에 있는 그 미친 존재감을 찾아야 할 일이다.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당신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