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상상플러스>가 플러스하는 상상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상상플러스>가 플러스하는 상상

D.H.Jung 2006. 2. 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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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플러스 그 처절한 오락프로의 세계

이런 상상을 해본다. 실로 연예계를 하나의 무림으로 본다면 지금 그 무림은 수많은 고수들이 출몰해 일순 빛을 발하다가 새로운 고수를 만나 스러지는 혼돈기임에 틀림없다고.
과거의 무림은 정돈되어 있었다. 한 계파가 다른 계파를 넘보는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흔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계파 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네모난 TV 속 무림계에서는 음악을 하던 이들이 연기를 하고, 연기를 하던 이들이 노래를 한다. 그들은 또한 너무나 팔방미인인 탤런트(talent)이기 때문에 각종 예능프로에 출연해 개그를 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을 홍보하면서 인간적인 이미지까지 확보한다.

문제는 개그계이다. 그들도 가끔 노래도 하고, 음반도 내며, 때로는 연기자로 변신하지만 그게 그렇게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렇다고 가수와 연기자들이 개그맨들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살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이곳은 하루 입 한번 잘못 뻥긋하면 퇴출되는 무시무시한 무림이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나 다양한 자칭 타칭 ‘입담 좋은 고수들’이 모여들고 있는 개그계, 지금의 개그맨들이 딛고 있는 땅이 너무나 좁아 보여 하는 말이다. 이 시대의 개그맨, 그들은 양극화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네 중간층(middle class)을 닮아있다.

KBS의 독주에는 의미가 있다?
TNS미디어코리아에서 조사한 지난 13일부터 19일 사이의 예능프로 전국가구 시청률을 보면 상상플러스(1위 28.3%), 개그콘서트(2위 21.5%), 해피투게더 프렌즈(3위 21%) 등 KBS의 독주체제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밖에도 비타민(5위 17.9%), 스타골든벨(7위 16.4%), 스펀지(16.4%)를 포함해 10위 중 총 6개 프로그램을 KBS가 독식했다는 것이다. 창사부터 연예와 오락을 모토로 했던 SBS는 비교적 오래된 프로그램인 진실게임(4위 20.9%), 야심만만(6위 17.3%)으로 겨우 체면만 살렸고, 반면 MBC는 꼭 한번 만나고싶다(9위 14.9%), 섹션TV연예통신(10위 14.9%) 등이 순위에 있긴 하지만 본격 연예오락프로그램인 ‘일밤’, ‘토요일’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 등이 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혹자는 KBS의 독주를 의미 있게 해석한다. 상상플러스의 올드 앤 뉴 같은 프로그램과 스펀지를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 + 엔터테인먼트)의 개가’로 보기도 하고, 해피투게더 프렌즈는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식 감동’이라고 해석한다. 개그콘서트는? 당연한 얘기지만 개그콘서트는 개그콘서트니까 독주대열에 낀다. 즉 새로운 형식을 시도한 첫 번째 개그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사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의미 있는 해석이 독주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까? 이미 최초의 의도였던 인포테인먼트는 희석될대로 희석되었고 이제는 말장난에 가까운 출연자들의 멘트가 그 자리를 차고앉는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 인기의 비결이 출연자에 있다고 말한다. 탁재훈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 말도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기는 하다. 하지만 상상플러스에서의 탁재훈이 맡은 역할에 비하면 해피투게더 프렌즈에서의 역할은 상당히 적다. 프로그램의 기획단계에서 출연자까지 기획에 포함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인기의 비결에는 아무래도 출연자보다는 기획에 힘이 실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상상플러스의 독주를 이끌었던가.

시스템의 칼날 위에서 춤추는 개그맨들
어떠한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는 그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고, 직간접적인 이익 때문인 것처럼, 예능프로의 의미 역시 사실 순위가 만든 것이지, 그 자체가 인기비결은 아닐 것이다. 시청률은 사실상 재미가 판가름한다(물론 재미에도 다양한 층위가 있겠지만). 시청자들은 이제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순간적인 즐거움에 익숙해있다. 가끔 어른들은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말한다. “저들끼리 나와서 웃고 떠드는 걸 뭐가 재밌다고 보냐”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웃음에 중독되어있다. 토크쇼는 예능프로그램의 대세이다. 물론 개그콘서트류가 남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다. 개그콘서트는 그 컨텐츠 자체의 성공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성공으로 보는 것이 맞다. 편집이라는 칼날 아래 끊임없는 경쟁을 유도하는 개그콘서트의 시스템은 보는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지만, 개그를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작두 위에서 추는 춤처럼 위험하기만 하다.

요인은 폭로와 무너지기에 있다
그렇다고 토크쇼가 개그맨들에게 안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개그맨 혹은 개그맨에 준하는 재담을 가진 이(탁재훈 같은)가 MC를 맡고 매번 출연자들을 초대해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상상플러스 같은 토크쇼가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그 프로그램의 폭로성과 무너지기에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상상플러스에서 먼저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야심만만에서 야심차게 해왔던 일들이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사생활은 물론이고 동료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들춰낸다. 가만히 보면 출연자들은 어떻게 하면 무너질까 고민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스타로서의 고고함이나 신비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바로 ‘재수없음’으로 통하게 된다. 그들은 강박적으로 무너지기에 몰두하고,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아나운서를 세워놓고 하는 독특한 구성은 마치 이 프로그램이 유용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다르다. 아나운서가 누구인가. 뉴스를 전달하기도 해야 하는 아나운서는 철저한 공인으로서 표정은 물론, 말까지 조심스러운 직업이다. 아나운서를 세워놓고 놀리거나, 웃음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가학적 행위는 그 자체로 시청자들의 욕구를 풀어주면서도, 피해자(?)에 대한 묘한 동정심과 애착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스스로 가해자들도 무너지기를 통한 바보가 되면서 가해와 피해의 균형을 맞춘다.

이것은 비단 상상플러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비타민(스타들의 사적인 몸 상태 드러내기), 해피투게더 프렌즈(스타들의 어릴 적 개인사 드러내기) 등도 형태는 다르나 내용으로 보면 유사하다.

개그맨들의 자가당착과 우리네 중간층들
프로그램은 끌어내리기의 연속이다. 출연자도 마찬가지고, 고정MC도 마찬가지다. 다만 개그맨은 본래부터 밑에 있었기에 그다지 끌어내려진 것 같은 느낌이 없다. 반대로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연기자나 가수는 다르다. 따라서 프로그램의 귀추가 무너지기에 의한 웃음에 있기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건 개그맨이 아니라 초대된 출연자들이다.

이제 출연자들은 개그맨을 압도하는 웃음을 만들어낸다. 탁재훈(물론 고정 MC지만 과거엔 주로 출연자로 시작했다)이나 최근의 김수로 같은 인물들은 개그맨 이상의 웃음을 선사한다. 게다가 그들은 개그맨이 아니라는 이점도 갖고 있다. 즉 개그맨은 웃기면 당연한 거지만, 못 웃기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반면 연기자나 가수는 웃기면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사람’이 되고 못 웃기면 그냥 본업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인 개그맨들은 매번 새로운 복병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나는 치열한 전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복병들을 돕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러면 누가 이런 시스템을 제공했던가. 그것은 당연히 정책 결정자이다. 인물과 연기력에다 이제는 웃음까지 걸머지는 부자들의 시스템 속에서 달랑 무너뜨릴 몸 하나를 갖고 처절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개그맨들은 우리네 중간층을 닮아있다. 정책은 본래부터 중간층이 바랬던 대로 그들을 상류층으로 끌어올리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층으로 끌어내리는데 있었던 것이다.

처절한 개그맨들, 스스로 무너지기로 하다
<개그 콘서트>로 비롯된 개그맨들의 부속화는 개그맨 스스로를 처절한 개그전쟁 속으로 몰아넣었다. 편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스스로를 한없이 무너뜨렸다. 갈갈이는 무를 갈았고, 옥동자는 바보짓을 했으며, 세바스찬은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었다. 그렇게 생존하려 했지만 그들에게 전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그 전쟁 속에서 처절하게 생존하거나 퇴출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렇다고 전쟁 바깥에 있는 고정프로그램 속의 개그맨들이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더 웃기는 연기자들, 가수들이 등장하면서 개그맨들은 자신의 위치를 더 낮춰야만 했다. 국민약골로 새롭게 인기를 얻게 된 이윤석과 호통개그로 주목받고 있는 박명수 등은 이 끝없는 낮춤으로 개그맨으로서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가끔 예능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나 보기가 껄끄러워 고개를 돌리곤 하는 것은 그 처절함을 순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은 슬프다. 무너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나, 왜 모두들 그 길로만 걸어가야 하는 걸까. 왜 우리나라에는 우디 알렌 같은 지적인 개그맨이자 성공한 연기자, 감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웃음은 우리의 삶을 비틀고, 슬픔을 비틀어내면서 나오는 철학적인 그 무엇이다. 왜 우리는 그렇게 웃음을 바라고 웃으면서도 웃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개그맨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초대된 많은 연기자와 가수들도 처절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은 그 곳이 자신의 무림이 아니며 돌아갈 자신만의 무림이 있다는 최후의 안도감을 갖고 있을 뿐이다. 최근 극장가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시피한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코미디물들은 이제 이 처절한 개그의 시스템이 관객의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개그계의 무너지기 열풍은 이미 연예계 전반의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혼돈의 무림계,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지어 보이며 끝없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는 수많은 중간층들이 진정한 웃음을 지을 날은 언제일까. 그 날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