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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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블로거의 시선

2009외인구단, 오혜성? 차라리 마동탁이 낫다

D.H.Jung 2009. 5. 1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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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입니다. 허름한 만화가게에서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처음 접했던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벌써 몇 년입니까. 이십년 하고도 7년이나 흘렀습니다. '2009 외인구단'이 드라마화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반가움과 함께 걱정이 든 것은 그 세월의 무게를 과연 이 드라마가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었죠.

27년이란 세월은 참 많은 걸 변화시켰습니다. 그중 문화컨텐츠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여성들이문화 소비의 주체로 떠올랐다는 점입니다. 정보사회의 도래는 육체노동의 남성중심적 사회의 틀을 변화시켰고, 감성적인 요구에 따라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가속화시켰죠. IMF는 이러한 변화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도 읽혔습니다. 남성성이 주체가 되는 개발중심적 사고관은 IMF를 통해 그 거품을 드러냈고, 급격히 사회는 여성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오혜성이라는 캐릭터가 현재에도 주목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혜성이 누굽니까.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어마어마한 순애보를 가진 남성이고, 그 사랑을 위해서는 자신 하나쯤은 희생되어도 좋다고 말하는 캐릭터가 아닙니까. 과연 이런 감성이 지금 시대와 잘 맞을까요.

적어도 드라마 속에서 '가난하지만 노력한다'는 정서는 80년대에는 어필할 수 있었을 지 몰라도, 지금 시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얻고 싶은 욕망이 사실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문득문득 깨닫게 되죠.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나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윤상현) 같은 어딘지 비뚤어진 것 같지만 뭐든 진짜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에 우리는 더 열광하곤 합니다. 씁쓸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부유함은 이제 그 자체로 능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죠.

게다가 "너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이 희생적인 분위기는 지금 시대의 쿨한 정서와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그 자신이 번듯해야 타인을 사랑할 능력도 생긴다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죠. '가난해도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조금은 구닥다리의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자기 관리 또한 하나의 능력이 되는 사회죠. 물론 외인구단이라는 작품 자체가 그런 것이지만 오혜성은 끝없이 자기 관리에 실패(그것이 외부적 이유 때문이라고 해도)한 인물이고 그런 점은 캐릭터의 매력을 떨어뜨립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미래의 어느 한 목표에 모든 것을 걸고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그다지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아닙니다. 현재적 삶이 더 가치있는 삶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외인구단'은 어린 시절 저를 감동시키고 울렸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시대착오적인 정서를 갖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식으로 외인구단을 구성하는 이야기는 마치 '외인'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군대식 뉘앙스를 읽게합니다.

그래서 항간에는 오혜성보다는 마동탁이 차라리 이 시대에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딘지 관리되어 있어 보이는 듯한 그 마동탁이 가진 능력과 힘이 더 현실적이라 느끼는 탓이죠. 그런 면에서 '2009 외인구단'이 그려내는 오혜성이라는 캐릭터는 27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불황의 정서가 그 긴 시간의 세월을 역행해줄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요. 보다 지금 시대에 어울리는 오혜성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만일 진짜 그렇다면 오혜성이라는 캐릭터의 탄생은 보편적인 정서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특정한 시대적 상황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굳이 2009라는 숫자를 달았다면 적어도 그 숫자의 무게에 어울리는 재해석이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