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표절, 왜 연예인만 문제 삼나

 

어찌 보면 참 뜬금없는 논문 표절 논란이지만 그 후폭풍은 강력하다. 국민 강사로 불리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김미경은 실수는 인정했지만 표절 자체를 인정하지는 않았고 그래도 책임을 느껴 자신이 하던 방송 프로그램 tvN <김미경쇼>에서 하차했다. 이미 찍어놓은 방송 분량도 본인의 뜻에 따라 방영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고승덕의 집중분석(사진출처:MBN)'

바로 직전에 터진 인문학 비하 논란(사실 오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과 함께 갑자기 터진 논문 표절 논란으로 인해 본인의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낀 탓일 게다. 방송이라는 것이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어떤 논란이 생겼을 때는 증폭된 만큼의 더 강한 후폭풍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논문 표절. 아마도 대학원을 다녔던 이들이라면 “그게 뭐?”하고 반문할 정도로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석사 논문이라면 논문 몇 개 놓고 적절히 짜깁기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까지 여길 정도다. 이것은 석사 학위라는 것을(이미 대학이 그런 지경이지만) 하나의 스펙으로 여기고 또 학교 측에서도 돈벌이로 생각해 어느 과정을 다니면(돈을 내면) 주는 자격증 정도로 여기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논문 표절은 분명 용서되지 않는 일이지만, 이렇게 논문을 사고파는 이른바 스펙사회가 그 본질적인 원인 제공을 하고 있다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굳이 석 박사 학위가 필요 없는 분야에서조차 학위를 요구하는 사회는 강사나 심지어 연예인조차 학위를 갖기 위해 엄한 노력을 하게 만든다. 물론 이렇게 논문을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간판 삼아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함이다.

 

김미경이야 강사가 직업이니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증표로서의 학위가 필요 했을 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제 아무리 뛰어난 강사라고 하더라도 학위 없는 이들에게 주는 강의가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미경 이후 또 다시 논문 표절 논란이 불거진 김혜수나 김미화 같은 연예인에게 학위가 무슨 소용이 있었는 지 모르겠다. 물론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한 목적이나 때로는 강연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연예인에게 학위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김미경이 실수는 인정하나 표절을 인정하지 않은 반면, 김혜수가 쿨하게 자신의 표절을 인정한 것은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김미화가 부정한 이유? 글쎄 진짜 아닐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김혜수와는 조금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활동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좀 더 결과가 나와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안이지만 방송 이미지와 활동의 차이가 그 대응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판단이다.

 

어쨌든 김미경에게는 학위가 자신의 위치를 만드는데 그만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한 반면, 김혜수는 연기자로서 학위가 그녀의 위치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한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표절을 해서 학위를 받긴 받았지만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는 않았다는 것(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훨씬 더 쉽게 쿨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차이를 굳이 얘기하는 이유는 논문 표절에 있어서 그 활용도를 보자면 연예인보다는 다른 쪽에 더 집중해야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우리 대학가에 이미 공공연한 논문 표절 문제가 이렇게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 학위의 활용도가 상대적으로 적은 연예인이 그 주 대상이 되고 있는 건 어딘지 과녁이 잘못된 느낌이다. 연예인이기 때문에 더 많은 이슈가 되는 건 사실이지만 논문 표절 문제가 가장 첨예할 수 있는 공직자나 정치인 같은 전문 직종에 더 집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 강사로 불리며 방송가와 서점가의 스타로 떠오른 이미경은 어쩌면 학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전문가와 연예인(방송인이 더 정확할 것이지만)의 중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파장이 클 수 있었다. 하지만 김혜수나 김미화 같은 연예인들로 그 불똥이 먼저 튀는 것은(물론 이것도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사안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논문 표절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도 큰 문제지만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 연예인 같은 도드라진 존재 몇 명을 희생양 삼음으로써 오히려 그 문제의 뿌리를 놓치는 행태가 일상화되는 건 더 큰 문제다. 논문 표절은 우리의 눈에 지금 보이고 있는 몇몇 연예인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거의 장사가 되고 있는 대학가 학위의 문제, 실력보다는 그렇게 받은 학위라도 스펙으로 먼저 인정되는 사회, 그래서 이제는 김미경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돈이 없으면 ‘개천에서 용 나는 건’ 더 이상 어려운 이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다 내포하고 있는 문제다. 연예인 몇 명에 집중하느라 그 문제들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석기 체험이 보여준 <정글>의 새로운 가능성

 

<정글의 법칙> 뉴질랜드편에서 병만족은 왜 굳이 채텀섬에 들어가 석기체험이라는 고행을 자처했을까. 칼도 없고 옷도 없고 가방도 통째로 없이, 동굴을 잠자리 삼아, 돌과 나무, 풀과 조개 같은 자연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이용해 살아남는 도전. 이 도전은 지금껏 정글 자체가 도전 상황이었던 <정글의 법칙>과는 사뭇 다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이것은 아마도 뉴질랜드라는 공간이 기존의 정글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뉴질랜드는 물론 천혜의 자연이 심지어 신비롭기까지 해 수많은 판타지 영화의 배경이 될 정도지만, 분명한 건 다른 정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연히 현대화되어버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보통 <정글의 법칙>은 앞부분에 정글 생존을 그리고, 뒷부분에 그 공간의 생존비법을 알고 있는 부족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존 노하우를 배우고 또 서로 소통하는 공존을 그리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뉴질랜드편이 아예 첫 회에 마오리족을 찾아가 생존비법을 전수받는 이른바 생존캠프로 보여준 것은 이미 이 부족이 모두 현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채텀섬이라는 조금은 뉴질랜드 본토에서 떨어진 섬을 찾았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그 정도로 깊게 들어가야 인적 없는 공간을 찾아 <정글의 법칙> 본유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초심을 내세우고 석기체험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이 현대화된 공간 속에서(물론 채텀섬은 야생이지만)도 야생의 모습을 의지적으로 그려내어 <정글의 법칙>이 본래 갖고 있는 의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 의도는 도시를 떠나 자연 속에서 그 힘겨움이 주는 양가감정, 즉 문명의 고마움과 동시에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 조금은 인위적인 도전 설정으로 이뤄진 석기 체험은 <정글의 법칙>에 어떤 가능성을 보여줬을까. 그것은 <정글의 법칙>의 가치가 정글이라는 공간이 주는 힘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떤 도전과 체험을 하려는 의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석기시대로 돌아가 생존해보려는 김병만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고, 이러한 하나의 생존 게임 같은 설정 속에서도 뉴질랜드 채텀섬이 가진 천혜의 자연공간은 변화무쌍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뉴질랜드의 날지 못하지만 전광석화처럼 달리는 런닝새 웨카를 잡기 위한 병만 족장과 정병장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냈다. 역시 족장다운 순발력과 경험으로 웨카를 척척 잡아내는 병만 족장과 달리 의욕 충만 정병장 정석원은 팬티 바람에 포복을 하면서도 연실 포획에 실패하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주었다.

 

김병만은 웨카를 잡기 위해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어 얼굴에 가시가 박히면서도 “6인분 잡아야 되거든”하는 말로 족장으로서의 책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집착하며 좇는 그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거꾸로 동굴을 찾아든 웨카는 그 자체로 돌발적인 상황극을 만들어냈다. 결국 동굴 속에 들어온 웨카를 잡아낸 정석원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이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조개를 잡고 전복을 발견해낸 박보영과 주변이 거대한 흑전복과 밤송이보다 큰 성게밭이라는 걸 알게 된 병만족은 그 자체로 순식간에 자신들을 감싸고 있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냥 웃음이 나오는 맛이네요”라고 말하는 박보영처럼, 소라를 잡아먹고 흑전복버거(?)를 구워먹고 천연의 신선한 성게 내장을 즉석에서 꺼내먹는 그 장면은 그 어떤 먹방보다도 보는 이들의 식욕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석기 체험이라는 고행에서도 웃음을 찾으려는 노력은 <정글의 법칙>이 결국은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그 위치를 명확히 하는 일로서 중요한 것이다. 반복적으로 사용된 <레미제라블>의 OST는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되어 혈거인으로 고생하는 병만족의 장면과 겹쳐져 페이소스 있는 웃음을 제공했고, 정석원의 OST로 활용된 군가 또한 그 캐릭터를 잡아주는데 있어 적절했다 여겨진다. 또 미끄러운 돌 위에 미끄러진 박정철과 노우진이 즉석에 보여주는 몸 개그는 힘겨운 석기체험이라는 미션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정글의 법칙> 초심을 떠올리게 했다.

 

<정글의 법칙>은 리얼리티 논란으로 많은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석기체험이 보여주는 그 의지와 그 속에서 느끼는 의미 그리고 힘겨움만큼 커지는 즐거움은 여전히 <정글의 법칙>이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논란이 벌어지기 이전에 시도된 것이지만 석기 체험 도전은 그래서 어찌 보면 <정글의 법칙>이 처음 아프리카의 악어섬에 들어가 보여주었던 그 초심을 의지적으로 확인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실로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의지다.

<그 겨울>의 배종옥과 김태우, 악역에도 격이 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에서 왕비서(배종옥)과 조무철(김태우)은 미스테리한 인물들이다. 누가 봐도 악역이지만 그 속내를 좀체 알 수가 없다. 왕비서는 눈 먼 오영(송혜교)의 뒷바라지를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마치 엄마처럼 오영을 걱정하고 챙기지만, 그녀가 사실 오영의 눈을 멀게 방치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모성이 아니라 모성에 대한 괴물 같은 집착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녀는 오영을 평생 옆에 두고 챙기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했던 것.

 

'그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왕비서가 자신의 집착이면서도 그것을 모성으로 꾸몄다면, 조무철은 정반대 악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무철은 오수(조인성)로 하여금 오영에게 거짓 오빠 노릇을 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100일 안에 78억을 갚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위협은 이 드라마의 가장 강력한 장치가 된다. 이 드라마는 자본의 문제와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겹쳐서 돈을 무화시키는 죽음의 힘,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애 같은 것을 다루고 있는데 조무철은 오수에게 바로 그 죽음을 드리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겨울>에는 그래서 세 명의 시한부 인생이 등장한다. 뇌종양이 재발해 죽어가는 오영이 그렇고, 말기암 판정을 받은 조무철이 그러하며 그로 인해 100일이라는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은 오수가 그렇다. 죽음이라는 명제와 78억이라는 돈은 늘 같이 병치되어 나오면서 동시에 삶과 사랑, 사람에 대한 가치가 부각되는 게 이 드라마의 핵심구조다. 조무철이라는 악역은 그래서 겉으로 보면 악역이지만 사실상 오수라는 탕자에게 진짜 삶을 부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진성(김범)과 오수를 죽이려는 김사장에게 100일을 채울 동안 기다리라 오히려 협박하는 조무철의 행동은 그래서 그가 실제로는 악역이 아닌 존재라는 걸 감지하게 해준다.

 

마치 엄마처럼 행동하고, 모성마저 가장하는 왕비서라는 존재와, 악역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오수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는 조무철이라는 존재는 <그 겨울>이 가진 격이 다른 악역의 결을 보여준다. 심지어 오영의 눈을 멀게 방치하는 왕비서라는 인물은 점점 그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악역이라기보다는 측은한 마음까지 들게 만드는 인물이 된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모성에 집착하게 했던 것일까 하는 마음.

 

'그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반면 가장 비열한 것처럼 보였던 조무철은 그 이면에 깔린 오수와의 애증이 드러나면서 점점 상처받은 짐승 같은 동정심을 유발한다. 어쩌면 조무철의 죽음은 오수를 구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악역이 이 정도의 구원자 역할을 해낸 캐릭터는 지금껏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치 않았을 게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특별한 악역들을 연기하고 있는 배종옥과 김태우의 연기력이다. 배종옥의 오영을 바라보는 눈은 엄마처럼 자애롭다가도 갑자기 치켜떠지면 공포영화의 그것처럼 보는 이들을 소름끼치게 만든다. 김태우의 오수에 대한 증오심은 한없이 폭발하다가도 어느 순간 언뜻언뜻 그 내면의 애정이 묻어난다. 눈가의 흉터는 잔인한 악마의 모습과 동시에 쓸쓸한 상처의 흔적을 담아낸다. 이들은 눈빛 하나만으로도 이 양가감정을 가진 캐릭터를 넘나들고 있는 셈이다.

 

악역조차 인간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아마도 노희경 작가가 가진 휴머니즘과 닿아 있을 것이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악마 같은 존재들이 그저 드라마의 극성을 만들기 위해 기능적으로 활용되는 <야왕>이나 <백년의 유산> 같은 드라마의 악역들과는 그래서 확연히 다른 격을 보여준다. 악역에게조차 어떤 온기를 부여하는 것. 이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김미경, 힐링과 자기계발 열풍의 양면성

 

한 달에 무려 40여회의 강연을 나가고, 가는 곳마다 부흥회에 가까운 반응을 얻고 있는 김미경. 최근에는 자기 이름을 내건 김미경쇼를 선보였고, <무릎팍도사>에 나와서도 거침없는 입담으로 강호동마저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였던 그녀. 이제 국민 강사라고까지 불리던 김미경은 왜 잇따른 논란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김미경쇼(사진출처:tvN)'

인문학 비하 논란에 이어 생긴 논문 표절 논란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벌어진 일 그 자체보다 논란이 훨씬 더 크게 번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사건의 경중 그 자체보다 일종의 대중정서가 작용했다는 얘기다. 김미경쇼에서 했던 발언이 뒤늦게 논란으로 이어진 이른바 인문학 비하 발언은 편집된 장면이 가져온 착시현상에 가깝다.

 

김미경이 해명한 것처럼 그녀는 인문학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다만 자기계발서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을 깨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 “시건방을 떨고...” 같은 다소 강한 표현이 논란의 촉매제가 되었다. 그녀는 해당 논란이 된 방송에서, 자기계발서가 인문학을 치열하게 읽고 남은 지혜가 한 사람의 책으로 쓰여지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인문학 서적이 내 머리로 들어오고 몸으로 들어와서 내 몸과 그 지식이 치열하게 소통하는 거야. 치열하게 소통하고 나면 한 방울 지혜로 남아. 인문학은 지혜 만들기 위해서 읽는 거라구. 근데 그 사람의 지혜가 삼백 페이지 책으로 쓰여지면 그가 자기계발을 해온 거고, 그게 자기계발서적이야. 근데 안 읽는다고? 웃기고 있어. 시건방 떨고... 나는요. 책은 아무 문제없어요. 사람도 아무 문제없고. 읽는 사람이 문제예요.”

 

인문학을 비하한 것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하에 자못 감정적인 논조를 섞어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들어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녀가 그토록 강연을 통해 설파했던 것들이 바로 그 자기계발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계발서에 대한 비하는 자신에 대한 비하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김미경이 얘기하는 것처럼 자기계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오히려 문제는 읽는 사람이 문제일까. 이 부분에서는 김미경이 갖고 있는 계몽주의적인 시각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이 생길만 하다. 즉 세상과 사회의 잘못과 부조리가 아니라 문제는 바로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 사회 시스템이 갖고 온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시각은 듣는 이에게는 마치 고해성사 같은 카타르시스를 줄 지는 몰라도 그 사람의 진짜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사실 자기 계발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권력이 대중들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다. 과거에 권력은 총과 칼로 대중들을 통제해 왔지만 근대 이후에서는 이른바 푸코가 얘기하는 파놉티콘처럼 스스로가 자신을 통제하는 기술들을 만들어왔다. 왜 우리는 굳이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하고, 왜 우리는 굳이 살을 빼기 위해 다이어트를 강박적으로 해야 하며, 왜 우리는 사회생활을 위해 무수한 처세들을 따라야 할까. 또 굳이 왜 그렇게 꿈을 강박적으로 가져야만 할까. 꿈이 있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것에 강박을 갖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도르노가 이미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명저를 통해 얘기했듯이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자연을 통제해왔지만, 그 자연의 일부가 인간 자신도 포함하고 있다는 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또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되고 조직화되는 비인간화를 꼬집었던 것이다. 과연 김미경은 이러한 자기계발서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

 

김미경이 하는 이야기는 속 시원하면서도 달콤하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걸 여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 논거의 대부분이 자신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살아왔던 개발시대의 사회와 작금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회는 다르다. 지금의 달라진 사회 시스템 속에서 생겨난 문제에 대해서 김미경은 과거의 해법을 들고 나오는 셈이다. 일종의 복고와 보수주의가 거기에는 깔려 있다. 지금 네가 안 되는 것은 네가 죽어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여전히 얘기하고 있다. 과연 그 말이 이 시대에도 맞을까.

 

갑작스럽게 나온 김미경의 논문 표절 논란은 그 사안 자체만 보면 뜬금없어 보인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석사 학위 논문, 그것도 직장인들을 위한 석사 과정에서의 학위가 얼마나 아카데믹할 수 있는지를. 박사 학위도 아니고 석사 학위에서 타인의 논문을 인용하는 것은 늘 있던 일이다. 그만큼 우리네 사회가 가진 학위에 대한 강박과 이제는 심지어 상술이 되어버린 학교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런 엄밀한 잣대로 논문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표절 아닌 것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즉 김미경의 논문 표절 논란은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놓여진 그녀에 대한 대중정서가 폭발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국민 강사라는 명성을 가졌으니 그만한 실력에 대한 일종의 검증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김미경은 분명 스피치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스피치는 말하는 기술이다. 정작 중요한 건 말의 내용이 아닌가.

 

김미경 신드롬과 논란 속에는 그래서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자기계발과 힐링 열풍의 뒤안길을 보게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예 들어갈 기회조차 주지 않는 세상 앞에 청춘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김미경의 꿈은 달콤하다. 적어도 몇 십분 동안 ‘나도 할 수 있다’는 설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강연을 듣고 나선 현실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아마도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지면 현실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이 왜 이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달라져야 할까. 그것은 또 다른 보수적인 순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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