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도 막을 수 없는 '1박2일'의 즐거움

'1박2일'(사진출처:KBS)

여행 가서 비오면 뭘 할까. 어디 가볼만한 곳이 있어도 돌아다니기 뭐 하고 그렇다고 방구석에만 콕 박혀 뒹굴자니 어딘지 허전하고. '1박2일'이 떠난 영월 가정마을의 하룻밤은 그 답을 알려준다. 떠나는 과정에서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는 미션을 치른 것을 빼고, 가정마을 편은 그들이 머문 베이스캠프를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자 카메라가 머문 곳은 다섯 사람이 누우면 꽉 차는 작은 방이 전부였다. 여기서 과연 예능이 가능할까?

가정마을편은 적어도 '1박2일'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한 회였다. 작은 방에서 갑자기 떠오른 이수근의 아이디어는 즉석에서 올림픽(?)을 연출하게 했다. 코끼리 코로 열 바퀴를 돈 후 벽에 만든 과녁에 검지로 인주를 찍는 이 기상천외한 경기는 좌중을 포복절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비틀거리다 과녁에는 가지도 못한 채 넘어지고 쓰러지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몸 개그의 향연을 만들었고, 경기는 발가락으로 과녁을 찍는 것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벌어진 게임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이수근의 멤버들 행동관찰 내기가 이어졌다. 제작진이 바지에 커피를 쏟았을 때 김종민의 반응이 "괜찮아요"라는 걸 걸고 벌어진 내기에서 김종민은 거짓말처럼 "괜찮아요"를 반복했고,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았을 때 3분 안에 "달라"고 할 거라는 은지원의 반응을 이수근은 기막히게 예견해서 내기에 이겼다. 사실 별거 아닌 내기지만 예견한 대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말과 행동은 충분히 재미를 주었다. 게다가 이를 '동물의 왕국'을 패러디해 연출해 넣자 효과는 만점이었다.

흥미로운 내기는 진한 페이소스를 남겼다. 즉 이 내기는 5년 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1박2일'을 해온 멤버들의 끈끈함을 말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이제 그들은 어떤 상황에 멤버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인지까지 척척 알고 있는 사이다. 그러면서 이것은 김종민의 착한 심성이나 은지원의 초딩스러움이 진짜 리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몰래카메라이기도 하다. 물론 후에 자막으로 들어간 것이지만, 이수근의 야외취침을 걸고 한 이 내기는 '하룻밤쯤 걸 수 있는 그들의 애정'을 보여준 결과가 되었다.

이 작은 방에서의 '1박2일'의 절정은 기상미션에서 보여진 엄태웅의 반전이다. '제가 다 할게요'라는 메모를 갖고 있는 사람이 아침밥을 하는 미션에서 이승기는 메모를 은지원에게 주었고, 은지원은 이것을 이수근의 주머니에 넣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메모가 이승기의 주머니에 들어있었던 것. 이 기막힌 상황은 사건(?)을 오리무중으로 이끌었고 결과는 후에 촬영된 카메라를 되돌려본 데서 밝혀졌다. 엄태웅이 슬쩍 이수근의 주머니에서 메모를 빼내 이승기의 주머니에 넣었던 것. 이를 확인한 작가와 PD는 "소름이 돋는다"며 '유주얼 서스펙트'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작은 방에서 벌어진 '1박2일' 간의 에피소드지만 거기에는 포복절도의 몸 개그를 보여준 게임이 있었고, 훈훈한 관계를 재확인해준 관찰 카메라가 있었으며, 마지막 드라마틱한 반전을 만들어낸 엄태웅의 심리 스릴러(?)가 있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다섯 명의 캐릭터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잠시도 쉬지 않고 아이디어로 웃음을 만들어내며 동생들을 생각하는 이수근의 마음이 있었고, 초딩 같은 천진함의 은지원,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김종민, 막내로서 형들을 따르고 챙겨주면서도 노래할 때는 황제 같은 면모를 잃지 않는 이승기, 그리고 맏형으로서 때론 버럭 하고 때론 우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뭉스러운 면모까지 보여주는 엄태웅이 있었다.

작은 골방에서 이뤄진 '1박2일' 가정마을 편은, 그저 다섯 사람만 모여 있으면 그 곳이 어디라도(심지어 작은 골방이라도) 사실상 한 회 분의 방송 분량 정도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는 이 예능 프로그램의 저력을 과시했다. 여행?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1박2일'은 그것을 이 작은 골방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정향 감독의 '오늘', 용서란 무엇인가

사진출처: 영화 '오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마이클 샌댈의 조금은 진지한 인문서적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적이 있다. 물론 엄청나게 책이 팔린 것과 많이 읽힌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에서 '정의'라는 문제에 대해 대중들이 그만큼 민감해하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술관 옆 동물원',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이 들고 온 신작 '오늘'은 여러모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렇게 묻고 있다. 정의는 무엇이고 또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하고 나니 편해?" 영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죽게 만든 소년을 용서한 다혜(송혜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정말 용서하고 나서 편해졌을까.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심지어 끔찍한 것이 삶이다. 용서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멀리서 바라보는 삶'을 살던 다혜는 어느 날 자신이 용서한 소년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그 끔찍한 사실을 눈앞에 목도하게 된다. 그러자 자신의 편안함(?)이 사실은 자기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용서란 가해자가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때 해줄 수 있는 일이지, 피해자가 저 혼자 용서한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이며, 나아가 정의의 시점으로 보면 또 다른 죄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오늘'이 파고드는 건 바로 이 지점들이다. 끔찍한 사건을 당한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사죄도 없이 스스로 '용서'할 것을 종용하는 사회. 그래서 용서했으니 죄도 가볍게 사해주는 사회. 하지만 제대로 된 사죄 없이 용서받은 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되는 현실. 잘 살겠지 하며 용서해줬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소년원에 들어간 소년을 찾아간 다혜는 '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와의 대면조차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즈음에서 정의는 애매해진다. 법은 피해자를 위한 것인가 가해자를 위한 것인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사실 다혜가 극중 인물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감독이라는 장치 속에 들어있다. 이 액자구조는 어쩌면 다혜라는 가상의 주인공이 겪는 심경의 변화가 바로 이정향 감독 자신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영화가 마치 심층다큐나 토론 프로그램처럼 여겨지는 건, 이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세계'를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사회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려는 감독의 노력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영화가 건조하기만 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에는 이정향 감독 특유의 멜로적인 선이 들어가 있고, 가족적인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래서 마치 멜로드라마와 다큐가 섞인 듯한 이 영화는 찡한 눈물과 우리의 이성을 두드리는 둔중한 질문이 공존한다.

하지만 이 '피해자들의 풍경'은 실로 처절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데 그를 죽인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사죄도 하지 않은 그들을 세상은 모범수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준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은 자를 국가는 무슨 자격으로 용서하는 것일까. 다혜는 피해자들을 찾아가 용서의 모습을 찍으려 하지만, 피해자들은 거꾸로 용서할 수 없는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즉 다혜가 찍으러 다니는 인터뷰는 거꾸로 다혜에게 질문한다. '용서하고 나니 정말 편하냐'고.

이 영화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불편한 진실'을 관객들에게 끄집어냄으로써 '사과 없는 용서'라는 허울 좋은 세상의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오늘'이 바로 가해자들이 처참하게 빼앗은 피해자들의 미래라는 것을 아프게 말한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그 오늘이 당신이 빼앗은 피해자들이 그토록 바라고 간절하게 여긴 그 시간들이라는 것을.


광고시간도 기다림으로 채우는 '슈스케'의 힘

'슈퍼스타K3'(사진출처:Mnet)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슈퍼스타K'에서 김성주 아나운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멘트는 사실 광고 소개나 마찬가지다. 케이블 채널이라는 특성에 맞춰 중간 광고를 60초 넣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프로그램 도중 뚝 끊기고 광고가 나오는 것을 인식한다면 시청자들은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웬걸? 김성주 아나운서가 이 멘트를 던지는 순간, 불만보다는 기대감 섞인 웃음이 나오는 건 왜일까. 도대체 무엇이 불만을 기대로 바꾼 것일까.

이 멘트가 거의 유행어가 된 이유는 그 멘트가 사용되는 지점과 관련이 있다. 즉 이 멘트는 '슈퍼스타K'라는 오디션 경쟁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하이라이트 지점에 포진되어 있다. 이 멘트는 본선 이전의 예선에서는 출연자들에게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졌고 그것에 대한 의문이나 궁금증이 커지는 지점에 들어갔으며, 본선에서는 어김없이 탈락자 발표 순간에 들어간다. "이번 오디션의 탈락자는..."하고 잠시 시청자와 밀고 당기는 김성주 아나운서의 입에 시청자와 관객의 눈길이 집중되었을 때, 그 긴장감을 무너뜨리며 "60초"가 언급된다.

이렇게 되자 '60초'의 시간은 광고가 송출되는 시간이 아니라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기대감의 시간으로 바뀐다. '60초'는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리는 시청자와의 약속어가 된 셈이다. 무엇보다 막연한 '잠시 후'가 아니라 '60초'라는, 구체적인 시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만일 '잠시 후'라고 했다면 언제 프로그램이 시작될 지 알 수 없는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60초다. 그 구체적인 60초는 시청자들을 기대감에 충분히 기다리게 해준다.

물론 '60초 후에 공개됩니다'라는 멘트가 이렇게 효과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 첫째는 김성주 아나운서의 이른바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즐거워지게 되는' 진행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김성주 아나운서는 스포츠 아나운서 출신답게 '슈퍼스타K'라는 무대를 온전히 하나의 스포츠 게임처럼 구성하는 능력이 있다. 출연자를 소개할 때는 마치 권투나 이종격투기 경기의 그것을 연상시키고, 노래를 부른 출연자들을 세워두고 심사위원의 평가를 받을 때는 마치 중간에 선 심판 같은 인상을 만들어낸다. 물론 탈락자 발표에 있어서 밀고 당기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은 그의 진행의 백미다. 이런 진행 방식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60초'를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된다. 그것은 즐거움을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건 두 번째 전제다. 그것은 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연 자체가 누가 남고 누가 탈락할 것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팽팽하다는 데 있다. 만일 우열이 확실히 갈린다면 마지막 탈락자 발표 순간의 '60초'는 밋밋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그 시간 또한 지루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숨은 실력자로 무대 위에 오른 그들의 경연은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렵다. 도대체 이 이미 자신들만의 스타일이 완성된 듯한 팀들의 우열을 어떻게 예측할 것인가.

많은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슈퍼스타K'가 독보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이 경중을 평가할 수 없는 뛰어난 실력의 참가자들 덕분이다. 이것은 아마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히 가장 많은 경쟁자들이 몰리기 때문일 것이다. 많이 오기 때문에 그만큼 실력자도 많은 셈이다. 프로그램 중간에 떡 하니 60초 정도는 기다리게 만들 수 있는 힘. 광고시간마저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채우는 '60초'의 위력은 그래서 거꾸로 이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참가자들의 높은 질적 수준을 얘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나가수', 문제도 해법도 청중에게 있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나는 가수다'는 가수의 무대일까, 청중의 무대일까. 가수의 정체성을 묻는 제목을 보면 마치 이 무대가 가수가 주인공인 무대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가수다'는 철저히 청중과 대중이 주인공인 무대다. 이 무대가 특별한 것은 가수들보다는(그렇다고 그들이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청중들 덕분이다. 아주 미세한 숨소리까지 긴장하며 들어주는 청중이 있기 때문에 가수들은 더 긴장하고 자신의 전력을 다하게 된다.

게다가 이 가수들은 지금껏 TV를 통해서는 '들어주는 귀'가 별로 없던 가수들이다. 그러니 이런 청중이 있는 무대가 주는 힘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제 아무리 가창력이 좋은 가수라고 해도 '들어주는 귀(이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뿐더러 잘 부르지도 못할 것이다. 노래는 '공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라이브 현장에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부르는 노래가 더 깊은 감흥을 주는 건 그런 이유다.

하지만 청중들의 귀는 훈련받은 귀가 아니라 그저 감성과 자극에 솔직한 귀다. 그러니 자극이 강한 지르는 창법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게 부르는 노래보다 먼저 더 귀에 박히기 마련이다. 조규찬의 도전 첫 라운드에서의 탈락과, 특집으로 기획된 '나가수 출신 가수들'의 경연에서 이소라가 7위를 한 것에 대해 이른바 '막귀 논란'이 생긴 건 이러한 가수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어 보이는 경연 시스템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전문가들에게 일정 부분 경연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장르적인 고려가 가능해져 좀 더 다양한 가수들이 이 무대에 설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막귀 논란'에 대한 지적은 어딘지 논리적인 모순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막연히 '나는 가수다'의 청중이라고 지칭하는 그들은 어쩌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청중평가단을 신청할 수 있고 평가단에 선정되면 투표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막귀'라는 지적하는 그들은 사실은 우리 자신이다. 김영희PD가 "지금 청중평가단도 달라지고 있다"고 얘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막귀 지적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그 달라지고 있는 청중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 말은 '나는 가수다'의 투표 시스템이 결국 청중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순간 이미 그 해결책도 제시되는 셈이란 얘기다.

본래 투표 시스템이라는 것이 그렇다.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것을 어떻게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질 수 있을까. 다만 한 명을 뽑는 것이니(물론 '나가수'는 세 명을 투표하지만) 각자 청중들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투표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투표하는 청중들도 여론을 인식하고 있다. 지르는 노래가 당장 귀에는 들어오지만 그것만 좋은 노래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아가고 있다. 그러니 '나는 가수다'는 어느 순간에는 지르기만 하는 가수를 외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딘지 촌스러운 발악처럼 여겨질 지도.

'나는 가수다'에 변화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이미 변화를 담보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라는 무대가 애초부터 가수들의 무대가 아니라 청중들의 무대였기 때문이다. 청중들이 원하는 것을 가수들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들여 부르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가수들의 존재이유이도 하다. '나는 가수다'라는 가수들의 자기존재 증명은 홀로 자기감정에만 빠져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거기 앉아 있는 청중들과 호흡하는 데서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수다'의 진면목은 어쩌면 '나는 청중이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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