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근석 신드롬, 신 한류 드라마의 조건

'미남이시네요'(사진출처:SBS)

일본에서 불고 있는 장근석 신드롬은 여러모로 배용준 신드롬을 닮았다. '겨울연가'는 우리나라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배용준으로 대변되는 1세대 한류의 시작이었다. 장근석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미남이시네요'나 '매리는 외박중'은 화제는 낳았지만 시청률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심지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이미 일본의 언론은 장근석으로 세대 교체된 한류를 얘기하고 있을 정도다.

'겨울연가'는 돌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후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네 드라마가 10여 년 동안 한류를 겨냥해왔던 것은 분명하다. 한 때는 퓨전사극이 그 뒤를 이었고, 심지어 블록버스터 드라마까지 제작되었다. 해외를 의식하면서 미드 같은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도 다수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과연 그런 이른바 한류를 겨냥한 드라마들은 성공을 거뒀을까. 물론 몇몇은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류를 염두에 두었다고 두드러진 성과를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미남이시네요'나 '매리는 외박중'의 장근석이 과거 '겨울연가'로 갑자기 등장한 배용준처럼 갑작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조준하고 있는 한류 드라마라는 것이 어쩌면 엉뚱한 방향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지도 모른다. 또 국내에서의 성공이 해외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때론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이 성공이라는 기준으로서의 시청률 산정이 사실은 그다지 신뢰하기 어렵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국내에서 제 아무리 시청률 40%를 넘긴 가족드라마라고 해서 해외에 신드롬을 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어떤 부분에서 벌어지는 왜곡이 이런 국내와 해외의 온도차를 만드는 것일까. 먼저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은 K팝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외의 콘텐츠들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것을 잘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K팝은 말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한때 박진영이 미국 진출을 선언하면서 미국시장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한 '미국화'여야 한다는 주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K팝의 성공은 외국인들의 눈과 귀에 맞출 일이 아니라, 그들의 눈과 귀가 K팝에 번쩍 뜨이게 하는 것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한류 한류 하지만 우리 드라마가 미드를 흉내 내서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그렇게 블록버스터들은 우리가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미드를 따라가기 어렵다. 반면, 우리 정서나 문화가 자연스럽게 들어가 있는 로맨틱 코미디류나 멜로는 그런 점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가진다. 여기에는 일본을 포함해 미국, 유럽 같은 서양에는 발견하기 어려운 우리 만의 끈끈한 정서가 숨겨져 있다. 이 사랑과는 또 다른 가족적이며 정(情)적인 감성은 같은 멜로를 그려도 분명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신드롬을 만들었던 것에는 바로 전후세대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는 그 따뜻함(배용준의 미소로 대변되는)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 '미남이시네요'와 '메리는 외박중'으로 일본에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것은 장근석의 그 아기 같은 미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 미소에 '미남이시네요'나 '메리는 외박중'이 다루고 있는 K팝적인 소재들이 어떤 상승작용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류 드라마의 양상 역시 마찬가지다. '시크릿 가든'이나 '커피 프린스 1호점' 같은 작품들이 파란 눈에 금발의 아주머니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쿨한 사회일수록 더더욱 그리워지고 희구하게 되는 그 정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하루의 피곤한 일상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딘지 위안 받고 싶은 마음으로 TV를 켜면 온통 쏟아져 나오는 게 '캅 콘텐츠(cop contents)' 같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미국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왜 거기 우리네 로맨틱 코미디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지 그 이유를 쉬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거꾸로 우리나라에서의 드라마판을 되돌아봐야 한다. 과연 최근 쏟아져 나오는 우리네 드라마들은 우리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눈앞의 시청률에 목맨 드라마들은 이른바 되는 코드들을 적당히 엮어서 비슷비슷한 드라마들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내고, 어떤 드라마는 한류를 겨냥한답시고 엄청난 제작비만 끌어 모아 말 그대로 돈 잔치만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제 TV로만 산정되는 시청률은 세대적인 고려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이미 콘텐츠는 TV는 물론이고 인터넷이나 IPTV 등 다양한 플랫폼으로 소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의 시청률은 중장년층의 시청률이나 거의 마찬가지가 되어 버렸다. 이 시청률 잣대가 광고비와 연계해서 제작을 압박한다면 나올 수 있는 콘텐츠는 불을 보듯 뻔한 것들이 아닐까.

이미 시대는 글로벌해졌고, 콘텐츠는 넘쳐난다. 우리는 여기 앉아서 미국의 콘텐츠든 일본의 콘텐츠든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굳이 그들을 따라 하거나 혹은 우리 안에만 매몰돼서는 이 글로벌한 시대의 콘텐츠로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곡된 시장의 흐름을 바로잡는 일은 그래서 한류가 주목될 때마다 국가가 나서서 어떠한 지원책을 내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기적의 오디션’, 단순히 연기자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다

'기적의 오디션'(사진출처:SBS)

대중들에게 연기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연기자를 뽑는 오디션은 낯설 수도 있다. 이 점은 음악을 소재로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비해 연기를 소재로 하는 '기적의 오디션'이 가진 약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연기가 갖고 있는 일면만을 보는데서 오는 오해다. 연기라는 것이 그저 대사 외워서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경험 그 자체이고 그것이 그 사람의 몸과 마음에 담겨서 배역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연기가 가진 흥미로움이 음악보다 낮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적의 오디션’은 연기가 가진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씨의 꿈을 캐스팅하겠습니다.” ‘기적의 오디션’은 왜 당락에 있어서 ‘합격’, ‘탈락’이라는 용어 대신 ‘꿈’이란 좀 더 거창한(?) 단어를 쓰는 걸까. 어찌 보면 과장된 용어처럼 여겨지지만 이 말은 그러나 거기 오디션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멀쩡하게 괜찮은 직장을 다니는 허성태씨가 어쩌면 현실적으로 더 어려울 수 있는 연기에 도전하고, 불우한 삶을 살아온 어현영씨가 그 내면적인 고통을 연기로 뿜어내려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그 ‘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연기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은 ‘연기’가 가진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기적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연기라는 꿈을 갖게 되고 무대를 향해 한 발을 내딛는 그 순간에 일어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결핍을 깨닫는 순간이고, 그것을 연기라는 어찌 보면 ‘자기 치유’의 과정일 수 있는 꿈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도전인 셈이다. 즉 연기가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정을 통한 경험이거나, 혹은 경험하지 못했기에 억압되어 있던 갈증의 발산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기적의 순간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두 번째 기적이 더 중요하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 쌓여진 어떤 것이 연기를 통해 드러나고, 그것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똑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곽경택 감독이 어현영씨의 연기를 보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찡한 감정이 올라왔다”고 말하는 그 순간, 후보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진다. 이 똑같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공감의 순간은 그 자체로 기적이면서, 서로를 변화하게 하는 기적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나는 기적은 이렇게 첫 발을 디딘 용감한 도전자들이 차츰 성장해 저마다의 결핍을 채우면서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늘 드라마와 영화 같은 영상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로 연기란 너무나 익숙해서 그 특별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 누군가가 진심에서 우러난 연기를 하고, 그걸 바라보는 누군가가 그 진심을 알아채고 공명하는 이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기적’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의 연기라는 소재는 그래서 단순히 기술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공명할 수 있는 연기는 온전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니까. ‘기적의 오디션’은 바로 그 기적 같은 지점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사랑타령을 넘어서 세상과의 대결을 유쾌하게 그려내다

'최고의 사랑'(사진출처:MBC)

"독고진이 구애정을 정말 열심히 사랑했다는 게 욕먹고 오해받을 일이 되지 않도록 제발 지켜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른바 독고진(차승원) 동영상에는 감동적이지만 씁쓸한 반전이 담겨져 있다. 대중과 언론들이 기대했던 것은 뭔가 음성적인 동영상이었겠지만, 그 속에는 죽을 것을 대비해 남겨놓은 독고진의 뜨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장면은 '최고의 사랑'이라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려낸 세계의 특별함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최고의 사랑'은 기존 신데렐라 스토리를 연예계로 가져왔다. 국민배우 독고진과 비호감 연예인 구애정(공효진) 사이는 저 왕자와 신데렐라만큼의 거리가 놓여져 있다. "살아서도 고백하고 죽어서도 고백하고 독고진씨는 나를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는 거예요?" 왕자 독고진이 신데렐라 구애정에게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백하는 이야기. 이만큼 익숙하고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가 있을까.

하지만 이 전형적인 스토리가 극단적인 호감, 비호감으로 나눠지는 연예계로 들어오면서 이 달달한 스토리는 사회성을 띄게 된다. 즉 전통적인 멜로 구도에서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방해자(시어머니 같은)가 끼어들기 마련. 하지만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과 구애정 사이에 끼어 있는 건 대중들이다. 즉 그들이 사랑에 이르는 과정보다 더 어려운 건 그들의 사랑이 대중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멜로 구도가 갖는 사적인 사랑을 그 연예인이라는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공적인 간섭을 받는 불편한 상황이 들어가 있다.

독고진이 말끝마다 자신을 '특별한 독고진'이라고 수식하는 데는 그래서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국민적인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특별하지만, 그 특별함 때문에 사적인 사랑이 불편해지는 것. 그래서 이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가 먼저 '극복'해야 했던 것은 공적인 사랑에 익숙해진 그들이 사적인 사랑에 눈뜨는 과정 그 자체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이유에서 또 자신은 비호감으로 낙인찍혔다는 이유에서 보통의 사랑을 하지 못하는 지친 이 두 영혼은 차츰 서로의 '충전'이 되어주며 사랑을 이뤄간다.

이 사이에 완벽남 윤필주(윤계상)가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당연히 선택할 이 완벽남이 TV의 짝짓기 프로그램에 나와서 프로그램 의도와 달리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장면은 사적인 선택과 공적인(?) 선택의 충돌처럼 여겨진다. 윤필주는 사적인 진심을 드러내지만 공적인 위치에 있는 구애정은 그것을 실제로는(방송으로만 받아들인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즉 국민배우든 비호감이든 연예인이라는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사이에 위치해 있는 이들의 사랑은 (이중적인 의미로) 특별하다. 그래서 공적인 신분을 벗어나 사적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또한 공적으로도 인정받는 이 사랑은 '최고의 사랑'인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우리는 과연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과 구애정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현실의 연예인이라는 존재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거의 '개그콘서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발랄하고 경쾌하기 그지없는 이 로맨틱 코미디는 그래서 그 달달한 사랑과 유쾌한 유머 밑에 진중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웃으며 바라봤던 일반 대중들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과 글이 어떻게 한 사람을 힘겹게 만드는가를 우리 자신에게 다시 되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최고의 사랑', 이 사랑이 특별했던 것은 오글거리는 사랑타령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 놓여진 세상과의 대결을 머리가 아닌 가슴 두근거리는 사랑을 통해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사랑'(사진출처:MBC)

"세상 사람들이 정말 무서워요. 어쩌면 그렇게 나쁜 말들을 만들어가지고..." '휴먼다큐 사랑'에서 고 최진실씨의 어머니 정옥숙씨는 그렇게 말하며 진저리를 쳤다. 그 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채업자로 몰려버린 자신의 딸에게 끊임없이 쏟아지던 비수 같은 '나쁜 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연예인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뒤에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결국 하지 않아야 할 선택을 한 딸과 그로인해 충격을 받고 결국 그 딸을 따라간 아들(고 최진영) 앞에 망연자실한 엄마는 너무 많이 흘려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을 여전히 흘리고 있었다.

'나는 가수다'의 첫 무대에 오른 옥주현. 그 첫 무대가 방영되기 전부터 그녀는 끝없는 자질논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나는 가수다'라는 무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 과거 몇몇 행적들이 일으킨 비호감 이미지가 덧붙여졌다. 끝없이 쏟아지는 비난의 글들이 이어지면서 어디선가 전혀 근거 없는 루머까지 생겨났다. 그녀가 '나는 가수다'의 다른 가수들과 심한 마찰이 있었다는 것. 그러자 진위도 가려지지 않은 루머에 악플이 또 달라붙었다. 결국 무대에 오른 옥주현은 '천일 동안'을 불렀다. 그 노래는 마치 '천일 동안' 힘겨웠던 자신을 토로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눈물을 쏟아낸 그녀는 그 날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 감동의 무대로 모든 논란이 덮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제작진이 옥주현을 띄워주기 위해 의도적인 편집을 했고, 의도적인 룰을 만들었다는 억측이 이어졌다. 그녀는 말 그대로 비호감 연예인이었다.

드라마 '최고의 사랑'에서 구애정(공효진)은 과거 국보소녀라는 아이돌 걸 그룹 출신이지만 지금은 인기 없는 비호감 연예인이 되어 있다. 방송에 출연하기 위해 롤러코스터에서 자장면 먹기 같은 이미지 관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미션들을 수행하는 그녀는, 뭘 하든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비호감 덩어리다. 신발 경매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독고진(차승원)과 윤필주(윤계상) 사이에 경쟁이 붙어 엄청난 고가로 신발이 낙찰되자, 대중들은 갑자기 그녀가 자신을 띄우려고 스스로 경매가를 높였다는 루머를 퍼뜨린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언론의 집중화살을 맞고 최고의 비호감 연예인으로 몰린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다. 이렇게 궁지에 몰린 구애정을 신발을 산 독고진이 나타나 구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이라면 어땠을까. 구애정이라는 이름에 가까이는 옥주현이 겹쳐지고, 멀게는 최진실이 그려지는 건 왜일까. 최진실의 어머니가 말했듯 연예인은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다. 한 때 사랑을 한껏 받으며 연예인이 되었던 그들은 어쩌다 사랑받지 못하는 비호감의 굴레에 빠졌을까.

과거의 비호감 연예인이라면 주로 드라마의 악역을 뜻했다. 그 때만 해도 드라마 속 캐릭터와 연기자는 동일인물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악역은 잘만 소화해내면 주연 못지않은 인기를 끌 수 있는 역할이 되었다. 대중들은 이처럼 캐릭터와 연기자를 분리해냈다. 그만큼 영상 콘텐츠의 실제 이면을 들여다보고 그 실체를 알게 된 결과다. 그래서 작금의 비호감 연예인은 연예인들의 공식적인 활동, 즉 드라마라든지, CF라든지, 영화, 공연 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행적들(이라고 추정되는 이미지들)에서 비롯된다. 즉 이제는 사적인 행적들이 감춰지지 않는 시대다. 어디서든 연예인들은 대중들에 의해 포착될 수 있고, 진짜 대중들이 마음만 먹으면 그 신상이 털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털린 신상에 대해 뭐라 항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니 최진실의 어머니가 말했듯, 그저 방구석에 칩거한 채 끼니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가끔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쉬는 시간들을 혼자 버텨내야 한다. 이 상황이 되면 과거 한 때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이었다는 사실은 거꾸로 비수가 되어 날아든다. 그저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온 자가 가질 실연의 고통보다 더 큰 것은, 그 이상의 사랑을 받던 자의 실연이다.

이처럼 대중들에게 연예인은 그저 호불호(好不好)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날 그렇게 연예인은 대중들에 의해 발견되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다가 어느 일순간 그 사랑이 급격히 식어버리고 때로는 미움으로 돌변한 모습에 큰 상처를 받는 존재다. 물론 일부 팬덤은 연인 관계 이상으로 스타를 추종하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삶은 따로 있다. 이것은 마치 상품과 같은 것이다. 좋아서 사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싫어져 버려진다고 해도 그다지 항변하기는 어려운 존재. 스타란 연예시장 속에서 보면 비정하게도 '상품화되어 전시되어 있는 인간'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최진실의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연예인도 역시 사람"이라는데 있다. 대중들은 호불호로 좋고 나쁘다고 쉽게 표현하지만, 그걸 당하는 연예인들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지워지는 충격적인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호불호와 루머의 관계이다. 전혀 실제 사실과 상관없는 루머에 의해 비호감이 된 연예인은 아무리 그 루머를 바로 잡으려 해도 또 다른 루머에 휘말리기 쉽다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의 옥주현 출연이 문제가 되자, 여기에 대한 해명 발언을 하면서 제작진이 꺼낸 얘기는 "제 2의 타블로"를 원치 않는다는 거였다. 학력위조 루머에 휘말려 다양한 증거자료를 내밀었지만, 그 증거자료들 역시 조작된 것이라는 또 다른 루머가 끝없이 만들어졌던 타블로.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나왔던 대학교에 직접 찾아가 확인하는 해프닝까지 벌여야 했던 타블로. 그렇게 모든 증거들이 명명백백하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에 놓인 그. 이것이 비호감의 잔인한 굴레다. 사랑받지 못하는 비호감 연예인은 그래서 어쩌면 비난받기 위해 존재하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보이다.

'최고의 사랑'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이 왜 굳이 '최고의 사랑'이며, 그 비운의 비호감 연예인인 여주인공의 이름이 왜 '구애정'이며, 상대 남자 주인공이 왜 '독고진'인지 이런 시각에 바라보면 흥미롭다. 즉 '최고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이 연예계에 몸담고 있는 구애정이나 독고진은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대중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일방적인 사랑을 받거나 미움을 받아왔던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신이 갑자기 겪게 되는 가슴 떨림조차 사랑이 맞는 지 의심스러워한다. 그래서 비호감 연예인인 구애정은 '애정을 구하는'이라는 의미로 들리고, 최고의 스타인 독고진은 '진짜 고독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게 어느 쪽이든 사랑이 쉽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이라는 제목은 역설적으로도 들린다. 최고 스타들의 사랑이지만, 마치 초심자들의 그것처럼 익숙지 않은.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대중들의 호불호에 자신들은 생과 사가 오가는 위치에 서게 된 작금의 연예인들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최고의 사랑'을 받거나, 혹은 어느 순간 비호감이 되어버리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