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아나운서란 어떤 존재인가

'전현무'(사진출처:KBS)

10년 전만 해도 아나운서는 어딘지 늘 조신한 존재였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거나 서서 손에 마이크 하나를 들고 오로지 입으로만 드러나는 존재. 심지어 뉴스 도중 누군가 난입해 "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소리를 치더라도 짐짓 당황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보도를 하는 그런 존재. 물론 지금도 아나운서에 대한 이런 덕목이 달라진 건 아니다. 또 엄밀히 따져서 한참 과거로 올라가도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있었다. '명랑운동회'의 변웅전 아나운서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 때 예능 프로그램의 한 복판에서도 늘 단정하게 서서 말 그대로 진행만 했던 변웅전 아나운서와, 이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한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아나운서는 확실히 다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아나운서는 과연 어떤 존재들일까.

한 때 아나운서지만 특유의 끼를 보여주었던 김성주 아나운서나 강수정 아나운서 같은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들이 속속 등장했지만 이제 이 말조차 식상해져버렸다. 지금은 아나운서를 뽑는 오디션을 쇼 프로그램화 하는 시대이고, 그 쇼 무대 위에서 개그맨 뺨치는 만담으로 빵빵 터트린 지원자가 주목받는 시대다. '신입사원'에서 아나운서계의 방시혁으로 불리는 방현주 아나운서는 특유의 독설을 날려 주목받고, 아나운서계의 유재석으로 불리는 전현무 아나운서는 특유의 깝으로 개그맨들마저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뉴스 보도, 사회, 실황 중계의 방송을 맡아 하는 사람. 또는 그런 직책'을 지칭하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의 정의는 이제 변해야 될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른바 7단 고음을 선보이며 '개그맨 웃기는 아나운서'로 등극한 전현무 아나운서. 신입시절부터 특유의 끼를 주체할 수 없어 벌어진 해프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아 듣는 이들을 빵 터뜨린 그는 골반을 흔들어대며 샤이니 댄스를 추고 어딘지 성역처럼 보이는 KBS 아나운서실의 뒷얘기를 마구 풀어놓는다. 한 때 아나운서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던 전현무는 대중들의 호감을 얻기 시작하면서 KBS의 보배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약 5개 정도의 고정 프로그램을 하고 있고 게스트로도 섭외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는 것.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전현무를 모시기 위해서 줄을 서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진행도 깔끔하게 하면서 특유의 예능감과 끼가 넘치니 예능의 블루칩이 될 만하다.

그런데 이 전현무로 인해 생겨난 아나운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전현무를 넘어서 타 동료 아나운서들에게까지 전이되고 있다. '해피투게더'에 전현무와 함께 출연한 박은영 아나운서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웃음을 주려 노력하며 마치 '여자 전현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자신이 박명수와 닮았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고 마치 전현무가 툭하면 동료 아나운서들을 폭로(?)하는 것처럼 오정연 아나운서가 짝짝이 하이힐을 신고 제주도까지 왔던 사연을 폭로하기도 했다. 심지어 코를 후비다가 들킨 사연을 들려주기도 하고, 콧구멍이 크다며 50원짜리 동전을 넣어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전현무가 일찍이 깔아놓은 멍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나운서라도 예능에 나와서는 웃음을 주기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낮추는 자세로 호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현무를 통해 이미 알게 된 것이다.

이른바 '전현무 효과'를 통해 보여지듯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재정의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방송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향적 소통 시대에 방송사가 가진 입은 권위 그 자체였다. 그러니 방송사의 얼굴은 단연 아나운서였다. 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세상의 의심할 여지없는 정보들이었고,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매체 시대로 접어들고, 쌍방향 미디어들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나르는 시대에 방송의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 대중들 스스로가 미디어라 믿어지는 시대에 방송의 정보들은 때론 대중들과 시각차를 보이고 부딪치기도 하고, 때론 오보에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일단 뉴스나 시사 같은 중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매체가 방송 말고도 너무나 많아졌다. 심지어 이제는 대중들이 포착한 뉴스를 받아서 방송하는 시대가 아닌가. 방송의 가장 큰 힘인 권위가 해체되면서 방송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연성화의 길이다. 이것은 다만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보다 대중의 눈높이로 낮춰진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은 시사교양 프로그램 전반에 깔리게 되고, 이제는 주말 MBC 뉴스데스크를 이끄는 최일구 앵커로 대변되는 것처럼 뉴스에도 스며들기 마련이다.

아나운서가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또박또박 언어를 구사하며 심지어 대외적인 활동까지 반듯해야 했던 것은 그 말의 힘이 권위로 작용하던 시대의 방송의 잔재다. 여전히 아나운서들은 이 틀을 고수하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바뀌었다. 정형돈과 게임을 하며 종이를 놓고 얼굴을 맞대는 민망한 장면을 문지애 아나운서가 연출하고, 그 장면은 '신입사원'의 오디션 후보가 패러디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그 후에 문지애 아나운서가 뉴스나 시사 보도 프로그램에서 브리핑을 하는 것에 대해 대중들은 그다지 이물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대중들이 뉴스나 시사 정보 프로그램과 연예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그다지 다르게 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바로 '생생정보통'이다. 이 정보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프로그램에는 저녁 시간대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전국 먹거리 이야기에서부터 연예 정보, 때론 미니 다큐가 들어가고 심지어 생뚱맞아 보일 수 있는 뉴스가 배치되지만 그것에 어떤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의 얼굴로서 전현무 아나운서가 서 있다는 것은 현 달라져있는 아나운서라는 존재를 가늠하게 한다.

이렇게 달라진 시대에 아나운서들이 방송국을 뛰쳐나와 프리선언을 하는 상황은 당연할 것이다. 즉 과거 아나운서들이 방송의 얼굴이었을 때는 방송사들이 이들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제 아나운서들은 방송 전부를 대표하는 얼굴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인이 되어 있고 또 그래야 살아남는다. '신입사원'의 방현주와 '생생정보통'과 각종 예능을 휩쓸고 있는 전현무는 이 달라져 가는 아나운서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것은 지원자뿐만 아니라 심사자도 스타로 만드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아나운서 방현주가 앉아있고, 전현무라는 대체 불가능한 깝의 아나운서가 각광받을 수 있는 정보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 아나운서계의 방시혁과 유재석은 어쩌면 앞으로 아나운서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될 지도 모른다.

전현무 효과, 타 방송사에까지 미치다
이른바 '전현무 효과'는 타 방송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MBC에서 아나운서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인 '신입사원'의 지망생들 중에는 전현무 아나운서를 롤 모델로 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자 MBC 최재혁 국장이 "전현무 같은 스타일은 뽑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의식이 된다는 얘기. 하지만 이 '신입사원'이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전현무 같은 친근한 이미지의 아나운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즉 아나운서 지망생이 만담을 해서 웃음을 주는데 그것을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자질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나운서들은 여전히 '방송사의 자존심'이라 불리지만 그 자존심은 대중들의 공감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달라진 시대에 달라진 자질을 요구받고 있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신입사원'이 보여준 존중과 배려의 가치

'신입사원'(사진출처:MBC)

시그널에 맞춰 즉석에서 진행을 하는 미션을 부여받은 '신입사원' 팀 대결에서 1조의 장성규씨는 흘러나오는 '인생극장'의 시그널 앞에 얼어붙었다. 처음 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담꾼에 버금가는 재담에 진지함까지 갖춘, 누가 봐도 에이스인 장성규씨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배틀에서 7:0 완패를 당했다. 에이스의 패배 탓이었는지 이후 1조는 경쟁조인 4조에게 패하고 말았다.

늘 밝고 재치 있는 모습만을 보여왔던 장성규씨의 그 당혹스런 얼굴 그 표정에, 담임이었던 문지애 아나운서가 눈물을 보였다. 공동담임이었던 김정근 아나운서는 "성규씨에게 너무 큰 짐을 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떨어져 받게 된 재심사는 '신입사원'이라는 프로그램의 진심을 드러내주는 계기가 되었다. 경쟁을 넘어선 진심어린 출연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한 편의 '인생극장'을 보는 듯한 극적인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팀의 패배가 자신의 패배에서 비롯되었다 자책하는 장성규씨는 "만약에 탈락자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을 선택하시겠습니까?"하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그렇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계속 나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마음 한 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저를 보면서 제가 좀 밉더라구요. 분명히 제가 저를 선택해서 떨어뜨렸을 때 후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제 스스로 벌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솔직한 대답에 같이 서 있는 동료들까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다시 "자신의 인생극장을 써보라"는 심사위원의 지시에 그는 특유의 재치를 발휘했다. "아 우리 조가 나 때문에 떨어진 것 같은데 내가 패자부활전에서 붙고 싶다고 말씀드려야 하나? 아냐 내가 잘 못했어 나 때문이야. 나는 절대 붙어선 안 되는 놈이야. 어떡하지 그래도 되고 싶은데? 그래 결심했어! 우리 친구들한테 양보하는 거야!" 막 울 것 같던 동료들도 심각한 얼굴의 심사위원들까지 모두 그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 선 이윤하씨는 그런 장성규씨를 "다른 의미에서의 공기, 가벼운 면이 있지만 정말 꼭 필요한" 공기라고 표현했고, "가장 자신을 긴장시키는 무서운 동료는 누구냐"는 질문에 "저는 정다희씨를 보면서 1박2일 동안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정말 아나운서를 원하는 사람이고 정말 방송이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정말 저렇게 마음가짐을 가지고 앞으로 계획을 설계해야겠구나. 제가 생각이 너무 미시적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정다희씨에게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제가 이런 말 들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심사위원은 장성규씨의 장점을 들면서 "진중함 속에서도 방향을 틀어서 상황을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금 복잡한 심정의 정다희씨를 위해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러자 장성규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춤과 랩과 음성변조를 곁들여가며 정다희씨는 물론이고 심사위원들까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신입사원'이 각본 없이 연출해낸 이 눈물과 웃음의 변주곡은 이 프로그램의 진심을 잘 보여주었다. 모두가 합격자로 남고 싶은 그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를 낮추며 보여준 동료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프로그램만의 가치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그토록 강조했던 것, 아무리 경쟁하는 관계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갖춰야하는 덕목, 바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였다. 장성규씨는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거듭 거기 함께 경쟁자로 서 있는 동료들을 '우리 친구'라고 표현했다.


'짝패', 자기 운명과 대결하는 사극

'짝패'(사진출처:MBC)

왈짜패들은 폭력으로 민초들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하고, 포청의 관원들은 잡아야할 이들 왈짜패들의 뇌물을 받아먹고 오히려 그들을 비호해준다. 그렇게 관원들에게 들어간 검은 돈은 구석구석 상납되면서 조정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왈짜패의 두목, 왕두령(이기영)은 그렇게 얻은 권력으로 포청까지 가마를 타고 들락거린다. 관원들마저 민초들을 핍박하는 도적이 되어버린 상황. 민초들에게 희망이 있을 리 없다. 부정축재한 관원들을 털어 민초들에게 되돌려주는 아래적의 탄생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짝패'는 의적이 어떻게 탄생하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래적의 수장 강포수(권오중)는 일찍이 소명을 깨닫고 썩어빠진 조정을 향해 먼저 총을 겨누는 인물. 그러자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이 하나 둘 그의 밑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어찌 목숨을 거는 이 의적의 길이 쉬운 선택일까. 장꼭지(이문식)는 그저 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었으나, 아들인 도갑(임현성)이 아래적에서 활동하다 죽음을 맞게 되자 자신도 아래적이 된다.

천둥(천정명) 역시 마찬가지. 그는 거지 움막에서 자라나면서 천민 출신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지만 처음에는 아래적의 활동에 비판적이었다. 의적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민초들에게 되돌려지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를 가로막는 것은 귀동(이상윤)과의 우정과 동녀(한지혜)에 대한 연정 때문이기도 하다. 양반집 자제이지만 자신을 짝패로 여기는 귀동과 역시 양반집 규수지만 자신을 존중해주는 동녀 사이에서 천둥은 핍박받는 민초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천둥의 조력자처럼 여겨지지만, 어찌 보면 천둥이 넘어서야할 벽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강포수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천둥은 자신의 그런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존중해준다고 생각했던 동녀가 사실은 철저히 반상을 나누고 차별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반쪽 양반의 운명을 가진 그는 "양반이 자랑이냐. 양반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느냐"며, "내 몸에 흐르는 더러운 양반의 피, 아씨 면전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뽑아버리고 싶다"고 외친다. 자신의 운명을 넘어서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결국 천둥은 강포수의 유지대로 아래적의 수장이 되기로 마음먹고 그 징표라도 보이겠다는 듯이 민초들을 괴롭히는 왕두령을 척살한다.

천둥의 캐릭터가 선명하지 않고 어딘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이 사극이 그리는 것이 단순히 홍길동 같은 의적의 활약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짝패'는 대신 그 과정을 포착한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는 한 상단의 행수가 어떻게 해서 의적의 수장이 되는가를 아주 느린 속도로 보여준 것. 그 과정에서 천둥의 행보를 가로막는 인물로서 동녀와 귀동의 존재 역시 확실한 어느 한 선을 보여주지 못한다. 즉 동녀는 어찌 보면 민초들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철두철미하게 반상을 나누는 인물이고, 귀동은 천둥과 반상을 넘어 우정을 쌓는 인물로 포청의 부패를 혐오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소속, 즉 김진사(최종환)의 아들이자 포청의 관원이라는 뿌리를 부인할 수 없다.

즉 '짝패'는 태생적으로 결정되어있는 자신들의 운명과 스스로 대결하는 사극이다. 즉 천둥은 반쪽 양반이라는 운명을 넘어 의적이 되는 인물이고, 동녀는 그 양반이라는 틀 속에 갇힌 인물이며, 귀동은 반상을 구별하는 세상과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어찌 운명을 넘어선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짝패'의 캐릭터들이 어딘지 방황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이 과정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일 수도 있다. 이것이 드라마의 대중성을 위해서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게 분명하지만, 그 개인적인 갈등의 양상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의적의 탄생은 우리가 생각하듯 그렇게 낭만적이고 명쾌하며 간단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닐 테니까.


'생활의 발견', 생활의 클리쉐를 뒤집다

'생활의 발견'(사진출처:KBS)

배경음악으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던 남자가 갑자기 여자에게 불쑥 묻는다. "밥 안 먹었지? 자장면 시켜놨어." "지금 이 상황에 밥이 들어가?"하고 여자가 묻지만 아무리 헤어지는 남녀라도 허기는 어쩔 수 없는 법. 고개가 끄덕여지는 그 순간 드라마 같은 데서 늘상 나오곤 하던 전형적인 클리쉐 하나가 뒤집어진다. "이렇게 월세도 못내서 쫓겨나는 나 같은 놈 만나서 뭐하려 그래?" 하고 말하면서 남자가 밥상을 펴자, "또 시작이다. 오빠 매번 이럴 때 마다 나 미칠 거 같아."하고 여자가 말하며 행주로 상을 닦는다. 심각한 상황과 그 상황마저 뚫고 들어오는 생활습관의 힘, 혹은 본능. 그 어울리지 않는 두 조합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클리쉐 하나가 통쾌하게 깨지며 웃음이 터져 나온다.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생활의 발견'은 이른바 '반전개그'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떤 짐작된 상황으로 흘러갈 것 같지만, 그 때마다 예기치 못한 틈입이 빵빵 웃음을 터트리는 개그다. 상황은 늘 지나칠 정도로 전형적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가 있고 어딘지 나아지지 않는 현실 때문에 남자는 헤어지려 하고 여자는 붙잡으려 한다. 그런데 이 공간은 헤어지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삼겹살집이거나 이삿날 중국음식을 시켜놓고 앉아있는 이삿짐이 쌓인 공간이다. 즉 남녀가 헤어지면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카페라던가 바닷가, 호수 같은 공간과는 사뭇 다른 생활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자 이 생활의 공간 속에 습관처럼 배어있는 행동과 말들이 막 벌어진 상황과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한다. 싸우면서도 자장면 배달부가 누른 벨소리에 "문 열렸어요!"하고 말하고, 여자가 선본 사실을 남자가 추궁하자 변명을 하다가 "탕수육은 가운데 놔 주세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때론 그저 이런 상황과 습관의 불협화음은 절묘하게 어우러지기도 한다. 즉 "사랑? 넌 사랑이 얼마까지 간다고 생각하니? 5년? 10년?" 이렇게 사랑의 가치를 묻다가, 갑자기 자장면 가격을 치르기 위해 "보라야. 백 원짜리 두 개 있어?"하고 물을 때, 10년이라는 대사와 백 원은 묘한 대조를 이루며 웃음을 터지게 만든다.

그런데 왜 하필 생활의 공간 속에서 그것도 음식을 앞에 놓고 있는 상황일까. "오빠 내 맘 알잖아."하고 마음을 전하던 여자가 자장면 배달부에게 "현금영수증 좀 따로 해주세요."라고 묻는 장면은 상황을 전복시키는 생활의 힘을 거꾸로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어도 허기는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아무리 상황이 심각하고 어려워도 우리 몸에 각인된 생활습관과 욕망은 이겨낼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즉 우리가 그토록 절절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저 작은 습관과 허기를 이겨낼 수 없다는 '발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래서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라도 우리는 생활의 힘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라는 희망의 전언이다. '생활의 발견', 그 반전개그의 진수 속에는 바로 이 희비극을 절묘하게 넘나들 때 언뜻언뜻 드러나는 우리 삶의 실체에 대한 공감이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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