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배우, 연출자, 삼박자를 이룬 '닥터챔프'

이토록 건강한 드라마가 있을까. 독기서린 대사와 과장된 설정이 난무하는 요즘 드라마들 사이에서 '닥터챔프'는 이례적인 드라마였다. 잔잔하지만 보는 이를 충분히 매료시키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노지설 작가는 이 작품의 첫 번째 발견이다. SBS특집극 '깜근이 엄마'로 일찌감치 그 가능성을 선보였던 노지설 작가는 '닥터챔프'를 통해 드라마가 자극적인 설정이나 대사 없이도 충분히 우리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노지설 작가가 6개월 간 밀착취재한 태릉선수촌의 갖가지 소재들은 김연우(김소연)와 이도욱(엄태웅)이 만나는 수많은 선수들의 이야기로 드라마를 풍부하게 했다. '닥터챔프'는 김연우와 이도욱, 그리고 박지헌(정겨운)과 강희영(차예련)이 엮어가는 4각 멜로를 틀로 갖고 있으면서도 이들이 갖고 있는 직업의 두 세계, 즉 태릉선수촌 주치의와 국가대표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드라마였다. 두 개의 전문분야를 한 작품 속에서 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노지설 작가는 그러나 이를 훌륭하게 봉합해냈다.

무엇보다 노지설 작가가 보여준 군더더기 없는 상황 전개와 대사는, 엉성하게 짜여진 구성과 사족처럼 덕지덕지 붙여진 대사들이 난무하는 작금의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단 한 마디를 던져도 충분히 감정이 이입되게 만드는 그 집중력은 드라마에 어떤 여운의 미학마저 느끼게 만들었다. 또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멜로가 가능하고, 그 속에 따뜻한 인간의 체온을 넣을 줄 알며, 또 사회적인 이야기까지 그 속에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노지설 작가의 다음 작품을 벌써부터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물론 이런 작가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연기를 통해 보여준 배우들이 없었다면 '닥터챔프'는 그렇게 빛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닥터챔프'가 발견한 두 번째는 주연에서부터 조연까지 아우르는 배우들의 재발견이다. 정겨운은 그간 타 작품에서 일관되게 보여졌던 '도련님 이미지'를 단번에 지워버렸고, 대신 그 위에 때론 귀엽고 때론 엉뚱하며 때론 강인하면서도 때론 부드러운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면모를 세웠다. 박지헌은 정겨운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를 부여했다.

이미 '아이리스'의 여전사에서 '검사 프린세스'의 엉뚱 발랄녀를 연기하며 그 연기 영역을 넓혀왔던 김소연은 이 작품을 통해 확실한 연기자로서의 면모를 재확인시켜주었다. 조금은 무신경하지만 따뜻한 가슴을 가진 김연우라는 캐릭터는 김소연을 통해 100% 소화되었다. 이것은 '선덕여왕'을 통해 일찍이 강인한 이미지를 보였던 엄태웅에게도 마찬가지다. 엄태웅은 어딘지 비뚤어진 듯 보이지만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인 이도욱을 입술을 약간 비트는 얼굴만으로도 표현해냈다. 또 이도욱의 상대역으로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 차예련도 빼놓을 수 없다.

'닥터챔프'는 무엇보다 조연들의 발견이 많은 드라마다. 유도팀 감독인 오정대 역할을 소화한 마동석은 최근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보여지듯 이제 외면적인 연기를 넘어서 내면 연기가 물이 올랐다. 유도선수로서 박지헌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유상봉을 연기한 정석원이나 신예이지만 강인한 인상을 남긴 고범 역할의 임성규, 아이돌 가수지만 연기를 잘 소화해낸 강우람 역할의 신동 등등, '닥터챔프'는 짧은 연기에도 굵직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들을 발견해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노지설 작가가 만들어낸 공감 가는 캐릭터들 덕분이지만, 이를 깔끔한 영상으로 만들어낸 박형기 PD의 공이기도 하다. 전작인 '칼잡이 오수정'으로 섬세한 연출력을 선보인 박형기 PD는 '닥터챔프'를 통해 스포츠의 세계와 의학의 세계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그 속에 따뜻한 사람들이 보이는 드라마를 그려냈다. 담담하면서도 감정의 밀도를 프레임 속에 잡아넣는 힘은 박형기 PD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작품의 편성 시간대로 인해 그다지 큰 시청률을 얻지 못했지만 '닥터챔프' 만큼 '발견'을 많이 하게 만든 작품도 드물다. 차기작이 기대되는 노지설 작가와 정겨운, 김소연, 엄태웅, 차예련, 마동석, 정석원, 임성규 같은 배우들, 그리고 무엇보다 박형기 PD 같은 건강한 감독의 발견은 그 어떤 시청률보다 더 값진 성과라고 생각된다. '닥터챔프'는 우리에게 하나의 '발견'이었다.

막장만 문제? 독한 드라마도 문제다

'아내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는 새로 들고 나온 '웃어요 엄마'의 제작발표회에서 이 드라마는 절대 막장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자극적인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막장은 아니고, 엄마들의 삶을 조명하는 가족극이라는 것. 과연 그럴까.

제목은 진짜 가족극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첫 회부터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했고, 2회에서는 여배우가 되려는 딸이 강간당할 뻔한 사실을 알면서도 성공을 위해 이를 묵이하려는 비정한 엄마 이야기가 등장했다. 3회에서는 궁지에 몰린 엄마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딸을 술 시중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됐다.

물론 작가의 말대로 이런 자극적인 설정이 그 자체로 그 드라마를 막장으로 평가하게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전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물들이 비현실적으로 과장되어 있고, 지나치게 감정과잉의 경향을 보인다. 이 작품은 마치 연극의 독백처럼 인물들의 혼잣말이 잦다. 상황 자체가 인물의 감정을 자연스레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물들이 자꾸 스스로를 설명하게 되는 것. 그만큼 얼개가 느슨하고 우연적 요소도 많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김순옥 작가가 "막장이 아니다"라고 강변한 것은 아마도 최근 등장한 막장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되는 몇몇 작품들 때문으로 보인다. '제빵왕 김탁구'는 국민드라마 반열에 들어섰지만 초반부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과 설정들이 등장해 막장드라마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있었기 때문에 막장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주말극인 '욕망의 불꽃'은 언니 자리를 빼앗기 위해 강간을 방조하는 동생의 모습이라든가, 뺑소니로 위장해 사람을 죽인다거나 하는 자극적인 장면들이 방영되었다. 거의 악마처럼 보이는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뭐든 거침없이 해버리는 장면들은 매우 자극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막장은 아니다. 바로 그 어쩔 수 없는 욕망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옥 작가는 아마도 이런 작품들과 자신의 작품이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욕망의 불꽃' 같은 작품은 과연 문제가 없을까. 사실 막장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TV라는 매체적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불륜이니 살인이니 하는 소재들은 이미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등장했던 단골소재다. 하지만 이런 소재들이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과 드라마로 보여지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드라마가 가진 연속극적인 속성 때문이다. 드라마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보는 것이 아니다. 매주 조금씩 끊어져서 보여지기 때문에 사실상 전체적인 완성도나 주제의식은 마지막회까지 미뤄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과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이 된다. 20부작 드라마에서 19부가 자극적인 내용으로 가득 메워지고 나머지 1부가 착하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드라마는 없다.

게다가 드라마는 특성상 매번 챙겨보지 않는 시청자들도 많다. 그러니 한두 번의 자극적인 장면들도 사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막장이 아니라고 해도 독한 설정들의 드라마가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치 시청자를 자극하겠다고 작정한 듯한 드라마들의 그 의도성은 그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 비판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얘기다.

'시크릿 가든', 앓이는 벌써 시작됐다

김은숙표 로맨틱 코미디가 또 일을 낼 모양이다. '연인 3부작'을 거치면서 한국형 로맨틱 코미디의 한 축을 그려내고 '온에어'와 '시티홀'을 통해 로맨스가 존재하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 구축을 모색했던 김은숙 작가는 이제 '시크릿 가든'이라는 판타지와 현실이 공존하는 세계를 꿈꾼다. 그 곳은 피가 철철 나도 몸이 부서져라 살아가는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이 사는 공간이면서 백화점 사장으로 중세 귀족들이 살 법한 판타지 속의 왕자님 김주원(현빈)이 사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크릿 가든'은 이 두 사람의 만남과 엇갈림이라는 로맨스 위에 무술감독이면서 길라임을 보호해주고 챙겨주는 임종수(이필립), 그리고 어딘지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바람둥이 한류스타 오스카(윤상현)를 겹쳐놓는다. 대저택에서 살아가며 뭐든 하고 싶은 것은 척척 할 수 있는 김주원에게 현실은 지나치게 시시한 것이다. 반면 대역배우로서 카메라 속 판타지 공간에서는 휙휙 날아다니며 멋진 액션을 선보이지만 컷 사인과 함께 카메라 밖으로 나오면 주인공 배우에게 모욕을 당하며 깨진 몸을 추스르는 길라임에게 판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은 시작부터 어떤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눈 앞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길라임의 현실은 김주원에게 시시하게만 보이던 현실을 바꾸어놓고, 판타지 같은 건 없다 여기던 길라임에게 김주원이라는 남자와 그가 가진 것들은 조금씩 그녀를 꿈꾸게 한다. 카메라 밖으로 나와 김주원의 스포츠카를 마치 영화를 찍듯 엄청난 속도로 모는 길라임의 모습은 이 드라마가 가진 현실과 판타지의 만남을 절묘하게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거기에는 길라임과 김주원의 현실과 판타지가 순간적으로 공존한다.

무엇보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모호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의 드라마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하지원과 현빈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 덕분이다. 하지원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보이쉬한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성적인 매력 또한 갖고 있는 배우다. 한편 현빈은 엉뚱하고 가벼운 코미디 속에서조차 어떤 진지함이 느껴지는 눈빛을 갖고 있는 배우다. 이 둘의 조합은 그래서 '시크릿 가든'을 가능하게 하고 돋보이게 한다.

여기에 임종수와 오스카가 가세하면, 이제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꽃미남 판타지의 구도가 세워진다. 한 남자와 여자가 엮어가는 로맨스가 있고, 그 여자를 남몰래 사랑하며 보호하는 보디가드가 있으며, 늘 친구처럼 분위기를 돋궈주는 멋진 남자가 있다. 이것은 '꽃보다 남자'에서부터 최근 '성균관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계보가 된 꽃미남 콘텐츠(?)의 구도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런 전형적인 구도 속에서도 이 드라마를 새로운 설렘으로 채우는 건 역시 하지원과 현빈이라는 배우가 가진 독특한 아우라 덕분이다.

하지원이라 가능하고, 현빈이어서 돋보이는, '시크릿 가든'. 이제 주말 밤 이들에 대한 '앓이'가 시작되었다.

'초혼', 예인들에게 던지는 헌사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뛰어오르는 줄타기 어름산이의 모습은 실로 아름답다. 여기에 옛 기와집의 지붕이 살짝 걸쳐지면 금상첨화. 지금도 지방축제에 가면 백미를 장식하는 이 남사당패의 대표적인 놀이인 줄타기는 그러나 그저 아름답기 만한 그런 기예가 아니다. '줄을 탄다'는 그 기막힌 사정에는 남사당이라는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온 예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SBS 창사 20주년 특집 드라마 '초혼'은 그렇게 살다간 예인들에게 던지는 헌사다.

얼마나 그 삶이 지독스러웠으면 그 삶을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갓 태어난 아기를 버리려할까. 그 운명을 거스르려 했던 어미는 결국 아기에게 기예를 가르치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인생은 유전이라, 그렇게 자라난 아기는 다시 그 어미의 길을 걸어간다. 한 발 한 발 위험천만한 그 줄 위를 걸어 나가다가 그러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것이 자신들 예인들의 운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존을 위해 기예는 물론이고 남정네들 앞에 몸뚱어리를 던져야 했던 여사당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미봉(정은별)은 어린 시절부터 같이 성장한 창수(박정철)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욕망하는 양반집 도련님 윤승재(최령)에게 몸을 버린다. 어떻게 보면 수없이 반복된 구식의 신파극 같은 스토리지만, 이 스토리를 남다르게 만드는 건 바로 남사당이 가진 특유의 예인으로서의 삶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멀리서라도 꽹과리 소리와 춤으로 연결되는 그 어울림이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표현된다.

잘 하면 살판이지만 잘 못하면 죽을 판이 되어버리는 그 놀이판은 서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락이지만 그 판 위에 서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생존이다. 줄 위에 서서 천연덕스럽게 농 짙은 사설을 던지며 줄을 타는 미봉만큼 남사당의 삶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바로 이 죽음 같은 시련 앞에서 그것을 역전시켜 해학과 기예로 승화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예술의 과정을 그대로 닮았다. 죽을 수도 있는 줄 위에서 오히려 그 줄의 탄성을 이용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 '초혼'의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으로 구름 위에 놓인 줄을 타는 미봉의 모습은 그래서 예인들의 극복된 삶을 담아낸다.

'초혼'은 물론 조선시대의 끝자락이 남아있는 일제시대가 배경이지만, 그 남사당이 이런 예인들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기 위해 자신은 더 위험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그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나는 최고의 어름산이가 될 거야. 그래서 전국을 떠돌아다닐 거야"하고 말하는 미봉의 말은 신인답지 않게 이 역할을 연기해낸 정은별의 다짐처럼 들린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요즘 드라마에서는 보기 드문 진지함을 가진 '초혼'은 짧아도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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