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두 가지 눈, 다름 혹은 같음

당신에게 '다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당신은 그를 배척하는가. 아니면 거꾸로 같은 점을 찾는가. '초능력자'는 오락영화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그 겉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그 속에 꽤 진지한 질문이 들어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제목은 '초능력자'이지만, 그 타인을 보는 것만으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강동원)이 한쪽 다리가 없어 의족을 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 그 초인의 능력이 유일하게 미치지 않는 단 한 사람, 임규남(고수)이 마지막에 전동휠체어를 탄다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왜 이 영화의 초능력자들은 그 엄청난 힘을 가졌음에도 마치 장애를 가진 사람들처럼 그려지는 걸까.

'초능력자'는 인간 이상의 능력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지만 여타의 슈퍼히어로 영화처럼 그들이 지구를 구한다거나, 멸망시킨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공간도 전 지구적으로 확대되지 않고, 서울의 한 공간, 그것도 세운상가나 시장통 같은 지극히 서민적인 공간에 국한되어 있다. 눈으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하는 것은 지구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다. 그저 전당포나 사채를 빌려주는 회사, 은행 같은 곳을 털어 먹고 사는 게 그가 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야망이 없다. 다만 이렇게 다른 존재로 태어나 다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대한 저주가 있을 뿐이다. 지구 전복의 욕망이 거세된 초인이 가진 유일한 욕망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비범함이 가진 욕망과 그 욕망의 올바른 사용, 즉 정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범함이 다름이 되고 다름이 차별이 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또 다른 축에 서 있는 비범한 존재, 임규남이 외국인 노동자들과 더불어 형 동생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임규남은 다른 존재에 대해서(사실 나와 타인은 모두 다른 존재들이다) 다른 점을 찾기보다는, 같은 점을 찾는 인물이다. 그는 타인과 공감하려하고 소통하려 한다. 따라서 어느 날 맞닥뜨린 초인이 '다르다'는 그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죽이는 것에 임규남은 분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초인이 타인을 마음껏 죽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다른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인 반면, 임규남이 지나가는 행인의 불행을 막기 위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들을 그래도 '같은 존재'로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초인과 임규남의 '다름'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의 싸움처럼 보인다.

이런 진지한 질문들이 넘쳐나는 '초능력자'는 그래서 그저 슈퍼히어로물을 기대하고 보는 관객의 뒤통수를 친다. 대결의 롤러코스터를 신나게 질주하기보다는 타인들 앞에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등상황들이 계속 전개되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진지한 마음으로 듣다보면 나중에 "남들과 다르단 거 정말 힘들다 그치"하고 묻는 초인과 그 다르다는 것을 차별로 인식하는 초인에게조차 "너 이름이 뭐냐?"고 묻는 임규남의 의미심장한 대사가 주는 지적인 쾌감을 가질 수도 있다.

'초능력자'의 그 능력이 눈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명확하게 한다. '초능력자'는 세상을 보는 인식의 문제를 초인과 임규남의 대결로서 그려내는 것이다. 세상에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그런 우리들이 타인을 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저들은 나와 다르다는 시각과, 저들은 나와 같다는 시각이다. 다른 점을 찾는 시각이 20세기까지의 분류의 시대를 이끌어왔다면, 같은 점을 찾는 시각은 21세기의 통섭의 시대로 열리고 있다. 지금은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듯 '공감의 시대'다. 당신의 눈은 어느 쪽인가. 여전히 타인과 나를 구별 짓고 그것을 심지어 차별로까지 여기는 초인의 눈인가, 아니면 타인과 공감하려는 임규남의 눈인가. 강동원의 반짝거리지만 어딘지 외계인 같은 눈인가, 아니면 고수의 흐리멍덩해 보여도 어딘지 정감가는 눈인가.

'대물', 정치 바깥에서 정치를 할 수는 없다

'대물'이 다루는 세계는 정치다. 물론 실제 정치와 정치드라마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현실에서 신물이 나게 봐서 이제는 혐오증까지 생겨버린 그 놈의 현실정치를 그대로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그 누가 드라마를 볼 것인가. 따라서 드라마에는 현실정치가 결여한 부분들을 채워줄 필요가 생긴다.

'대물'의 서혜림(고현정)과 하도야(권상우)가 마치 국민들의 대변인인 것처럼, 그간 침묵하고 있던 바람들을 대사를 통해 언급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혜림이 유세장에서 "내 아이에게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하고 외치고 잘못하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회초리를 들어 달라"거나, 하도야가 검찰청 로비에서 검사윤리강령을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속절없게도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돈키호테 같은 대변인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서혜림과 하도야를 정의의 편에 세우고 그 반대편에 조배호(박근형)를 위시한 정치꾼들을 마치 협잡꾼처럼 세워놓자 실제 정치는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기왕에 정치판에 뛰어든 마당에 서혜림이 하는 행동은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서혜림은 정치판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그저 "제가 잘은 모르지만"하면서 여전히 정치 바깥에서 그 너머를 그저 끔찍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정치가 권력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이 드라마의 순진한 선악구도는 지나치게 판타지로만 보인다. 드라마가 현실일 필요는 없지만 또 너무 현실성을 결여하게 되면 시청자들은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이 서혜림과 하도야라는 얼룩 하나 존재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 캐릭터들이다. 정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정의로운 행동이 단지 뜻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고 그 안에 다양한 욕망들이 장치로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의 진짜 모습은 이 욕망과 정의와의 팽팽한 긴장감에서 생겨난다. '대물'이 진정 대중들에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래도 존재할 법한 어떤 것을 다뤄 진정성을 보여주려면 이런 개인적 욕망 자체가 거세된 캐릭터로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물'은 지금 현실 어디에선가 봤던 것 같은 민감한 사안들을 끌어들여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그 상황 속에서 서혜림과 하도야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만 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마치 모든 일이 해결된 듯한 인상을 지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문제 자체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대물'의 주인공은 어차피 진창인 정치권 싸움에서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싸우려는 서혜림이나 하도야 보다는, 그래도 그 진창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강태산(차인표)이 리얼하게 보일 때가 있다.

어떤 좌절된 희망 앞에서 폭발하는 강태산의 분노는 그래서 서혜림과 하도야의 눈물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 속에는 정치인으로서의 야망과 개인적인 욕망이 현실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상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강태산은 마치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처럼 그 끝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까지 달려보려 한다. 드라마가 굳이 해피엔딩을 향해 달려가는 착한 주인공을 내세워 주제를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잘못된 길이라도 달리는 주인공을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메시지는 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닥터 챔프'가 아시안게임에 미치는 영향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선수들에게 있어서 태릉선수촌이란 어떤 의미일까. 국가대표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고 부상이란 어떤 고통일까. 사실 TV를 통해 생중계되는 선수들의 경기와 그들이 힘겹게 따낸 메달에 우리는 감동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값진 의미인지는 잘 실감하지 못한다. 물론 메달을 딴 선수라면 그 의미를 찾아 카메라가 다가가겠지만, 아깝게 메달을 놓친 불운의 선수들은 그저 잊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일 '닥터 챔프'라는 드라마를 본 시청자라면 이번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들에 대한 마음이 사뭇 다를 것이다.

태릉선수촌 의무실이라는 이 드라마의 배경은 선수들의 고충을 온몸으로 그려내는 공간이다. 거기에는 부상을 입어도 티 하나 내지 않고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있고, 우정으로 경쟁하지만 경기 중 불운으로 한 선수가 다른 선수를 영원히 뛰지 못하게 만드는 사고를 겪는 선수들도 있다. 거기에는 폐암이 의심되는 증상을 갖고 있으면서도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정밀검사를 받지 않으려는 선수도 있고, 도핑테스트에 걸려 자칫 출전조차 못할 뻔한 선수도 있다.

물론 죽을 것 같은 훈련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태릉선수촌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지옥훈련은 지옥이 아니다. 그들에게 진짜 지옥은 태릉선수촌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오로지 메달을 따기 위해 태어난 듯이 살아가는 훈련기계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들은 그 살벌한 경쟁 속에 살아가면서도, 아니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더더욱 누군가와의 사랑을 희구한다. 유도선수인 유상봉(정석원)이 박지헌(정겨운)에게 하는 말대로 이제는 "사랑이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닥터 챔프'는 경기 무대 위에서만 보았던 선수들의, 무대 아래 이야기를 그려낸다는 점에서 '슈퍼스타K2'를 닮았다. '슈퍼스타K2'라는 스포츠 형식을 무대화한 프로그램이 단순히 대결 자체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대결에 임하는 경쟁자들을 포착해 오히려 대결을 더 흥미진진하게 한 것처럼, '닥터 챔프'는 경기장 바깥의 이야기로 경기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놓는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주목받았던 역도의 이배영 선수나 펜싱의 남현희 선수, 배드민턴의 이용대 선수, 유도의 최민호 선수 등등.. 그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이면에 숨겨진 땀과 눈물을 우리는 '닥터 챔프'가 그리는 박지헌의 이야기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낼 수 있다.

물론 '닥터 챔프'는 극화된 허구의 드라마일 뿐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허구로 그려내는 이야기들 속에는 현재 우리네 선수들의 녹록찮은 삶이 묻어나 있다. 몸뚱어리 하나로 진솔하게 맞붙는 이들의 삶에서 단순하지만 명쾌한 삶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은 꾸며질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니 그동안 정직하게 흘린 땀과 그 날의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승운에 따라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결과가 무엇이든 이제는 알 수 있겠다. 거기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저마다 하나씩의 고개를 넘은 승자들이라는 것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아시안게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건, 이 작은 드라마가 보여준 선수들에게 대한 따뜻한 헌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일구 앵커의 '뉴스데스크' 뭐가 달랐나

"5년8개월만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는 자세로 소통과 공감을 뉴스의 기본축으로 삼겠다"는 최일구 앵커의 말대로 40년 만에 8시부터 시작하는 주말 '뉴스데스크'는 확실히 달랐다. 딱딱하게만 느껴지던 뉴스가 예능 프로그램만큼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 최일구 앵커의 '뉴스데스크'는 뉴스의 선정에서부터 보도 순서, 보도 방식 그리고 무엇보다 뉴스의 진행 방식까지 기존 뉴스의 모든 틀에 변화를 주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뉴스 프로그램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첫 소식의 변화다. 개편된 주말 '뉴스데스크' 첫날의 첫 소식은 안개 소식으로 시작했다. 때 아닌 전국을 뒤덮은 안개 소식을 전하며 최일구 앵커는 "말 그대로 안개전국인데요"하고 운을 떼고는, 다음 청목회 로비 의혹에 대한 뉴스를 전하면서 "정치권도 안개에 휩싸였습니다"하고 '안개전국'과 '안개정국'을 이어 붙였다. 재치 있는 멘트로 딱딱해질 수 있는 정치권 소식을 시청자들에게 좀 더 부드럽게 접근시킨 것이다.

이튿날 첫 소식은 박지성 선수의 한 경기 두 골이었다. 이 뉴스를 전하면서도 최일구 앵커는 "한 경기 두 골을 기록하고 상대 울버 햄턴을 완전히 울보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해 특유의 재치 있는 멘트를 선보였다. 최일구 앵커가 "다른 중요한 뉴스도 많지만 오늘 휴일이고 해서 산소탱크의 골 소식을 톱으로 정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주말 밤의 '뉴스데스크'는 늘 뉴스의 첫 소식이라면 등장하던 정치권 뉴스의 범주를 벗어난다. 즉 시청자가 원하고 듣고 싶은 뉴스를 먼저 앞에서 보여주고 정치권 소식은 뒤쪽으로 빼낸 것. 첫날 이명박 대통령이 G20 준비를 둘러본 소식은 뉴스 시작 후 23분 후에 전해졌고, 둘째 날 정치권 소식 역시 20여분이 지난 후에 전해졌다.

보도 방식에 있어서도 큰 변화가 보였다. 그것은 현장 깊숙이 직접 기자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담아내려는 노력이다. 첫날 최일구 앵커는 전라남도 무안까지 달려가 낙지 어민들과 실제로 낙지를 잡아보고 그네들의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듣는 자리를 만들었다. 어민과 똑같은 복장으로 앵커가 뻘에서 뒹구는 모습은 '뉴스데스크'의 한층 낮춘 보도 자세를 돋보이게 했다. "한 시간 동안 40번을 시도한 끝에야 겨우 낙지 한 마리를 잡는데 성공했다"는 최일구 앵커의 말은 뉴스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만한 노력을 보이겠다는 의지로 읽혀졌다. 한편 광부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지하 550미터 막장으로 들어간 기자는 얼굴에 검댕을 묻혀가며 그들과 일해보고는 "저처럼 살찐 사람이 없다는 말 이제 이해가 가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다. 같은 뉴스라고 하더라도 땀이 배어있는 뉴스가 가진 진정성에 천착하는 모습이다.

재미있는 것은 최일구 앵커의 진행스타일이다. 그는 기존 앵커들이 혼자 앞에서 진행하는 형식이 아니라 기자들과 함께 뉴스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KTX를 취재하는 내용에서 그는 "참 빠르긴 빠르죠. 주말 뉴스부 박승진 기자를 KTX에 태워서 취재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박기자는 이 KTX 때문에 지역의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라고 말했고, 야생동물의 생존에 대한 소식에서도 "등산 중에 어린 야생 동물을 발견하면 측은지심으로 데려다 키우고 싶을 때도 있는데요 그러나 환경전문 허무호 기자는 아무리 선의라 해도 데려다가 키우면 야생동물의 생존이 허무해진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앵커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자들의 목소리를 더 높여주는 진행스타일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불필요해 보이는 멘트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너무 빠르게 시간이 지나갔다는 얘기를 하면서 "사장님한테 얘기해서 뉴스시간 좀 늘려달라고 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한다거나, 기상캐스터에게 "어제보다는 덜 떨립니까? 새내기 캐스터가 이틀만에 적응하는 거 보니까 방송 소질이 꽤 있는 거 같습니다."하고 말하는 내용은 굳이 없어도 되는 멘트들이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럽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전체 뉴스 프로그램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뉴스는 예능이 아니고 예능이어서도 안 된다. 정확한 정보를 신뢰감 있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 보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실시간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작금에 이르러 정보의 정확성이나 신뢰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지상파의 뉴스 프로그램이 뉴스의 일원화된 창구로서 기능하던 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뉴스는 어떤 식으로든 좀 더 지금의 시청자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다가가야 한다. 지금 최일구 앵커의 '뉴스데스크'는 이 변화된 뉴스의 환경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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