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팥팥’, 나영석 사단의 저력이 느껴지는 힘 뺀 예능의 맛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tvN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이하 콩콩팥팥)>에서 4개월간 농사를 지으며 보냈던 인제에서의 마지막 밤. 그들은 불멍을 하기로 한다. 장작에 불피우는 것조차 초보인 이들은 불이 잘 붙지 않아 계속 토치로 다시 불을 붙이는 걸 반복한다. 어디서 들었던 ‘불멍’의 감성이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면서 이광수의 여지없는 투덜댐이 시작된다. “이게 만약 불멍이라면 다신 안 하고 싶어.” 불은 잘 안 붙고 연기에 눈은 맵고 넣어 놓은 고구마는 아직 익지 않았다. 

 

30분만에 깨진 캠프파이어의 환상. 하지만 그렇게 조금 지나고 나니 제법 불이 붙고 불멍의 분위기가 피어난다. 출연자들이 반색하며 이 프로그램에서 아마도 김우빈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일 듯한 “좋다”란 말이 튀어나온다. 익은 고구마를 꺼내 돌려먹고, 불멍 앞에서 빠질 수 없는 컵라면을 둘러 앉아 먹는다. 투덜대던 이광수는 금세 불멍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서로 좋아하는 걸 묻고 말하는데 김우빈이 이 프로그램을 하며 좋았던 소회를 털어놓는다.

 

“저는 이거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뭐냐 하면 흙 밟고, 손으로 만지고, 비 맞고, 새입 난 거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그런 게 너무 좋았어요.” 그 말에 더해 김기방이 한 마디를 곁들인다. “되게 원초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거.” 김기방, 이광수, 김우빈 그리고 도경수. 벌써 만난 지 10년이 된 죽마고우들의 10년 전 팔팔 했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더니 도경수가 불씨가 남은 숯을 입으로 호호 불며 톡톡 터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그런 걸 하나하나 다 돌아가면서 하는 게 웃기다는 제작진의 이야기에 “좋은 건 다 같이 하는 게 좋다”고 입을 모아 출연자들이 말한다. 어찌 보면 불 하나 피워놓은 것일 수 있지만, 그 소소한 불멍 하나로 이토록 사운드가 가득 채워지고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하다. 갑자기 쥐불놀이를 하고 싶다며 집게로 숯을 들고 돌리고, 그걸로 네 사람이 굳이 ‘LOVE’를 그리며 사진에 남기려 애쓰는 모습은 거의 스펙터클이다. 

 

이 마지막밤 불멍의 풍경은 이제 마무리된 <콩콩팥팥>이 가진 독특한 재미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제목에 담긴 ‘콩 심은 데 콩나는’ 이야기는 과거 예능에서는 금기로 불리던 소재였다. 이른바 ‘쌀로 밥 짓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너무 뻔한 걸 해서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방송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이 달라졌다. 너무 과잉된 걸 하는 건 오히려 웃기지도 또 재미있지도 않게 됐다. 그건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너무 애써 웃기려는 것도 너무 애써 재밌게 하려는 것도 그래서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워낙 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의 일상 또한 영상과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고 있어서인지, 요즘은 ‘멍’ 계열의 예능들이 오히려 주목받는다. 불멍, 물멍 같은.

 

<콩콩팥팥>은 시작부터 그 끝이 보이는 예능이다. 농사라는 소재 자체가 그렇다. 여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수확하는 과정이 담길 수밖에 없다. 초보농사꾼들이라는 사실이 하나하나 겪어내며 부딪치는 좌충우돌의 재미요소를 만들고, 그 와중에 인제의 이 작은 마을에 사는 인심 좋고 정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고 친해지는 과정이 주는 재미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과정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결국 콩 심은 데 콩이 나는 걸 보여주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콩 심은 데 진짜 콩이 나고, 그 콩을 수확해 쪄서 먹어보고 또 갈아서 콩국수를 만들어 먹는 과정은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 농사가 쉽지 않은 초보 농부들에게 쑥쑥 자라줘 용기와 보람을 준 깨는 잎으로 고기를 싸먹고, 깨는 털어서 들기름을 만든 후 그걸 양껏 부어 고소한 기름막국수까지 먹게 해준다. 그 고소한 향기가 TV화면을 뚫고 안방까지 전해지는 느낌이다. 

 

떠나온 밭에 남겨두고 왔던 배추며 무로 김장을 담그는 모습은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대미가 된다. 그냥 사서 하는 김장이 아니라, 하나하나 직접 키워 수확해 하는 김장이니 얼마나 각별할까. 모두가 둘러 앉아 함께 김장을 하며 나누는 대화는 그간 4개월 간의 추억만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그냥 틀어놓고 크게 집중하지 않은 채 슬쩍슬쩍 봐도 될 정도로 부담없는 ‘멍’ 계열의 프로그램처럼 보이지만, 이를 또 집중해서 보면 더더욱 재밌게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이광수를 중심으로 김기방, 김우빈, 도경수, 찐친들의 티키타카였다. 이미 친한 그들의 케미는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시청자들에게는 새로웠다. 이광수는 예능 출연이 많았지만, 이처럼 자신이 중심에 서서 끌고가는 역할을 맡아 새로운 면모가 돋보였고, 다른 출연자들은 말 그대로 예능 초보자들이었다. 특히 이광수와 티격태격하는 모습과 발군의 요리실력에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막내였던 도경수는 ‘재발견’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매력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데면데면했지만 차츰 아버지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따뜻한 정을 보여주신 이웃 동근 아버님이나, ‘홍반장’처럼 우직하게 도움을 주고 재미도 줬던 망치 형님 같은 마을 주민들의 환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외지인들이 그 곳에 적응할 수 있게 드러내지 않고 도와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도 전해졌다. 

 

<콩콩팥팥>의 저력은 나영석 사단이 갖고 있는 균형감각을 다시금 발견하게 만든다. 힘 빼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예능의 맛을 밑반찬으로 내놓고, 그러면서도 출연자 구성과 그 케미만으로도 빈 틈 없는 재미를 채워넣은 것이 그렇고, 초보가 조금씩 농사를 알아가는 재미를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게 해주는 ‘힘 뺀 연출’이 그렇다. 늘 그래왔듯이 <콩콩팥팥> 역시 한때는 금기로까지 이야기됐던 익숙함을 넘어 ‘뻔할 수 있는’ 소재 속에서도 새로운 재미를 찾아낸 예능으로 각별하게 기억될 것 같다. (사진:tvN)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3

같은 것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재미를 주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먹방과 쿡방이 이미 대세일 때 불현듯 나타나 새로운 판도를 만들어버린 백종원이 대표적이다. 음식에 진심인 데다, 요리실력은 기본이고, 프랜차이즈를 해오며 몸에 밴 사업가 기질과 무엇보다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방송능력까지 더해져 그는 ‘요식업계의 사부님’으로 급부상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정반대의 기획들이 나오게 된다. 백종원을 세워 할 수 있는 방송을 기획하는 식이다. 

 

최근 여행예능에는 기안84가 바로 ‘백종원’ 같은 존재다. MBC <나혼자 산다>에서 간간히 기행에 가까운 여행을 선보이며 웃음을 줬던 기안84는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통해 제 물을 만났다. 마치 옆집 놀러가듯 대충 가방에 옷가지 몇 개 넣고 여행을 떠나는 기안84는 아마존강이나 갠지즈강에도 스스럼없이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현지인들의 삶에 보다 깊숙이 뛰어들어 그들과 교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어난 김에 세게일주>는 이른바 ‘극사실주의 여행’을 표방하고 있는데, 그 색깔은 당연히 기안84의 이런 ‘현지에 스며드는’ 모습에서 나온다. 이러한 여행 스타일은 최근 유튜브 등을 통해 인기를 얻고 있는 여행 크리에이터의 여행을 닮았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에는 대표적인 스타 여행 크리에이터인 빠니보틀이 함께 했고 시즌2에서 덱스가 합류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구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돌아온 시즌3, 이번 여행지는 아프리카다. 하지만 이번 시즌 역시 어디서 봤던 것 같은 그런 아프리카는 결코 아니다. 물론 이들이 가는 마다가스카르는 <정글의 법칙>이나 최근 <지구마불 세계여행>에서 원지가 고생고생해 찾아갔던 곳이기도 하지만, 기안84가 보여주는 마다가스카르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원시의 바다에서 원주민들과 작살낚시를 하고 싶어하는 기안84의 소망에 걸맞게 제작진은 마다가스카르에서도 비행기와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벨로수르메르라는 곳을 여행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에티오피아까지 12시간, 거기서 마다가스카르까지 5시간, 그 곳 수도 안타나나리보 공항에서 모론다바로 경비행기를 타고 가서 또 배를 타고 벨로수르메르까지 가는 머나먼 여정이 펼쳐졌다. 

 

그 곳까지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기안84 특유의 현지 밀착 여행이 주는 묘미가 도드라졌다.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져 비행기를 탈 수 없게 된 기안84가 안타나나리보 공항 근처 도시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됐을 때 길거리로 나와 빗속에서 현지인들이 파는 라면을 먹는 대목부터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차양막도 없는 거리에서 빗물이 들어가도 대충 끓여 내주는 라면을 쪼그리고 앉아 먹는 모습은 기안84표 여행이 시작됐음을 알려줬다. 또 모론다바에서 배를 기다리며 현지인이 바닷가에서 파는 음식들을 먹는 모습 또한 압권이었다. 너무나 맛있게 먹어 현지인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드디어 배를 타고 찾아간 벨로수르메르에서 기안84는 해변에서 만난 원주민 청년들과 함께 바다로 나가 자신이 그토록 꿈꿔왔던 작살낚시를 시도했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달라서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지만,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즉석에서 회를 쳐 공수해온 초고추장을 찍어 먹는 모습은, 맛있게 먹는 기안84와 질색하는 원주민 청년들의 대비로 웃음을 줬다. 마치 기안84가 더 원주민 같은 모습이 연출된 것이었다. 먼저 기안84 혼자 시작하는 야생 그대로의 여행을 보여준 후, 빠니보틀과 덱스의 합류를 통해 색다른 케미를 이어가는 구성방식은 시즌2와 유사하다. 하지만 이번 시즌3는 시즌2의 엔딩에 기안84가 ‘바다로 가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던 것처럼 원없이 바다를 눈에 담게 해주는 여정이 아닐까 싶다. 프로그램 도입 부분에 프롤로그처럼 들어간 거대한 배를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이들이 함께 끄는 모습은 바다와 현지인이라는 이번 여행의 색깔을 기대케 하는 대목이다.

 

벌써부터 연말 연예대상에 기안84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올해의 대상감이라는 이야기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MBC 예능의 올해 성과라고 해도 될법한 프로그램이면서, 최근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이 탄생시킨 예능으로서도 의미와 가치가 있다. 그래서일까. 시즌3가 기안84의 연예대상에 쐐기를 박을지를 지켜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사진:MBC) (<일간스포츠>에도 게재된 원고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질문, 우린 과연 진짜 말하고 듣고 있는 걸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차진우(정우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저 평범하게 누구나 할 법한 그 말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차진우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농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건 그래서 다른 의미로 들린다. 그저 소리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일 수 있다는.

 

그 날은 정모은에게는 너무나 힘들 날이었다. 배역 캐스팅이 되어 기뻐하며 촬영장에 갔지만 알고 보니 뺨 맞고 물세례를 받는 역할이라 빠른 촬영을 위한 더블 캐스팅이었다. 그래서 수없이 번갈아가며 뺨을 맞고 물세례를 받으며 촬영을 끝냈지만 자신이 나올지 더블 캐스팅된 다른 엑스트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없이 초라해진 마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모은은 차진우를 떠올린다. 힘들 때 부르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문자를 남겨도 보지 않는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던 차에,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정모은은 집 앞에 그가 서 있는 걸 보고는 꾹꾹 눌렀던 감정이 터져나온다. 돌아선 그의 등을 살짝 잡은 채 눈물을 쏟아낸다. 정모은은 돌아볼까봐 등뒤로 숨으려 하고, 차진우 역시 그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걸 직감하며 그 눈물을 보이기 싫어하는 정모은을 위해 돌아서지 않는다. 

 

감정을 추스른 정모은은 자신도 모르게 차진우에게 그 날의 일들을 늘어놓는다. “저 오늘 처음으로 대사있는 역할 촬영한다고 엄청 신났었거든요. 근데 막상 가보니까 긴장도 많이 되고 정신도 하나도 없고 잘 하고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좀 서러웠나 봐요. 그래도 씩씩하게 잘 참고...”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정모은은 깨닫는다. 말을 듣지 못하는 차진우에게 자신의 말이 너무 많았다는 걸.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차진우는 아니라며 미소를 지어주고는 핸드폰에 이렇게 찍어준다. ‘수고했어요. 잘 쉬길 바라요.’ 그 말은 힘겨운 날을 보낸 정모은에게 작지 않은 위로가 됐을 게다. 

 

그래서 훗날 만나 그 날 일을 이야기하며 고맙다는 정모은에게 차진우는 의외의 답변을 핸드폰을 찍어 보여준다. ‘사실... 거의 듣지 못했어요.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실상은 너무 어둡고 말이 빨라서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하지만 정모은은 그 답변에서 ‘노력’이라는 단어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차진우에게 이렇게 익숙지 않은 수어로 말한다. “더 고마워요. 내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해줘서.”

 

자신이 듣지 못해 대화를 하는 것이 답답하지 않냐는 차진우의 물음에 정모은 역시 의외의 말을 꺼낸다. “솔직히 저는 핸드폰 없이 얘기하는 것도 좋아요. 왜 그런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순 없지만 정말이에요. 음.. 나도 모르게 한 혼잣말도 다 알아주는 것 같고. 그래서 가끔 잊어버려요. 당신이 듣지 못한다는 거.” 그러면서 오히려 차진우에게 수어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수어를 잘 못해서 힘드시겠지만.”

 

타인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건 무슨 의미일까. 정모은이 말하는 ‘듣는다’는 건 단지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그런 의미는 아닐게다. 우리는 매일 같이 많은 말들을 듣지만 과연 그건 진짜 듣는 걸까. 그저 지나가는 소리들일 뿐인 건 아닐까. 들을 수 있어도 듣지 못하는 건 정모은이 콕 짚어낸 것처럼 ‘노력’이 없어서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들을 수 있는 것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정모은의 자기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해줘서 더 고맙다는 그 말을 곱씹으며, 차진우는 생각한다. ‘딴 생각에 빠지는 순간 눈앞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만다.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되묻기가 미안해 가끔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다시 말해달라 부탁하지 않는 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듣기 위해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마음에 선을 긋고 누구로부터 거리를 두려 애썼던 걸까. 나는 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며 살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차진우의 이 생각은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멜로드라마가 손으로 말하는 농인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는 배우 정모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진짜 건네려는 질문을 끄집어낸다. 그건 사람과 사람이 진정으로 듣고 말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더 설레면서도 뭉클하다. 그저 쉽게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담겨질 수 없는 진심을, 그래서 말이 아니라도 더 노력하고 마음을 다 하는 것으로 전해질 수 있는 진심을 꺼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모은이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완벽히 알아듣지 못해도 차진우와 핸드폰 없이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느끼는 그 순간들처럼.(사진:ENA)

로이킴 콘서트 ‘로이 노트 Roy Note’에서 발견한 로이킴의 진심

로이 노트

“화려한 불빛들 그리고 바쁜 일상들 뒤에 숨겨진 초라한 너의 뒷모습과/ 하고 싶은 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고민하는 너의 무거운 어깨를 위해/ 너의 발걸음이 들릴 때 웃으며 마중을 나가는 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선물이었지-” 로이킴이 ‘Home’을 부를 때 그 가사 한 줄 한 줄이 스크린에 판서처럼 써진다. 부드러운 음색이 귓가에서 가슴까지 소리의 통로를 내며 들려오고, 가사가 머릿 속에 그림 같은 풍경들을 끄집어내자 그 공명에 관객들은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음률도 음률이지만, 스토리가 그려지는 가사와 어우러지는 무대가 주는 애틋함이라니. 2023 로이킴 콘서트 ‘로이 노트 Roy Note’의 한 풍경이다. 

 

‘로이 노트’ 왜 콘서트의 콘셉트를 노트로 가져왔을까 싶지만, 로이킴과 노트는 잘 어울린다. 로이킴을 말할 때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 ‘싱어 송 라이터’이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그가 직접 쓴 가사와 어우러져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Home’을 부르기 전, 그 곡에 대해 로이킴이 초등학교 시절 함께 했던 반려견 싼쵸를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소개해준 이야기는 그 가사들을 하나하나 더 곱씹게 만든다. 퇴근길을 재촉하는 곡으로 잘 알려진 이 노래는 그래서 지친 나를 기다려주는 집과 하염없이 보호자를 기다리는 반려견의 그림을 겹쳐 놓는다. 

 

노트가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처럼 로이킴의 노래는 디지털화되어 더 빨리 움직이는 시대의 흐름과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매력이 있다. ‘Love Love Love’나 ‘봄봄봄’ 같은 컨츄리와 포크풍의 단순하지만 흥겨운 리듬에 맞춰진 곡은 저 클럽과는 거리가 먼 목가적인 정경을 떠올리게 만들고, ‘북두칠성’ 같은 오케스트라가 어울리는 곡을 듣다보면 어두운 밤길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쏟아지는 별이 보이는 듯하다. 

 

살갗에서 울려대고 눈과 귀를 한없이 자극하는 노래들 속에서 한껏 피로해지고 때론 방어적인 우리를 발견하게 될 때, 로이킴의 노래는 쌩쌩 부는 바람이 아닌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살처럼 우리를 무장해제시켜 놓는다. 고음을 애써 진성으로 불러 자신의 목소리를 강조하기보다는, 가성으로 불러 바깥의 빈 공간들로 나머지를 넉넉히 채워주는 특유의 창법은 실크 같은 부드러움으로 아무런 저항감없이 심장까지 파고든다. 

 

견디는 세상이다. 버텨야 하는 삶이다. 그래서 이른바 ‘존버’의 시대라고들 한다. 그런데 견디고 버티는 힘은 자신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들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넉넉히 받아들이면서 ‘타격감 제로’로 만드는 거라는 걸 로이킴은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똑같이 힘든 그 삶들을 꺼내놓고 함께 공감하면서 때론 ‘얼마나 아팠니’ 하고 묻고 그럼에도 ‘괜찮을 거야’라고 위로해준다. 

 

아티스트는 같은 세상을 살아가며 그 세상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내놓지만, 동시에 아티스트의 작품이 세상에 영향을 미쳐 작더라도 세상을 바꿔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로이 노트’ 콘서트 커튼콜 엔딩 곡에서 최근 앨범 ‘그리고’의 타이틀곡인 ‘괜찮을거야’가 남긴 여운은 깊고도 길었다. ‘괜찮을거야’라는 가사를 거의 50번은 넘게 반복해서 외치는 로이킴의 외침은 마치 주문처럼 콘서트장을 빠져나온 관객들이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았다. 그건 힘든 현실을 잘 버텨낸 우리들에게 로이킴이 건네는 위로면서, 또 잘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스스로를 토닥이는 다짐 같은 것이었으니.(사진:웨이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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