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에서 최민식까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

사진출처:'범죄와의 전쟁'

드라마든 영화든 요즘 이 맛에 본다. 바로 연기의 재발견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 팽팽한 대본과 군더더기 없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무엇보다 두드러진 건 연기자들의 '신들린 연기'였다. 송중기는 꽃미남 이미지에 연기자 이미지를 확실히 부각시켰고, 한석규는 한 가지 장면에서도 계속 변화하는 섬세한 감정 연기로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브레인'의 신하균은 야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욕망에 충실한 역할을 보여주면서도 한 편으로 그 인물에 공감하게 만들었다. 하균신이라고까지 불린 신하균과 팽팽한 대결양상을 보여준 정진영 역시 인술을 행하는 명의에서부터 그 껍질을 하나 벗겨낸 가식어린 모습까지 드러내줌으로써 연기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한편 '해를 품은 달'에서는 여진구와 김유정이라는 놀라운 아역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섬세한 멜로 연기는 초반부터 이 사극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미 30%를 넘어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이 두 아역이 남겨놓은 강한 여운이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화에서도 '신들린 연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부러진 화살'에서 안성기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강한 효과를 남겼고, 판사 역할로 나온 김응수, 이경영, 문성근의 보는 이를 치 떨리게 만드는 연기가 흥행에 한 몫을 차지했다. 아쉽게도 흥행에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페이스메이커'의 김명민은 역시 메소드 연기의 또 한 차원을 보여주었다. 완전히 페이스메이커에 빙의된 그의 연기는 그 앙상한 몸과 발만으로도 보는 이를 찡하게 만들었다.

'범죄와의 전쟁'은 그 '나쁜 놈들 전성시대'라는 부제가 '신들린 연기 전성시대'로 보일 지경이다. 최민식은 이 작품에서 나쁜 놈들 중의 나쁜 놈 역할을 연기하지만, 그 안에 진한 페이소스까지 담아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나쁜 놈의 전형 속에서 가장의 고단함까지 느껴지는 이 작품은 최민식 특유의 광기어린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에 하정우라는 든든한 아우라가 덧붙여지고, 최근 '뿌리 깊은 나무'로 주목받은 조진웅이 빛을 발하니 그 연기력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란할 지경이다.

최근 들어 확실히 연기는 재발견되고 있다. 물론 그간 연기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다. 특히 드라마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연기력 논란'은 이제 대중들이 얼마나 연기에 민감해 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사실 영화계에서 최민식이나 하정우 같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늘 인정받아왔다(물론 영화에서도 겉멋든 배우들에 대한 논란은 계속 있어왔다). 반면 드라마에서 연기력이란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만큼 엄밀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감히 이 영역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연기자들이 잘 생긴 얼굴 하나로 투입 되었던 것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다. 최근 들어 러시를 이루는 가수들의 연기 영역 진출은 그 상업적인 목적은 알 수 있지만, 연기자로서의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에서 큰 문제로 지적된다. 하지만 한석규나 신하균이 보여준 것처럼 이제 드라마에서의 연기력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도 한껏 높아져 있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연기라는 영역이 가진 가치가 재발견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 편에서는 신들린 연기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마당에 다른 한 편에서는 끊임없이 연기력 논란이 쏟아지는 것이 현재 연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다. 그만큼 겉멋이나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연기를 보고 싶은 대중들의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다. 이 정도 되면 연기자들도 각자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연기자다'라고 스스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온 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다. 연기가 어디 장난인가. 어쨌든 연기의 재발견, 요즘 이 맛에 드라마든 영화든 보게 된다.


'남극'의 딜레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남극의 눈물'(사진출처:MBC)

'남극의 눈물' 김진만 PD는 이 '눈물' 다큐멘터리를 찍어 오면서 늘 갖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고 했다. 이 지구의 눈물을 포착하고 증언하기 위해 문명 저 편의 세계로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지만, 어쩌면 그것 자체가 파괴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남극의 눈물' 세 번째 이야기의 말미에 내레이션을 통해 들어간 질문, 즉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라는 그 물음은 바로 이 김진만 PD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극의 눈물' 3편 '펭귄행성과 침입자들'은 먼저 이 남극을 자신들의 행성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다양한 펭귄들의 생태를 보여주었다. 그 펭귄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키워드는 두 가지. 즉 '협동과 배려'다. 자이언트 패트롤 같은 육식성 천적들이 새끼 펭귄을 공격하면 그것이 제 새끼가 아니라도 어른 펭귄들이 나서서 방어하고 보호해주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생존능력을 보면서, 잠깐 우리 사회의 가족 이기주의가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이들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내 일 아니면 지나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이 그러할진대 타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이기주의가 오죽할까. 2편에서 나왔던 고래잡이와 물개 잡이로 학살당한 수백만 남극의 종족들은 그래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혹등고래의 그 아름다운 노래가 처절한 절규로 들리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물론 포경이 국제협약으로 금지되는 등 환경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이 침탈이 끝난 것은 아니다. 펭귄행성에 들어온 침입자들, 즉 인간의 파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쪽은 얼어가고 다른 한쪽은 녹아가는 남극의 상황은 먹이를 찾아 바다로 떠나야 하는 펭귄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의 확산은 펭귄들의 알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하고, 오지의 땅이 갖는 그 신비로움을 관광하기 위해, 혹은 그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때 아닌 남극에 쥐들을 들끓게 만들었다. 쥐는 생태계를 교란할뿐더러 그 자체로 세균을 전파한다는 데서 치명적이다.

김진만 PD는 2003년에 2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전재규 대원을 얘기하면서 그 고민스러운 딜레마를 꺼내놓았다. 세종기지에서 세상을 떠난 전재규 대원 때문에 이슈가 많이 됐고, 그 덕에 '아라온'이라는 쇄빙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익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목숨 걸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대원들을 보면서 환경 파괴 운운하기도 어렵다는 얘기였다. 알다시피 특정 국가의 땅이 아닌 남극은 각국의 영토권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있다.

'남극의 눈물'은 물론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서 지구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다큐멘터리가 굳이 카메라를 들고 남극까지 들어가 그 눈물을 포착해내는 것은 답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사극에서 당대의 현실과 정치가 투영되는 건, 대중들의 요구다. 대중들은 사극을 통해 현실에 부재한 정치적 비전을 발견하고 싶어 한다. 사극이 가진 역사의 재해석은 그래서 마치 '온고지신'처럼 현재의 정치를 일갈하기도 한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이 삼한통일에 앞서 그토록 찾으려 했던 '시대정신', '추노'가 보여줬던 역사의 한 줄 아래 수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의미했던 것, '공주의 남자'가 그려낸 혁명을 위해 역사와 대적하는 상상력의 힘 등은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마음 한 구석을 자극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가 밝힌,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사극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올해 최고의 사극이라 지칭되는 '뿌리 깊은 나무'가 그려내는 현재의 모습은 뭘까.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뤘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법한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 몇 백 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키워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전제로서 소통하지 않는 왕,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먼저 등장한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방원은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마방진 앞에서 모든 숫자들(백성을 의미하는)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꿀 때, 중앙에 왕을 상징하는 숫자 하나(왕을 의미)를 남겨두고 주변을 모조리 치워버리는 '칼의 통치'를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이방원의 무력 앞에 부들부들 떠는 이도는 그 칼날에 죽어나간 사람들을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간직한 채, 자신이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칼의 힘이 아니라 글의 힘이다. 그래서 '한글'은 지식의 독점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고, 막혀진 소통체계를 열어주는 강력한 세종(한석규)의 무기가 된다.

여기서 전제되는 건 '소통의 정치'를 꿈꾸는 자로서의 세종이라는 특별한 왕이다. 소통은 그리 쉽게 되는 게 아니라 왕의 고통과 희생을 요구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완벽한 왕으로서의 세종이 아니라, 외로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때로는 자신의 울분과 분노를 표출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왕을 그린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는 상황의 힘겨움을 세종은 이렇게 토로한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물론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를 담은 것이지만 현재의 정치에 시사하는 바도 클 것이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현재의 정치 행태를 접하고 있는 대중들로서는 세종의 이런 인간적인 토로는 차라리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글을 창제하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 세력은 그래서 고스란히 현재의 정치가 그려내는 소통에 대한 태도를 함의한다. 소통하려는 자와 불통하려는 자.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자와 그것을 막는 자. 적들(?)에게 열린 사회를 지향하려는 세종의 일갈이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 때문이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식견이 얄팍하다는 이유로,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하극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라 기강이 문란해진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이유로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과인은 대체 백성의 소리를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이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밀본의 본원인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소통에 대한 두 가지 풍경을 그려낸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있었던 서울 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SNS의 힘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갑자기 들고 나온 'SNS 심의' 발언은,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린 한글 반포와 유포 과정에 대중들을 더욱 열광케 만들었다. 심지어 '밀본이 MB'라는 말까지 회자되는 상황에 이른 것. 정기준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은 그래서 마치 SNS가 가진 힘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이 바로 소이(신세경)다. 세종이 준비하는,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보다 더 강력한 것이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얘기는 그대로 현재의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모든 걸 한 번 보고 들으면 기억하는 소이는 사극판 컴퓨터인 셈이고, 그녀가 유포에 사용하는 부적과 노래는 SNS 같은 네트워크인 셈이다.

도대체 이 '역병 같은' 소통의 욕망을 어찌 막을 것인가. 최근 정치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세종을 배우라"는 요구는 그래서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해 새롭게 의미화된 '소통의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욕망을 말해준다. 그러니 정치여! 만일 지금의 대중들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밀본이라는 적조차 붕당으로 인정하고 토론하려 하는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을 되새겨볼 일이다. 이제 막는다고 막아지는 세상은 지났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장수 프로그램, '개콘' 경쟁력 분석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무대개그의 시작은 '개그콘서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간 개그의 양대산맥으로 내려오던 '유머일번지'류의 콩트 코미디와 '일요일 일요일 밤에'류의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안전함'의 틀을 깼다. 그 '안전함'이란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경쟁이 없다는 것과 일방향성 프로그램이라는 것. 무대개그는 개그맨들의 무한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관객과 개그맨이 호흡하는 개그의 쌍방향 시대를 예고했다. 개그는 더 이상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짜진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개그맨들은 편집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고 무대에 올려진 후 관객에게 외면 받으면 여지없이 통편집되는 '정글'을 경험하게 됐다. 물론 개그맨들에게는 힘겨운 현실이었지만, 이 시스템은 프로그램에는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다. '개그콘서트'는 끊임없이 다양한 캐릭터와 유행어와 인기 코너들 그리고 화제를 만들어냈다.

경쟁은 경쟁을 불러왔다. 개그맨의 경쟁이 '개그콘서트'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졌다면, 이후의 경쟁은 각 방송사들에 의해 벌어졌다. '웃찾사', '개그야' 같은 무대개그가 방송사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그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는 듯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급조된 형태의 무대개그가 개그 코너들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어도 '개그콘서트'처럼 탄탄한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선배들이 끌어주고 후배들이 받쳐주는 '개그콘서트' 특유의 시스템은 경쟁 속에서도 상생하는 힘을 발휘했다. 반면 타 방송사의 무대개그들은 한층 더 심해진 경쟁 속에서 차츰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며 사라져갔다. 그리고 처음처럼 오롯이 '개그콘서트'만이 살아남아 무대개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개그콘서트'류의 짧은 개그들이 갑자기 주목을 얻은 데는 시대적인 이유도 있다. 그 첫 번째는 시대가 요청하는 서사구조의 변화다. 사실 리모콘이 생겨난 이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혹은 '서론-본론-결론' 형태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끊임없이 공격받아왔다. 이제 시청자들은 발단에서부터 뜸을 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시작이 지루하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손가락에 의해 여지없이 잘려져 나간다. 그러니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나 서론은 점점 축약되고 있다. 그것은 이제 드라마건 방송 프로그램이건 김수현 작가 식으로 표현하면 "베토벤의 '운명'처럼 처음부터 짜자자잔 하고" 시작한다. 사실, 너무나 서사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서론은 너무 뻔한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척'하고 보여주면 '착'하고 알아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잘 맞아떨어지는 프로그램이 바로 '개그콘서트'류의 무대개그다. 많은 개그맨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짧은 시간을 주고는 웃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이 쿨한 시스템에서 서론은 설 자리가 없다. 1차로 PD가 가위질을 하고, 그렇게 살아남는다 해도 2차로 시청자들이 리모콘으로 가위질을 하는 상황에서 개그는 좀 더 콤팩트하고 군더더기 없는 형태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개그콘서트'는 이 대중들이 선호하는 서사구조가 달라지는 시점에 징후처럼 등장한 짧은 개그를 뽑아내는 시스템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논리적이고 순차적인 서사에 대한 거부(?)는 상당부분 디지털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날로그 문화가 가진 '처음부터 중간 과정을 다 봐야 끝을 볼 수 있는' 서사의 특성은 디지털 문화로 오면서 '아무 곳에서나 중간 중간 끼어들어 볼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속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성향이 기술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술이 성향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 프로그램으로 적용되어 '개그 콘서트'처럼 분절적인 구조의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런 시대적인 요청에 맞는 형식의 변화만으로 '개그콘서트'가 장수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그 형식을 어떤 방식으로 채워왔는가, 즉 내용의 문제다. '개그콘서트'가 '개그야'나 '웃찾사'에 비해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개그가 개그에만 매몰되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조우해왔다는 데 있다. 물론 '개그야'나 '웃찾사' 역시 현실과 무관한 소재들을 다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개그콘서트'에 비교해보면 그 현실공감에 있어서 현저하게 뒤쳐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그야'나 '웃찾사'가 보여준 주로 말장난에 의존하는 면과 의미 없는 슬랩스틱의 반복은 당장 웃음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여운을 남기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현실이라는 무한정 넓은 소재의 텃밭을 잊지 않고 돌아봤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대중들의 욕구를 바라봤다는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감'할 수 있는 개그를 지향했다는 것이 그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텃밭을 갖고 있는 '개그콘서트'의 코너들은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개그코너들도 성격을 달리해왔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개그콘서트'를 통해 사회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개그콘서트'의 초창기 코너들을 보면 이른바 '자학개그'들이 주류를 이뤘다. 슬랩스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자학개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거나, 이빨로 무를 갈거나, 못생긴 얼굴을 과장되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심지어 '마빡이'같은 코너는 특별한 내용 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이마를 때리는 것으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 자학개그들은 그러나 단순한 몸 개그에 머무는 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힘겨운 현실을, 자학함으로써 살아가는 개그맨이라는 직업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학을 포함한 단순한 몸 개그들은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것은 IMF로 허덕이던 현실이 많이 반영된 것들이다. '개그콘서트'는 다름 아닌 바로 그 IMF로 힘겹던 1999년의 현실을 갖고 시작됐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해야 살아남는 개그맨들의 현실 또한 이런 경쟁적인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 개그 역시 단순하고 자극적인 형태에서 머물렀던 건 아니다. 심하면 한두 주에도 사라져버리는 이 칼날 같은 무대 위에서 무려 4년 간이나 버텨낸 김병만의 '달인'은 진화해온 몸 개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코너다. 이 코너는 초기에 달인도 아니면서 달인이라고 우겨대는 개그맨 김병만의 뻔뻔한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김병만은 놀랍게도 실제 달인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실제로 줄타기를 하고, 물구나무를 선 채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등의 기예를 진짜 선보이자, 관객들은 가짜 달인에서 진짜 달인으로 변한 김병만의 반전에 매료되었다. '달인'의 사례가 보여주듯 개그의 생명력은 그것이 몸 개그든 말 개그든 역시 틀에 박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그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슬랩스틱류의 몸 개그들은 최근 들어 그 경향이 바뀌었다. 즉 '개그(gag)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말 개그가 중심이 되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한 웃음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화, 즉 이야기가 개그의 중심이 되면서 그 소재는 훨씬 더 현실적인 것들이 되었다. 즉 현실에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개그의 소재가 되었던 것.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이른바 '애정남'은 이 달라진 트렌드를 대표하는 개그다. 함께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누가 그것을 먹을 것인가, 혹은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탔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 같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문제 자체가 되지 않을 상황에 대해 '애정남'은 친절하게도 답을 지정해준다. 물론 그 답은 대단한 게 아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건 돈 내는 사람이 먹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애정남'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제 뭔가 살다가 부딪치는 애매한 상황만 만나면 '애정남'을 들먹이게 된 것이다. '애정남'의 인기는 몸 개그가 주던 처절함보다는 이제 말 개그를 통한 공감대에 대중들이 더 열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거꾸로 보면 한국의 대중들이 소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하고 맞장구를 쳐줄 때 갖게 되는 그 공감대 속에서 대중들은 그들만의 내밀한 소통의 즐거움을 느꼈다.

현실에 대한 공감이 말 개그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살아난 것이 바로 풍자 개그다. '개그콘서트'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직설적인 정치, 시사 풍자를 선보였다. 과거라면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국회의원을 소재로 하는 정치 풍자가 등장했고, 이제는 대통령에서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의 폭이 넓어졌다. '사마귀 유치원'과 '비상대책위원회'는 그 대표적인 코너다. '사마귀 유치원'은 유치원 선생님의 목소리로 어른들의 세계를 낱낱이 풍자하는 코너이고, '비상대책위원회'는 비상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상황 속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안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는 관료주의를 꼬집는 코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과감한 풍자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과거처럼 모종의 정치적 외압 같은 것이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치가 문화를 억압하던 구시대와는 분명 달라진 현실이다. 즉 문화란 가려지고 억눌려진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정치권에서도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 현실에서 정치는 어쩌면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개그콘서트'가 보여주는 풍자개그와 공감개그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대는 이제 제아무리 정치권이라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상대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정치나 시사 분야의 소재들은 이제 오히려 개그의 블루오션이 되어가고 있다. '개그콘서트'는 어쩌면 그 지대를 먼저 찾아서 열어젖힌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장수비결은 위에서 열거한대로, 그 시대에 조응하는 형식과 시스템의 구축과 그 안에 현실과 공감하는 내용을 끊임없이 채워 넣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디지털 시대가 갖고 온 좀 더 분절적이고 빠른 서사에 대한 욕구를 '개그콘서트'는 일찌감치 읽고 있었으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보다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안에서 당대의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나갔다. 현실은 따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개그콘서트'와 상호작용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코너들은 대중들에게 회자되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개그콘서트'의 생명력은 하나의 형식과 내용으로 굳어진 박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진 현실과 함께 변화해온 생물 같은 진화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한, 지금도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글은 <신문과 방송>에 게재된 글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