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 TV 풍경을 바꾼 음악 프로그램들

하루의 노동 끝에 눈도 뻑뻑하고 어깨도 결리는 몸이 침대 위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자정. 그 고요한 밤의 품속에서 오롯이 깨어있는 것, 바로 귀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열려있기 마련인 이 시간대, TV는 언제부턴가 음악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 편성은 낯설었다. 한참 잠을 청할 시간에 노래라니! 그것은 또한 중심 시간대에서 밀려버린 음악 프로그램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실제로 우후죽순 생겨났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들은 시청률 몰락으로 점차 프라임 타임 대에서 사라져갔다.

하지만 중심에서 밀려난 음악 프로그램과, 소음에서 자유로워진 자정 시간대라는 이 두 지점이 만나자, 음악 프로그램들은 오히려 제대로 음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프라임 타임대에 주로 보여지는 시각 중심의 음악 프로그램들은 자정으로 옮겨오면서 청각 쪽을 더 치중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음악 중심에서 활동하는 실력 있는 가수들(시각 중심 음악 프로그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이 무대로 나오게 되었다. 주류와 비주류는 이 음악을 중심으로 세우는 무대 위에서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과 기획형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가 같은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이렇게 달라진 자정의 풍경의 중심에 서 있는 ‘이하나의 페퍼민트(KBS 금 12시 15분)’는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계보 위에 서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음악을 중심에 세우는 프로그램을 말 그대로 프로포즈했다면,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좀더 도발적으로 음지에 있는 음악인들(예를 들면 힙합이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을 무대 위로 끌어들였다.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이 토양 위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편견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에서 귀가 즐거운 음악의 향기를 퍼뜨리고 있다. 진행자가 가수에서 배우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그만큼 말하는 입보다는 듣는 귀가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초콜릿(SBS 수 12시 30분)’ 역시 ‘이하나의 페퍼민트’와 마찬가지의 선상에 서 있다. 음악성을 중심으로 초대되는 가수들, 소극장 같은 작은 무대가 주는 집중력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하나의 페퍼민트’가 이하나가 가진 엉뚱하면서도 풋풋한 매력을 프로그램의 개성으로 세웠다면, ‘김정은의 초콜릿’은 김정은이 가진 ‘만인의 연인’이미지를 세웠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마치 연인들이 서로 이벤트를 해주는 것 같은 컨셉트가 부가되어 있다. 물론 자정의 듣는 귀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가끔 시각적인 이벤트(라틴 댄스를 춘다거나, 연주를 하는 것 같은)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여행 라라라(MBC 수 12시 35분)’는 더 극단적으로 듣는 귀를 중심에 세운다. 먼저 눈길을 끌어 모으는 무대를 없앴고, 반응을 유도하는 객석도 없앴다. 심지어 초기에 프로그램에 세워두었던 ‘라디오스타’ 4인방도 불필요해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는 노래가 저 녹음실에서 녹음되어 음반으로 만들어져 라디오나 TV의 전파를 타고 우리의 귀까지 들어오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면, 이 프로그램은 그 과정을 녹음실에서 바로 TV로 압축시켰다. 그만큼 생생해졌고 음악은 직접적으로 귀로 파고들었다. TV가 기본적으로 시각을 저버릴 수 없는 매체라고 할 때, ‘음악여행 라라라’가 보여주는 영상은 ‘귀로 보는’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스페이스 공감(EBS 월화 12시 10분)’은 작은 공간 속에 뮤지션과 관객을 밀착시킴으로써 그 상호반응을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프로그램 제목처럼 공간으로써 공감을 증폭시키는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공간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연주자들의 연주다. 손가락이 줄을 당기고 뜯는 그 미세한 소리마저 바로 앞에 있는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그것은 고스란히 TV를 타고 시청자 앞으로 날아온다. 작아서 집중되는 이 효과는 소극장 음악들의 장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또 재즈 같은 악기 연주가 중심이 되는 음악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다.

늦은 시간대로 옮겨 간 음악 프로그램들은 그 시간이 갖는 독특한 힘과, 오히려 편성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는 그 자유로움이 만나 우리의 자정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피곤하고 지친 영혼이 홀로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이 시간, 우리의 귀는 이제 때론 감미롭고, 때론 마음을 뻥 뚫어줄 정도로 시원하며, 때론 잊고 있던 느낌을 깨어내는 듯한 그 음악 소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이 시간의 무대 위에는 주류와 비주류, 혹은 장르로 구분되던 수직적인 음악들의 위계는 사라지고, 장르와 대중성과 실험성이 모두 어우러지는 수평적인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귀로 보는 음악 시대가 열렸고, 그것은 우리의 자정풍경을 바꾸고 있다.

소극장으로 간 한국대중음악상, 왜?

결국 대중음악은 소극장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말하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갑작스런 지원중단 발표 후, 시상식을 연기해온 ‘한국대중음악상’은 애초에 건국대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학전 소극장으로 축소 개최되게 되었다.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한국의 그래미’, ‘한국의 빌보드’를 만들고 ‘대중음악전용관’을 짓겠다며 대중음악을 키우기 위해 무려 1275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애초에 유인촌 문화부 장관이 키우겠다던 대중음악은 ‘한국대중음악상’이 말하는 그 대중음악이 아니었던 것일까.

혹자들은 ‘한국대중음악상’에 인디밴드들과 같은 상대적으로 낯선 음악인들이 대거 수상자 명단에 들어있는 점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음악들이 그 명단에 들어있지 않고 대중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음악인들이 거기에 있느냐는 것이다. 심지어 혹자들은 그 점을 들어 ‘한국대중음악상’이 아니라 ‘인디음악상’이냐는 비아냥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껏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들만이 대중음악이라고 불려진 것에 대한 ‘한국대중음악상’의 도발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된다. 대중음악은 물론 상업적일 수 있지만 그 전에 대중의 정서를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음악에서 먼저 찾아져야 하는 것이다.

올해로 6회를 맞이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이 생기게 된 것은 방송사와 대형 기획사 저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국내의 음악 시상식이 갖는 한계를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대중들까지 인식하게 되면서부터다. 대중음악이 갖는 상업적 성격은 몇몇 대형 기획사들의 승자독식구조를 지속시켰고,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방송사의 시상식은 그네들의 홍보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문제였던 것은 그네들에 의해 대중음악이라 호명되는 몇몇 음악들이 대중들의 다양한 기호를 묵살하고 획일화시킨다는데 있다.

이렇게 보면 문화체육관광부가 키워내겠다고 한 ‘대중음악’과 ‘한국대중음악상’이 말하는 ‘대중음악’ 사이에 커다란 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그래미 운운하면서 1275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를 말할 때부터 그 대중음악의 성격 속에는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상업성에 경도되고 있었다는 것을 이번 지원중단은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자생적인 대중음악의 발전을 지원한다기보다는, 국가 통제 하에 대중음악의 틀을 두려는 의도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중음악에 대한 상반된 접근이 1275억을 투자하겠다고 하면서도 고작 몇 천만 원에 불과한 지원비를 굳이 중단하겠다고 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작년 한 해, TV 음악 프로그램에 일대 변혁을 불러온 인디 밴드들(‘장기하 밴드'나 ‘갤럭시 익스프레스' 같은)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한국대중음악상’이 이제 변화해가는 대중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를 제대로 선점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윤도현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장르 구분을 넘나드는 음악의 소개가 그 전조를 보였다면, 그 바통을 이어받은 작금의 ‘이하나의 페퍼민트’, ‘음악여행 라라라’, ‘스페이스 공감’같은 프로그램들로 그 다양성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것은 TV의 음악 프로그램들이 과거와 같은 몇몇 상업적으로 성공한 음악에만 편향된 형식만으로는 대중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상 규모가 작아진 금번 ‘한국대중음악상’에는 김동률, 토이, 원더걸스, 다이나믹듀오, 태양, 윤하, 양방언 등이 불참해 아쉬움을 남겼다. 진행자인 윤도현과 이하나는 “우리 권위 있는 거 맞죠?”하는 농담까지 했으니 그 썰렁한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금번 ‘한국대중음악상’에서 단연 화제는 ‘싸구려 커피’로 3관왕의 영예를 안은 ‘장기하와 얼굴들’이다. 천편일률적으로 흐르는 작금의 대중음악에 인디의 정신을 살리며 참신함을 불어 넣어준 음악으로 당연히 받을 걸 받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싸구려 커피의 정서를 노래로 부른 ‘싸구려 커피’라는 음악이 싸구려가 아니듯, ‘싸구려 커피’에 영예를 준 ‘한국대중음악상’이, 화려하지 못한 협소한 공간에서 조촐히 벌어진 싸구려(?) 음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싸구려 커피의 그 달달함과 속쓰림 역시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의 화려함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는 현재, 우리네 대중들의 정서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이러한 대중들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를 이해해야 한다. 소극장으로 내려간 ‘한국대중음악상’은 마치 이제 막 바깥 세상을 향해 나오려고 하던 다양성을 지평으로 하는 대중음악들이 다시 저 좁은 공간으로 내려보내는 것만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식채널e’, TV의 법칙을 모두 뒤집다

‘지식채널e’의 ‘가비오따스’편은 “발전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1970년 콜롬비아 열대 우림에 운하건설을 위해 파견된 파올로 루가리는 인디언 정착지를 둘러보며 ‘개발로 인해 정작 행복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찾아 코카나무조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가비오따스로 들어가고 거기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도한다. 자생력 강한 소나무를 심고, 수경 재배법을 퍼뜨리고, 버려진 잡동사니로 풍차를 만들고, 심지어 시소놀이를 하면서 물탱크를 채우는 슬리브 시소 펌프를 만든다. 결국 수천 년 만에 사막이 열대우림으로 되살아나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이 감동적인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5분 짜리 영상은 그대로 ‘지식채널e’의 기적을 증명하듯 보여준다. ‘지식채널e’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프로그램의 자원으로서는 가비오따스의 사막만큼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파올로 루가리가 이 사막이라는 조건을 상상력으로 뛰어넘었듯이, 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압축된 시간은 영상의 군더더기를 없앴고 단일한 주제에의 집중을 요구했다.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는 영상의 시대에, 5분 압축 속의 집중이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지화면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영상의 메시지들은 정지화면 속에서 좀더 사색의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세련된 영상 대신 자리한 것이 낡은 사진(혹은 옛 동영상)이었다. 그 흑백으로 자리한 낡은 사진들은 색마저 지워버림으로써 온전히 사진 속 이미지가 주는 의미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위로 ‘지식채널e’는 문자를 부활시켰다. 음성이 지워진 자리에 선 글자 하나하나는 마치 머릿속에 각인되듯 의미들을 피워내고는 사라졌다. 정지된 영상과 사라진 음성 속에서 문자만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이 풍경은 마치 TV가 한 권의 책으로 변신하는 마력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5분이라는 한계 상황은 좀더 집약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면서 심지어는 누군가의 일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된다. 5분이라는 열악한 시간자원을 가진 프로그램이, 몇 시간의 다큐멘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메시지를 잡아내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지식채널e’는 영상시대가 문자시대에 보내는 헌사다. 이 프로그램은 시간을 압축하고, 동영상을 정지시키며, 음성 대신 문자를 채워 넣음으로써, TV의 영상법칙을 모두 뒤집어 문자시대가 주었던 지식들의 향수를 일깨운다. ‘지식채널e’가 말하는 역설의 미학은 속도의 미학에 경도된 TV영상들이 주는 그 숨가쁨에 숨쉴 공간이 되어주고, 현란한 동영상 세상의 산만함에 잠깐 멈춰 사색할 공간을 내어주며, 내레이션들이 강권하는 메시지들이 넘쳐나는 TV 공간에 강권없는 화두로서의 문자를 던져준다. ‘지식채널e’는 풍요 속에 사막이 되어가는 상상력 없는 TV세상에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불황기 문화풍경을 바꾼 비주류의 전복

불황기를 맞아 늘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 같은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적 감성들이 어딘지 다른 나라 얘기처럼 들렸던 분들이라면, 장기하가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하고 외쳤을 때 무릎을 탁 쳤을 만도 하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오는 그 ‘싸구려 커피’의 감성은 홍대 클럽에서는 익숙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처음 ‘이하나의 페퍼민트’에서 전파를 탔을 때는 날카로운 B급 감성의 바늘에 찔린 것 같은 충격이 되었다. 그 낯선 노래가 가진 천진함에 가까운 솔직함은 불황을 맞아 오히려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들의 수사를 낯선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단지 낯설게만 느껴지는 비주류의 감성에 머물지 않고 주류로 떠올랐다. 지난 27일 발표된 ‘장기하와 얼굴들’의 첫 정규앨범 ‘별 일 없이 산다’는 초판 8천 장이 예약으로 모두 팔려나가 급히 1만 장을 새로 찍었다고 한다. 장기하에 대한 폭발적인 대중들의 반응은 물론 그 음악의 독특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항간에는 산울림과 송골매의 재림이라고 부를 정도로 ‘장기하와 얼굴들’음악적 뿌리를 포크 록의 계보에서 찾고 있다. 장기하는 포크가 가진 메시지성에 B급 감성을 노래에 장착해, 장기 불황과 취업 전쟁에 내몰린 청춘들의 암담함을 거꾸로 뒤집는다.

‘별 일 없이 산다’는, 이 기가 막힌 중의적 의미를 가진 제목의 노래는 ‘일 없이 사는 자’가 그로 인해 ‘별 고민 없이 산다’고 말하는 노래다. 이 일 없는 자가 일을 좇지 않고 일 없음을 즐기는 태도는 실로 (아마도 일이 있는 자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면서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로 전복된다. 장기하는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바로 이 ‘일 없는 상태’가 즐겁고 신나고 재밌다고 말함으로써, 먼저 상황을 뒤집고 그런 상황을 만든 그 누군가의 의도가 실패했음을 통쾌하게 역설한다.

B급 감성이 주류로 편입되는 현상은 장기하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워낭소리’이후 갑자기 관심을 갖게 된 독립영화에서도 B급 감성은 도드라진다. 고작 제작비 1천만 원으로 무려 3만 명의 관객을 향해 가고 있는 ‘낮술’이 대표적이다. 여자친구와 실연을 당하고 친구들의 부추김으로 떠난 정선 여행길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비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청춘들의 감성이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음침한 주점 한 구석에서 소주를 마시며 술기운을 빌려 한바탕 호기를 부리는 그 낮술의 광경은, ‘장기하 감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 시대 청춘들의 좌절과 그럼에도 절대로 고개 숙이지는 않는 자존감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상황을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불황이다. 투자는 전체적으로 줄어들었고, 그 줄어든 투자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수익을 끌어올릴 수 있는가가 불황기 생존법이 되었다. 대규모 투자로 대규모의 수익을 얻어가던 주류는 이 시기에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투자상황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불황을 맞아 달라지게 되는 대중 정서의 변화다. 심각한 불황기에는 비주류 정서가 주류가 되기 마련이다. 이른바 ‘장기하 감성’은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의 자양분으로 피어난 이 시대 청춘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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