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명소가 된 촬영지들, 문제는 없나

평범해 보이기 이를 데 없는 정자. 하지만 뭐가 새로운 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이유는 하나. 그 곳이 드라마, ‘고맙습니다’에서 영신(공효진)과 기서(장혁)가 첫 키스를 한 장소란다. 또 다른 풍경 하나. 인터넷 영월군의 관광소개(http://ywtour.com)에 들어가면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만을 모은 지도가 있다. 그 지도를 보면 재미있는 것이 이른바 명소라는 곳의 이름들이다. ‘영빈관’, ‘청록다방’, ‘청령포모텔’등등. 영화라는 간판이 없었다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중국집, 다방, 모텔이 관광 코스가 된 것이다.

과거 7,80년대의 여행이 관광이었다면, 90년대 이후의 여행은 체험이었다. 그리고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아 여행도 문화라는 겉옷을 걸쳐 입었다. 영화, 드라마 속의 공간을 찾아가는 이른바 문화여행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문화라는 그림자만 어른거려도 일단 고개부터 돌린다. 물론 문화를 모른다면 그 곳은 아무 것도 아닌 곳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안다. 그 평범한 장소에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많은 이야기들을.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드라마는 세트장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며, 드라마는 끝나도 세트장을 남긴다. 나주시는 MBC드라마 ‘주몽’의 4만2천 평 규모 오픈 세트장 건립에 약 80억 원을 투자했다. 지난 3월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이 세트장을 삼한지 테마파크로 유료화한 뒤 50여 만 명의 관광객이 찾았고 그로 인해 14억 원의 직접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수익일 뿐, 직접 관광객이 지역에 소비하는 비용과 지역 홍보 및 나주의 이미지 개선 등 보이지 않는 수익을 포함하면 연간 600억 원 이상의 경제효과를 가져온다고 시는 추산하고 있다.

이러한 드라마 촬영지의 테마파크화를 만든 것은 드라마 ‘태조 왕건’. 30억 원을 들인 이 테마파크가 성공을 거둔 이후, 드라마 ‘해신’은 하나의 성공사례가 되었다. 완도는 해신 세트장을 유치해 2005년도 관광객 500만 명을 유치했으며 이로써 1600억 원의 지역경제파급효과를 거둔 공로가 인정되어 최근 제12회 한국지방자치경영대상에서 문화관광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 고구려 드라마들의 부흥과 함께 세트장 규모도 커지고 있다. 속초에 지어진 ‘대조영’ 세트장이 70억 원, 문경에 지어진 ‘연개소문’ 세트장 역시 60억 원을 들였다. 현재 가장 큰 테마파크가 진행되고 있는 곳은 ‘태왕사신기’의 제주도 청암영상테마파크로 약 190억 원을 들여 제작되고 있다. 휴가철을 앞둔 지금 벌써부터 이 지역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들썩이고 있다.

문화가 있는 여행은 좋지만, 문제는 없나
한편 영화의 경우, 그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라디오 스타’ 촬영지인 영월이 될 것이다. 이 인구 4만의 시골은 영화 촬영 이후, 연간 12만 명 이상이 찾는 명소가 되었고, 2006년만 따진다면 지역 경제 유발효과가 92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지자체의 촬영지 혹은 세트장 유치는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지자체 입장에서 보면 관광 수입은 물론 홍보 효과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방송사 입장에선 광고 이외의 별도수익을 올릴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도 잘 지어진 세트장은 보다 높은 완성도의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특히 테마파크를 겨냥해 짓는 대형 드라마 세트장의 경우에는 그 실효성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규모가 점점 비대해져가고 있는 반면, 실제로 그만큼의 수익 창출이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때론 지자체장들의 치적을 위한 무분별한 유치경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테마파크의 부실화를 양산할 수 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그 지역주민과 그 지역을 찾는 관광객에게 돌아간다.

문화는 장소를 향기롭게 해준다
테마파크를 겨냥해 대형 세트장을 지었다면 드라마가 종영하거나, 영화 상영이 끝났을 경우를 생각해서 향후 대책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에 기대 그대로 방치하다가는 심지어 폐가가 되어버리는 경우를 맞이할 수 있다.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는 ‘태조왕건’의 성공으로 2002년 34만 명, 2003년 37만 명이 찾았으나 그 후 특별한 관광상품을 개발해내지 못해 현재는 7만 명 정도로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진 상태다.

문화의 시대, 문화가 여행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거대한 세트장이 전시행정의 하나로 읽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사전준비는 물론이고 사후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딱히 블록버스터나 마케팅이 아니라도 문화는 그 장소를 더 향기롭게 해준다. 새로운 세트장을 짓지 않고 그 동네의 일상을 고스란히 찍어내 오지 중의 오지인 증도라는 섬을 명소로 만든 ‘고맙습니다’ 같은 드라마나, 변방 주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낸 ‘라디오 스타’가 소중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 교보생명 사외보 <다솜이 친구> 8월호

한류의 위기, 일류의 도전, 그 이유

우리가 물건을 팔면, 돈은 일본이 벌어간다는 말이 있다. 과거 제품 생산에 있어서 부품을 국산화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거의 수입해 조립하면서 벌어졌던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네 문화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 양상을 떠올리게 한다.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두려움 없이 임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래 부지불식간에 들어온 일본 문화들은 이제 우리 문화 저변 속으로 폭넓게 퍼져가고 있다. 오래 전부터 복제되어 유통되며 저변을 넓혀온 일본 만화에서부터, 대학생들의 가벼운 읽기 수요를 채워주고 있는 일본소설, 일드로 대변되는 일본 드라마는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우리 사회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것들이 수면 위에 올라온 우리 문화 속의 일본 문화라면, 일본영화들은 수면 아래서 한류로 대변되는 우리 문화의 근간을 뒤흔드는 요인이다. 2001년 1천만 달러 정도에 머물던 우리 영화의 수출 성적표는 2005년 7천6백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류의 영향이었다. 그런데 이 2005년 빛나는 성적표를 만들어준 나라는 다름 아닌 일본. 2005년 일본에서 벌어들인 것만 6천만 달러에 이르러 전체 수입의 약 80%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한류 위기의 주범이 되었다. 2006년 일본으로부터 거둬들인 수입이 6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한류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한 것.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중론은 하나다. 한류열기로 상품에 대한 기대감은 점점 높아지는 반면, 양산된 작품들은 그들의 기대를 맞춰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성공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일본인들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남북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빼면 대부분, ‘스캔들’, ‘달콤한 인생’, ‘내 머릿속의 지우개’, ‘외출’ 같은 한류스타들이 포진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의 거품은 차츰 빠지게 됐고 ‘야수’, ‘태풍’. ‘연리지’. ‘형사’ 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고배를 마셨다.

한류의 원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드라마의 경우에는 ‘겨울연가’와 ‘대장금’이후 ‘풀하우스’ 정도를 빼고는 그다지 한류로서 주목할만한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일드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 늘고 있어, 일드와 한드(한국 드라마)의 상황이 역전되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견들이 나오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것은 한류의 언저리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는 일류가 가진 득의의 미소이다. 한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끈 것은 일본 드라마에는 이제 찾아보기 힘든 순애보 같은 향수 섞인 전통적인 이야기 소재가 직설어법으로 일본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덕이다. 즉 한류의 인기는 거꾸로 말해 당시 일본 드라마나 영화계가 매너리즘에 봉착하고 있었다는 말도 된다.

어찌 보면 한류는 일본의 침체되어 있는 시장을 일깨운 공이 크다. 현재 한류가 몇몇 스타들에만 의지해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일본영화가 그 공백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상황이 그걸 말해준다. 한편 한류라는 전 세계 마켓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포장을 뜯어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일본 부품들(일본 만화, 소설 같은 원작들)’은 한류의 이면에서 일류가 얻어간 이득의 실체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류에 들뜬 상황에서 일류는 두 가지를 얻은 셈이다. 대내적으로는‘겨울연가’ 열풍 같은 자국의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류라는 흐름에 자연스럽게 자국의 문화 부품들을 띄워 세계 시장을 두드린 격이 됐다. 여기에 국내에서 불고 있는 일드 같은 일본 문화에 대해 갖게 된 호감은 덤이다. 아직 국내에 개봉된 일본영화들의 성적표는 좋지 않지만, 전보다 몇 배나 많이 일본영화들이 상영관이 걸리는 것은 앞으로도 그 성과가 미미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한류든 일류든 그것을 과거와 같은 한일전의 양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일본의 것이든 중국의 것이든 이젠 작품의 질이 국가의 차원을 넘어 개인에게 직접 소구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위기론이 대두되는 상황을 외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그것이 샴페인 일찍 터트리고 실익은 주변에서 다 채가는 상황을 막는 길이며, 그것만이 좀더 좋은 우리네 작품들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해체되는 가족, 거기서 보는 희망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웃음폭탄의 주재료로 다루는 건 ‘이 시대의 가족’이다. 그것이 웃음을 주는 이유는 한 집안에서 살고는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파편화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간의 과장된 대결구도는 재미의 한 요소로 끄집어 내진다. 박해미와 민용은 여러 차례 복수와 보복을 거듭하며, 나문희는 며느리인 박해미와 내적인 갈등 상황을 연출한다. 부자지간이지만 아버지인 이순재는 아들인 준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 윤호와 민호는 앙숙지간이다.

이렇게 질서(?)를 잃고 대결로 치닫는 가족관계는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와 달라진 가족구성원들의 역할 내지는 권력구도에서 비롯된다. 권위적인 아버지상의 아이콘이었던 대발이 아빠 이순재는 ‘야동순재’로 불리며 한층 낮아진 눈높이의 아버지상을 그려낸다. 게다가 아버지의 계보를 이어받는 준하는 이 시대가 만든 무능력한 아버지의 전형이다. 그러자 과거 아버지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된다. 대신 가족의 중심으로 서는 인물은 능력 있는 며느리로 표상되는 박해미다. 한 가족 속으로 들어온 며느리라는 이름의 새 구성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혈연으로 묶인 가족체계는 느슨해지면서 좀더 수평적인 구조로 재편된다.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 속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의 처지 때문이다. 최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시대 남성들이 처한 문제를 포착한다. 가장이란 이름으로 칼과 피가 튀는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세계’라는 진창에서 뒹구는 것이다.

이런 조직사회의 어려움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 속에서 장준혁(김명민)이란 캐릭터를 통해 극명하게 그려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파멸된 자신이라는 것은 이 시대 가장이란 이름으로 조직생활에 몸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여성들 전문직으로 나아가다
반면 대중문화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과거 남성들이 차지했던 그 권력의 자리에 앉혀진다. MBC 드라마 ‘히트’의 강력반 반장이 여성인 차수경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드라마는 작가가 밝혔듯이 형사물 이면에 ‘히트’라는 강력반으로 대변되는 유사가족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장점과 함께 단점을 가진 남정네들을 이끄는 인물은 차수경이란 여성이다. ‘히트’의 차수경처럼 TV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여필종부하는 여성들이 아니다. 심지어는 사극에서조차(예를 들면 황진이나 ‘주몽’의 소서노 같은) 여성들은 남성들을 휘어잡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남성이란 존재는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불륜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여성들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된다.

대중문화 속에 전문직 종사자로서 등장하는 여성상은 이제 오로지 결혼에만 목매는 트렌디한 성격으로 그려져서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저 스스로 독립적이며(마녀유희), 즐길 줄 아는 존재(로맨스 헌터)로 공감을 얻는다. 가족을 구성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 같은 여성들의 변화는 가족 그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동인이다.

각자 살아가는, 하지만 버릴 순 없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이렇게 변화된 가족의 모습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제목이 제시하는 중의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좋지 아니한가’는 ‘좋지 아니한 가(家)’, 즉 안 좋은 가족이란 의미와,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문장 그대로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관계는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은 저 ‘바람난 가족’에서 고개를 들더니 ‘가족의 탄생’에서 어떤 화해의 모습을 띄다가 ‘좋지 아니한가’에 와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이란 의미로서 그 가족은 좋지 않은 가족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비춰주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는 가족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걸어가는 삶 속에서 그저 묵묵히 옆을 돌아다보면 거기 늘 안길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족은, 과거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생되고 억압됐던 가족 구성원들을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다시 그런 가족이라면 ‘좋지 아니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좋지 아니한가’처럼 이 시대에 가족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살기 어려워진 사회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존재로서의 가족이며 또 하나는 수평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해체되는 양상으로 해석되는 가족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되는 것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서 가족관계는 변화를 요구한다. 명령하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하고, 직접 변화를 주려하기보다는 묵묵히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새로운 공존의 방법이 모색된다면, 좋지 않아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또한 좋지 아니한가’ 하고 긍정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족, 우리 문화의 경쟁력?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중국시장에서 반응을 보인 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민감해진 중국영화시장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바탕에는 ‘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미덕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중국언론들은 이 영화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차별점으로 가족을 들었다.

‘괴물’의 중국 성공, ‘가족’ 때문?
유력일간지 징화스바오는 ‘괴물’에 대해 “기존의 멜로물과 폭력물 위주에서 탈피한 한국영화”라며 “한 평범한 소녀를 괴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평범한 가족들이 사생결단”을 “눈물 없이 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영 베이징르바오는 이 영화가 “으시시한 공포영화나 화려한 화면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단결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집단적 가치에, ‘가족’이라는 가치가 덧붙여졌고, 거기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확실한 경쟁자를 내세우자 반응은 더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이 ‘가족’이라는 소재이다. 우리이게 이 소재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흥행의 요소가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쿨한 전개를 파고 들어오는 가족이란 이름의 끈끈함을 종종 비아냥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재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보다는 개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가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가족의 탄생’, ‘좋지아니한가’ 같은 가족을 표방한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영화 속 어디에서든 어른거린다.

조폭 짓 왜 하냐고? 가족 때문에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는 이제는 하나의 우리네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조폭영화에 ‘가족’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과거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들이 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촌 깡패짓을 하는 병두(조인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아한 세계’의 메인 카피, ‘조직에 몸담은 가장의 꿈’에서 조직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조폭 세계의 조직이란 뜻도 있지만 우리 현실사회에서 누구나 몸담게 되는 조직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조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은 하나의 상징이 되며 조폭에 ‘가장’이 붙게되자 영화 속 가장인 송강호의 삶은 더 독해진다. 그가 피가 튀고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조직생활(사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 때문이다.

송강호가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정작 ‘우아하지 않은 세계’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다.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는 아버지로, ‘눈부신 날에’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는 아버지로,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다.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형사 짓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만큼, 드라마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좀더 직접적이다. 주간시청률 집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대부분이 가족드라마이다. 거기에는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한 여자’, ‘나쁜여자 착한여자’, ‘사랑도 미움도’, ‘아줌마가 간다’등등 문제가 되는 불륜과 논란 드라마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족이 중심테마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단지 가족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전문직드라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하얀거탑’이 병원 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그리면서도 장준혁(김명민)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 것은 가족이 갖는 장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병원 내의 생사를 오가는 전문적 내용들이 다뤄지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속에서 가족의 이야기(예를 들면 이건욱(김민준)과 조문경(오윤아)의 에피소드 같은)를 끄집어낸다.

최근 시작한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 ‘히트’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수사경력 25년의 최고참 베테랑 형사이지만 만년 경사인 장용하(최일화)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강력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히트’의 멤버이면서 만사 제쳐두고 가출한 딸을 찾아 홍콩으로 가는 그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족이 갖는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국드라마라면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 잡는 형사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딸과 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자 드라마는 좀더 끈끈하고 절절해진다. 자극 중심의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감성적 드라마가 뒤섞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려면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영웅본색’은 헐리우드 영화가 갖지 못한 피의 끈끈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리’이다. 소마(주윤발)가 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폭력과 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만 하던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감성의 자극이었다. 그 감성은 그러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를 좀더 끈끈한 의리로 묶어놓자, 거기서 벌어지는 드라마에는 더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보다 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탓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그런 면에서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가 뒤늦게 인정하게 된 가치이다. 점점 글로벌화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해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이 하나의 아시아권으로서의 영화적 경쟁력을 키워나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가치이다. ‘의리’니 ‘가족’이니 하는 가치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똑같은 동양적 가치체계(예를 들면 유교나 불교 같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과거의 구질구질함으로 대변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가족’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라진 세상에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소재는 자칫 과거적 가치로의 회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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