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 남궁민의 연기에 깃든 드라마의 메시지

 

tvN 월화드라마 <낮과 밤>은 시청자들을 그 미궁 속으로 몰아넣었다. 28년 전 하얀밤 마을에서 벌어진 집단 사망 사건이 그 미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면, 28년 후 발생하는 연쇄 예고 살인은 그 미궁이 갈수록 깊어진다는 예고였다. 그러니 시청자들은 아무런 단서 없이 툭 던져진 미궁 속에서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됐다. 

 

하지만 그 28년의 간극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사건들을 연결시켜준 건 특수팀 팀장 도정우(남궁민)다.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지만 냉소적인 말투에 어딘지 허무 가득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던 도 팀장은 죽은 자들에게서 아무런 망설임이나 공포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은 연쇄 예고 살인의 범인으로 지목되고, 그것이 자각몽을 이용한 것이란 게 밝혀진다. 

 

이 과정에서 범죄심리학박사로 미국 FBI에서 파견된 제이미(이청아)가 도정우와 함께 28년 전 하얀밤 마을에서 생존해 탈출한 인물이라는 게 밝혀지고, 그가 우연히 만난 문재웅(윤선우) 또한 그 때 생존자 중 한 명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생체실험으로 죽어나간 아이들 속에서 살아남아 남다른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 또한 밝혀진다. 

 

애초 도정우라는 인물은 그래서 28년 전 하얀밤 마을과 현재 발생한 연쇄 예고 살인을 연결하는 존재로서 등장해, 과거에 벌어졌던 생체실험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찾아가는 인물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 백야 재단과 자신의 방식으로 맞서는 인물이 된다. 처음에는 특수팀 팀장이었다가, 연쇄 예고 살인의 용의자가 됐던 도정우는 이제 과거 생체실험으로 갖게 된 능력으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또 다른 아이들도 희생양으로 만들고 있는 거대 권력 집단인 백야 재단과 맞서는 다크 히어로로 변신한다. 그 미로 같은 이야기에서도 시청자들이 길을 잃지 않은 건 바로 이 인물 덕분이다. 

 

그런데 도정우는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그려내려 하는 '모호한 경계'라는 메시지를 캐릭터적으로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생체실험을 통해 보통 인간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되지만, 그 부작용으로서 뇌에 이상을 갖게 된 시한부이기도 하다. 그는 초능력자이지만 그 능력의 대가로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 낮인 듯 보이지만 밤이 겹쳐져 있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미스터리한 스릴러가 그 복잡한 미궁 속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여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낮과 밤>에는 우리가 분명하다 믿고 있던 어떤 것들이 사실은 모호한 경계에 서 있어 그것이 낮인지 밤인지를 알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어린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해줘야 할 보육원은 생체실험을 위해 아이들을 수급하는(?) 일을 하고 있고, 공혜원(김설현)에게는 그저 일만 아는 평범한 아버지인 줄 알았던 공일도(김창완)가 바로 그 실험을 28년 간이나 하며 이를 숨겨왔던 인물이다. 

 

진범을 잡고 진실을 추구해야 할 경찰 조직은 하얀밤 마을의 그 집단 사망 사건의 증거들을 은폐하고, 심지어 이 엄청난 범죄를 자행한 백야 재단에는 오정환(김태우) 같은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개입되어 있다. 게다가 이 실험에서 나온 공식을 통해 전직 대통령이 백 살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생존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하얀밤 마을의 집단 사망 사건이나 연쇄 자살 사건을 일으킨 것도 이른바 '자각몽'을 이용한 범죄로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를 이용한 사건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하얀밤 마을에서 비공식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셋 중 하나인 문재웅(윤선우)은 이 낮과 밤을 해리성 인격장애를 통해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는 함께 하얀밤 마을에서 탈출한 장용식(장혁진)에 학대당하며 포털 MODU를 통해 여론 조작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인자의 또 다른 얼굴이 등장하며 장용식을 오히려 지배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이러한 해리성 인격장애는 제이미 또한 겪던 일이라는 점에서 하얀밤 마을의 생체실험이 야기하는 뇌 이상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런 경계가 모호한 상황, 사건, 인물들을 통해 <낮과 밤>은 우리가 명징하다 여겼던 세계가 사실은 무수히 그 범주를 넘나드는 경계 위에 존재한다는 걸 드러낸다.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세상도 없고, 심지어 사람도 없다. 그래서 도정우라는 인물은 주인공이면서도 시청자들조차 이 인물의 실체를 의심하게 되는 놀라운 캐릭터다. 그는 살인자인가 아니면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영웅인가. 그는 피해자인가 아니면 가해자인가. 그는 초능력자인가 아니면 죽을 날을 앞둔 시한부인가. 

 

남궁민은 이 '낮과 밤'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동시에 가진 도정우라는 인물을 놀랍도록 섬세한 연기로 표현해낸다. 그의 섬세한 연기는 항상 입에 물고 다니는 막대사탕 하나만으로도 그의 이중성을 드러낼 정도다. 달콤해 보이는 사탕이지만, 그것은 먹지 않으면 뇌가 터져버릴 수도 있는 약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처럼 이리저리 입안에서 굴리며 막대사탕을 빨지만, 거기서 도정우라는 인물의 현실적인 고통이 느껴진다.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표정을 잔뜩 짓고 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허무함이 연민을 자아내게 만드는 인물. 남궁민이 아니었다면 이 복잡한 감정을 시청자들이 따라갈 수 있었을까 싶다. 그의 연기는 실로 이 미궁에서의 실타래가 되어주고 있다.(사진:tvN)

'스위트홈', 좀비와는 다른 선택권이 있는 괴물이라는 건

 

세상이 갑자기 종말을 맞이하는 아포칼립스 장르는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계가 됐다. 영화 <부산행>에서부터 <킹덤>에 이르기까지, 좀비들이 창궐해 온통 세상을 핏빛으로 뒤바꾸는 광경이 여러 콘텐츠들 속에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스위트홈> 역시 그 연장선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좀비와는 다른, 색다른 괴물(뭐라 부르기가 애매한)이 등장한다. 

 

아포칼립스 장르들이 그러하듯이 왜 갑자기 그런 괴물들이 나타났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린홈'이라는 사뭇 역설적인 이름의 거의 폐건물에 가까운 아파트에 생존한 사람들 역시 그 원인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욕망' 때문이라는 다소 막연해 보이는 원인이 등장할 뿐이다. 막연해 보이지만, 등장한 괴물들은 그 막연함을 실체적으로 구현해 보여준다. 

 

즉 괴물로 변하기 전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욕망이 그 괴물의 형상과 의지(?)에 투영되는 것이다. 근육맨이나 파충류혀, 털북숭이 등의 괴물들은 그들이 어떤 욕망들을 갖고 있었는가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털북숭이가 된 괴물로 변한 편의점 사장은 탈모로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온통 털이 뒤덮인 괴물로 변하게 되는 것. 

 

하지만 흥미로운 건 어떤 원인에 의해 '감염'이 된다 해도 모두가 괴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설정이다. 흔히 좀비 장르에서는 물리기만 하면 무차별적으로 감염되어 좀비가 되어버리지만, <스위트홈>에서 일찌감치 감염되어 코피를 쏟아내고 눈동자가 검게 변하는 경험을 한 차현수(송강)는 괴물로 변하지 않고 대신 빠른 회복 능력을 갖게 된다.

 

이 괴물화의 선택권이 온전히 당사자들의 것이 된다는 점은 <스위트홈>이 색다른 괴물 아포칼립스가 되는 중요한 이유다. 그것은 괴물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인간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욕망의 문제라고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근육맨 괴물 앞에서 사고로 아이를 잃었던 한 엄마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고 괴물로 변해 그 근육맨과 싸우지만 계속 그 괴물로 남아있지는 않는다. 그 엄마가 가진 보호본능과 더불어 가진 욕망은 실제 모습으로 그를 되돌리기도 하고 다시 괴물로 변하게도 만든다. 

 

주인공 차현수도 마찬가지다. 애초 온 가족이 사고로 사망한 후 혼자가 된 그는 아무런 삶의 의지를 갖지 않았던 인물이다. 은둔형 외톨이로 가족들과도 동떨어져 방에서만 지내던 그는 가족들이 모두 죽고 나자 그 방을 빠져나와 그린홈 아파트로 오게 된다. 그저 죽어버릴까를 생각하던 그는 세상에 괴물들이 창궐하고 고립된 아파트에서 아래층 아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선다. 그 역시 감염되어 눈빛이 변하게 되지만 그가 가진 선의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괴물이 되는 걸 막아준다. 

 

욕망에 따라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하지만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괴물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이 작품이 단순한 좀비 아포칼립스가 그리곤 하던 디스토피아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한 은유이고 일종의 경고로 그려진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욕망이 선의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악의를 갖고 있는가가 문제일 뿐.

 

이런 구도는 <스위트홈>의 세계에서 괴물들과의 사투를 외부의 문제가 아닌 내부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켜놓게 해준다. 그래서 <스위트홈>은 사실 괴물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린 홈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삶의 의지가 전혀 없던 차현수가 괴물이 되는 걸 참아가며 아파트 사람들을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이나, 아무런 삶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던 편상욱(이진욱)이 그린 홈 사람들이 내미는 손에 조금씩 마음을 여는 모습, 정재헌(김남희) 같은 기독교 신자가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하는 모습들은 우리네 사회의 인간군상들이 가진 저마다의 욕망과 의지들을 표상한다. 

 

그래서 <스위트홈>은 애초 시작부터 던졌던 화두를 향해 달려간다. 살아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삶의 의지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욕망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이 작품은 던지고 있다. 흥미진진한 괴물들과의 사투 속에서 인물들이 저마다 실제로 싸우고 있는 건 그래서 바로 자신이다. 

 

스토리나 설정의 재미도 재미지만, 이 작품은 이런 세계를 제대로 구현해낸 미술과 그 욕망을 캐릭터화한 괴물의 형상 같은 디자인적 요소들, 그리고 이를 잘 표현해낸 연출이 특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김은숙 작가와 명콤비를 이루며 많은 빅히트작을 만들었던 이응복 PD의 야심이 묻어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시즌1이 끝난 것이지만 여러 시즌으로 반복되어도 충분히 흥미로워질 수 있는 세계관의 탄생이 아닐 수 없다.(사진:넷플릭스)

'런 온', 임시완의 달리기와 신세경의 통역에 담긴 뜻은

 

"통역하는 건 뭐 예쁜 말만 잘 골라서 해야 하는 건 기본이니까 잘 알거고, 내 아들의 일거수일투족 보고해주는 정도? 통역사야 계속 붙어 다닐 수 있잖아. 그렇다고 허튼 마음먹으면 안 되겠죠? 수작을 건다거나." JTBC 수목드라마 <런 온>에서 기선겸(임시완)의 아버지 기정도(박영규) 의원은 통역일을 맡게 된 오미주(신세경)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한다. 그에게 통역이란 '예쁜 말만 잘 골라서' 하는 어떤 것이고, 심지어 그건 늘 붙어서 감시하는 일에 최적인 일 정도다.

 

하지만 오미주에게 통역은 그런 게 아니다. 첫 사랑이었지만 그리 좋은 감정으로 헤어지지도 않은 감독이라도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고, 그래서 그렇게 통역을 한 작품이 끝난 후 모든 관객이 다 나가도 끝까지 자기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오는 걸 보고 일어설 정도로 그는 통역을 사랑한다. 뮤지컬 영화의 통역이 입을 맞추는 게 어려워 개고생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작품 자체가 좋으면 어쩔 수 없이(?) 통역을 맡는 그다. 그에게 통역은 그저 언어를 바꿔 전달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걸 말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이 진정한 소통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기선겸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걸 다 가진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다. 단거리 육상 국가대표이고 그것도 본래는 창던지기 선수였었지만 달리기로 종목을 바꿔 차근차근 올라와 국가대표의 자리까지 오른 선수다. 아버지는 국회의원이고 어머니는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는 배우. 게다가 잘 생긴 외모 때문에 모델로도 활동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기선겸 자신은 그런 외부의 시선들과는 달리, 모든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인물이다. 동료들 사이에서는 금수저 취급받지만 아버지는 한 끼 밥을 먹으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려 하는 기선겸을 '못난 놈'으로 몰아세운다. 어머니 육지우(차화연)는 물론 국민 첫사랑이지만 기선겸에 대한 남다른 애정보다는 자신을 빛나게 해주는 역할 정도로 아들을 생각한다. 쇼윈도 부부가 아니라 쇼윈도 모자 관계랄까.

 

기선겸은 모든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답답한 상황 속에서 후배 김우식(이정하)이 선배들에게 상습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폭행하고 그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려 한다. 자신의 폭행이 단죄된다면, 후배를 폭행한 그들도 단죄될 거라 믿고 한 행동이지만, 이번에도 아버지가 나서 그 모든 걸 덮어버린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진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소통이 단절된 기선겸은 그래서 달린다. 그의 달리기는 그래서 그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단절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여기게 된 기선겸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달리는 것을 포기하고는 자신이 후배를 폭행한 사실을 밝힌다.

 

아마도 기자들은 그 폭행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게다. 그 뒤에 담겨진 다양한 의미들과 저간의 사정들을. 하지만 그 기자들 뒤에 서서 그 이야기를 듣는 오미주는 다르다. 그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오미주는 그가 왜 달리는 걸 포기하고 기자들 앞에서 폭행 사실까지 드러내는지 그 마음을 이해한다.

 

달리기를 하는 기선겸과 통역을 하는 오미주. <런 온>은 이들의 멜로를 그리고 있지만, 그 사랑이야기에는 '소통 단절'에 대한 이야기들을 깔려 있다. 가진 것의 차이로, 생각의 차이로, 또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아예 이해하려 들지 않아서 사람들은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해주지 못한다. 기선겸의 진심을 통역해주는 오미주라는 인물은 그래서 이러한 소통 단절의 깨고 들어오는 사회적 의미까지 담고 있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그저 남녀가 만나 툭탁대다 사랑을 하는 평이한 멜로 정도로 여겨졌지만, 보면 볼수록 기선겸과 오미주의 관계에서 남다른 설렘이 느껴지는 건,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진정한 소통에 이르러 가는 과정이 담겨 있어서다. 그것은 어쩌면 남녀 간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의미로까지 확장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사진:JTBC)

'펜트하우스'의 작가 마음대로 세계관, 사이다만큼 고구마도 크다

 

SBS 월화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오윤희(유진)는 애초 헤라팰리스 사람들의 갖가지 갑질과 폭력을 당하는 약자로 등장했다. 청아재단 이사장의 딸인 천서진(김소연)은 자신이 가진 아버지의 돈과 권력에 힘입어 오윤희가 받아야 했던 1등 트로피를 빼앗고 심지어 그의 목을 그음으로써 더 이상 성악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이 악연은 계속 이어져 오윤희는 자신의 딸 배로나(김현수)가 청아예고에 성악으로 들어가려하는 걸 결사적으로 막는 천서진과 헤라팰리스 사람들의 핍박을 받는다. 그래서 시청자들로서는 오윤희라는 약자의 입장이 되어, 딸의 복수를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심수련(이지아)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성공해가는 모습에 통쾌함을 느끼게 됐다. 오윤희는 결국 딸을 청아예고에 들어가게 하고, 헤라팰리스에도 입주하게 된다.

 

그런데 오윤희는 이처럼 시청자들이 몰입하게 만들고 그래서 사이다를 안겨주는 인물에서 한 순간에 불편하고 답답한 고구마를 안기는 인물로 변화한다. 그것은 그가 헤라팰리스에서 떨어져 사망한 민설아(조수민)를 죽인 범인이었다는 걸 흐릿한 기억 속에서 떠올리면서다. 물론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오윤희의 기억의 착각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스스로 자신이 범인이라 생각하게 되면서 이 인물은 조금씩 흑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간 민설아의 친모인 심수련과 의기투합해 펜트하우스 사람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공조해오던 오윤희는 점점 심수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어쩐지 주단태(엄기준) 같은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인물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청자들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약자로서 시청자들이 몰입해 그가 저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기를 원하게 만든 인물이 점점 뒷목 잡는 캐릭터로 변화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윤희 뿐만 아니라 그의 딸 배로나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하윤철(윤종훈)과 불륜관계일 거라는 오해 때문에 학교에 자퇴의향을 밝히고 술을 마시거나 도둑질을 하는데다 엄마에게 응석을 넘어 화풀이를 해대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시청자들 중에는 오윤희와 배로나가 심지어 펜트하우스 사람들보다 더욱 보기 불편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 이렇게 된 건 애초 그나마 믿었던 '몰입의 대상'조차 흑화된 데서 온 실망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펜트하우스'가 가진 사이다와 고구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면이 있다. 즉 빈부격차나 갑질 같은 상황들을 통해 돈과 권력으로 약자들을 짓밟는 이들을 공공의 적으로 세운 후 복수극의 형태로 사이다를 주는 이 드라마는 그 이야기가 작품 내적인 개연성을 따르기보다는 작가의 의지대로 인물들이 설정되고 흘러가며 변화한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그 사이다의 실체는 사실상 작가가 만든 고구마 현실들을 전제로 조금씩 던져주는 '작위적인 보상'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자극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때, '펜트하우스'는 또 다른 자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윤희나 배로나 같은 인물조차 뒷목잡는 캐릭터로 변신하게 만든다. 즉 현실과 달리 작가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뭐든 가능하기 때문에 강력해진 사이다는 정반대로 작가가 더 큰 자극을 위해 만들어내는 고구마도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펜트하우스'라는 세계는 작품 내적인 개연성보다 작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작위성이 커서, 사이다만큼 고구마도 마음대로 크게 만들어낸다. 약자로 시청자들이 몰입했던 오윤희가 어느 순간부터 흑화되어 시청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존재로 변화하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펜트하우스'가 복수극의 형태로 제공하는 사이다의 실체다. 그건 실질적인 어떤 메시지(적어도 권선징악 같은)를 위한 사이다나 카타르시스라기보다는, 시청자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위한 자극으로서 작가가 던져주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 그 사이다는 고구마로 변화할 수 있다. 더 큰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면.(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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