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캐스팅에 담긴 혼합장르의 열쇠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흔한 멜로라고 생각한 시청자라면 지금 스릴러로 치닫고 있는 이 드라마에 심지어 당혹감마저 느낄 만하다. <내 딸 서영이>로 국민 딸로 자리매김한 이보영과 <학교 2013>으로 여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이종석의 조합, 여기에 <시크릿가든>의 윤상현까지 가세하면서 드라마는 삼각 멜로의 달달한 이야기를 예상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수하(이종석)의 능력은 멜로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완전 소통의 가능성까지 만들어주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사진출처:SBS)'

하지만 이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보영과 이종석의 달달한 멜로가 그만큼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생긴 착시현상이지만 사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스릴러의 요소를 깔아놓고 있었다. 그것은 민준국(정웅인)이라는 범죄자 때문이다. 수하와 혜성(이보영)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이 바로 민준국(의 범죄의 피해자인 수하와 그것을 증언하는 혜성)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의 혼합 장르적 성격을 명확히 말해준다. 이종석의 풋풋한 눈빛과 이보영의 좌충우돌 명랑함이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해줬지만, 정웅인의 잔인한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 드라마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이 변곡점은 민준국이 혜성의 어머니인 춘심(김해숙)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순간부터다. 춘심의 치킨 집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은 민준국이 본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감금하고 몽키스패너를 휘두르는 장면으로 끝나는 7회 마지막까지도 설마 실제로 춘심이 죽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8회 첫 장면에서 춘심이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드라마는 급격히 법정극과 스릴러의 장르 속으로 그 흐름을 바꾸었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가 정웅인이다. 왜 민준국이라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역할에 정웅인이 캐스팅되었을까. 사실 정웅인 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르가 시트콤 혹은 코미디일 정도로 코믹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다. 잔뜩 경직된 얼굴 속에서 엉뚱하고 음흉한 모습이 살짝 드러날 때 그것이 웃음을 만들어냈던 기억을 대중들은 여전히 갖고 있다. 그러니 그가 범죄자로 등장한다는 것은 다소 의외의 캐스팅이다. 여기에는 이 혼합장르의 드라마가 가진 신의 한수가 들어가 있다.

 

이 드라마를 함께 세팅해온 SBS 김영섭 CP는 정웅인 캐스팅에 대해서 ‘반전 효과’를 노렸다고 말했다. 즉 코믹 캐릭터가 진짜 살벌한 범죄자로 변신했을 때 오히려 그 공포감은 더 커질 거라는 것. 그 반전 효과는 실제로 주효했다. 물론 초반부터 수하의 아버지를 죽이는 살인자로 등장하지만 그 배우가 정웅인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스릴러 장르라 여겨지지 않았던 면이 있었던 것. 초반 멜로로 충분히 수하와 혜성의 관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스릴러의 색채를 상당부분 줄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웅인이 진짜 범죄자의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섬뜩함은 오히려 배가 되는 효과를 만들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가진 특별한 매력은 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다양한 복합장르에서 비롯된다. 즉 청소년 판타지물처럼 보이던 것이 로맨틱 코미디로도 이어지고 멜로로도 엮어지다가 휴먼 드라마적인 요소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차츰 이 현실감 없을 것만 같은 판타지물은 점점 스릴러적인 요소를 강화하면서 무게감을 찾아간다. 비현실적인 판타지에서부터 지극히 현실적인 스릴러로의 자유로운 전환. 바로 여기에 이 드라마만의 독특한 매력이 생기는 지점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의 캐스팅은 다양한 장르적 성격들을 각자 구현해낼 수 있을 만큼 적절했다 여겨진다. 이종석이 그리는 청소년 판타지물의 성격과 이보영이 만들어내는 로맨틱 코미디와 가족드라마, 법정 장르의 요소, 그리고 윤상현이 여기에 부여하는 멜로와 휴먼드라마적인 색채가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웅인이라는 배우가 있어 멜로에서 범죄물과 스릴러로의 전환이 가능했다 여겨진다.

 

수하의 어머니가 죽고 1년이 지난 시점, 갑자기 떠오른 정웅인의 손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향후 전개가 도무지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수하가 정웅인의 살인피의자로 지목된 상황에서 혜성과 차관우(윤상현)가 그를 변호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무수한 변수들이 남아있다. 수하는 과연 민준국을 죽인 것일까. 왜 수하는 기억을 잃게 된 것일까. 민준국은 죽기는 죽은 것일까. 또한 수하와 혜성 그리고 차관우의 멜로는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이러한 다양한 궁금증과 기대감이 생기는 건 복합장르를 절묘하게 엮어내면서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거기에는 캐스팅의 묘수가 숨겨져 있다.

<최고다 이순신>, 짜증나는 엄마들 공감가지 않는 이유

 

<최고다 이순신>은 할 이야기가 이상하고 짜증나는 엄마들밖에 없나.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전면에 깔린 이 드라마는 이순신(아이유)을 길러준 엄마인 김정애(고두심)와 그녀를 낳은 엄마 송미령(이미숙) 사이의 갈등으로 이야기를 점화시켰다. 두 엄마가 한 자식을 두고 벌이는 갈등은 저 솔로몬의 선택에도 나올 정도로 고전적인 모티브를 가진 이야기다.

 

'최고다 이순신(사진출처:KBS)'

아이를 나눠가지라는 솔로몬의 판결에 아이를 살리려고 포기하는 친모의 이야기. 드라마는 길러준 엄마보다 더 비정한 낳은 엄마의 이야기로 변주된다. 자식이 상처받을 것을 걱정해 이순신을 친모인 송미령에게 보내는 김정애가 진정한 모성임을 이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런데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엄마의 상은 딱 거기까지다. 하긴 김정애라는 엄마도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는 이순신이 친 자식이 아님을 알고 그녀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던 엄마였다. 평생을 믿어온 만큼 남편에 대한 배신감도 컸을 것이니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다른 엄마들의 모습은 좀체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특히 송미령은 과연 모성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의심이 갈 정도다. 여전히 김정애를 찾아가는 딸 이순신을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 그녀는 이순신의 아버지 역시 친 아버지가 아님을 폭로한다. 제 아무리 이기적인 엄마라고 해도 자기 욕심 차리려고 자식에게 이토록 엄청난 충격과 상처를 주는 막장 엄마가 있을까.

 

이 드라마의 엄마들이 이상한 것은 ‘출생의 비밀’ 코드 속에 활용된 엄마들의 모습만이 아니다. 두 차례나 걸친 ‘출생의 비밀’ 코드가 펼쳐지면서 이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건 이른바 ‘혼사장애(결혼하려는 연인들과 그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라고 불리는 드라마의 식상한 코드 속에 등장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들이다.

 

이순신의 언니인 이유신(유인나)과 그녀를 좋아하는 박찬우(고주원)의 결혼을 반대하는 장길자(김동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아들이 그를 따라다니는 병원장 딸 신이정(배그린)을 마다하고 이유신과 결혼하겠다는 걸 ‘절대 불가’라며 반대하고 나선다. 이유는? 흔한 설정이지만 “내가 아들을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자기 자식만 잘났다는 이기주의다.

 

심지어 장길자는 이 문제로 절친한 친구인 이유신의 엄마 김정애에게 못할 말을 마구 쏟아낸다. 자기 자식이 귀하다면 다른 사람의 자식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이 비뚤어진 모성은 자기 욕심에만 가득 차 있다. 그것도 겉으로 보이는 빈부의 격차나 직업의 귀천 따위가 그 이유다.

 

아직 전면에 나오지 않았지만 이순신과 신준호(조정석) 사이에 생겨날 멜로 전선에도 신준호의 모친인 윤수정(이응경)이 결혼 반대를 들고 나올 것이라는 복선은 이미 조금씩 깔리고 있다. 아마도 이 이순신과 신준호의 결혼을 두고 윤수정과 벌이는 ‘혼사장애’ 코드 역시 꽤 오래도록 드라마를 질질 끌고 갈 것이 뻔하다.

 

물론 ‘혼사장애’라는 드라마의 코드가 ‘출생의 비밀’만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공식인 것은 분명하다. 실로 식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이 코드를 활용하면 어느 정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끌어도 ‘혼사장애’ 코드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과거에는 극강의 시월드를 만들어내는 시어머니의 결혼반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들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즉 결혼의 개념이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물론 결혼이 두 가족의 결합인 것은 맞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들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혼사장애’라는 코드는 공감 없는 짜증만을 불러일으키는 공식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주말극인데다, 그것도 KBS라는 막강한 간판을 달고 있으니 대충의 ‘출생의 비밀’과 대충의 ‘혼사장애’만으로도 시청률은 보장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그 시청률이 공감을 바탕으로 지지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되지 않는 상황에 짜증이 나더라도 그저 관성적인 시청에 의지하기 시작할 때 KBS 주말극이라는 철옹성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상하고 짜증나는 엄마들만 가득한 데는 그 얄팍한 방식으로 시청률만 가져가겠다는 제작진의 불성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볼 것이라 여기는 제작진의 교만이 보인다.

선생도 학생도 막장인 <여왕의 교실>, 실제일까

 

이게 진짜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일까. 아니면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 과정에서 제대로 우리화하지 못한 드라마의 문제일까. <여왕의 교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현실은 더 심하다는 쪽이 그 하나이고, 정반대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며 마여진(고현정) 선생 같은 인물이 과연 가능할 수 있느냐는 쪽이 다른 하나다.

 

'여왕의 교실(사진출처:MBC)'

이 드라마가 문제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아이들이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잔인한 행동들 때문이다. 친구를 지켜주려 한 심하나(김향기)는 매번 그 아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은보미(서신애)를 위해 마여진 선생이 제안한 축제 행사를 보이콧 하자고 주장하지만 은보미는 당일 거꾸로 마여진 선생에게 포섭되어 심하나를 배신하고 감시하는 조장이 된다.

 

또 지갑을 훔친 친구 고나리(이영유)와의 약속을 지켜주기 위해 그 비밀을 숨겨주다 본인이 도둑으로 몰린 심하나(김향기)지만, 고나리는 오히려 그런 심하나에게 이게 다 들킨 너의 잘못이라며 왕따를 시킨다. 심지어 고나리는 심하나가 지갑 주인인 수진(변승미)과 친해지게 되자 불안함을 느껴 둘을 이간질시키기도 한다. 로커에 가둬버리고 심하나가 도와 달라 애원하는 걸 장난스레 따라하는 아이들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이게 아이들이 맞나?

 

하지만 이것은 이기적이고 되바라진 아이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마여진 선생 같은 괴물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이다. 가정형편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동구(천보근)의 불행한 가족사를 아이들 앞에 공공연히 폭로하고 “너는 친구가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를 끝까지 믿는 하나에게 그녀는 “우정을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몰라주는 진실? 멍청하기는. 사람들이 몰라주는 진실 따윈 아무 의미 없어. 친구니 우정이니 그럴 듯한 말들이긴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은 틀렸어. 진짜 진실은 말야. 다른 아이들 눈에 보이는 네 모습이야. 선생님한테 반항하면서 잘난 척 했지만 뒤에서는 친구 지갑이나 훔치는 질 나쁜 애. 그러면서 끝까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 넌 이제 그런 아이야 알겠니?”

 

제 아무리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거의 아동 학대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적인 폭력보다 더 한 것이 정신적인 폭력이니까. 진실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고방식도 문제지만, 상처받은 아이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거기에 대고 거짓말쟁이에 이중인격자라 몰아 부치는 건 너무 심한 일이 아닌가. 이 마여진 선생의 대사는 그 부분만 떼어내서 들어보면 도저히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라고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무표정한 얼굴에 인간미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렇게 막장인 아이들과 선생 사이에서 오로지 아이다운 아이는 심하나 하나뿐이라고 여긴다. 아니 여기고 싶어진다. 친구가 없다는 선생님의 단언에 “오동구는 제가 좋아하는 친구예요”라고 말하는 아이, 진실이나 우정 따윈 필요 없다는 말에 “우정은 소중한 거고 언젠간 진실이 꼭 이길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 심하나만이 현실적인 아이처럼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는 심하나를 빼고는 현실성이 없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혹 원작이 만들어진 일본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이 다른 데서 생기는 편차가 아닐까. 그런 면이 있다. 마여진 선생 같은 인물은 실제 현실에서 그다지 보편적인 캐릭터라고 말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들이 이를 방치하고 있다는 건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제 아무리 성적 지상주의라고는 하나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그대로 볼 우리네 학부모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치부하기도 어렵다. 우리의 입시제도라는 것에 일본식 교육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미 입시교육의 시작점이 초등학교로까지 침범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약육강식의 현실을 던져놓은 어른들이 그 아이들에게 아이들다움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 아니겠는가.

 

결국 <여왕의 교실>은 드라마지만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 마여진 선생 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싶지만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또 그 선생의 논리가 틀렸으면 싶지만 잘못된 현실 속에서는 그 논리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현실이 아닌가. 그 속에서 비뚤어지고 파괴되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게다.

 

<여왕의 교실>의 시청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그것이 보기 싫은 것들을 자꾸만 우리 눈앞에 펼쳐놓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고 위로받기를 원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여왕의 교실>은 문제작이라 할만하다. 우정이 배신되고 오히려 왕따를 당하는 이 현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래서 드라마들 사이에서 왕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가진 심하나 같은.

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심의(心醫), <허준>

 

오로지 올곧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일까. <구암 허준>이 그려내는 이른바 심의(心醫)의 길에 어떤 감동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허준(김주혁)의 그 고군분투가 지금 현재 우리네 현실에 어떤 울림을 던져주기 때문이었을 게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는 심의의 길은 부조리한 세상에서는 그 자체로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길을 통해 허준은 아픈 병자들만이 아니라 아픈 세상까지 고쳐나간다.

 

'구암 허준(사진출처:MBC)'

혜민서(惠民署).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곳이지만, 부패한 관리들이 있어 이 곳 역시 병이 들었다. 순번을 바꿔주는 식으로 백성들의 돈이나 뜯어내고, 약재나 빼돌려 착복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 허준은 이를 엄금하려 하나 서리들의 만만찮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국법 또한 허준이 가려는 심의의 길을 방해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병자를 외면하지 말라는 스승 유의태(백윤식)의 가르침을 지키려 하나, 국법은 집으로 찾아오는 가난한 병자를 도운 허준에게 벌을 내린다. 내의원은 사사로이 병자를 볼 수 없다는 국법 때문이다.

 

‘중문과 정청을 오가며 어필 현판을 천 회 낭독하라’는 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허준이 수행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잘못된 법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어의 양예수(최종환)는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니 앞으로는 내의원도 돈을 받지 않는다면 병자를 사사로이 봐도 된다는 결정을 내린다. 결국 허준은 병자만 고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법도 바로 잡았던 것.

 

또한 자신을 모함했던 혜민서 서리가 온 몸에 농가진이 생겨 혜민서로 실려 오자 허준은 자신이 심지어 농가진에 전염되면서도 끝까지 병자를 고쳐낸다. 이 사실에 감복한 혜민서 서리들은 허준을 마음 속으로부터 존경하게 되고 결국 혜민서를 바로잡겠다는 그의 뜻에 따르게 된다. 허준은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병든 마음까지 고친 것이다.

 

<구암 허준>이 단지 조선시대의 한 명의가 성취한 의술의 이야기만을 다루었다면 어쩌면 얄팍한 잔재미에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암 허준>은 병자들을 구하는 허준의 모습을 통해 한 가지 뜻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성인의 길을 모색한다. 병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한 가지로 병만이 아니라 병자들의 마음까지 고쳐주고, 올곧은 심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병든 세상까지 고친다는 건 이 이야기가 가진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낸다.

 

실로 병든 세상이 아닐 수 없다. 돈 많은 세상의 갑들은 바로 그 돈으로 을들을 유린하고, 국민의 종이 되어야할 정치인들은 오히려 권력을 이용해 국민들을 기만한다. 광주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했던 전직 대통령에게 공소시효를 늘리고 벌금을 받아내기 위해 추징법을 세우려 하자 ‘인권침해’ 운운하는 세상이다. 법이 범법자들을 오히려 보호하게 될 때 그 누가 그 법을 믿으려 할 것인가.

 

<구암 허준>을 보면서 현재를 개탄하게 되는 것은 허준이 걸어가는 그 올곧은 길이 이 시대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오로지 병자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허준처럼, 오로지 국민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정치인, 법조인, 공무원들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세태일까. 병든 세상까지 고치는 허준의 이야기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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