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와 현대의 만남, '옥탑방 왕세자'

 

조선의 왕세자는 어째서 옥탑방에 떨어졌을까. '옥탑방 왕세자'는 이른바 '타임슬립'이라는 시간을 뛰어넘는 장르적 장치를 활용한 드라마다. 조선시대의 왕세자 이각(박유천)은 그의 신하들과 함께 자객들에게 쫓기던 중, 갑자기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의 박하(한지민)가 살고 있는 옥탑방으로 떨어진다. 과거에, 그것도 왕세자로 살던 인물이 현대로 왔으니 그 낯선 환경 속에서 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코미디가 될 수밖에 없다. 왕세자의 말투도 우스울뿐더러, 그를 모시는 신하들의 충성스런 행동거지도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그들이 겪는 현대의 서울 체험은 그 자체로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식의 유머에 닿아있다.

 

 

'옥탑방 왕세자'(사진출처:SBS)

드라마 초반부에 '개콘'보다 웃긴 드라마라는 닉네임이 붙더니, 차츰 복잡하게 얽히는 멜로가 시작된다. 이각은 박하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감정과 함께, 현대에 환생했다고 믿는 빈궁 홍세나(정유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홍세나가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태무(이태성)와 연인 사이라는 점은 이 4각 관계를 복잡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훗날 누가 누구와 연결될 것인가 하는 구도가 불명확한 건 아니다. 드라마가 이각과 박하를 선으로, 홍세나와 용태무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을 그릴 것이라면(코미디 장르에서 비극을 그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이각과 박하가 서로 마음을 열게 될 것이라는 점은 명확해 보인다.

 

이 드라마는 겉으로 보면 그 코믹함과 선명한 멜로 때문에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겉모습을 한 꺼풀 벗겨내 놓고 보면 그 안에 담겨진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왜 조선의 왕세자가 현대의 옥탑방에 떨어졌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조선이라는 전근대적인 상황은 현대와 만나면서 그 자체가 코미디가 되고 있다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길거리에서 "전하-"하고 외치고, 치렁치렁한 머리를 자를 바엔 차라리 목을 자르겠다고 고집하는 모습은 전근대적인 주종관계를 코미디로 포착해낸다. 따라서 이 코미디는 그 자체로 이 전근대적 관계(이게 어디 조선시대만의 모습일까. 현대에도 자본부의가 만들어낸 돈의 위계질서가 있다)를 풍자함으로써 뛰어넘으려는 의도를 담게 된다.

 

그렇다면 전근대를 뛰어넘어 합리적이며 쿨하다는 현대는 어떨까. 박하가 살아가는 현대의 모습 역시 비상식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전근대를 뛰어넘는 근대화가 가져온 합리성은 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집단과 신분에 예속되던 개인이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많은 것을 희생하게 했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끈한 관계 같은 좋은 가치가 돈을 매개로 하면서 사라지게 됐던 것. 용태무와 홍세나는 이 근대의 합리성이 가져온 폐해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캐릭터들이다. 그들은 욕망을 위해 친구를 죽게 하고 심지어 위험에 놓인 부모와 형제를 외면한다.

 

옥탑방에 왕세자가 떨어진 이유는 이 전근대와 현대의 가치를 동시대에 놓고 바라보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것이다. 사실 전근대라고 해서 반드시 버려야할 가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라고 해서 반드시 나은 가치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전근대든 현대든 좋은 가치를 가져가고 나쁜 가치는 버리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옥탑방에 떨어진 왕세자 이각은 절묘한 위치에 서 있는 캐릭터다. 그는 서민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차츰 전근대적인 주종관계의 부조리를 이해하게 되고, 또 한 편으로는 돈에 매몰되어 있는 현대인들을 측은하게 바라본다.

 

'옥탑방 왕세자'는 그래서 현재가 과거를 몰아내는 식의 혁명을 꿈꾸는 드라마가 아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가 만나 서로 화해하고 잘못된 것들은 밀어내고 잘된 것들은 끌어안는 그런 드라마다. 물론 타임슬립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활용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웃기고 울리는 이 코미디 같은 드라마가 때론 마음 한 구석을 훈훈하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왕세자가 옥탑방으로 떨어져 현대의 서민들의 삶과 욕망을 겪고 바라본다는 점, 이 전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지점이 이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재미를 주지만, 그것이 또한 갖는 의미도 깊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규리에겐 너무 가혹한 '무신'의 대본

 

과거 사극은 다분히 연극적이었다. 스펙터클로 보여주기 힘들었던 전투 장면들은 대부분 장수들이 카메라 앞에 일렬로 죽 서서 "적들이 몰려옵니다!" 식의 대사를 한 마디씩 하는 걸로 채워지곤 했다. 이 과거의 사극이 지나치게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단적인 장면은 현대적인 드라마에서는 좀체 어색해서 사용하지 않는 독백이 너무 잦다는 것이다.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면 좀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지만, 굳이 인물이 "어떻게 내가 김준의 이름을 얘기한 거지?" 하는 식의 독백을 하게 하는 건 그것이 하나의 관습이라 여기기 때문인 것 같다.

 

 

'무신'(사진출처:MBC)

하지만 요즘처럼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한껏 높아진 상황에 이런 연극적인 톤은 드라마 몰입을 방해하는 단적인 요소들이다. '무신'은 그런 점에서 장면 자체가 흥미롭다가도 이 몰입을 방해하는 연극적인 톤들과 작위적인 설정에 의해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캐릭터가 김규리가 연기하는 송이라는 인물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합하 최우(정보석)의 딸인 송이가 일개 노예에 불과한 김준(김주혁)에게 반하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라는 인상이 짙다.

 

격구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승리를 이끈 김준이 단상에 있는 월아(홍아름)에게 눈길을 던지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송이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지나친 설정처럼 보인다. 따라서 송이가 기뻐하는 모습이 진심이 아닌 연기처럼 여겨지는 건 그 상황 자체가 리얼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송이가 김준에게 빠져드는 것은 이 계속되는 격구장에서의 착각에서 비롯된다.

 

고려시대, 최고 권력자의 딸이 노예를 사랑하게 되는 이 극적인 상황에서 이런 단순하고 우연한 동기는 캐릭터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공감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동기가 공감이 가지 않기 때문에, 송이가 역시 최고 권력의 위치에 서게 된 김약선(이주현)과의 혼사를 거부하는 것 역시 한갓 투정처럼 여겨진다.

 

송이의 어머니인 정씨(김서라)가 송이에게 김약선과의 혼사는 거스를 수 없는 일이라고 엄포를 놓자, 송이가 "그럴 바엔 노예 김준이 낫겠다"고 말하는 장면도 어색할뿐더러, 혼자 산책을 하다 송이가 왜 자기가 김준을 언급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의심하는 독백은 더더욱 뜬금없게 여겨진다. 이런 독백이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들어가 있는 건, 그만큼 이 캐릭터가 자연스럽게 구현되어 있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감하기 힘든 상황 전개와 연극적인 톤으로 혼잣말을 통해 제 마음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그래서 대단히 부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런 점은 특히 김규리에게 더 가혹하다고 여겨진다. 김규리가 맡은 송이라는 역할은 보통 사내들 정도는 우습게 여기는 여장부다. 이런 캐릭터가 매력을 가지려면 실제로 국가대소사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송이는 어떤가. 그녀는 주변에서 여장부로 일컬어지지만 실제 하는 일이라곤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김준에 대한 연정으로 괴로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캐릭터라면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들도 매력을 가지기가 어렵다.

 

이 드라마에서 이런 사정은 물론 김규리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와 멜로에 있어서 이 사극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월아가 결국 비상을 먹고 자결하게 되는 시퀀스도 작위적이고 월아라는 여성 캐릭터도 너무 수동적이면서 전형적이다. 이것은 복잡한 정치 상황과 권력의 문제를 캐릭터를 통해 그나마 잘 보여주고 있는 남성 캐릭터들과 확실한 비교점을 만든다. 여성 캐릭터가 잘 살지 않는 사극이(그것도 주말이라면 더더욱) 성공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김규리는 이 사극이 가진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캐릭터다. 그녀는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도 너무 강하게 어필되어있는 점이 있다. 한때 광우병에 관해 했던 소신발언은 아직도 그녀의 강한 이미지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다른 이미지를 보여줄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지만(그녀는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이미지는 좀체 떨쳐지지 않는다. '무신'은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김규리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온다. 어째서 이렇게 공감도 가지 않고 매력도 느끼기 어려운 캐릭터의 짐이 그녀에게 지워졌을까. 여러모로 '무신'의 다분히 작위적인 대본이 만들어내는(특히 여성 캐릭터에게 더더욱) 이런 문제들은 김규리에게는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킹 투하츠', 이승기에 맞춤인 이유

 

'더킹 투하츠'에서 재하(이승기)는 왜 항아(하지원) 앞에서 자꾸만 마음이 변덕을 부리는 걸까. 자신을 거부한 항아에게 철저히 복수하겠다며, 그 마음을 빼앗은 후 헤어져 평생 잊지못할 상처를 주겠다는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실제 실행에까지 옮기지만 재하는 막상 자신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항아를 보고는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해진다. 거기서 진심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용히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하려는데, 불쑥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하자 또 마음이 바뀐다. "너랑 왜 내가 약혼을 하겠냐"며 독설을 날린다.

 

 

'더킹 투하츠'(사진출처:MBC)

도대체 왜 재하는 이토록 변덕이 심한 걸까. 사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의 제목하고도 관련이 있다. 재하의 갈등은 항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재하는 제목처럼 두 개의 심장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 하나는 남한의 왕제로서의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다.

 

그가 모의 훈련 중에 항아를 향해 총을 쏘는 상황은 이 재하라는 인물이 가진 두 개의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남자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나라의 왕제로서 인질이 되어 국익에 손실을 줄 바에는 총을 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물론 모든 게 모의훈련으로 드러났지만, 후에 재하는 항아와 행군을 하면서 그 때 상황을 얘기한다. 자기의 마음도 뻥 뚫리는 것 같았다고. 이것이 한 남자로서의 심장이 전하는 말이다.

 

재하는 이 두 개의 심장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남자로서 항아라는 알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에게 흔들리다가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오래도록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점, 게다가 복잡한 정치적인 사안들과 맞물려 있는 결혼이라는 문제에까지 다다르면 또 마음 한 구석이 흔들리게 된다. 자신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제로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그는 또 개인이 아닌 왕제로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갑자기 항아가 약혼을 하겠다고 발표해버리자, 그 즉시 부인할 수 없는 게 왕제로서의 그의 마음이다(거부하면 이것은 남부 간의 불편한 관계로 이어진다).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역할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때론 완전히 개념 없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떤 순간이 오면 왕제로서의 근엄함을 유지하는 진중함으로 돌변해야 한다. 이것은 멜로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날라리처럼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마음을 찡 울리는 진심이 묻어나야 하는 인물이 재하라는 캐릭터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이미 이승기는 드라마와 예능, 가수 활동을 하면서 겪었다는 점이다.

 

그의 첫 이미지는 '황태자'였다. 그것도 누나들의 로망으로서의 황태자. 하지만 그 황태자가 '1박2일'이라는 예능을 통과하면서는 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가 되기도 하고, 때론 허술함이 드러나는 허당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찬란한 유산'을 통해서는 개념 없던 황태자가 진솔한 청년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에서는 사랑을 알아가는 순수한 청춘을 연기하기도 한다. 또 홀로 '강심장'을 맡았을 때는 이제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짓궂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킹 투하츠'는 이승기에게 이 황태자의 진중함과, 막내이자 허당으로서의 가벼움을 동시에 품게 하는 드라마다. 이 작품 속에서 이승기는 때론 지독할 정도의 악동의 모습이었다가 또 순간 진중한 모습으로 돌변해 그 악동 이면에 있는 왕제로서의(황태자의 삶으로서의) 쓸쓸함을 드러낸다. 이 두 가지 이미지의 통합은 '더킹 투하츠'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왕제 재하라는 캐릭터의 연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더킹 투하츠'는 지금껏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MC로 활약하며 다양한 모습을 끄집어냈던 이승기에게 이 이미지들을 통합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다. 진중함과 가벼움, 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황태자의 탄생. 이것이 '더킹 투하츠'에 이승기가 맞춤인 이유다. 이승기는 지금 진정한 '킹'이 되기 위한 '투하츠'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니까.

'건축학개론'을 통해 보는 연기력 논란의 실체

요즘 영화계의 화제는 단연 '건축학개론'이다. 첫사랑에 대한 멜로를 시공간을 활용해 '건축적'으로 잘 축성한 이 영화에서 단연 주목을 끄는 배우는 이제훈이다. 첫사랑의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절망을 그는 앙다문 입과 순수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잘 표현해냈다. 그런데 이 연기 잘하는 신예답지 않은 신예(물론 그는 영화 '파수꾼'이나 '고지전'을 통해 그 가능성을 보여준 배우다)가 처음 '패션왕'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는 심지어 연기력 논란마저 겪어야 했다.

 

사진출처: 건축학개론

'패션왕'에서의 재혁이라는 캐릭터는 '건축학개론'의 승민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이다. 승민이 순수함과 따뜻함 그 자체라면 재혁은 노련함과 차가움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초반 그 차가움을 드러내기 위해 표정을 잘 보이지 않았던 데서 연기력 논란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본인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려 한 것일 게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장르는 어딘지 영화와는 달리 '연기하는 톤'이 드러나는 걸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장 연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몰입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는 특정 공간에서 완전 몰입해 감상하는 반면(그래서 집중도가 더 높다), 드라마는 생활의 공간 속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슬쩍슬쩍 보기도 하는 장르다. 그러니 뭔가 연기가 보이지 않으면 안한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다행스러운 건 이제훈이 차츰 드라마에 적응하며 악역으로서의 재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한 건 이 단단한 신예는 분명 앞으로 배우로서 확실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거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연기력 논란에 휘말렸던 한가인은 확실히 '건축학개론'에서는 제 옷을 입은 편안한 느낌이다. 이것은 드라마와 영화의 장르적 차이라기보다는(그녀는 이미 둘 다 충분히 경험했다) 사극과 현대극의 차이 때문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첫 사극 연기로서 한가인은 많은 단점을 드러냈던 것이 사실이다. 대사의 톤을 맞추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역할에 동화되지 못하고 흉내 내는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하지만 '건축학개론'은 달랐다. 완성도가 지상과제인 영화와 순발력이 더 요구되는 드라마적인 차이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연기자들의 몰입도에 따라 그 연기력이 달라보였을 것이지만, 이처럼 장르적인 차이와 그로 인한 작업방식의 차이에 의해 연기자들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줄 수도 있다. 물론 이제훈과 한가인의 연기력을 이런 식으로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확실히 이제훈이 보여주는 연기는 더 오래 연예계에 발을 담아왔던 한가인보다 훨씬 단단하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영화와 드라마가 가진 장르적 차이가 우리가 흔히 통칭해서 부르는 '연기력 논란'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또한 드라마의 연출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즉 지극히 드라마적인 드라마들(예를 들면 가족드라마나 일일드라마 같은 관습적인 연출을 하는) 속에서 캐릭터들은 조금씩은 과장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기도 조금은 연극 톤으로 과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영화 같은 드라마들은 사뭇 다르다. 이들 드라마들은 과장된 연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연출 속에 녹여내려 한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친구로 나온 납뜩이 역할의 조정석이 '더킹 투하츠'에서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의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가 멜로라는 틀 속에서 오히려 이 가난한 동네에 살아가는 청춘들의 우정으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것은 그것을 껄렁한 농담으로 보여준 조정석의 단단한 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볍게 여겨지던 납뜩이가 '더킹 투하츠'에서는 은시경이라는 시종일관 진지함을 드러내는 원칙주의자로 변신한다. 여기에 아무런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조정석의 연기력이 밑바탕 되어 있는 것이지만, 또한 영화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더킹 투하츠'라는 드라마의 연출이 기여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건축학개론'에서 말 그대로 재발견된 수지는 연기력이라는 것이 단지 연기자의 능력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말해준다. '드림하이'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드라마 속에서 수지가 보여준 그 어떤 배우로서의 매력보다 '건축학개론'의 서연을 넘어서기는 어려울 듯 싶다. 한편 엄태웅은 '건축학개론'에서 조금은 세파에 찌든 나이든 승민을 연기한 것보다 드라마 '적도의 남자'에서의 광기어린 연기가 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아마도 연기력보다는 캐스팅과 캐릭터에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이처럼 연기력 논란은 단순히 연기자의 문제로만 지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장르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고, 드라마든 영화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내고 있느냐는 연출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래도 결국은 제작자의 문제가 가장 크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같은 연기자들이 연기를 했지만 연기력 논란은커녕 배우를 재발견시키고 있는 '건축학개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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