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상영 중단 미스테리 왜 커질까

 

어쩌다 이런 촌스러운 일마저 벌어지게 됐을까. 이미 개봉된 영화이고 개봉 첫날부터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 전체 박스오피스 11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인 관심을 모은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프로젝트>는 상영 중이던 26개 메가박스 개봉관에서 내려지게 됐다.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흥행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었던 것.

 

(사진출처 :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메가박스 측에 의하면 ‘일부 단체의 강한 항의 및 시위에 대한 예고로 관람객 간 현장 충돌이 예상돼 일반 관객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상영 취소는 배급사와 협의 하에 이뤄졌다고 말했지만 구체적인 협박 내용 등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영화를 기획 제작한 정지영 감독은 메가박스의 일련의 조치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첫째, 일부 단체가 압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즉각 영화 상영을 취소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상식적인 행동은 그 압력을 행사한 단체를 오히려 고발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둘째, 제작 배급사와 협의 하에 상영 취소가 이뤄졌다고 발표했지만 정지영 감독측에서는 그 어떤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유일하게 멀티플렉스 체인 영화관 중에서 상영관을 열어준 메가박스에 고마운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는 것. 이런 상황에 아무런 협의 없이 이뤄진 메가박스의 상영 취소 조치가 단순히 일부 단체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건 역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셋째, 왜 이런 사상 초유의 결정을 내리는 일에 메가박스측은 그 단체가 어디인지 또 그 단체가 한 협박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느냐는 점이다. 만일 이것을 밝히지 않는다면 메가박스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뒤집어쓸 위험도 있다. 이것은 대중들을 상대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서는 치명적인 영업의 오점이 될 수 있다. 영화관이 가진 이미지는 그 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천안함 프로젝트>는 이미 법원이 유족과 사회 일각에서 낸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기각한 영화다. 즉 사법부가 상영이 정당하다 판결한 영화가 일부 단체의 협박과 압력으로 뒤집혀진다는 것은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일부 단체의 힘이 사법부보다 더 크다는 얘기일까.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식의 영화 상영을 둘러싼 잡음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촌스러운가를 말해준다. TV라면 모를까 영화관은 각자 선택에 따라 돈을 내고 보는 곳이 아닌가. 즉 제 아무리 소수의 의견이라고 하더라도, 또 어떤 사안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표현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져야 한다.

 

9.11 테러를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다루며 부시 정부를 맹공격했던 마이클 무어의 다큐 영화 <화씨 911>은 그 누구의 제동도 받지 않고 상영되었고 평단과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라크 참전 유가족들에게는 민감한 문제일 수 있었지만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 그들은 관대했다. 심지어 지난 미국 대선 때는 오바마 행정부를 비난하는 <2016 오바마의 미국>이라는 다큐 영화가 개봉되었고 흥행에도 성공했지만 이 영화의 상영을 제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영화는 영화고 표현은 표현이며 정치는 정치라는 쿨한 이런 면모는 실로 부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영화 한 편 보는 게 실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영화가 정치나 이념적인 이유로 상영 금지에 휘말리기도 하고 심지어 상영되던 영화가 일부 단체의 협박에 의해 내려지기도 한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와도 진보냐 보수냐의 편 가르기의 시선을 느끼는 게 우리네 사회의 현실이다.

 

이것은 영화 한 편의 힘이 그렇게 대단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영화 한 편에도 화들짝 긴장하는 그 무언가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반증일까.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천안함을 둘러싼 공방들이 환기시키는 미스테리만큼,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 상영을 둘러싼 미스테리 또한 증폭되고 있다. 실로 안타깝고 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국열차>가 비판하는 <설국열차> 독과점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설국열차>가 다루고 있는 것은 저절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실체다. 하층 계급이 무임승차한 대가로 사는 열차의 맨 꼬리 부분에서 상층 계급이 살고 있는 맨 머리 부분까지 달려가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의 여정(?)은 그래서 이 계급으로 나눠진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저 스스로 작동하는 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설국열차(사진출처:CJE&M)'

흥미로운 것은 하층 계급의 혁명가인 커티스가 일으키는 반란조차 적절한 인구수를 조절하는 이 시스템의 한 부분이라는 점이다. 하층 계급이 상층 계급으로 올라가려는 욕망은 그래서 이 열차의 통치자인 윌포드(애드 해리스)에 의해 때로는 부추겨진다. 결국 맨 머리 부분까지 올라간 커티스를 윌포드가 설복시켜 차기 통치자로 내세우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시스템의 통제방식이 하나의 반복적인 궤도를 이루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커티스가 혁명의 이름으로 맨 꼬리 부분에서 맨 머리 부분까지 달려가는 이 욕망의 시스템에 충실한 인물이라면, 남궁민수(송강호)는 이 시스템의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전면에 나선 인물이 커티스임에도 불구하고 남궁민수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결국 이 시스템을 깨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커티스의 오로지 앞으로만 나가려는 힘과 남궁민수의 자꾸만 옆길로 빠지려는 힘은 그래서 이 영화의 중요한 두 흐름과 그 부딪침을 만들어낸다.

 

크로놀 중독자처럼 보이던 남궁민수가 열차의 맨 머리 부분의 윌포드가 있는 문 앞에 서서 커티스와 나누는 설전은 그래서 대단히 흥미롭다. 남궁민수는 그 자리에서 커티스에게 “문을 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남궁민수라는 캐릭터의 역할(각 계급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가 열려는 문은 윌포드가 있는 곳으로 가는 문이 아니다. 열차 바깥으로 나가는 문. 여기서 크로놀은 마약이 아니라 폭탄으로 돌변한다. 시스템에 중독된 이들을 깨는 방식으로 크로놀을 사용한다는 설정에는 봉준호식의 블랙유머가 살짝 들어가 있다.

 

그렇다. <설국열차>는 단순하게 말하면 모두가 동승해야만 하고, 또 각자 부여받은 칸에서 살아야만 하며, 또 계급 상승 욕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오로지 윗칸으로만 달려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 무비판적이고 세뇌적인 시스템의 옆구리에 옆으로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는 영화다. 모두가 다 앞으로만 달려갈 때 왜 그래야 하느냐고 질문하는 남궁민수의 역할은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에 해당한다.

 

결국 이 <설국열차>는 자본주의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열차라는 상황으로 집약해 놓은 놀라운 작품이다. 마치 카프카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그러하듯이 거기에는 비현실적이고 심지어 판타지적인 세계가 그려지지만 그 세계의 작동방식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너무나 리얼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저 시간 죽이는 블록버스터를 기대했다면 적잖이 옆길로 새는 이 영화는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상징이나 블랙 유머를 한 번 생각해보면 <설국열차>라는 작품이 가진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설국열차>라는 영화 자체가 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산물이라는데 있다. 이 영화는 CJ E&M이 무려 450억을 투자해 만들어진 영화다. 할리우드라면 소자본 영화겠지만 우리로서는 블록버스터 중에 블록버스터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이렇게 투자된 영화에 CJ가 총력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CJ가 구축하고 있는 CGV 멀티플렉스는 그래서 이 <설국열차>가 움직이는 시스템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스크린 독과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설국열차> 개봉 첫 주말 스크린 수는 1128개로 역대 6위라고 한다. 상영 횟수도 지난 13일만 두고 보면 1014개 스크린에서 무려 5213번 상영되었다고 한다. 이미 6백만 관객 수를 동원하고 7백만 나아가 1천만 관객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괜찮은 영화지만 가장 많은 스크린을 확보함으로써 결국은 영화관을 찾는 이들이 볼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됐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몇몇 언론에서는 아예 대놓고 관객 수 카운팅 기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올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 역시 영화 흥행의 시스템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치 <설국열차>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 관람의 행렬에 동참하지 않으면 소외될 것 같은 기분. <설국열차>에 올라탄 승객들이 가졌을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열차 바깥으로 나가면 우린 모두 죽어요’라고 외치는 아이들처럼.

 

<설국열차>는 좋은 영화지만 그것이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과정에는 이 영화가 메시지로 던지고 있는 ‘옆길로 샐 권리’ 자체를 봉쇄하는 씁쓸함이 담겨져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아이러니인가. 영화는 옆길로 샐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영화가 보여지는 방식은 그걸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굳건히 붙박여 있다는 것은. 이것은 이 영화가 대단하기 때문일까(그만큼 자본주의 시스템을 제대로 꿰뚫고 있기 때문?) 아니면 이런 메시지조차 시스템으로 묶어두는 자본주의의 힘이 대단한 것일까. 봉준호 감독은 이 시스템에서 남궁민수가 되고 싶었겠지만 그 윌포드식의 완벽한 현실의 시스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모양이다.

류승룡은 어떻게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됐을까

 

<7번방의 선물>에서 류승룡이 연기하는 용구는 딸바보다. 용구가 영화 속에서 한 가장 많은 대사는 아마도 “예승아!”라고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을 게다. 얼굴만 쳐다봐도 그 간절한 부성애가 넘쳐나는 용구는 정신지체의 장애를 갖고 있는 실제 바보이기도 하다. 강풀 원작의 <바보>가 그러한 것처럼 이 시대에 바보의 의미는 오히려 똑똑하고 계산적인 이들이 갖지 못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다. <7번방의 선물>에서는 그 바보가 아빠로 돌아왔다. 진정한 딸바보의 탄생이다.

 

사진출처: 영화 '7번방의 선물'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의 결정체는 그러나 지독한 현실과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바보라는 존재가 늘 이른바 정상이라고 하는 이들의 변명거리나 희생양이 되는 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을 게다. 용구는 그렇게 7번방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딸 예승이를 부르며 애끓는 부성애를 보여준다. 그 부성애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어떤 아이의 강간 살해범이라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쓰게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딸바보 류승룡이 이 땅의 모든 부모들을 눈물 짓게 만드는 것은 이 바보 같은 용구라는 존재가 그 부모들이 살아왔던 삶을 극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자식 하나만을 보며 살아온 부모세대는 그러나 지금 이 청춘들이 길거리로 내몰리는 현실의 발원지처럼 백안시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지난 대선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투표장을 향했다는 그 세대들은 어찌 보면 자신의 시대가 배척당하고 부정되는 현실의 억울함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7번방의 선물>처럼 최근 들어 모성애가 아닌 부성애가 귀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내 딸 서영이>는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버지의 시선이 담겨진 드라마다. 과거의 잘못을 저지른 것은 맞지만 딸에게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면서도 그 딸의 앞날만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시청률 40%를 넘어 50%를 향해가는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아빠 어디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이하면 늘 먼저 떠오르는 엄마를 집에 남겨두고 대신 아빠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아빠들은 이 1박2일의 여행을 통해 아이들의 사랑을 재확인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성동일이 조금은 권위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아이를 통해 돌아보고, 김성주가 주눅이 든 아들의 모습에 자신이 너무 윽박지르며 아이를 대했던 것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처럼 최근 부성애를 다루는 콘텐츠들은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을 통해 그 양자를 힐링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 <7번방의 선물>의 류승룡이 한 때 거친 수컷의 향기를 뿜어내던 작업남에서 부성애의 끝단을 보여주는 딸바보로 돌아오면서 계속 대중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 바탕에 깔린 남성들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 아버지들은 그렇게 수컷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고, 이제는 그 차원을 넘어서 판타지를 통해서라도 어떤 힐링을 꿈꾸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류승룡이 왜 최근 새로운 아이콘으로 급부상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다. 딸바보 류승룡이 보여주는 <7번방의 선물>은 우리 시대의 수많은 바보 아빠들은 물론이고 그를 새롭게 바라보고픈 자식들을 위한 판타지다.

비참한 삶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대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어느 선거보다 뜨거웠던 대중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던 선거였다.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로 나뉘어져 팽팽한 대결을 벌였지만 그 공약이 전하는 내용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로 양극화 문제 해결, 반값등록금 실현과 청년 실업 해결, 대기업의 횡포로 사라져버린 골목 상권 부활 등등. 그것이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를 넘어선 작금의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 <레미제라블>

대선이 치러진 날 <레미제라블>이 개봉되었다.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레미제라블>은 이 날에만 전국 28만 3887명의 관객을 동원 누적 관객수 34만 3094명을 기록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마치고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이미 고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어떤 희망을 꿈꾸었을까.

 

<레미제라블>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의 비참했던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목부터가 <레 미제라블 Le Miserable> 즉 ‘비참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의 감옥살이를 지낸 장발장, 병을 앓고 있는 코제트를 위해 몸까지 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여인 팡틴, 고아나 다름없이 갖은 구박과 착취를 겪으며 살아가는 코제트가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가난과 비참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도시, 그 끝없는 고통의 그늘 속에서 마리우스 같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가진 아버지를 부정하고 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하지만 혁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 시위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혼자만 장발장에 의해 살아남게 된 마리우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 마리우스를 위로하고 감싸 안는 건 바로 연인 코제트와 그 사랑을 이뤄준 장발장이라는 위대한 인간의 헌신이다.

 

<레미제라블>은 최근 우리 문화계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뮤지컬 영화가 개봉되었고, 뮤지컬은 우리말로 초연되었다. 5권으로 완역된 소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고 심지어 다시 돌아온 피겨 여왕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의 새 레퍼토리가 바로 이 작품이다. 왜일까. 도대체 15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이 걸작이 지금 우리 시대와 맞닿은 지점은.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자본이 그려낸 지구의 미래가 양극화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돈이면 사람도 서슴없이 거래되는 이 비참한 시대에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희망이다. 도둑질을 한 장발장을 끌어안아 그 영혼을 구원한 미리엘 주교의 삶은 바로 그대로 장발장에 의해 반복된다. 한 사람에게 준 희망의 촛불이 다른 여러 사람의 희망을 비춰주는 빛이 되었던 것.

 

원작에서 장발장은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긴다.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건 없다. 스스로 진정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대선은 끝났고 당락은 결정됐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든, 아니면 그렇지 못했든 그 과정에서 지금 이 땅의 대중들의 염원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염원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일이다. 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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