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과 <남영동>, 영화가 해줄 수 있는 것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고한 시민이 정부에 의해 고문당하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일이 자행되었던 80년대. 영화는 그 시대를 불러와 무엇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 <26년>과 <남영동 1985>는 그 시대의 상처를 애써 들춰낸다. 모든 게 시간에 의해 덮여져버린 듯한 그 아픔과 고통을 굳이 2013년을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사진출처: 영화 '26년'

영화는 고통스럽다.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간 고문을 당한 사실을 다룬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잔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이 모여 당시 모든 걸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을 단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적으로 각색된 부분은 있지만 이 두 영화의 근거로 제시되는 상처는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두 영화 모두 그다지 시원스런 복수극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영동 1985>는 시종일관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은 살려 달라 애원하고는 거짓말을 한 자신을 탓하며 그 진술을 번복하고 또 고문을 당하는 한 남자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증언하듯 그 남자는 후에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지만 그를 고문한 사내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상황이 역전되어 두 남자가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고문당했던 남자의 토로나 시원스런 주먹다짐 하나 나오지 않는다.

 

<26년>도 마찬가지다. 광주를 겪으며 살아가는 유족들의 아픔은 끝없이 반복되어 보여지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경호를 받으며 교통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복수의 순간 앞에서도 진심을 담은 사죄를 요구하는 이 유족들의 총구는 심하게 흔들린다. 결국 영화는 차가운 총성과 함께 암전 처리되고 여전히 경호를 받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답답한 결말이다.

 

모두 80년대의 아픔을 다뤘고, 또 죽이고 싶은 당대의 가해자들을 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영화의 연출은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남영동 1985>는 극적인 스토리 전개 자체를 극도로 자제한 인상이 강하다. 고문 장면에 있어서 더 가학적인 일들이 당시 대공분실 안에서 벌어졌지만 영화는 그런 부분들조차 단순화해서 보여준다. 당연한 선택이다. 이 영화는 고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반면 <26년>은 상당히 극화된 장르적 스토리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조폭의 이야기도 들어있고 스나이퍼의 이야기도 들어있으며 형사물의 클리쉐도 들어가 있다. 실제 1980년 광주의 그날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 후에 상상으로 재구성된 26년의 이야기는 실사다. 거짓말 같은 현실과 진짜 같은 가상이다. 이 연출 역시 당연해 보인다. <26년>은 그 날 이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의 염원이자 갈망이 담겨진 상상의 소산이니 말이다.

 

<남영동 1985>와 <26년> 그 어디에도 속 시원한 복수극은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당대의 아픔이 ‘살아남은 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제공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신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그 지독한 아픔이며, 여전히 가시지 않는 고통과 부채감이다. 그래서 보기 힘겨운 그 장면들을 꾸역꾸역 바라봐야 한다. 그 미진한 아픔을 나눠 가진 채 영화관을 나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화관 안에서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영화관 밖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을.

<착한남자>는 어떻게 <늑대소년>이 되었나

 

실로 대단한 송중기다. 그저 예쁘장한 꽃미남이라는 편견을 <뿌리 깊은 나무>의 젊은 이도 역할로 깨버리더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에서는 순수한 사랑과 복수의 양면을 가진 얼굴로 그만의 독특한 멜로를 그려냈다. 그리고 이제는 <늑대소년>이다. 대사가 거의 없고(전체 영화에서 한두 마디밖에 없다) 오로지 몸의 언어로, 표정으로 그 감정을 전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역할. 그러나 송중기는 그 역할도 자신이 가진 독특한 이미지로 구축해낸다.

 

사진출처: 영화 <늑대소년>

<늑대소년>은 현재 <광해>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단숨에 87만 관객을 돌파하고 1백만 관객을 향해 달리고 있지만, 사실 허술한 구석이 많은 영화다.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설정들과 여러 장르의 결합이 매끄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폐가 좋지 않아 산골집으로 이사 오는 순이(박보영)의 모습은 저 <마루 밑 아리에티>의 쇼우를 연상케 하고, 늑대소년이란 설정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등장해 인간과의 사랑과 질투를 다룬 <트와일라잇>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들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늑대소년>이 저패니메이션의 정교함이나 할리우드의 화려함과 달리 좀더 B급감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늑대소년>은 공포 장르처럼 시작해서 코미디로 넘어갔다가 스릴러로 이어지고 멜로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수많은 장르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이미 장르에 대한 이해와 허용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장르의 변주는 그다지 완성도가 높지 않다. 그것은 아마도 제작비와도 관련이 있을 듯 싶은데, 예를 들어 늑대소년 철수와 순이의 사랑을 막는 적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악역의 캐릭터 구축이 평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악역의 스케일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대체 이 괴력의 늑대소년을 어떻게 단 십수 명의 사내들이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런 빈약한 구석을 영화는 코미디적인 설정으로 넘어서려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그리는 장르가 코미디도 공포도 스릴러도 아닌 멜로라는 점이다.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늑대소년의 지고지순한 사랑. 흔히 늑대개와 인간의 우정을 그린 영화들의 감성이 여기서는 늑대개를 인간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세월을 뛰어넘는 충성스런 사랑의 이야기가 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장르적인 특성들, 이를테면 코미디와 공포와 스릴러와 멜로의 다양한 변주를 송중기가 잘 버텨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영화 속에서 한없이 웃기고, 때론 무섭게 돌변하며, 긴박감을 주면서 동시에 아련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의 아이콘이 되어 준다. 영화적인 허점들이 만들어내는 균열을 송중기라는 연기자가 하나 하나 메워주는 인상이다.

 

전형적인 청춘 멜로에 적합할 것이라는 편견은 <착한남자>를 거처 <늑대소년>을 통해 완전히 깨져버린다. 그는 여전히 청춘 멜로에 적합하지만, 그의 스펙트럼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늑대소년>의 철수는 보여주었다. 송중기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주는 영화, 바로 <늑대소년>이다.

'MB의 추억', 유인촌도 울고 갈 명연기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하고 지럴 에이 우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겄어.”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가 이렇게 맛깔난 욕을 툭툭 쏟아냈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시 선거 광고를 기억한다. 뜨거운 국밥을 연거푸 입에 넣으며 욕을 듣는 이명박 당시 후보.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의 욕들은 조금씩 뉘앙스를 바꿔나간다. “청계천 열어놓고 이번엔 뭐 해낼껴, 밥 더줘? 더 먹어 이놈아.” 이제 욕은 욕쟁이 할머니의 진술과 행동을 통해 밥이라는 격려로 바뀌게 된다. “밥 쳐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이 말은 설사 욕먹을 짓을 했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데 밥이라도 챙겨주자는 경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를 끌어낸다. 밥은 여기서 표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

기가 막힌 이 이미지 광고는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경제대통령의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주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MB의 추억>은 이 광고를 다시 끄집어낸다. 당시 광고에 자막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아직 배고픕니다”라는 말은 그러나 이제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것이 사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 의지의 배고픔이 아니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탐욕의 배고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게 거짓 이미지였다.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는 사실 연기자였고, 광고 속 내용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제작진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산 코미디’라고 붙였고, 그래서 이명박 당시 후보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 웃음이 빵빵 터지지만 절대 웃을 수만은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MB의 추억>이다. 그 화면 속에는 유인촌 전 장관이 등장해 “지금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한 시절, 그분은 누구인가”하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 유명한 747공약(7% 성장, 4만 달러 시대, 7대 강국)을 설파한다. 유인촌은 90년에 방영되었던 KBS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역할(이 드라마는 이명박을 모델로 했다)을 했던 연기자. 그런 그가 ‘영웅의 시대’를 말한다. MBC에서 당시 방영되었다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를 미화했다는 논란을 일으켰던 <영웅시대>를 끄집어낸 것. 이미지는 그렇게 당시 힘겨웠던 서민들의 눈을 현혹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당시 대선의 풍경을 조목조목 잡아내가며 그것이 일종의 쇼였음으로 상기시킨다. 대선 후보들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주는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는 장면은 실로 압권이다. 여기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수를 두 그릇이나 뚝딱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동영 당시 야권 후보가 연설 도중에 한 유권자가 자꾸만 먹으라는 음료를 “연설 끝나고 먹겠다”고 버티는 장면과 병치된 이 국수 시퀀스는 당시의 야권의 무능까지도 포착해낸다. 당시 야권은 이 정치쇼에서 연기조차 출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반면 이명박 당시 후보는 안 해본 것 없는 백전노장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뭐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그는 풀빵 장수에게 자신이 어설프게 만들어 잘 익지도 않은 풀빵을 서민들에게 건네면서 불이 약하다고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우리가 강제한 것이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거야.’ 이 괴벨스의 어록으로 시작해서 이 어록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를 혐오하고 그래서 무관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각종 거짓말과 연기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호도되어 치렀던 그 대선이 가져온 대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 아픈 꾸짖음을 감독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시 선거운동을 하며 소리쳤던 이명박 후보의 목소리로 전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잘한다고 할 게 아니라 지난 5년간 잘했어야지, 어제 못한 사람이 내일 잘할 수 있어요? 정권을 바꿔야 합니다." 이 당시 유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은 2012년 <MB의 추억>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온다.

 

“국민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데,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국민을 마음대로 하는 건 줄 알아요. 기가 막혀요, 정말.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만들어놔야 합니다.” <MB의 추억>을 통해 보여주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당시의 이 유세 발언은 지금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또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X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문제”라고 한 전여옥 전 의원의 발언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MB의 추억>은 우리에게 거짓말과 명연기로 코미디가 되어버린 당시 대선의 풍경을 아프도록 웃기게 보여준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 명연기.

<007 스카이폴>, 007을 도마에 올리다

 

여전히 007 제임스 본드는 유효한가. 50주년을 맞은 <007 스카이폴>이 던지는 질문이다. 영화 속에서 제임스 본드의 상관인 M은 장관에게 불려나가 MI6라는 조직의 유효성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장관은 이제 007 같은 스파이가 물리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영화 속 스파이 조직의 존폐에 대한 질문은 그대로 이 스파이 영화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진출처:영화 <007 스카이폴>

바뀐 시대에 대한 증언은 007 시리즈에 신무기를 개발하는 캐릭터인 Q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과거처럼 제임스 본드에게 어마어마한 신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저 제임스 본드의 지문을 인식해서 그만이 쓸 수 있는 총 한 자루와 그가 위기상황에 놓일 때 위치를 알려주는 위치추적기 한 개를 줄 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런 무기를 만들던 시대는 지났어요.”

 

실제로 그런 시대는 지났다. <007 스카이폴>의 적으로 등장해 MI6를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실바라는 인물은 간단하게 컴퓨터를 해킹해서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건물을 폭파시킬 수 있는 시대라고 증언한다. 놀랄만한 무기? 아마도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에는 그것이 유효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신무기를 제공하는 Q는 이 영화에서는 이제 해커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007 시리즈의 핵심적인 재미 중 하나인 신무기가 빠져버린 그 자리의 공백을 메우는 건 제임스 본드라는 그 자체가 강력한 무기다. 제임스 본드는 이 스마트한 디지털 세상에 혼자 남아있는 아날로그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오토바이를 타고 허공을 날아오르고 달리는 열차의 지붕 위에서 적과 사투를 벌인다. 그를 디지털 세상으로 연결하는 건 그의 귀에 꽂힌 무선통신기가 전부다. 그 통신기를 통해 그는 컴퓨터가 날라다주는 거대한 정보를 제공받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살인무기인 몸과 통신기.

 

여러모로 달라진 환경(국제정세나 미디어 환경 같은)은 007이라는 시리즈 자체에 대해 그 유효성을 묻는다. 사실 007 시리즈의 기반은 50년대 초반부터 80년대 말까지 이어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다. 이 냉전체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치 개혁에 의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그 막을 내렸다. 007 시리즈도 그 영향을 그대로 받았다. 87년 티모시 달튼이 주연한 <리빙데이라이트>와 89년작 <살인면허>가 실패한 것은 냉전체제 붕괴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하지만 007시리즈는 이후에 피어스 브로스넌을 새로운 제임스 본드로 만들고 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설정하면서 다시 부활한다. <007 스카이폴>에서 장관이 질문한 MI6의 유효성에 대해서 M이 증언하는 것과 딱 맞는 얘기다. M은 이 달라진 시대에 “우리는 과연 안전한가”하고 질문을 던지고는 과거의 보이던 적보다 지금의 ‘보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또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용기라는 것을 피력하면서 제임스 본드를 그 상징적인 존재로 설정한다.

 

<007 스카이폴>의 적이 테러리스트라기보다는 M을 제거하려는 인물로 설정된 점은 이 영화가 다른 한편으로 007 시리즈가 왜 여전히 필요한가를 설파하려는 목적을 띠고 있다고 읽혀진다. 제임스 본드는 위기에 처한 M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이 장면들은 마치 007 시리즈를 지켜내려는 사투처럼 보인다. 50주년을 맞은 007 시리즈가 그 존속의 의미에 얼마나 천착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007 스카이폴>은 그래서 최첨단 무기들의 전시장이었던 전편을 탈피해 오히려 아날로그적인 액션에 더 천착한다. 디지털 시대에 더 강력하게 다가오는 아날로그에 대한 매력. 본드 카로 1964년 작인 <007 골드핑거>와 1965년 작인 <007 썬더볼 작전>에 등장했던 ‘애스턴 마틴 DB5’라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차가 등장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늘 나오는 시퀀스 중에 하나지만 제임스 본드를 붙잡아 놓고 적인 실바가 너의 장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제임스 본드는 “부활”이라고 말한다. 그 말에 걸맞게 <007 스카이폴>은 007 시리즈가 여전히 매력적이고 유효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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