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하드 4.0’에서 아버지가 떠오른 이유

‘다이하드’시리즈가 여타의 액션영화와 다른 점은 형사라는 노동의 피곤함을 액션에 녹여낸다는 점이다. 일상의 피곤함에 절어있는 귀차니스트 존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가족과 얽힌(남 일이었다면 이렇게 죽어라 뛰어다녔을까) 테러사건이 벌어진다. 그러자 이 나른해만 보이던 남자는 가부장으로서의 놀라울 정도의 끈질긴 근성을 발휘해 테러를 진압하고 가족을 구해낸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설정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액션에 스며들어 있는 아이디어와 유머이다. ‘다이하드’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액션을 선보인다. 1편이 빌딩이고 2편이 공항이며 3편은 뉴욕시가 됐다. 제한된 공간이라는 점은 그 공간이 가진 특성을 활용하는 액션이 가능하다는 역설적 기능을 한다. 빌딩은 고층에서 뛰어내리고 창으로 뛰어들고 하는 액션들이 묘미를 주고, 공항은 연료통을 열어놓고 떨어진 맥클레인이 라이터로 불을 붙여 비행기를 날려버리는 유머 섞인 액션이 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이니 4편의 배경을 어디로 할 것인가가 고민이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다이하드 4.0’은 한때 카리브해의 유람선을 배경으로 계획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하드 4.0’의 선택은 사이버라는 새로운 공간이었다. 절묘한 것은 지금까지의 존 맥클레인이 보여준 액션이 말 그대로 생노동에 가까운 아날로그의 첨단을 걸어왔다는 점이다. 디지털 세상이 가진 위악과 허망함을 모두 액션에 넣어 풍자할 수 있는 데다가, 20년 간 유지해온 캐릭터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이버 공간은 ‘다이하드 4.0’의 최적공간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 테러로 보여지는 디지털 세상이란 컴퓨터 하나로 미국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는 위악을 가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주먹 한 방으로 부숴 버림으로써 테러를 막을 수 있는 허망한 공간이다. 맥클레인이란 아날로그 형사는 자판을 두드리는 세상에도 여전히 주먹이 더 쓸모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컴맹인 맥클레인을 위해 매튜 페럴(저스틴 롱)이란 해커가 붙는다. 그런데 이 매튜란 캐릭터와 맥클레인의 조합 또한 절묘하다. ‘다이하드’시리즈에서 맥클레인의 노동(?)이 가족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공식 속에 매튜와 맥클레인의 관계는 유사가족을 형성한다(물론 딸이 등장하기는 한다).

마치 컴퓨터에 능통한 아들이 컴맹인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가 해야만 하는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처럼 이 영화는 영리하게도 둘의 관계를 밀착시켜 놓았다. 여기에는 또한 디지털 세상에 살아가는 관객의 대리인으로서의 매튜라는 캐릭터도 존재한다. 관객들은 매튜 같은 일상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사건 속에 휘말리고 맥클레인이라는 아날로그 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다이하드 4.0’이라는 모험의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또한 디지털 영상으로 가득한 작금의 액션 영화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턴트로 하는 땀내 나는 액션들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여기에 쫓아오는 헬기를 향해 총알처럼 날아가 꽂히는 자동차나, 터널 속에서 디지털로 조작된 신호에 의해 양방향에서 몰려오는 차들의 충돌 장면 같은 것들은 정말 다이하드적이라 할 수 있는 액션의 유머와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시퀀스들이다.

이 블록버스터에서 어딘지 정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절묘한 공간의 설정과 노동을 끌어들인 액션 히어로, 디지털 세상의 아날로그 형사라는 기막힌 스토리 설정, 매튜 같은 현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만한 캐릭터의 설정,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아날로그적 액션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버전업된 내용들이 ‘다이하드 4’가 아닌 ‘다이하드 4.0’이라 붙인 이유다.

세월이 19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다이하드’라는 제목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이 ‘다이하드’한 액션이 어느 때 보아도 ‘다이하드’한 사회를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절어 귀차니스트가 된 존 맥클레인은 이 시대 샐러리맨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거의 졸다시피 하던 귀차니스트가 가족이란 이름에 벌떡 일어나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노동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지금 우리네 샐러리맨들의 일상이기도 하다. 게다가 ‘다이하드 4.0’이 제시한 디지털 테러는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네 아버지들 앞에 던져진 재난을 말하는 것만 같다. 형사라는 ‘다이하드’한 직업이 일상이 된다는 것은 퍽이나 슬픈 일이다. 그만큼 그의 삶이 거칠다는 뜻이니까.

군용헬기의 프로펠러가 팽팽 돌아가고, 군인들의 군화발이 절도 있게 움직인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폭약이 터지고 이건 마치 전쟁영화의 도입부분 같다. 그런데 이건 전쟁영화가 아니다. ‘그 평범한 날’ 벌어진 납득되지 않는 일일뿐이다. 택시를 몰며 사는 강민우(김상경)가 그가 사랑하는 박신애(이요원)와 함께 웃음을 터뜨리며 코미디 영화를 본다. 그 장면은 마치 멜로 영화의 시작 같다. 그런데 이건 멜로 영화가 아니다. 잠시 후 그들의 몸은 피로 적셔진다. 등장인물들은 마치 전원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정겹기 그지없다. 그건 마치 휴먼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에는 총이 매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든 총알이 날아와 그들의 머리에 꽂힐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화려한 휴가’는 이 모든 일상의 장르적인 그림들을 뒤집어버린 ‘그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날’이란 단어가 마치 보통명사처럼 특정한 날을 지칭하던 80년대, 군화발과 총검이 평화롭던 일상을 난자하는 장면을 통해 영화는 먼저 이런 일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주인공인 강민우의 시선을 통해 보여짐으로써 이념적인 코드를 배제하고 대신 인물들에 집중한다. 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실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살아있다. 인물들이 쏟아내는 촌철살인의 대사들과 웃음을 절로 나게 만드는 상황들, 그러면서도 깊게 느껴지는 진심들이 어우러지면서 모든 장르를 뒤집어버린 영화는 여느 장르영화보다 훨씬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따뜻하고 생생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 앞에 관객들은 이들을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마치 당시 광주에서 살았던 사람이라면 가졌을 폭력에 저항하던 시민들을 지켜주고 싶은 심정처럼. 이렇게 시간여행을 통해 80년대 광주의 한 시민이 되어버린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놀라운 친밀감과 안타까움, 공포, 연민, 분노를 느끼게된다. 이 즈음 영화가 하는 말은 ‘보라’는 것이다. 당신이 한 짓을, 혹은 당신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그것은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눈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러니 이 시대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끝나지 않고 여전히 진행형인 셈이다.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답게 저항하기 위해 죽어나간다. 차마 도청에 사람들을 남겨놓고 떠나지 못해서, 헛된 인생 한번이라도 사람을 느끼며 살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들은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이 하나하나 생의 선을 넘어갈 때, 지프차 위에서 박신애는 소리친다. “광주시민여러분, 우리를 기억해 주세요.” 영화 속 80년대 외쳐진 그 소리는 영화 스크린을 타고  27년이란 세월을 넘어 현재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귓속을 파고든다. 차마 보기 싫었던 차마 기억하기 싫었던 ‘그 날들’의 장면들은 이렇게 현재를 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 날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갑작스레 군화발이 치고 들어오는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지금 당신이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자유가 어떻게 얻어진 거라는 걸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검은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공간에 대한 공포영화다. 그 공간은 전준오(황정민)가 다니는 회사의 칸막이로 둘러쳐진 자신만의 책상이기도 하고, 애인 장미나(김서형)와 함께 편안한 저녁을 보내는 집이기도 하며, 건널목이 고장난 철길이기도 하고, 목욕탕을 개조해 살아가는 박충배(강신일)와 신이화(유선)의 검은집이기도 하다.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그 프레임 안에 유령보다 더 무서운 칼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비어 있을 때 더 공포를 느끼게 한다. 반면 무차별적인 살인마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순간, 그 긴장감과 공포감은 줄어들고 대신 그 감정은 긴박감으로 전이된다.

어둠으로 가려진 빈 공간이 공포를 주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 공간에 남겨진 누군가(그것이 사람이든 유령이든)의 흔적이고, 또 하나는 그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관객 스스로 빈 공간에 채워 넣은 두려운 상상이다.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생각하기 싫은 그래서 의식 저편으로 넘겨버리고픈 끔찍한 그 무엇을 눈앞에서 목도할 것이란 예감. ‘검은집’은 그렇게 빈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무의식 속에 숨겨둔 어두운 공간(검은집)을 끄집어낸다.

보험사정원 전준오에게도 바로 그 어두운 공간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한 자신의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다. 그가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전화를 받기 전까지, 그 어두운 공간은 적어도 꿈이라는 무의식의 틀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게 되는 순간, 끔찍한 무의식은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죄책감이라는 검은집은, 박충배의 집에서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밖으로 빠져나온다.

어린 시절의 악몽은 박충배의 집에서 목격한 아이의 죽음으로 꿈이 아닌 현실이 되며, 그 현실로 드러난 무의식에 대항해 전준오의 의식은 싸움을 시작한다. 빈 공간은 이제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 추악함을 드러낸다. 전준오의 의식처럼 정돈되어 있던 그의 집은 이 마음 없는 살인자에 의해 난도질된다. 그리고 결국 전준오는 그토록 보고싶지 않던 무의식을 닮은 검은집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린다.

그런데 전준오가 그냥 지나쳤으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에 뛰어든 것은 그의 입버릇처럼 나오는 ‘인간의 마음’이나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용서받고 싶었다”는 전준오의 말은 그것이 죄책감을 벗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사투의 와중에 “이쯤 되면 사람 다 똑같다”는 살인자의 말은, 마음이라는 의식의 허울로 어두운 무의식을 가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섬뜩하게 응시한다.

이처럼 ‘검은집’이 가진 이야기는 소재나 내용, 그리고 지적인 재미의 측면에서 기존 우리네 공포영화의 새로운 영역을 넓힌 공이 크다. 그럼에도 관습적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신체절단 같은 충격적 장면들이 오히려 영화의 공포감을 떨어뜨리는 것은 왜일까. 구체적인 장면들보다는 좀더 많은 여백을 넣었더라면 그 빈 공간이 주는 공포감이 더 컸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찰나의 소중함을 묻다

청춘시절의 한 때를 생각해보면 꽤 강렬했을 감정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떠오르는 장면들은 단순하다. 어느 날 운동장에서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라든지, 그 하늘을 유유히 움직이던 구름이라든지, 방과후 텅 빈 운동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고받던 그 단순한 시간들 같은 그림들이 갈무리된 감정으로 떠오른다. 그것은 그 시절에는 너무 강렬했거나, 따분했거나, 때론 급박하게 움직여 볼 수 없었던 시간의 풍경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과 시간들, 그리고 그것들 위로 등장해 우정의 이름으로 스치듯 지나가 버린 사랑의 감정 따위는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리프라는 능력을 갖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사랑스런 애니메이션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려 그 아름다움조차 기억나지 않는 청춘이란 시간대를 마코토라는 소녀를 통해 여러 번 되돌려보기로 한다.

다행히도 마코토라는 캐릭터는 지구를 구한다거나 하는 거대한 욕망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 능력은 오로지 우리가 흘려보낸 일상 속에서만 발휘된다. 타임리프라는 능력은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루종일 부른다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먹는데 사용된다.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의 시간대를 되돌려보자 일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들이 피어나면서 툭툭 던지곤 했던 말들과 행동들에 감춰졌던 청춘이란 열병의 실체가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애니메이션은 시간의 풍경을 담아내기에 정지된, 혹은 정지된 듯한 장면들이 유난히 많이 보여진다. 호소다 마모루라는 섬세한 눈의 소유자는 그 정지된 장면 속에 고즈넉이 서 있는 집, 운동장, 하늘, 구름, 언덕, 강물 같은 풍경을 집어넣는다.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면 속에 주인공들이 가진 감정의 떨림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멈춰선 시간의 풍경 속을 유영하는 주인공들을 넣어 마치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싶은 안타까운 감정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누구나 흐뭇한 감회에 젖는 것은 소년 소녀에서 남자와 여자로 성장하는 그 과도기의 작은 떨림 같은 것을 끊임없이 반추해내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가 자칫 추억이라는 웅덩이에서 허우적댈 수 있는 위험성을 이 애니메이션은 ‘일상을 되돌아보는 타임리프’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뛰어넘는다. 잔잔함에 젖어 잊고 있던 청춘의 추억 속에서 물 흐르듯 빠져들다가, 수면 위로 불쑥 솟은 열병을 발견하곤 급박한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정점에서 역시 귀여운 반전까지 기다리고 있으니 이 애니메이션이 얻은 성취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시간은 소중하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다양한 메시지를 가진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아포리즘에나 나올 법한 이 메시지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과연 이 메시지가 평범한 걸까. 그것은 오히려 중요한 메시지조차 평범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둔감한 이성과 감성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마코토가 그랬듯이, 바로 그 평범과 일상이 되어버린 시간을 다시 소중한 것으로 환원시켜주는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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