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될까

왜 이 땅에 사는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되는 걸까.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는 인생이 즐겁지 못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실직해 잘 나가는 교사 아내에 얹혀 살아가는 기영(정진영), 낮에는 택배,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자식 교육비 대기 바쁜 성욱(김윤석), 기러기 아빠로 한 대라도 더 중고차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혁수(김상호)가 그들이다.

세대의 마이너리티, 가장
그래도 한 때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했던 활화산이란 밴드 이름처럼 활활 타올랐던 적이 있다. 지금은 휴화산이 되어버린 그들. 그들이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통해 줄곧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져주었던 이준익 감독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 보듬고자 하는 이들이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을 왕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라디오스타’에서 한물간 스타를 영월이란 변방으로 보내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온 것처럼, ‘즐거운 인생’은 명퇴나 구조조정으로 고개 숙인 가장을 그 이전의 시간, 즉 젊음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한바탕 즐거운 난장을 벌인다. 즉 ‘왕의 남자’는 신분의 마이너리티를, ‘라디오스타’는 지역적인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즐거운 인생’은 말하자면 가장이라는 ‘세대의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어떤 통쾌한 구석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마이너리티들이 중심을 치고 가는 이야기 얼개에 숨겨져 있다. 즉 이 소외된 이들이 본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 순간, 그들을 소외되게 만들었던 현실의 제도나 왜곡 같은 것들이 깨지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천한 광대가 왕과 마주서서는 그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세월에 의해 밀려난 왕년의 스타가 영월이란 변방에서 그 주민들과 라디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그 진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구조 말이다.

가장들과 어깨동무 해주는 청춘들
‘즐거운 인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들을 청춘의 꿈이었던 음악을 끌어들여 즐거운 인생으로 복권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이너리티들의 위치상승이 욕망이 아닌 본 모습으로의 귀환을 뜻한다는 점이다. 즉 ‘즐거운 인생’은 특별할 것 없이 누구나 즐거워야 하는 인생을 즐겁지 못하게 살아가는 가장들에게 당신도 즐거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마이너리티를 넘어서는데 있어서 이준익 감독이 쓰는 또 하나의 방식은 당대의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왕의 남자’가 저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같은 광대를 끌어들였다면, ‘라디오스타’는 영월이란 변방의 주민들을 동지로 끌어들인다. 마찬가지로 ‘즐거운 인생’이 동참시키는 동지들은 대책 없는 청춘들이다.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을 따라다니는 노브레인을 통해 전조를 보였던,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음악이 있어 마냥 즐겁기 만한 청춘들은 ‘즐거운 인생’에서 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가장들과 기꺼이 어깨동무를 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음악이라는 소통의 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믹 재거를 닮았어!”, “니가 믹 재거를 아니?”, “당근이지, 내가 롤링스톤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활화산 밴드를 따라다니는 젊은 여자애들과 늙다리 가장들이 술좌석에서 음악을 통해 소통되듯, 음악은 또한 현준(장근석)이란 조금은 까칠한 청춘과 이 가장들을 엮어놓는다. 억눌린 청춘들은 억압되어 자기의 즐거운 삶을 찾지 못하는 가장들과 동격으로 읽히면서 락이란 음악으로 공명한다. 이것은 락이 가진 저항성, 억압의 분출 같은 강력한 촉매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꺾어진 꿈들이 각각으로 있을 때는 자학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둘 모이게 되자 “왜 우린 안되는데?”하는 현실에 대한 모반을 꿈꾸게 된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거추장스런 양복이나, ‘365일 6000원’이란 문구가 덕지덕지 써진 택배직원 제복을 걸쳐 입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에 문신을 한 채 ‘즐거운 인생’을 찾아간다.

성욱의 처가 40대 중반에 밴드를 한다는 이 엄청난(?) 탈선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성욱의 답변은 단순하다. “하고 싶으니까.” 이 단순한 한 마디가 깊게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의 가장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저 ‘브라보 마이라이프’에서 조민혁 부장(백윤식)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라고 말하듯, 이 시대의 마이너리티, 가장들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의 어깨가 무언가를 걸머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면, 한없이 작아질 것을 요구하는 가장수난시대에 이제 가족들이 그 중압감을 덜어내고 어깨동무를 해줘야하지 않을까.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환타지와 현실이 공존하는 ‘브라보 마이라이프’

그들도 한 때는 요란한 록 기타 반주에 맞춰 머리를 흔들어댔던 적이 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장성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그들은 대신 노래방에서 주점에서 구슬픈 뽕짝을 부른다. 그들도 한 때는 자유, 열정, 꿈 같은 단어를 붙들고 술로 밤을 지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명예퇴직, 실업, 노후생활에 한숨짓는다. 그 때만 해도 그들은 제각각의 얼굴과 표정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사회라는 틀이 재단해 놓은 똑같은 얼굴들이 되어있다. 가장이란 현실, 그 무게 때문에 ‘내 삶(마이라이프)’에 한번도 ‘브라보’ 해본 적 없는 그들. ‘브라보 마이라이프’는 현실이란 이름으로 거세된 가장들의 꿈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조민혁 부장(백윤식)의 로망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드러머를 꿈꾼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난 자리, 그가 앉아야 할 곳은 저 밥벌이의 전장으로 나가기 전, 꾸역꾸역 밥알을 밀어 넣어야 하는 아침 식사 자리다. 그 자리에서 아내는 곧 정년 퇴직할 조부장의 퇴직금으로 아들을 유학 보내자고 말한다. 즉 이 두 장면은 지금 현재 조부장이 처한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그가 20대부터 버려 두었던 꿈과 지금 현재 정년 퇴직을 앞둔 50대가 되어 있는 자신의 현실만큼 먼 거리에 있다.

그가 그간 꿈을 버리고 어떻게 살아왔을 지는 박승재 과장(박준규)의 입을 빌려 말하는 조부장의 충고 속에 드러나 있다. ‘30대에는 눈치코치 보며 생활하고, 40대에는 들어도 못들은 척 50대에는 알아도 모르는 척’ 그렇게 버텨왔던 것. 하지만 그렇게 멀리 있다고 느껴왔던 드러머의 꿈이 늘 자신의 손아귀가 닿을 지점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조부장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

작년부터 불고 있는 이른바 ‘아버지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 이 영화가 그들과 다른 점은 희생하는 아버지들의 환타지를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는 이 영화가 시종일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유는 샐러리맨이라는 현실과 이 환타지가 한 무대에서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부장의 손에 들린 드럼스틱에서 우리는 그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방을 떠올리고, 직장상사 앞에서 거래처 앞에서 손금이 없어져라 비벼대던 손바닥을, 그 처지를 잊고자 연실 술잔을 들어올리던 손을 떠올린다. 무엇보다 양복을 입고 드럼을 두드리는 조부장의 모습은 멀게만 느껴지던 꿈과 현실의 간극을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지 샐러리맨들이 꿈꾸지만 이룰 수는 없는 환타지만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삶에서 나 자신의 삶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지금 아버지들이 접하고 있는 현실을 영화는 조부장의 자기 다짐으로서 말하고 있다. 조부장이 아들에게 말하는 “더 좋은 꿈을 찾지 못했다면 포기하지 마라”라든가, 선술집에서 만난 젊은 시절의  자신을 통해 하는 “다른 거 다 필요 없습니다. (아들이)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하게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말들은 지나온 후, 삶의 행복이 거창할 것 없는 자기 꿈에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아쉽게도 영화는 조부장 이외에 다른 인물들이 가진 다양한 꿈들을 조망해내지 못하면서, 풍부한 울림을 만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 한 장면, 예를 들면 조부장의 손에 들려진 드럼 스틱이 허공을 가르면서 굉음을 쏟아내는 그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한 제 몫을 하고 있다 여겨진다. 적어도 그것은 지금의 가장들, 혹은 샐러리맨들의 좀처럼 뛰지 않을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을 테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그저 환타지가 아니라 실제 ‘갑근세 밴드’라는 직장인 밴드의 이야기를 다룬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꿈을 거세한 건 사회라는 틀이 만들어낸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점을 영화는 환타지와 현실을 공존시켜 말하고 있다. 지금도 꿈꾸기에 당신은 늦지 않았다.

‘라따뚜이’의 음식평론가와 ‘디워’의 평가

‘라따뚜이’를 보면서 ‘디워’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바로 예술가(혹은 창작자)에 대해 비평가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가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똑같이 출신(혹은 태생)의 문제가 등장하고 편견이 있으며 그 편견을 넘어서는 예술가가 있고, 무엇보다 혹독한 비평가가 등장한다.

‘라따뚜이’에서 절대미각으로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를 꿈꾸는 레미는 아이러니하게도 주방과는 상극 중에 상극인 생쥐다. 태생부터 요리사는 불가능하게 태어난 레미는 그러나 편견을 버린 견습생 랭귀니를 만나 함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그들이 일하게 되는 곳은 한때 별 다섯 개 짜리 최고급 레스토랑이었으나 혹독한 비평가, 안톤 이고의 혹평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구스토 레스토랑.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레스토랑의 창시자인 구스토가 모토로 했던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요리철학이다. 그 말에 코웃음을 쳤던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는 ‘요리는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구스토가 죽고 레스토랑을 인계 받은 스키너 역시 그 편견을 갖고 있었다.

랭귀니 대신 레미가 만든 음식은 구스토식의 요리법이 아닌 전혀 다른 레미만의 방식이다. 요리사들은 모두들 그 방식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 그 독창적인 맛은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고 결국 음식비평가마저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디즈니 스타일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지만 그 울림은 성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될 만큼 깊고 크다.

최근 인터넷은 연일 ‘디워’에 대한 기사와 그 기사에 대한 댓글들로 뜨겁다. 처음에는 ‘디워’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더니 그 논의들은 점점 커져서 심형래 감독에 대한 편견으로 넓어지고 그것은 충무로와 기자, 평론가들이 합세해 ‘심형래 죽이기’를 하고 있다는 음모론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디워’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저만치 소외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억울한 심형래 감독만큼,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매도되는 억울한 기자들도 있을 법하다.

이것은 ‘디워’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기존 영화인으로 대변되는 충무로 그리고 그들과 한 통속으로 취급되는 기자들이나 평론가들과, 심형래로 대변되는 비주류 그리고 충무로 영화들에 신물이 난 관객들의 공방이 되고 있다. 그 공방은 마치 저 ‘라따뚜이’의 구스토와 안톤 이고의 논쟁이 된 ‘요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처럼 들린다. 영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훈련받은 자들만 할 수 있는가. 또 만들어진 영화는 영화적인 문법 속에서 평가받아야 되는가, 아니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재미있으면 되는 것인가.

‘디워’에 대한 기사들의 내용을 보면, 물론 몇몇 선정적인 표현들로 심하게 작품 자체를 몰아붙인 것들도 있었지만, 여타의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비판할 것은 하고 칭찬할 것은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또 다른 영화인인 기자나 비평가들의 비판이 ‘저들만의 리그’로 여겨졌다면, 심형래 감독이라는 충무로 밖의 인물과 그 작품에 쏟아지는 비판은 관객들이 ‘자신들의 리그’에 투하된 충무로라는 기득권의 융단폭격으로 비쳤을 수 있다. ‘디워’는 작품 자체에 대한 논의를 떠나서 대중들이 평단을 보는 시각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작품이 되었다.

세상은 권력의 평준화를 향해 굴러간다. 한때 전문가 집단이 휘두르는 칼날에 대중들이 좌지우지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누구든 평이라는 칼을 들 수 있는 시대다. 즉 이제 요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요리가 맛이 있든 없든 그것은 전적으로 맛보는 자의 몫이다. 따라서 비평의 패러다임도 달라지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듯이 하는 비평은 더 이상 대중들의 마음에 다가가지 않는다. 대중들의 옆에 서서 충실한 가이드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 비평이 해야할 일이 되었다.

‘라따뚜이’의 혹독했던 음식비평가 안톤 이고가 라따뚜이란 음식을 먹고 쓴 참회 섞인 비평의 글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레스토랑을 평점 할 때 누구나 그렇게 하듯이 혹평을 하는 게 쉬웠고 그것은 또한 잘 먹혔다’로 시작하는 참회의 글은 그만큼 장점을 찾아낸다는 것이 단점을 찾는 것보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단점보다는 장점을 끄집어내 작품을, 작품 그 이상으로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냈던 문학비평가 고 김 현 선생의 비평이 떠오르는 시점이다. 비평가는 더 이상 점수를 매기는 평가자가 아니다. 아니 평가자가 돼서는 안 된다.

‘디워’라는 블록버스터의 재미는 어디서 오나

주로 게임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난 우리네 CG기술은 주로 해외 게임업체들의 하도급 형태로 공력을 쌓아왔다. 해외 게임업체들이 우리나라 CG 샘플을 보고 놀라는 것은 ‘그 정도의 제작비로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CG를 만들어내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당시의 CG 기술들은 이후 게임업체들에 의해 활용되면서 지금의 우리네 게임산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커다란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화 쪽에서의 CG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폭파장면 같은 특수효과쪽에 활용은 되었지만, 전략적으로 CG를 활용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전 세계를 공략하는 할리우드 같은 시도는 별로 없었다. 그만한 제작여건도 거의 전무인 상태인데다 투자는 어불성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형래 감독이 들고 나온 ‘용가리’는 사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총체적인 부실로 드러났다. 스토리는 둘째치고 CG는 실감나지 않았고 출연한 인물들조차 연기력 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당시 CG가 실감나지 않은 것은 캐릭터를 모델링하는 능력이나 동작을 구현하는 애니메이션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할리우드가 가진 CG와 실사를 합성하는 기술과 노하우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절치부심한 심형래 감독이 ‘디워’의 어떤 부분에 모든 정력을 쏟았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실제 결실로 나타났다. ‘디워’가 보여준 CG와 실사의 합성 노하우는 아직까지 우리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마도 CG에 관심이 있거나 같은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먼저 그 압도적인 CG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지만 시사회 이후 ‘디워’에 계속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스토리다.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의 반응은 하나 같이 스토리가 엉성한 점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심형래 감독조차 인정한 바이다. 그의 논지는 ‘스파이더맨’이나 ‘트랜스포머’, ‘킹콩’, ‘쥬라기공원’, ‘인디펜던스데이’를 예로 들어 그 영화들의 스토리 역시 별 것 아니며, 블록버스터는 스토리와 상관없이 볼거리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는 지금 인터넷에서 ‘디워’를 두고 벌어지는 설전의 중심에 서 있다.

실제로 최근 할리우드에서 개봉했던 일련의 블록버스터들, ‘스파이더맨3’, ‘캐리비안의 해적3’는 물론이고 ‘트랜스포머’까지 시나리오의 스토리로 보면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심형래 감독이 얘기하듯이 블록버스터(아마도 SF나 환타지 블록버스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의 재미가 인물이나 뒤통수를 치게 만드는 기발한 스토리 전개 같은데 있는 게 아니라 실상은 볼거리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할리우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대형 CG에 엄청난 물량을 투여하고 그 위험부담을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기업과 나누며, 전 세계 배급망을 확보해 개봉 1,2주차에 모든 마케팅비용을 쏟아 부어 투자금을 회수하고 수익을 올리는 과정 속에서, 저변을 되도록 넓히기 위해 스토리는 절대로 복잡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스토리에 대신 영화는 철저히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에 집중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블록버스터가 지향하고 있는 지점은 흔히 예술영화나 극영화가 제시하는 삶의 비의 같은 것이 아니다. 재미에 집중된 이 영화들의 지향점은 영화의 또 한 가지 갈래가 될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다. 실제 지금 극장들은 이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자잘한 캐릭터의 디테일이나 대사의 집중도보다는 블록버스터가 보여주는 볼거리의 참신함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을 또다시 돈을 내고 본다는 것은 어딘지 아까운 일이다. 심형래 감독이 언급한 스토리가 그저 그런 ‘스파이더맨’의 재미는 거미인간이 뉴욕의 도심을 휙휙 날아다닌다는 점이며, ‘인디펜던스데이’의 재미는 외계인이 도시를 때려부순다는 그 설정에 있고, ‘트랜스포머’의 재미는 변신로봇 자체가 주는 유아적 욕망이 눈앞에서 실현된다는 점에 있다. ‘킹콩’의 재미는 이 거대한 생물체가 도시라는 정글을 마구 때려부수는 장면들의 재미이며, ‘쥬라기공원’은 공룡을 실제로 본다는 그 자체가 재미이다. 이 블록버스터들은 모두 볼거리의 참신함에 있어서 훌륭한 CG와 만나면서 충분한 만족감을 주었다.

그렇다면 ‘디워’가 가진 볼거리의 참신함은 어떨까. 먼저 용이 되어야 한다는 이무기라는 소재, 조선시대에 도성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관군들과 이무기 군단들과의 전쟁 설정 같은 것들은 참신하다. 게다가 후반 40분 동안 폭풍처럼 몰아치는 LA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이무기와 헬기, 탱크, 비행기들의 액션 장면들은 ‘디워’라는 롤러코스터가 가진 볼거리라는 측면의 가능성을 충분히 담보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CG의 디테일을 감안해서 본다면 볼거리의 재미는 더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들이 있다. 우리의 관객이나 외국의 관객 모두에게 특별한 볼거리가 될 수 있었던 조선시대 장면들이 특수촬영으로 이루어지면서 어딘지 CG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최고의 CG 실사 합성 능력을 보여준 LA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장면들은 기존 블록버스터의 전통에 충실한 맛은 있지만 아쉽게도 ‘디워’만의 차별성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한 평론가는 “차라리 LA가 아니라 남산타워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부수는 이무기였다면 더 볼거리가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에 일부 공감하게 되는 것은 영화 속에서 관습적으로 괴수나 적의 공격을 받는 LA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너무 많이 봐온 탓은 아닐까.

아리랑을 영화음악으로 삽입할 정도로 한국적인 걸 강조하는 심형래 감독도 미국시장을 두드리기 위해서는 타협해야될 부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적인 정서를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시장 속 블록버스터 공식을 벗어난다는 점에서 안전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블록버스터에 있어서 우리 것을 조금 더 고집하는 것이 위험성은 있겠지만 결국 새로운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미국시장과 우리시장을 다 노릴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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