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 영화에 길이 자주 등장하는 건, 그가 만드는 영화가 인생을 담고, 그 인생의 비의를 담지한 시대를 포착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 위의 풍경은 임권택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먼저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길 자체가 내포한 표정이다. 길은 장관을 이루다가도 애조 띤 정서로 감아 돌고 때론 바다를 만나 반짝거리다가 인간에 의해 매몰되기도 한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구성진 소리처럼 구불구불 논길 사이로 이어진 길 풍경으로부터 우리네 구비진 인생살이의 고단함까지 잡아낸다.

그리고 그 풍경을 자세히 보면 길 위를 걷는 사람이 보인다. ‘천년학’에서는 소리꾼의 비루한 삶과 아버지에 의해 누이가 되어버린 사랑하는 여인 송화(오정해)로부터 도망친 동호(조재현)가 그 길 위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한편 눈이 멀어버린 송화는 그 길 위에서 소리로 연명한다. 동호의 길과 송화의 길은 자꾸만 엇갈린다. 동호는 자꾸만 송화의 길을 따라가고픈 욕구에 사로잡히고 송화는 마치 표식처럼 소리를 길 위에 남겨놓는다.

이러자 송화의 길을 좇는 동호의 길은 송화가 만들어놓은 소리 길을 좇는 길이 된다. 따라서 길 위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건 저 ‘서편제’의 길을 따라 듣게된 우리의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에는 바로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가 오랜 세월 깃들어 있다. 인물과 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소리 길이 되면서 영화는 좀더 시대적 아픔을 잡아내며 시간 길을 날줄을 끌어들인다.

길 자체가 가진 표정에 그 길 위를 걷는 애틋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리길에 시간의 표정이 곁들여지자 ‘천년학’은 더 이상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도 영상의 잔재주를 피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작품이 된다. 임권택 감독만이 가능했을 이 담담한 시선은 바로 인생과 삶, 영화를 모두 집약하면서도 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길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시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다. 이 단순해 보이는 플래시백은 그러나 과거의 길과 지금의 길, 그리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안타까움을 더해간다. 그 안타까움은 동호가 송화에게 갖는 그리움만큼의 거리에서 비롯된다. 그 그리움은 성장한 현재의 동호가 선학동 선술집에 도착해 처음 상상하던 어린 시절의 송화만큼 먼 거리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면서 만남의 기대감을 높인다. 선술집에서 펼쳐놓은 이야기 길을 따라 동호는 여러 차례 송화와 엇갈리지만 그들은 결국 실재 존재하는 길 위에서는 만나지 못한다.

매몰되어 사라져버린 강처럼, 예전 날아들었다는 학도 사라진 그 선술집 선학동으로 이야기는 먼 거리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결국 만나지 못한 동호와 송화는 그러나 소리로 길을 낸다. 그 소리 길 위로 사라졌던 강도 살아나고 사라진 학들도 날아든다. 학들은 동호와 송화의 못다 나눈 정담을 나누듯 소리 길 위에서 춤을 추며 강 위를 날아다닌다. 길은 소리 길을 따라서 영원이 된다. ‘천년학’은 그렇게 임권택의 100번째 길 위에서 영원으로 만들어진다.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흥행만을 노린 기획영화들 때문이다. 물론 조폭영화라는 용어 속에는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있다.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느와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 역시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조폭이라는 소재에 연연하는 것일까. 혹시 조폭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표상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우아한 세계’에 이르러 추정되는 결론은 조폭은 이제 그저 칼부림에 쌍스러운 욕이나 하는 그런 표피적인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 함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이다.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게임의 법칙(1994)’,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로 귀결되는 초창기 조폭영화들은 조폭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에둘러 고발했다. 철저히 조폭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벌이는 게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에 대한 문제. 정답은 시스템을 만들고 법칙을 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넘버3가 넘버2나 넘버1이 되려고 해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이들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폭의 세계가 갖는 단순명쾌한 폭력으로 그 아래 숨겨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시스템을 목격한다는 것은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친구(2001)’는 이런 현실에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그 시절의 친구를, 이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런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성공의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그 시스템의 벽에 무너지는 우리네 가장의 모습들이다.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
하지만 초창기 조폭영화가 가진 이러한 풍자 내지는 사회비판의 요소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조폭 코미디물로 인해 퇴색된다. ‘조폭마누라’나 ‘두사부일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명절 극장가를 달구었다. 조폭영화가 가진 현실적 함의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공중에 붕 떠버린다. ‘또 조폭영화냐’라는 비판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재는 2006년 개봉된 ‘비열한 거리(2006)’를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진다.

‘비열한 거리’는 똑같이 초창기 조폭영화에서 다루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좀더 생활기반으로 조폭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과거 조폭의 모습은 조폭 세계 속에서의 비장한 인물로만 그려졌지만, ‘비열한 거리’에 와서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더 리얼해지고 사회적인 함의는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집안에서는 가족이 살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의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병두(조인성)는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이 갖는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
수직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또한 그 가장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수평적인 세계이다. 병두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누군가를 밟고 서야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질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수평적인 세계의 안정을 위해 수직적인 세계로 올라가려는 가장들의 희망은 시스템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아한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바로 가장들이 갖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며, 가족이란 안전망과 사회라는 현실 싸움터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살려는 강인구(송강호)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저 현실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적 가장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졌듯이 시스템은 절대로 희생 없는 대가를 주지 않는데, 우리네 가장들은 그 시스템에서의 성공을 통해 가족들과의 ‘우아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또다시 조폭의 세계를 들고 온 이유이자, 조폭이 이 시대의 가장이 된 사연이다.

최양일 감독의 신작, ‘수’는 대사는 적고 액션이 대부분인 영화.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으로 상황을 얘기한다. 영화는 난데없는 자동차 액션(사실 액션이라기보다는 있는 대로 부순다는 의미가 크다)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 때문에 벌어진 일인지 생각하기보다는 그 끝간데 없이 부서지고 부딪치는 자동차와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피를 보며 진저리를 치게 된다.

이 영화를 보통의 액션영화로 본다면 정말 지독히도 재미없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액션영화의 틀을 벗어나 있기 때문. 액션의 통쾌함을 목적으로 연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가 튀기는 장면들은 끔찍하다는 느낌을 줄뿐이다. 주인공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대도 극도로 얇게 구성되어 있다. ‘동생을 찾는 청부살인자→찾은 동생이 암살된다→복수를 한다’는 단순한 설정에는 몰입을 위한 어떠한 장치도 들어있지 않다. 그것은 말 그대로 설정일 뿐이지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다.

최양일 감독은 영화 제목 ‘수’에 극중 주인공 태수의 수, 복수할 수, 목숨 수의 뜻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한 가지를 포함시킨다면 바로 수컷의 수이다. ‘하드보일드 클래식’이란 기치를 걸고 나선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동물적인 복수를 향해 달리는 수컷, 수를 이해해야 한다. 영화가 2시간 동안 보여주려는 것은 바로 ‘상처 입은 짐승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그를 키워낸 송인(조경환)의 말대로 ‘수’는 ‘누군가를 상처 주고 물어뜯고 죽음을 주는 존재’. 자신 때문에 대신 붙잡힌 쌍둥이 동생과 헤어져 19년 간을 살아온 태수는 짐승의 삶을 살아온다. 그 삶의 흔적은 그의 아지트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허름한 외부의 문을 통해 들어가면 외부와는 전혀 다른 내부공간. 차갑고 음울하며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공간 한 편에 놓여진 동생과의 사진 한 장이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동생의 애인 미나(강성연)가 끓여준 커피보다는 자학하듯 무미건조한 생수만을 고집하는 상처 입은 짐승이 태수이다.

그의 복수는 인간적인 판단이 배제되고 오로지 본능만 꿈틀거린다.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무모함. 그러니 액션 역시 물리고 물어뜯는 질척함이 묻어난다. 칼과 도끼로 찍히고 몽둥이로 맞아가면서도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태수의 복수에서 깔끔하고 통쾌한 해결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건 속시원한 복수극이 아니다. 그것은 피 튀기는 대결과 죽이지 않으면 죽는 비정한 현실 혹은 우리네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핏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나중에는 스크린에 묻어날 것 같고 죽을 듯 죽을 듯 살아 꿈틀대는 태수를 보면서 그게 마치 내 자신인 양 관객이 피곤을 느끼게 될 즈음, 태수의 복수극은 끝난다. 그리고 피칠갑을 한 몸이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 누여지고 씻겨진다. 이 카타르시스의 장면조차 최양일 감독은 무미건조하게 처리해낸다. 커다란 대야에 가득 찬 물을 그저 화면에 담는 것이다.

‘수’는 대중적으로 지지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관객들을 동화시키기보다는 이화시켜 자꾸만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액션을 보러갔던 관객들은 태수에 동화되기 위한 어떤 장치(설정)를 기대했겠지만, 이 영화는 철저히 그 요구를 외면한다. 대신 영화는 이성을 배제하고 동물적 본능처럼 움직이는 태수의 몸짓으로만 흘러간다. 그 굵직한 고집은 그래서 기존 틀에 박힌 액션 복수극의 뒤통수를 때리는 구석이 있다. 이 어려운 영화를 정말 실감나게 해준 것은 지진희는 물론이고 문성근, 이기영 등의 몸서리쳐지는 연기를 보여준 연기자들의 몫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 태수와 태진이 쌍둥이라는 설정 정도는 좀더 영화의 뼈대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똑같이 생겼다’는 그 영화적 장치는 ‘자신(태진)이 죽는 장면을 자신(태수)이 목격하고’, ‘그 죽은 자신(태진)을 대신하며’, ‘그 죽은 자신(태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의미로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재일교포로 살아온 최양일이란 감독이 가진 두 개의 정체성, 즉 한국인으로서의 최양일과 일본에서 살아온 최양일을 보여주는 독특한 그만의 영화 스타일로 귀결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수컷의 향기가 가득한 영화, ‘수’가 남긴 아쉬움이다.

퓨전사극, ‘300’의 역사논쟁
영화 ‘300’에 대한 간략한 스포일러. 다가오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 앞에 맞서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 그들의 숫자는 불과 300명. 팬티 하나에 망토 하나씩 걸친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창과 방패, 헬멧 그리고 칼이 전부다. 시간적으로는 단 3일이며 공간적으로도 영화는 테르모필레 협곡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300’의 단순한 줄거리다.

그런데 이렇게 줄거리를 다 얘기해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건, 이 영화가 스토리를 보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스토리는 하나의 장을 마련해줄 뿐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역사보다는 재미이며, 멋진 대사보다는 그림 같은 액션이고 스토리보다는 근육이다. 그러니 아무리 스토리를 백 번 얘기하고, 역사를 들춰보는 것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봐야 안다. 그것도 꼭 대형스크린으로.

재미가 된 역사, ‘300’
우리에게 ‘주몽’이 있다면, 저들에게는 ‘300’이 있다. 스케일에서도 이야기에서도 전혀 다른 이 두 작품을 한 문장 안에 쓸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둘 다 퓨전사극이라는 것. 퓨전사극, ‘300’에서 역사는 재미가 된다. 실로 수많은 해석을 낳았던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영화 속에서 마치 스파르타인들이 이성적이라는 아테네인들을 졸장부나 심지어는 남색가로 불러대는 것처럼 영화 밖으로 밀어낸다. 레오니다스 왕이 페르시아의 사신을 끝을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때부터 역사나 해석 따위 역시 그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살과 살이 부딪치고 뼈와 피가 난무하는 하드코어 폭력의 세계다. 창이 날아갈 때마다 페르시아인들의 몸은 꿰어지고 칼이 날아갈 때마다 두 조각이 나버린다. 피는 비처럼 쏟아지고 때론 꽃처럼 흩날린다. 이것은 하나의 게임을 보는 것 같다. 뇌 속에 있는 자판과 마우스를 움직이면 거기 거대한 모니터 속에서 피칠갑을 한 시체들이 쌓여간다. 헤비메탈 기타 음이 울려대며 전사들의 아드레날린이 과부하되어 호흡이 가빠질 때, 그걸 보는 이들은 캐릭터와 접속되어 함께 숨을 할딱거리게 된다. 역사? 그런 건 불끈불끈 솟아나 있는 300개의 근육들과 왕자 복근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재미는 ‘300 : 100만’의 대결. 게임에서는 본래 아군은 적을수록 적군은 많을수록 좋다. 그래야 혼자서 해치울 수 있는 적이 많아지는 법이니까.

퓨전이 도를 넘을 때, 시작되는 논쟁
이 역사를 뒷전으로 한 채 스타일리스틱한 재미에 몰두하는 퓨전사극에서 갑자기 역사논쟁이 불거지는 지점은 상상력이 역사적, 혹은 현실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이다. 1차 전투에서 방패전술(여러 명이 방패를 덧대 하나의 방패처럼 싼 뒤 적을 밀쳐내고 창으로 공격하는 전술)이 스파르타식의 리얼한 전투장면을 끌어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지는 괴물 같은 임모탈의 등장은 피 튀기는 전장을 본 뒤 잔뜩 흥분된 관객의 감정적 기반 위에서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그 흥분 속에서도 바위처럼 냉철함을 잃지 않는 레오니다스 왕 같은 관객이라면 좀 생뚱맞게 느껴졌을 것이다. 심지어 이 부분에서 사극은 환타지와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연출한다. 그런데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다. 퓨전사극 ‘주몽’을 통해 보여졌던 환타지 같은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상상력이 도를 넘어서 불가능을 보여줄 때 논쟁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이란에서 이 영화에 대해 서명운동까지 펼쳐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영화에서 보이듯이 괴물이 아니니까. 게다가 자신들이 괴물이 된 이유가 레오니다스라는 영웅을 만들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는 분노마저 느꼈을 법하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라고?
여기에 대한 제작사측의 답변은 ‘영화는 영화일 뿐 다큐멘터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총괄한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오락영화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프랭크 밀러의 전작, ‘신 시티’를 로드리게즈가 영화화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의 감독 잭 스나이더도 만화의 장면을 하나하나를 프레임으로 옮겨왔다. 영화적 문법을 무시하고 프랭크 밀러의 작품에 모든 걸 헌사하자 영화는 새로운 형태의 맛을 띄게 되었다. 만화 같은 영화.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영화.

프랭크 밀러는 자신의 작품에 정치적인 담론을 담아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이것은 “코믹스는 현실 밖의 세상을 더 현실화시킨 것”이라는 그의 말에도 나타난다. 그가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를 모티브로 삼았을 때부터 그것은 이미 역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특히 이 전투가 갖는 상징성, 예를 들면 ‘동ㆍ서양의 충돌’에서 300명의 스파르타인의 영웅적 전사가 가져온 세계사적 의미 같은 것들에 잔뜩 호들갑을 떠는 서구인들임에야 오죽할 것인가.

그들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역사적인 전투라는 배경이다. 이 배경은 주어진 것이고 사실 영화가 보여주려는 세계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폭력의 하드코어’로 불려질 수밖에 없게 된다. 만일 그게 목적이었다면 애초부터 역사적 배경 따위는 집어치웠어야 옳다.

퓨전사극이 갖는 환타지의 위험
이러한 퓨전사극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자유로울까. ‘주몽’이란 퓨전사극이 보여주는 역사왜곡, 예를 들면 고구려를 부각하기 위해 부여를 왜곡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몽’이나 ‘300’에서 드러나듯이 퓨전사극은 그 재미에 있어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환타지다. 하늘에게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계시 받은 인물이나, 괴물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맞서 이기는 헤라클레스에 대한 환타지는 또한 그것 때문에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한다.

‘300’. 살점과 피의 향연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고 그 미학적인 인물의 동선들은 예술적인 차원으로까지 폭력을 끌어올린다. 영화적으로 보면 분명 이 영화는 충분한 미적 가치를 갖고 있다. ‘주몽’의 환타지를 귀엽게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 영화의 치밀함은 그래서 더욱 무섭다. 환타지를 현실화하기 위해 300인의 연기자들을 지옥훈련 시키고, 의상 하나를 찾기 위해 전 세계를 뒤지며, 하나 하나의 프레임에서 구현해낸 완벽한 CG는 물론이고 병사들의 동선을 리얼하게 찍기 위해 감독조차 병사들 사이에서 구르고 뛰어다니며 만든 이 영화가 그래서 두려워진다. ‘역사가 아닌 영화일 뿐’이라고 하지만 헐리우드가 영화를 통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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