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영화의 새장 연 ‘식객’, 그 아쉬움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란 원작만화는 일본의 ‘미스터 초밥왕’이나 ‘맛의 달인’을 보며 입맛을 다셨을 독자들에게 우리네 입맛을 되돌려준 고마운 작품이다. ‘우리 음식의 재발견’이라 할 정도로 만화는 철저한 사전 취재와 실제사례들을 통해 생생한 우리네 맛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것을 영화화한 ‘식객’은 기본적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들어가는 이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식객’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요리영화라는 점에서 먹고 들어가는 영화다.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담뽀뽀(1986)’가 있다면 중국에는 ‘금옥만당(1995)’, ‘식신(1996)’이 있고 우리에게는 ‘식객’이 있다고.

그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영화는 초반부에 운암정 후계자를 뽑는 대결에서 봉주(임원희)에게 패배한 성찬(김강우)이 시골집에서 자신을 찾아온 진수(이하나)와 국장에게 밥상을 차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손수 지은 밥에 된장찌개, 각종 반찬에 누룽지까지 이 영화의 첫 번째로 등장하는 밥상은 화려하진 않아도 우리네 요리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원작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 한 탓일까. 원작 만화가 가진 에피소드들을 한 편의 영화로 묶어내는데 있어서 ‘식객’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 중심적인 모티브를 원작만화의 미덕이었던 이 서민적인 밥상에 두지 않고, 성찬과 봉주의 ‘요리대결’로 가져가면서 영화는 정작 주목해야할 요리들을 소외시킨다.

이것은 저 ‘담뽀뽀’가 가진 일본식 사연 중심의 스토리와 ‘금옥만당’, ‘식신’이 가진 중국식의 과장된 대결구도를 적절히 봉합한 듯한 느낌을 준다. 원작만화가 천착하려 했던 요리에 대한 치열한 접근이 빠져버리자, 요리 자체와 요리와 관계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관계는 겉돌게 된다. 그나마 이 부분이 맞아떨어지는 곳은 원작만화에서도 백미로 꼽히던 ‘고구마 에피소드’에서이다.

영화의 사건들은 생활과 생계, 혹은 삶과 연계된 요리 이야기를 배제하고, 대결구도 속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로서의 요리 이야기로 흘러간다. 스토리가 극단적으로 한일 간의 민족주의적 색채마저 띄게 되는 것은 영화가 선택한 대결구도라는 장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대결구도 속에서 요리가 화려해질수록 사람 손길이 닿은 서민적인 밥상이 주던 훈훈한 감동은 점점 사라진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이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 안에서 다루던 음식이 특별난 것이 아닌 서민들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대사에서도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의 수는 세상의 어머니의 숫자와 같다”는 말은 사실상 허영만 화백이 가진 음식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니 ‘식객’의 진짜 묘미는 요리사들의 대결 이야기가 아닌 서민들의 이야기에 있다. 거기 들어있는 요리가 맛있고 심지어 감동까지 주는 것은 요리는 물론이고, 그걸 만든 사람의 손길이나 마음이 닿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은 원작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감독 나름의 선택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만화원작과 영화를 너무 비교하는 관점에서 본 결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화 ‘식객’은 만화원작에서는 보이지 않던 도시와 시골, 상류층과 서민의 대결구도를 끄집어내 괜찮은 우리 식의 요리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상품화되어 대량생산되는 요리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요리의 대결구도를 가져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것 역시 영화 속에서 구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는 여러 편의 에피소드를 대결구도라는 틀 속에서 순서에 따라 나열하는 구조로 간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요리로 치자면 이 영화는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린 화려한 밥상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그 자체의 다채로운 맛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충분한 재미를 선사해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좀더 소박하고 서민적인 밥상을 기대했던 분들이라면 이 화려한 밥상을 대하면서 무언가 2%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 상 위에 올려진 요리 하나하나에 숨겨진 서민적인 사연 같은 것들이 그 화려함 속에 묻혀졌다는 아쉬움이다. 때론 수십 개의 화려한 메뉴를 선보이는 집보다, 한두 개의 메인 메뉴로 승부하는 집의 입맛이 그리운 법이다.

‘M’의 작품성과 상품성

이명세 감독의 ‘M’에 대한 반응이 양극단으로 엇갈리고 있다. 한편은 이 기존 내러티브 형식을 파괴한 영화의 시도를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다른 한편은 관객을 지독한 혼란 속에 빠뜨리는 이 영화를 감독 자신의 과잉된 자의식의 산물로 보는 쪽이다. 무엇이 이렇게 엇갈린 반응을 만들었을까.

내러티브 vs 비내러티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내러티브의 세계다. 내러티브는 일정한 시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한다. 즉 현실에 있을 법한 그럴듯한 세계가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며, 보기를 기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M’이 그리는 세계는 내러티브의 세계만이 아니다. ‘M’은 꿈이라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기에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느슨하게 되어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아니면 소설 속의 내용인지를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은 이 헷갈리는 미로 속에 들어가 갑갑함을 느끼면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와 음향의 세례를 받아낼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이 초반부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면 꿈의 세계를 보다 지쳐 잠이 들 수도 있다. 이것은 관객들이 불편해하고 한편으로는 불쾌해하는 이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돈주고 영화관까지 가서 이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느냐는 거다. 그런데 감독은 바로 이 관객을 혼동에 빠뜨리는 부분을 의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민우(강동원)가 겪는 바로 그 혼동을 똑같이 느끼게 의도했다는 말이다.

동화(同化) vs 이화(異化)
이명세 감독의 이 말은 마치 관객이 민우에게 동화되기를 기대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부분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관객들이 민우에게 동화되었다면 영화는 민우의 감정선을 따라서 움직여야 할텐데, 그러한 공감대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영화는 영화 속 주인공이나 스토리에 동화되어 몰입하기보다는,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는 자신을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속 민우의 첫사랑, 미미와의 아련한 기억이 예쁜 그림으로 그려지기는 하지만, 민우를 혼동에 빠뜨릴 정도의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 부분이 그나마 이 영화 속에서 내러티브를 갖는 지점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미지는 파격적이지만) 스토리는 관습적이다. 이것이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두 번째 이유다. 초반부의 힘겨운(?) 이미지들을 겨우 버티고 봐왔는데 결국 얘기란 것이 고작 관습적인 첫사랑이라니.

영상 vs 스토리
하지만 영화를 내러티브로 보지 않고 이명세 감독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잔치 자체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영화가 말해주는 것보다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에 더 열광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상의 언어가 모국어임을 자처한다. 만일 이 말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 영화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작품이 된다. 헐리우드 장르에 의해 만들어진 관습적인 내러티브 구조 속에서 영화가 가진 영상미학은 시도 자체가 거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M’의 시도는 내러티브라는 족쇄에 묶여있는 영화를 좀더 자유롭게 풀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는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런 실험적인 시도를 지금의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내러티브에, 동화(同化)에 익숙해져 그런 영화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왔던 관객들은 아마도 속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중들의 기호를 도외시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예술에 대해서 이제 대중들은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나 대중문화라고 불리는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서는 더더욱.

작품 vs 상품
이명세라는 감독과 강동원이라는 아이콘이 주는 기대감을 갖고 영화관을 찾았던 분들은 이러한 불편함 속에서 극장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이명세 감독과 강동원이라는 배우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예술인이라는 측면과 함께,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이미지를 모두 갖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까지 이들은 상품으로서 홍보되고 광고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며 상품으로서의 영화가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다.

‘M’이 영화 홍보에 있어서 그렇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천착하고, 거기에 강동원과 이연희의 아련한 이미지를 포장시킨 것은 상품으로서의 영화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물론 그것 자체에도 나름대로의 영화적인 재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첫사랑이란 코드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련한 아쉬움’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M’에 대한 양극단의 평가는 작품으로서의 ‘M’과, 상품으로서의 ‘M’ 사이에 벌어진 균열 때문에 생긴 것이다. ‘M’을 예술작품을 보듯 진지하게 바라본다면 그 낯설고 불편한 이미지들 속에서 어쩌면 초현실주의 그림들과 현대음악을 발견하는 재미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강동원이라는 아이콘과 첫사랑이라는 문구에 극장을 들어섰다면 자칫 불편함만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M’은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상품성은 떨어지는 영화다. 재미의 기준을 작품성에 두고 보면 재미있지만 상품성에 두고 보면 재미없는 영화다. 그리고 그 재미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다만 재미있다, 없다를 떠나서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기획영화들의 홍수 속에서 ‘M’이 보여준 시도 자체를 폄하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대중문화 시대, 낯선 작품의 가치

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이 떠올리게 하는 두 인물이 있다. 그것은 난해한 시와 소설로 당대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천재적인 시인 이상과, 불우한 삶을 거름 삼아 전복적인 소설을 써냈던 카프카가 그들이다. 스토리로 보자면 결혼을 앞둔 민우(강동원)가 첫사랑이었지만 잊고있었던 무의식 속의 미미(이연희)를 떠올린다는 것이 전부. 하지만 이 단순한 스토리는 이명세라는 독특한 자의식을 만나 기묘하고 낯선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상, 질주하는 그들과 거울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오감도의 첫 소절처럼 영화 ‘M’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쫓고 쫓기는 긴박한 꿈에서 시작된다. 민우(강동원)는 먼저 도심의 거리에서 자신을 쫓는 알 수 없는 시선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그 시선을 자신이 쫓기 시작한다. 어두운 골목길로 질주하던 그는 그 곳, 루팡 바에서 그 시선이 미미(이연희)라는 소녀라는 걸 알게된다. 그러자 그 후부터는 미미가 우산을 든 그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꾸게 된다. 미미는 민우를 쫓고, 민우는 미미를 쫓으며, 미미는 그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 반복된 이미지는, 이상의 ‘오감도’가 자아내는 의미를 찾기 힘든 단어의 반복과 그럼에도 느껴지는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을 똑같이 직조해낸다.

이상이 무의미한 단어의 조합을 통해 무의식의 초현실적인 느낌을 포착한 것처럼, ‘M’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물론 극도로 의도된 영상들이지만) 영상들을 통해 의미를 지워버리고 대신 느낌을 얻는다. 비논리적이고 단절된 영상들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그 이미지들은 때론 코미디가 되고, 때론 비장해지며, 때론 미스테리가, 때론 멜로가 된다. 이러한 파편적인 이미지들을 쏟아내는 이유는 우리네 꿈 혹은 무의식의 세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혼재된 의식과 무의식의 이미지들은 그러나 차츰 나누어진다. 그리고 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가 분열되는 부분에서 이상의 모티브가 또 등장한다. 그것은 거울이다.

민우는 거울 앞에서 저편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저편 세계(무의식)를 공간화한 루팡 바를 찾아가는 길에는 여지없이 거울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하나의 그림처럼 구성된 화면 속에 어딘가로 가는 골목길이 있고, 길 벽에 거울이 걸려 있는데, 그 거울 속에는 아직 화면 속으로 들어오지 않은 민우가 비춰진다. 의식 저편에 서 있는 민우가 그러나 화면 속으로 들어오면 거울 속에 있던 민우의 얼굴은 사라진다. 이 장면처리는 민우가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거울 이편에서 저편으로 넘어갔다는 걸 보여준다. 이밖에도 무수히 등장하는 거울의 이미지들은 저 이상이 자주 그려낸 분열되고 불안한 자아를 그린 시들의 모티브가 된 거울과 같다.

카프카, 인공으로 빚어낸 완결된 세계
“‘M’의 시놉시스 작업당시 주인공 민우를 구상할 때 처음 떠오른 것은 카프카의 젊은 시절을 담은 사진 한 장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이 말은 그러나 카프카처럼 안경을 끼고, 묘한 분위기를 내는 천재적인 소설가로서의 민우라는 캐릭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카프카적인 분위기는 이명세 감독의 초기작부터 ‘M’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영상미학과 연결되어 있다. 늘 실제 현실이 아닌 세트를 통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이명세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혼동하게 만든다.

분명 인공으로 제작된 가짜 이미지인데, 실제보다 더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이유는 뭘까. 카프카가 기괴한 내면의 세계를 실제 현실처럼 그려내는 것처럼, 이명세 감독 역시 내면에 심상화된 이미지를 잡아내기 위해 인공적인 가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실제 거리의 모습은 날씨와 사람들, 시간 등등에 따라 한없이 다른 이미지들을 던져주지만, 만들어진 인공의 거리는 감독이 전달하려는 그 느낌만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명세는 따라서 외면이 아닌 내면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작가라는 의미에서 카프카를 닮았다. 인공적인 세계 속에서 ‘아 나도 저런 거리에서 매미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하고 생각할 때, 그가 만든 영상은 비로소 정확히 관객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대중문화 시대, ‘M’의 가치
바야흐로 대중의 시대. 누구나 몇 천 원이 있으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요즘, 그 힘을 갖고 있는 자는 작가나 감독이 아니라 대중이다. 과거처럼 예술가로서의 감독이 자신의 세계관을 그려내는 작품보다, 대중들의 기호를 파악해 상품으로 제작되는 기획작품이 더 많아지는 것은 바로 이런 시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것은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장르에 있어 당연한 선택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작품이 장르적이고 관습적인 영상으로만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대중들에게 익숙한 선택만으로 영화는 더 이상 나아지지 않을 것이고, 결국에는 사라지지 않을까. 헐리우드를 위시한 장르 영화들이 극장가를 가득 메우고 극장 역시 테마파크화 하는 이 때 내러티브를 버리고 영화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로 돌아간다는 건 어찌 보면 무모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분명한 건 이명세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서 이미지를 주무르는 건 모국어를 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떤 문법과 틀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것과 다른 형식을 보여주는 시도를 불친절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는 창작자의 태도야말로 관객에게 불성실한 것은 아닐까. 낯선 것은 불편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바꾸면 낯선 두려움은 새로운 설렘이 되기도 한다. 이상과 카프카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여성적 시각 돋보인 ‘궁녀’의 아쉬움

최근 개봉한 ‘궁녀’와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은 여러 모로 닮았다. ‘장미의 이름’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면, ‘궁녀’는 궁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을 다루는 윌리엄 신부(숀 코넬리)가 있다면 ‘궁녀’에는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이 미궁의 사건을 조사한다. 윌리엄 신부에게 수련제자 아조(크리스찬 슬레이더)가 있었다면 천령에게는 숙영(한예린)이 있다.

무엇보다 유사한 점은 수도원과 궁이라는 이 두 공간이 주는 느낌이다. 먼 거리에서 봤을 때 신성한 장소로 생각되어온 이 공간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 곳은 기괴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야만의 공간이 된다. 주로 어둠 속에서 등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천령과 윌리엄의 모습은 야만으로 대변되는 중세사회의 어둠을 이성으로 비춰나가는 르네상스에 세례 받은 인물들로 보인다.

두 영화가 모두 공포와 미스테리적인 기법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유사한 점이다. 신성하고 밝은 이미지로만 인식됐던 수도원과 궁의 이면을 잡아내기 위해서, 이 기법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공포의 공간으로 변한 그 곳에서 가녀린 빛(이성)에 의지해 진실을 찾아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성과 야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결의식은 권위의 이면에 숨겨진 야만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할 것이다.

‘궁녀’는 이러한 의미 이외에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코드를 부여한다. 궁의 남성이 아닌 여성들, 즉 궁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왕인 남자는 그저 희빈이나 중전과 성관계를 벌이는 인물 정도로 그려진다. 또 한 명의 남자인 정랑(김남진) 역시 바람둥이 정도로만 보여진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궁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관행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지만 결국 여성들을 그렇게 만든 남성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드리우고 있다. 이것 역시 수도사를 통해 중세사회의 억압을 그려낸 ‘장미의 이름’과 유사한 접근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가 하려는 내용이 그러하듯이 끝까지 이성적인 수사를 그 중심에 두었지만, ‘궁녀’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천령의 수사가 이 궁의 비밀을 파헤치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지만, 영화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궁이라는 견고함을 도무지 이성이라는 것 하나로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성으로서의 억압이 그토록 깊다는 반증일까. 영화가 추리형식에서 공포물로 돌변하는 상황에 이르면 이성은 실종되고 만다.

‘궁녀’는 분명 그 시도자체가 의미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관을 표징하는 궁이라는 공간의 적나라한 속살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히 남는다. ‘한’과 같은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견고하고 뿌리깊은 남성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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