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절을 한다. 방귀 깨나 뀐다는 부잣집 양반님네들 앞에서도, 세 치 혀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를 가진 사또 앞에서도, 글 깨나 읽었다며 위선 떠는 선비 앞에서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던 그녀가 절을 한다. 그녀가 절을 하는 곳은 하녀들이 매일 닦아 반짝반짝 빛나는 마룻바닥이 아니다. 신음과 고열에 젖은 피비린내와 땀 냄새 심지어는 똥 냄새, 오줌 냄새 그것이 뭉뚱그려진 죽음의 냄새가 배어나는 옥사의 맨바닥이다. 그녀가 절을 하는 대상은 가장 천하디 천한 ‘놈이(유지태)’란 남정네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놈이는 저잣거리 왈자패, 색주가의 기둥서방, 그리고 화적 두목으로 살아가는 그 시대, 이 놈도 되고 저 놈도 되는 대부분의 천민들이 그러했던 양반네 눈에는 그저 잡놈인 비천한 사내다. 하지만 적어도 그는 가슴속에 “사람 사는 곳 어딘들 못 가겠냐”는 호기 하나를 품고 살아간다.

그 놈은 양반집 아기씨로 자라온 황진이(송혜교)의 태생을 밀고해 하루아침에 그녀를 천한 기생으로 만들어버린 놈이다. 빗나간 사랑으로 비롯된 그 일로 인해 그녀는 한없이 낮아지게 된다. 반면 그 놈은 낮아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가장 낮은 사람들을 돕는데 남은 인생을 건다. 높은 데서는 몰랐던 낮은 자들의 처지를 알게된 황진이의 마음 속으로 점점 놈이가 들어온다.

낮은 사람들을 돕는 화적패 두목 놈이와 천한 기생으로 살아가는 황진이는 지체 높은 양반네들에겐 가슴속에 칼 하나씩을 품고, 낮은 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삶에 매진한다. 그래서 양반들조차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가 된다. 그런 그들이 무릎을 꿇는다. 누굴 위해서? 이름마저 비천한 괴똥이(오태경)를 위해서다. 황진이는 그를 볼모로 잡고 있는 사또에게 몸을 허락하고, 놈이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허락한다. 그런 그들이 옥사에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다. 황진이는 처음이자 마지막 잔을 건네고, 가장 비천한 놈이란 놈에게 절을 한다.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는 이처럼 신분의 정점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황진이를 그려낸다. 그리고 결국엔 저 서화담(김응수)이 화두처럼 던졌듯이 신분도 귀천도 없는 자연의 일부로 끝을 맺는다. 황진이란 인물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먼저 했던, 드라마 ‘황진이’와는 정반대의 길이다. 드라마에서는 낮은 신분의 황진이가 점차 예인의 정점으로 올라가는 구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진이라는 인물에 있어서도 드라마 속의 양반들을 농락하는 카리스마보다는 삶을 탐구하는 듯한 진중함이 묻어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메인 카피, ‘16세기에 살았던 21세기의 여인’이란 문구는 영화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드라마 속의 황진이라면 모를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황진이는 20세기적 가치였으나 지금은 찾아볼 길 없는 혁명가의 모습이다. 21세기 여인은 희생보다는 행복을 꿈꾸는 좀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 묘한 부조화는 그래서 21세기 여인들이 보기에는 좀 낯선 것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의 한없이 낮아지는 혁명가의 모습에 관객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은 아직도 그 때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까. 놈이 같은 비천한 놈을 향해 절을 올리는 황진이의 모습이 좀체 잊혀지지 않는 것은. 황진이가 내뱉는 수많은 대사들이 이제는 오래된 향수처럼 느껴지는 문학으로 읽히는 것은.

디지털 극장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운 이유

영화티켓 하나 꼭 쥐고 냄새나고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저 스크린만 쳐다봐도 좋던 시절은 가버렸나. 영화가 너무 좋아서 연거푸 몇 번씩 보고 또 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멀티플렉스로 거대해진 극장은 체인화되고 시스템화된 지 오래며 이젠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점점 고급화되어가는 추세다.

이제 레스토랑처럼 보이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최고급 요리를 즐기는 시대다. 250평 규모의 공간에, 일반 스크린의 세 배가 넘는 가격의 고급 스크린이 설치되고, 바닥 스피커까지 갖춘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춘 극장은 영화 한 편에 10만 원이라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연인들을 위한 특별 커플석은 기본이고, 아예 극장 하나를 통째로 빌려 이벤트를 할 수 있는 소규모 극장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극장은 이제 더 이상 영화만을 감상하는 공간이 아니다. 복합레저공간이라고 해야할까. 테마파크 라고 해야할까. 여기에 이른바 팝콘무비로 불리는 블록버스터가 만나면 극장은 완벽한 놀이공원(?)이 되는 셈이다.

디지털 시대, 극장의 생존법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는 극장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디지털 배급(중앙서버에서 여러 스크린으로 영화파일을 전송하는 시스템)’은 선명한 화질로 무한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극장 수에 맞게 프린트를 해서 배급하던 과거의 시스템은 한 벌에 들어가는 2백만 원 상당의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여러 번 프린트하면서 발생하는 화질 저하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제 디지털 배급으로 그런 문제는 사라졌다. ‘필름 없는 극장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것은 극심한 극장의 위기였다. ‘홈 시어터’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스템은 극장으로 가려는 관객들의 발길을 가정에 묶어두었다. ‘황후화’를 감독한 장이모우 감독은 그 엄청난 스케일을 만들어낸 데 대해 꼭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볼거리’가 이제 영화에 필요해진 상황을 에둘러 말한 적이 있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거대해지고 블록버스터화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극장의 변신은 바로 이것과 맞물려 있다. 그저 스크린에 영상을 틀어주는 것만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생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극장과 팝콘무비가 만나는 지점이다.

극장과 팝콘무비의 공존, 좋기만 할까
하지만 그것이 좋기만 한 걸까. 국내 영화의 위기론에 불을 붙인 최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극장 점유는 가히 놀라울 정도다. ‘스파이더맨 3’가 전국 816개 상영관을 잡은 데 이어, ‘캐리비안의 해적3’는 이보다 100개가 넘는 912개의 상영관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런 현상은 디지털 배급이 가진 장점인 무한복제가 스크린 독점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극장주들이 돈을 벌겠다는 데야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은 또한 소비자의 선택의 권리를 원천 봉쇄한다는 점에서 그저 상업의 논리로만 내버려두긴 어려운 문제다. 그것도 이른바 팝콘무비, 즉 킬링타임용 영화에 대부분의 극장 스크린을 내준다는 점은 자칫 영화의 본질을 뒤흔들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물론 “재미만 있으면 되지 팝콘무비가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는 문화라는 본질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재미있는 놀이기구’로 생각하지 문화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팝콘무비와 극장의 변신이 만나 만들어 가는 이 놀이공원화 되는 극장은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
‘말아톤’, ‘좋지 아니한가’의 정윤철 감독은 최근 한 영화 잡지에 “극장에서 영화만 보고 나오기, 콜라와 팝콘 사먹지 않기 운동을 펴자”는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이른바 ‘팝콘무비’라 불리는 천편일률적인 블록버스터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뜻이다. 그는 이어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칸 영화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밀양’같은 작품도 극장을 못 잡아 관객들이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잇따른 상영관 독점 현상을 꼬집었다.

물론 극장의 변신은 서비스 차원에서 보면 관객의 선택 폭을 넓혀주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런 변신이 마치 저 ‘팝콘무비’를 위한 준비처럼 보여지게 만드는 헐리우드 영화들의 잇따른 스크린 독점은 오히려 관객의 선택 폭을 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점점 디지털화되고 세련되어지는 극장에서 자꾸만 조금 어수룩해 보여도 정이 가는 옛날 아날로그 극장이 그리워지는 이유다.- 교보생명 사외보 <다솜이 친구>7월호

어린 시절, 누군가 던진 돌팔매질에 상처 난 이마는 누가 고쳐주었나. 정성스레 솜에 과산화수소를 발라 상처를 소독한 후, 빨간 약을 발라주신 어머님인가. 아니면 과산화수소와 빨간 약인가. 이창동 감독이 들고 온 ‘밀양’이란 영화를 보면 ‘재수 없음’으로 치부되는 운명의 돌팔매질에 입은 상처가 과연 인간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영화는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을 아들 준과 함께 찾아가는 신애(전도연)의 자동차에서부터 시작된다. 햇살이 저 멀리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그것은 차창에 가려져 굴절된다. 신애가 밀양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하늘의 태양이 그저 거기 떠 있는 존재로만 알았다. 그러나 밀양에서 겪게되는 참기 힘든 시련(아들이 유괴되고 살해되는) 속에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가슴을 두드리고 그래도 죽지 않는 제 육신에 억지로 밥알을 쑤셔 넣으면서 미칠 듯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애 옆을 종찬(송강호)은 서성댄다. 밀양이라는 지명을 ‘비밀의 햇볕’이라 부르며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그녀는, “뜻보고 삽니꺼? 그냥 사는 거지예”하는 속물 같은 이 사내를 무시한다. 하지만 종찬은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믿음 없이도 교회를 나가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신애가 처음 종교의 힘을 빌어 하늘을 쳐다본 것은 그것이 자신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일까. 그것은 마치 상처가 분명 있는데도 없는 것이라 믿고 아무런 대응조차 않는 것처럼 헛된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신도를 유혹하면서 신을 비웃듯 두 번째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애의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있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직시하지 않았던 상처는 곪을 대로 곪아버렸던 것. 상처는 어느덧 그녀의 영혼까지 갉아먹는다.

영화는 신애라는 상처 입은 인간이 벌이는,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투를 끝까지 배신한다. 남편을 잃고, 아이를 잃고, 상처를 준 자를 용서하려 했지만 그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해도 거기서 또다시 상처와 마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지독스런 신애라는 인물을 연기해낸 전도연이란 배우는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자신 속에도 깊은 상처가 드리워졌을 것이 분명하다. 연기는 실제처럼 리얼하고, 그 리얼함은 진짜 전도연이라는 몸피 속에 숨겨진 신애, 혹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상처의 기억을 적나라하게 끄집어낸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상처의 연속이다. 누군가와 함께 숨을 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매일 조금씩 상처를 내는 일이다. 그래서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아무는 것일까. 그 답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적혀 있었고, 그녀 주변을 뱅뱅 도는 종찬이란 인물에 의해 구체화된다. 상처는 ‘누군가’에 의해 나는 것이지만 그 ‘누군가’는 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상황이다. 상처는 결국 소독약과 빨간 약도 아니고, 어머니의 정성도 아닌 상처 입은 자의 몸 스스로 아무는 것이다. 그러니 이 인간의 조건을 어찌 참혹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상처 입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빨간 약을 발라주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달릴 수 있게 일으켜주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신애의 주변을 서성대며 심각한 영화의 질문들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관객들을 툭툭 던지는 말로 웃겨버리는 종찬은 그래서 이 고통스런 영화의 ‘비밀의 햇볕’같은 존재다. 종찬으로 대변되는 우리 주변의 바라보는 자들은 또한 우리 삶의 상처들을 온전히 치유되게 만드는 햇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햇살은 저 멀리서 비춰주는 것만으로 생명을 살아가게 하니까. 마지막 장면, 후미진 더러운 마당을 담담히 비춰주는 햇살처럼.

가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꿈꾸는 ‘아들’

지금 영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고군분투 중이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그리고 ‘우아한 세계’에서는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진창에서 뒹굴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가부장적 가치관의 퇴조, 여성성이 중요해진 사회, 경제적으로 더 힘겨운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무엇보다 권위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된 이 시대의 아버지. 최근 들어 이른바 ‘아버지 영화’라고 불릴만한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아버지 영화가 가진 미덕과 한계
물론 어떤 영화는 아버지를 내세운 신파의 구조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 ‘아버지 영화’들의 미덕은 그간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비껴나 있던 아버지들이 그 중심에 서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것은 사라진 모성애의 뒤를 채워줄 부성애로서 아버지가 등장했지만 이것이 자칫 과거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신(新)가족중심주의’로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가족의 탄생’과 ‘좋지 아니한 가(家)’가 해체되어가고 있는 가족에서, 어떤 새로운 가족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면 이들 아버지 영화들은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아버지 영화는 과거 ‘어머니의 눈물’로 대변되던 가족영화의 아버지 버전이 될 가능성이 짙다. 장 진 감독이 들고 온 가족영화, ‘아들’은 그런 면에서 여타의 ‘아버지 영화’들과는 맥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아버지 영화로 착각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착각을 의도함으로써, 극적인 반전을 도모한다. 반전의 이유는 명확하다. 위에 언급한 대로 ‘아버지 영화’가 갖는 버전만 바꾼 가족영화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내레이션이 주는 난감한 유쾌함
15년 간, 단 하루도 생각이 떠날 수 없었을 아들, 준석(류덕환)을 만나러 가는 강식(차승원)의 마음은 짠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관객이라 해도 그 설정의 거미줄에 일단 걸리면 왠만해선 눈물을 참을 수 없다. 아기의 손을 잡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시작한 영화는 곧바로 인터뷰로 이어지는데 강식의 멍한 표정 하나를 보는 것만으로 거미줄에 잡히는 것은 충분하다. 그런데 장진 감독은 그것도 모자라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으로 강식과 준석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일기장에 써내려 가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거기엔 관객을 울리는 그들의 진정어린 속내에서부터 관객을 웃기는 엉뚱한 속내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내레이션은 그저 절절한 그네들의 사연만을 전하는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그 장치를 통해 장 진 감독은 특유의 유머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다. 장 진 감독 특유의 화법을 통해 관객은 울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신을 느끼면서 ‘이거 참!’하는 난감한 유쾌함을 경험하게 된다.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새 패러다임이 열린다
차승원의 아버지 연기와 류덕환의 아들 연기는 장 진 감독의 전략에 딱 들어맞는다. 손짓 하나 표정 하나에서 그들의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되고, 내레이션은 그 감정들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관조적인 입장에 서게 만든다. 그것은 일기 같은 내레이션이 갖는 상황 정리의 속성이 장 진 감독 특유의 쿨함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15년 간 만나지 못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하루’라는 어찌 보면 심각한 이 영화에 난데없는 철새들의 삽화가 만화처럼 끼여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 진 감독의 이런 스타일 덕분이다.

그런데 클라이맥스에서 던져지는 반전은 우리가 “이건 장 진 감독이니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전반부의 이야기들을 모두 뒤집는다. 그 모든 것들이 철저한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걸 느끼며 기대가 배반되는 순간, 한창 감정에 젖어있던 관객은 불현듯 고개를 쳐드는 이성을 느끼게 된다. 관객들 중에 어떤 분들은 이 당혹스런 반전을 불쾌함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감정을 두들기는 동안 우리는 지금까지 전개되어 왔던 영상들이(심지어는 날아다니는 철새들까지) 모두 복선이었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가 기대했던 아버지 영화의 환상이 깨지면서 장 진 식의 가족영화가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겪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이 정도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핵심이 바로 이 반전에 있기 때문이다. 이 반전을 드러내야 영화가 가진 진짜 메시지를 잡아낼 수 있지만, 그 순간 영화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글로 전달될 수 있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장 진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관객들이 선입견으로 갖고 있는 자신의 스타일까지 모두 반전의 장치로 활용해 의도한 ‘아들’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좋은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평가절하가 두려워 한 가지 정도는 밝혀둬도 되겠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 영화가 주는 절절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영화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버지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영화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영화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