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미줄의 두 가지 용도, 밥벌이와 창조
웰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샬롯이듯, 또한 샬롯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웰버다. 웰버가 나타나기 전까지 샬롯이 하는 일이라곤 거미줄을 치고 포획된 먹이에서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농장의 동물들은 그런 샬롯을 두려워하고 역겨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의 눈길을 던져준 것은 웰버. 웰버의 출연은 샬롯의 삶을 바꿔놓는다.

햄이 될 비천한 운명의 소유자 웰버를 위해 샬롯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 한다. 그 동안 먹고살기 위해만 쓰던 거미줄을 한 생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샬롯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부합한다. 웰버가 식용이 되지 않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즉 이 샬롯의 선택은 자신이 살아온 ‘그저 먹고사는 삶’의 부정인 동시에, 생산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세태와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네 글쟁이들의 선택과 거기서 오는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려 선택한 길에서 결국 밥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글쟁이들도 자기의 거미줄을 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먹고살기 위해 쓰는 글과 가치창조를 위해 쓰는 글. 샬롯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줄의 거미줄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초상이다.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 기적을 바라지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글은 사실 무력해 보인다. 더욱이 글보다는 돈의 가치를 더 맹신하는 사회 속에서는 글 자체도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애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만만한 글쟁이들의 초심은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샬롯이 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밤, 농장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글자를 만든다. 그것으로 저 생산성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겠다는 것.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거미줄에 새긴 글자는 ‘Some pig(멋진 돼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구간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은 웰버를 앞에 놓고 연실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관심으로 웰버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잠시 뿐,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장의 동물들이 모여 밤새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나온 글자가 ‘Terrific(굉장하다)’. 그리고 기적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회에 나간 웰버를 위해 마지막으로 ‘Humble(겸손하다)’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다.

여기서 이 세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멋지다’, ‘굉장하다’와 같은 자기 자랑형 문구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겸손하다’와 같은 자신을 낮추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겸손’같은 가치마저도 하나의 홍보성 문구로 활용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웰버를 위해 샬롯이 쓴 ‘겸손하다’는 결코 홍보성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글자였는데 그 증거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샬롯이 쓴 문구를 보며 웰버가 말한다. “그런데 내가 저 멋진 표현에 어울리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샬롯이 말한다. “바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너한테 딱 어울리는 표현이야.”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원
그런데 이런 샬롯의 노력으로 웰버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웰버의 소원은 겨울까지 살아남아 첫눈을 보는 것. 그러니 그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그런데 그 생존을 막는 요인은 욕망이다. 돼지 한 마리에게는 생존인 것이 그 돼지로 만든 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화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돼지를 그저 진짜 돼지로 읽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돼지와 거미와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과 동일선상의 가치로서 생명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웰버라는 돼지로 상징되는 비천한 존재와 그를 비천하게도 만들고 특별하게도 만드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존과 욕망 사이에 서서 한 돼지의 가치를 비천함에서 특별함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거미의 노력은 이 세계의 총체적인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좀더 섬뜩한 현실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아이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생긴다. 오히려 ‘샬롯의 거미줄’은 우화라는 아이들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는 영화라 할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영화관에서 아이가 볼까 숨기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리가 있을까. 그저 글쟁이가 동병상련식으로 느끼는 감정과잉이라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이 영화 속에는 있다.(www.ohmynews.com)

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를 달아야 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한류라는 이름 하에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연예인으로 ‘우리나라 문화 알리기’보다는 ‘이웃나라와 친해지기’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제 과거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자체를 알리는 데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서를 통해 흥행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한일전’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비인기종목이라 하더라도 피끓는 감정으로 보던 스포츠경기의 흥행요소와 같다. 김진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이 공조해 일본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할 정도이다. 물론 과거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개봉했다 실패한 ‘한반도’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에만 기대서는 자국에서도 해외에서도(이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상품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한 해 TV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 사극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제작한 이들 드라마를 가지고 한류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반한류의 기류를 형성해 여타의 드라마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작년 한 해 우리가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달아 해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적은 수마저도 이런 기류 속에서 판매부진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류에 포함된 상품논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화상품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민족적 정서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진영씨가 스스로를 “애국자가 아닌 배신자”라 자칭하며 미국에서 음악을 만들 때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며 만든 “흑인음악 속에 한국은 없었다”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한류’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상품’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이다. 즉 ‘한류’에는 그 안에 상품논리가 들어가 있다. 박진영씨의 글은 바로 이 상품에 대한 이야기며, 그 상품이 세워야할 전략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고’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는 절대 해외마켓에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문화컨텐츠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국내의 시장만으로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굳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상품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만일 박진영씨의 글이 이런 해외를 겨냥한 문화상품전략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말 그대로의 ‘국적 없는 문화’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현재 거대자본과 세계적인 유통망과 힘을 가진 소위 선진대중문화의 세계화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싫더라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해외 시장을 노리는 상품의 하나로 한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류 속에 내포된 반한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 한류가 태동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한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러므로 ‘한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들어있으며 그 자체로 ‘반한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류가 세계적으로 흐르고 넘칠 때일수록 우리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품 마케팅으로서는 더 유리하다.

게다가 한류는 특정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문화종사자들이 열심히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다면 그 때부터 컨텐츠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장경제 논리와 마찬가지다. 잘 움직이는 시장에 국가가 손을 대면 경제는 어지러워진다. IMF에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한류라는 냉수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한류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을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들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잉된 한류’이다. 우리 스스로 한류 한류 외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조장된 결과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우리 입으로 한류를 들먹이지 말고 좀더 차분하게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류라는 막연한 태극마크에 기대 안이하게 제작했다 실패하는 사례도 줄어들 것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성에 승부한다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명성은 우리가 떠들고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타인의 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속편 아닌 원류 선택한 ‘록키 발보아’가 시사하는 것

전 세계적인 배급의 파이프 라인을 갖고 수시로 자국의 영화를 쏟아내는 헐리우드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헐리 갖고 있던 컨텐츠의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자국만의 색채를 갖는 컨텐츠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헐리우드는 전 세계의 영화에 늘 촉수를 열어두고 다양한 컨텐츠와 소재들을 자국의 살로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으로는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가 어디 상업적인 요소만 있을까. 영화는 동시에 문화를 담고 있고 그러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헐리우드만이 가진 색채가 옅어지는 건 또한 저들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속편이 난무하는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원류로 회귀하는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 이유가 아닐까. 최근 육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 발보아’는 그 헐리우드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른바 헐리우드를 대표하던 일련의 헐리우드표 대작들은 2편, 3편의 속편들을 쏟아내다가 최근에는 모두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스’로 돌아갔고, ‘수퍼맨’은 ‘수퍼맨 리턴즈’로 돌아왔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 제작되고 있고, ‘007 시리즈’는 다시 원류인 ‘카지노 로열’로 돌아왔다. ‘록키 발보아’는 물론 나이든 록키의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내용은 ‘록키’ 원류로 돌아간 그대로다.

‘록키’가 실버스타 스탤론의 입지를 마련해준 영화가 된 것은 그것이 단지 헐리우드식 복싱 액션을 담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 영화다. 누구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 기회를 잡아 성공할 수 있다는 이 단순명제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요소다. 영화는 따라서 반 이상이 저자거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록키의 모습에 할애한다. 그런 록키가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트레이닝에 들어가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계단을 뛰어오르며 손을 치켜올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권투영화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록키 발보아’와 똑같은 구조이다. ‘록키 발보아’ 역시 영화의 반을 이제는 퇴역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록키의 생활에 할애한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레스토랑을 찾는 팬들 앞에서 록키는 수없이 무용담을 풀어놓지만 어쩐지 자꾸 퇴물로 취급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들은 자꾸 ‘과거’에만 집착하는 아버지가 영 안쓰럽다. 즉 영광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육순을 넘은 실버스타 스탤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든 저 링 위에서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록키’에서 젊은 록키가 저자거리에 떠돌던 3류 인생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섰던 것처럼, ‘록키 발보아’의 노익장 록키 역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선다. 무엇을 위해서? 반대편에 선 메이슨 딕슨은 록키가 싸우고 있는 대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록키는 과거를 지나간 퇴물로 여기는 젊은이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중이다. 링으로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강렬한 랩뮤직과 시나트라의 곡이 부딪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록키’와 ‘록키 발보아’의 미덕은 그것이 헐리우드식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영화는 둘 다 승리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모습’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더 리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애초부터 하려던 이야기는 링 위에 있었던 게 아니라 링 밖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비대해졌지만 자국의 문화 컨텐츠를 새롭게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리메이크하는 경향을 보이는 헐리우드를 닮았다는 점이다. 리메이크는 상업적인 선택이지만 거기에 과거로의 향수가 달라붙으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또한 2탄, 3탄 무한히 이어지는 재탕이 본질(원작의 힘)을 흐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락적인 재미만으로는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본류로 돌아가, “나 아직 건재해”라고 외치는 ‘록키 발보아’ 아니, 헐리우드의 일면에서 재탕 삼탕으로 얻으려는 상업적 선택이 가진 딜레마를 엿보게 된다. 이것은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늘 속편으로 유혹 받는 우리네 영화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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