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을 비웃는 본능, ‘향수’

영화의 첫 장면. 감옥,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르누이(벤 위쇼)가 앞으로 나온다. 그러자 코 하나만 달랑 빛 속으로 튀어나온다. 어둠의 섬 위로 떠오른 그르누이의 코. 이 간단한 장면 하나는 그러나 영화 전체의 이야기를 모두 압축하는 힘을 갖고 있다. 거기에는 이 영화가 다루려 하는 후각과 시각, 어둠과 빛, 이성과 본능에 대한 상징이 숨겨져 있다.

어둠과 빛이 의미하는 것
그것은 영화가 앞으로 다룰 이야기가 바로 코, 후각에 대한 것이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먼저 봐야 할 것은 이 첫 장면에서 보이는 어둠과 빛의 대비다. 어둠 속에 없는 듯 서 있는 그르누이는 영화 전체에서 드러나듯 그림자 같은 존재. 늘 거기 있지만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어떤 존재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모든 향기를 맡을 수 있지만 자신의 체취가 없다는 캐릭터의 설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늘 어둠 속에 숨어 빛의 세계 속에 놓여진 사람들에게 손길을 뻗는다.

처음 매혹적인 향기의 세계로 끌어들인 한 여인에게 다가가는 장면에서도, 로라(레이첼 허드우드)의 집 미로 같은 정원에서도,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그들은 자신에게는 없는 체취를 가진 존재들. 그는 바로 그 체취를 자신도 가지려 한다. 영화는 바로 이 어둠과 빛의 상치를 통해 어둠의 세계를 빛으로 덮어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인간의 허위의식을 고발한다. 그것은 후각이 가진 특성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후각을 시각화한다는 도전
‘향수’라는 제목의 영화 속, 그르누이라는 괴물의 탄생이 악취가 진동하는 생선시장이라는 건 아이러니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향수의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즉 악취 나는 인간이란 진실을 덮어버리는 어떤 것이다. 그 속에서 그르누이가 처음 목도하는 현실은 후각으로 집약된다. 그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악취가 버려진 자신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그는 시대의 잔인한 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살아내는 현실은 바로 그 악취 속이다. 그는 철저히 그림자로 어둠 속에서 악취에 쌓여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알게된 매혹적인 향기를 그는 수집하려 한다. 그는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그 향기의 원천이 사람들이 생각하듯 꽃과 같은 낭만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향기를 모으기 위해서는 결국 그 향기를 갖고 있는 대상을 죽여야 가능한 것. 매혹적인 향기라는 빛의 이면에는 살인이라는 그림자가 따라붙는다. 그르누이는 바로 그것을 현시해보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후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후각의 시각화.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영화는 먼저 강렬한 악취의 그림들을 연속적으로 내보내 먼저 시각을 후각화한다. 그리고 이것이 익숙해질 즈음, 향기가 가져오는 이미지를 환상으로 엮어낸다. 어느 순간, 우리들은 그르누이의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시는 장면 하나 만으로도 이미지와 뒤섞인 후각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할 것. 왜 작가는 다른 감각도 아닌 후각을 소재로 선택했던 것일까.

본능에 무릎꿇는 이성
그것은 후각이 그만큼 우리 감각에서 억압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감각기관과 달리 좀더 직접적으로 뇌와 만난다. 우리는 어떤 냄새 하나에서 수만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후각이 노리는 것은 뇌가 가진 이성이라는 능력이다. 이성은 과연 후각으로 촉발되는 본능적 기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는다.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거라 믿었지만 전쟁과 참화가 끊이질 않는 20세기(당시 책이 출간되던)를 비웃기 위해 쥐스킨트는 그르누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즉 이성은 빛이고 또한 시각으로 구현되는 세계이며, 반면 본능은 그 빛에 의해 억압된 어둠이며 후각으로 구현되는 세계다. 여기서 그르누이와 대결점에 있는 로라의 아버지인 안토인 리치스(알란 릭맨)는 바로 그 빛과 이성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는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추리하며 행동한다. 그러나 결과는 딸의 죽음. 딸이 죽어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안토인의 눈을 순간적으로 찌르는 것은 바로 그가 믿었던 빛이다.

그는 붙잡힌 그르누이에게 고문을 가하며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랬나?” 이것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그르누이의 행동에 대해 어떤 답변을 듣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르누이의 답은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토인이 원하던 이성적인 답변이 아니다. 그르누이라는 괴물에 대한 처결은 잔인한 고문 후 사형이라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본능이 앞선 해결책이다. 그래서 마지막 군중들을 향기로 취하게 만들어 광기에 빠뜨리는 충격적인 장면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그것은 안토인이 자신의 딸을 살해한 자에게 “아들아 미안하다”고 하는 것처럼 이성의 굴복을 의미한다.

통쾌한 그르누이의 퍼포먼스
영화의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루누이가 개처럼 사슬에 매인 채 끌려나가는 장면을 보면, 군중들의 “죽이라!”는 고함소리 속에서 한 수문장의 흥분된 얼굴이 잠깐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곧이어 군중들 앞에 세워진 그루누이에게 판결문이 읽혀진다. 그것은 형식을 갖춘 글귀이지만 그 내용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다. “절대로 한번에 죽이는 일 없이...”라는 문구가 그걸 말해준다. 군중들과 판관들은 모두 흥분한 상태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 사형대 위에 올라선 그르누이를 중심으로 모든 군중들은 잔뜩 흥분해있다. 그 앞 뒤 장면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으로 서 있는 인물은 바로 그르누이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이성에 대한 통렬한 조소를 보낸다.

영화에서 통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바로 이 빛의 허울 속에 가려진 어둠의 실체를 보았다는 말이다. 이성이라는 허울뿐인 잣대를 내세워 정의를 운운하며 결국에는 비이성적인 살인과 전쟁으로 몰아넣는 세계의 비정함을 목격했다는 말이다. 동화적이면서도 세계를 꿰뚫어보는 놀라운 시선과, 기괴하면서도 거기서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품, ‘향수’. 쥐스킨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어떻게 그 후각의 세계를 영상화했을까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주는 작품이다.

샬롯과 글쟁이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
밤이 되면 샬롯이란 이름의 거미는 여러 개의 다리를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면서 거미줄 위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밤이면 컴퓨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연실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텅 빈 거미줄 같은 화면을 글자들로 채워 넣는 모습. 그것은 영락없는 글쟁이의 모습 그대로다. 샬롯이 그렇게 글자를 새기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웰버라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돼지를 위해서이다. 가만 두면 햄이 될 운명을 가진 웰버는 심지어 비천하기까지 한 존재로 느껴진다. 그런 비천한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거미줄이라는 빈 원고지를 가진 거미 샬롯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글쟁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거미줄의 두 가지 용도, 밥벌이와 창조
웰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 샬롯이듯, 또한 샬롯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웰버다. 웰버가 나타나기 전까지 샬롯이 하는 일이라곤 거미줄을 치고 포획된 먹이에서 피를 빨아먹는 일이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일지는 몰라도 ‘가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농장의 동물들은 그런 샬롯을 두려워하고 역겨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편견 없이 호기심의 눈길을 던져준 것은 웰버. 웰버의 출연은 샬롯의 삶을 바꿔놓는다.

햄이 될 비천한 운명의 소유자 웰버를 위해 샬롯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려 한다. 그 동안 먹고살기 위해만 쓰던 거미줄을 한 생명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다. 샬롯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부합한다. 웰버가 식용이 되지 않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려는 것. 즉 이 샬롯의 선택은 자신이 살아온 ‘그저 먹고사는 삶’의 부정인 동시에, 생산적 가치로만 판단하는 세태와의 전면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네 글쟁이들의 선택과 거기서 오는 딜레마와 맞닥뜨린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려 선택한 길에서 결국 밥벌이라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그래서 글쟁이들도 자기의 거미줄을 그 두 가지 용도로 사용한다. 먹고살기 위해 쓰는 글과 가치창조를 위해 쓰는 글. 샬롯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 두 줄의 거미줄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시대 예술가들의 초상이다.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 기적을 바라지
자음과 모음을 합쳐서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글은 사실 무력해 보인다. 더욱이 글보다는 돈의 가치를 더 맹신하는 사회 속에서는 글 자체도 돈으로 사고 팔 수도 있는 상품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애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만만한 글쟁이들의 초심은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편이 나을 정도로 무력해진다. 샬롯이 하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어두운 밤, 농장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글자를 만든다. 그것으로 저 생산성에만 관심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되돌리겠다는 것. 그것은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녀가 처음 거미줄에 새긴 글자는 ‘Some pig(멋진 돼지)’였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기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구간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은 웰버를 앞에 놓고 연실 셔터를 눌러댄다. 그런 관심으로 웰버의 존재가치가 증명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은 잠시 뿐, 사람들은 무관심해진다. 그래서 이번에는 농장의 동물들이 모여 밤새 회의를 한다. 그래서 나온 글자가 ‘Terrific(굉장하다)’. 그리고 기적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회에 나간 웰버를 위해 마지막으로 ‘Humble(겸손하다)’이란 글자를 새겨 넣는다.

여기서 이 세 단어들이 가진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멋지다’, ‘굉장하다’와 같은 자기 자랑형 문구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것은 ‘겸손하다’와 같은 자신을 낮추는 문구가 아니었을까. 심지어는 ‘겸손’같은 가치마저도 하나의 홍보성 문구로 활용되는 요즘 같은 세태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웰버를 위해 샬롯이 쓴 ‘겸손하다’는 결코 홍보성 문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정성이 담긴 글자였는데 그 증거는 그들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 샬롯이 쓴 문구를 보며 웰버가 말한다. “그런데 내가 저 멋진 표현에 어울리는 지 모르겠어.” 그러자 샬롯이 말한다. “바로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너한테 딱 어울리는 표현이야.”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소원
그런데 이런 샬롯의 노력으로 웰버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웰버의 소원은 겨울까지 살아남아 첫눈을 보는 것. 그러니 그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그런데 그 생존을 막는 요인은 욕망이다. 돼지 한 마리에게는 생존인 것이 그 돼지로 만든 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화이다. 그러기에 여기서 돼지를 그저 진짜 돼지로 읽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돼지와 거미와 동물들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과 동일선상의 가치로서 생명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웰버라는 돼지로 상징되는 비천한 존재와 그를 비천하게도 만들고 특별하게도 만드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생존과 욕망 사이에 서서 한 돼지의 가치를 비천함에서 특별함으로 끌어올리려는 한 거미의 노력은 이 세계의 총체적인 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좀더 섬뜩한 현실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그저 아이들 영화라고 치부할 수 없는 구석이 생긴다. 오히려 ‘샬롯의 거미줄’은 우화라는 아이들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어른들의 세계를 꼬집는 영화라 할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 손잡고 아무 생각 없이 들른 영화관에서 아이가 볼까 숨기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리가 있을까. 그저 글쟁이가 동병상련식으로 느끼는 감정과잉이라 하기엔 뭔가 특별한 것이 이 영화 속에는 있다.(www.ohmynews.com)

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를 달아야 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한류라는 이름 하에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연예인으로 ‘우리나라 문화 알리기’보다는 ‘이웃나라와 친해지기’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제 과거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자체를 알리는 데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서를 통해 흥행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한일전’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비인기종목이라 하더라도 피끓는 감정으로 보던 스포츠경기의 흥행요소와 같다. 김진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이 공조해 일본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할 정도이다. 물론 과거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개봉했다 실패한 ‘한반도’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에만 기대서는 자국에서도 해외에서도(이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상품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한 해 TV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 사극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제작한 이들 드라마를 가지고 한류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반한류의 기류를 형성해 여타의 드라마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작년 한 해 우리가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달아 해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적은 수마저도 이런 기류 속에서 판매부진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류에 포함된 상품논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화상품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민족적 정서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진영씨가 스스로를 “애국자가 아닌 배신자”라 자칭하며 미국에서 음악을 만들 때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며 만든 “흑인음악 속에 한국은 없었다”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한류’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상품’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이다. 즉 ‘한류’에는 그 안에 상품논리가 들어가 있다. 박진영씨의 글은 바로 이 상품에 대한 이야기며, 그 상품이 세워야할 전략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고’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는 절대 해외마켓에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문화컨텐츠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국내의 시장만으로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굳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상품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만일 박진영씨의 글이 이런 해외를 겨냥한 문화상품전략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말 그대로의 ‘국적 없는 문화’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현재 거대자본과 세계적인 유통망과 힘을 가진 소위 선진대중문화의 세계화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싫더라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해외 시장을 노리는 상품의 하나로 한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류 속에 내포된 반한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 한류가 태동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한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러므로 ‘한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들어있으며 그 자체로 ‘반한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류가 세계적으로 흐르고 넘칠 때일수록 우리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품 마케팅으로서는 더 유리하다.

게다가 한류는 특정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문화종사자들이 열심히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다면 그 때부터 컨텐츠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장경제 논리와 마찬가지다. 잘 움직이는 시장에 국가가 손을 대면 경제는 어지러워진다. IMF에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한류라는 냉수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한류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을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들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잉된 한류’이다. 우리 스스로 한류 한류 외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조장된 결과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우리 입으로 한류를 들먹이지 말고 좀더 차분하게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류라는 막연한 태극마크에 기대 안이하게 제작했다 실패하는 사례도 줄어들 것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성에 승부한다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명성은 우리가 떠들고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타인의 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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