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 아닌 원류 선택한 ‘록키 발보아’가 시사하는 것

전 세계적인 배급의 파이프 라인을 갖고 수시로 자국의 영화를 쏟아내는 헐리우드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헐리 갖고 있던 컨텐츠의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화된 시장 속에서 자국만의 색채를 갖는 컨텐츠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헐리우드는 전 세계의 영화에 늘 촉수를 열어두고 다양한 컨텐츠와 소재들을 자국의 살로 만드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으로는 맞는 선택이다. 하지만 영화가 어디 상업적인 요소만 있을까. 영화는 동시에 문화를 담고 있고 그러기에 미국을 대표하는 헐리우드만이 가진 색채가 옅어지는 건 또한 저들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속편이 난무하는 헐리우드 영화들 속에서 원류로 회귀하는 하나의 흐름이 형성되는 이유가 아닐까. 최근 육순의 노익장을 과시하는 실버스타 스탤론의 ‘록키 발보아’는 그 헐리우드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른바 헐리우드를 대표하던 일련의 헐리우드표 대작들은 2편, 3편의 속편들을 쏟아내다가 최근에는 모두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그런 현상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두드러진다. ‘배트맨’은 ‘배트맨 비긴스’로 돌아갔고, ‘수퍼맨’은 ‘수퍼맨 리턴즈’로 돌아왔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다시 처음부터 다시 제작되고 있고, ‘007 시리즈’는 다시 원류인 ‘카지노 로열’로 돌아왔다. ‘록키 발보아’는 물론 나이든 록키의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내용은 ‘록키’ 원류로 돌아간 그대로다.

‘록키’가 실버스타 스탤론의 입지를 마련해준 영화가 된 것은 그것이 단지 헐리우드식 복싱 액션을 담는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을 다룬 영화다. 누구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 기회를 잡아 성공할 수 있다는 이 단순명제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요소다. 영화는 따라서 반 이상이 저자거리를 빈둥빈둥 돌아다니는 록키의 모습에 할애한다. 그런 록키가 링에서의 한판 승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트레이닝에 들어가고, 장중한 음악과 함께 계단을 뛰어오르며 손을 치켜올리는 장면에서 비로소 권투영화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것은 새로 만들어진 ‘록키 발보아’와 똑같은 구조이다. ‘록키 발보아’ 역시 영화의 반을 이제는 퇴역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록키의 생활에 할애한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레스토랑을 찾는 팬들 앞에서 록키는 수없이 무용담을 풀어놓지만 어쩐지 자꾸 퇴물로 취급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아들은 자꾸 ‘과거’에만 집착하는 아버지가 영 안쓰럽다. 즉 영광은 껍데기만 남은 허울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육순을 넘은 실버스타 스탤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언제든 저 링 위에서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록키’에서 젊은 록키가 저자거리에 떠돌던 3류 인생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섰던 것처럼, ‘록키 발보아’의 노익장 록키 역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링 위에 선다. 무엇을 위해서? 반대편에 선 메이슨 딕슨은 록키가 싸우고 있는 대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록키는 과거를 지나간 퇴물로 여기는 젊은이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는 중이다. 링으로 올라갈 때 흘러나오는 강렬한 랩뮤직과 시나트라의 곡이 부딪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록키’와 ‘록키 발보아’의 미덕은 그것이 헐리우드식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영화는 둘 다 승리가 아닌 ‘끝까지 버티는 모습’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더 리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가 애초부터 하려던 이야기는 링 위에 있었던 게 아니라 링 밖에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록키 발보아’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치 비대해졌지만 자국의 문화 컨텐츠를 새롭게 보여주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리메이크하는 경향을 보이는 헐리우드를 닮았다는 점이다. 리메이크는 상업적인 선택이지만 거기에 과거로의 향수가 달라붙으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또한 2탄, 3탄 무한히 이어지는 재탕이 본질(원작의 힘)을 흐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락적인 재미만으로는 ‘그 얘기가 그 얘기’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 본류로 돌아가, “나 아직 건재해”라고 외치는 ‘록키 발보아’ 아니, 헐리우드의 일면에서 재탕 삼탕으로 얻으려는 상업적 선택이 가진 딜레마를 엿보게 된다. 이것은 헐리우드뿐만 아니라 늘 속편으로 유혹 받는 우리네 영화계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미녀는 괴로워’ vs ‘복면달호’

최근 속속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외국 블록버스터들 사이에서 혼자 꿋꿋이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영화, ‘괴로워’. 이 영화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통쾌한 풍자를 다뤘지만 또한 오랜 불황의 늪에 빠진 우리네 가요계의 이면을 들추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또 하나의 영화가 개봉을 준비중이다. 이름하여 ‘복면달호’.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영화는 복면을 쓰고 트로트를 불러야하는 3류 록커에 대한 이야기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가요계의 이면을 다룬 이 두 영화에서 왜 두 주인공은 모두 정체성을 숨겨야했느냐는 점이다. 한 명은 성형으로, 또 한 명은 복면으로.

‘미녀는 괴로워’가 예상 밖의 선전을 한 것은 첫째, 원작에 대한 리메이크에 있어서 현지화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스즈키 유미코가 그린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녀는 괴로워’는 원작과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원작에는 미녀로 변신하기 전의 한나(김아중 분)의 뚱뚱한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모지상주의로 흐르고 있는 우리 사회를 더 강도 높게 비판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요계의 문제가 되어왔던 ‘얼굴 없는 가수’ 혹은 ‘립씽크’ 같은 이야기들이 배치되면서 영화는 원작을 넘어 좀더 우리 현실을 비추게 되었다.

‘복면달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는 이유는 그 상황이 ‘미녀는 괴로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일본의 소설가 사이토 히로시의 ‘엔카의 꽃길’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다루려는 그 내용이 우리네 가요계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록가수가 설  자리가 없는 가요 풍토와 상대적으로 잘 나가는 트로트에 대한 막연한 평가절하가 그것이다. 그러니 가창력 좋은 록가수가 트로트 가수가 되는 이야기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나라 초창기 록그룹의 신화였던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은 후에 트로트 가수로 변신, ‘갈테면 가라지’같은 히트곡을 남기기도 하지 않았던가.

만일 ‘복면달호’가 저 ‘미녀는 괴로워’처럼 원작을 넘어 우리네 정서에 맞춘 리메이크에 성공한다면 그 힘은 바로 저 가요계의 문제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문제 많고 그 문제로 침체된 가요계의 추락이, 오히려 불황기 우리 영화계를 비상하게 만든 소재가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가요계에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소재가 이 두 영화 속에서는 코미디라는 장르로 다루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다행인 것은 이 통쾌한 풍자를 동반한 코미디라는 틀이 문제는 물론이고 해법까지 도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음반시장상황을 이해하게 해주고 가요소비자로서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해주고 있다.

한나나 달호(차태현 분)나 그들이 성형 혹은 복면을 하면서 정체성을 숨기게 된 이유는 알맹이보다 중요해진 껍데기 때문이다. 전영혁씨나 신중현씨 말대로 가수는 노래 잘하면 되는 것이지만 우리네 가요계는 껍데기에 더 치중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잘 생기서 나쁠 건 없지만, 잘 생긴 것만으로 가수가 된다는 건 문제가 된다. 젊은이들에게 폼나고 멋져 보이는 음악 장르로서 R&B나 발라드, 댄스가 나쁠 건 없지만, 오로지 그 장르에만 몰려드는 음반기획은 문제가 된다. 이러한 문제들을 건드렸다는 점이 ‘미녀는 괴로워’ 이후, ‘복면달호’에서 다루어질 우리네 가요계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이유다.

중국식 블록버스터, ‘황후화’의 아쉬움

장예모라는 이름에서 아직까지도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등을 떠올리는 분들이라면 그의 최신작 ‘황후화’는 좀 당혹스러운 영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리라는 배우가 똑같이 등장하지만 그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제작비 450억 원이란 수치가 그렇다. 아무리 ‘영웅’, ‘연인’의 전작을 통해 이 거장의 행보가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블록버스터의 면모를 과시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화려한 장식이 깃든 복식들과 궁궐의 모습에서부터 단박에 시선을 잡아끈 영상의 색채와 스케일은, 천 여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엑스트라들이 동원되어 마치 사람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전투신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중국식 인해전술’이란 생각이 퍼뜩 드는 그 지점부터 장예모 같은 거장이 왜 이런 전술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영화는 무언가를 알리는 다급한 ‘딱딱이(?)’ 소리와 함께 일어나 도열해 옷을 차려입는 수백 명의 궁녀들에서부터 시작한다. 화면의 색채는 붉은 빛이 감도는 노란 황금빛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 틈입하는 인서어트에서 일단의 군대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이 끼어든다. 그 화면의 색채는 푸른 빛이 돌면서 저 황금빛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황금장식을 하는 황후(공리 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이 황금빛 장면은 다시 푸른 빛의 군대 장면과 교차된다. 이 집약된 장면들은 장차 황제(주윤발 분)의 군대와 황후의 군대 사이에서 벌어질 색채의 전쟁을 예감케 한다. 그리고 미로처럼 폐쇄된 궁궐을,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걸어가는 황후의 장면이 이어지면서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공간이 묘한 조화를 만들어낸다. 장예모가 아니면 쉽지 않았을 이 작다면 작은 가족의 치정사가 궁궐이라는 거대한 몸체와 합체되는 순간이다.

영화의 내용은 복잡해도 그것은 한 가족의 틀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거대한 이야기의 메인 스토리를 엮어가는 인물이 황제, 황후, 세 왕자, 황실 주치의와 그 아내 이렇게 총 일곱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계가 복잡해 보이는 건 세 왕자 중 첫째가 배가 다른 소생이며 이 왕자가 황후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황제와 황후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되어 불게되는 궁궐 내의 피 바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거대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들 몇몇 인물의 권력투쟁이 수천 명의 피를 부르는 구조에 있다. “그저 화려했던 과거 중국 봉건문화가 얼마나 허위적인지를 알리고 싶었다”는 장예모 감독의 말을 빌린다면 이 거대한 치정극이 보여주는 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만큼 강한 설득력을 얻는다. 이 영화는 수천 명의 군대가 궁이라는 밀폐된 공간 속에서(평원이나 성이 아니다) 황제와 황후의 명령 하나로 전쟁을 벌이는 영화다. 그만큼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스케일이 풍자와 비판의 선을 넘어선다. 사실 의도가 그 허위 고발에 있었다면 조금은 관객들이 그 거대한 장면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생각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현실을 꼬집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주었어야 했다. 그렇지만 엄청난 스케일의 화려함 속에서 비판의 칼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쿠데타군과 진압군이 궁 안에서 벌이는 전투신에 가서는 색채와 색채의 부딪침 같은 영상미학이 느껴질 정도이다. 아름다운 피 바람이 화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영화는 블록버스터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내에서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권위적인 가장이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가족 코드를 가지고 관객들을 끌어 모은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거대함 속에 비판의식을 매몰시킨다. 그리고 놀랍게도 결국 황제의 권위에 의해 모든 것이 진압되는 상황을 연출하며, 영화를 통해 현실의 모반을 꿈꾸던 관객들에게 오히려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영화가 갑자기 과잉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애초의 목적이 흐려지는 이 마지막 순간에서이다. 그러자 인해전술의 목적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 아닌 좀더 상업적인 목적에 가까워진다. 즉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 모으기 위한(극장에서 봐야 진짜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스케일) ‘헐리우드 블록버스트를 의식한 중국식 블록버스트’라는 마케팅적인 접근이 보이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집단 매스게임을 보는 듯한 스펙터클 속에서 2008 베이징올림픽 총감독직을 맡은 장예모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까.

그러나 역시 거장은 거장이다. 본인 스스로 “외국영화에 잠식되는 중국시장을 위해서라도 상업적인 목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거기에 딱 걸맞는 거대한 스케일의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채 미학, 영상 미학을 담아 넣는 건 거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한 치정극의 틀을 저 만다라의 무늬를 연상케 하는 테이블에 앉힘으로서 무한한 의미의 확장을 가능하게 하는 면모 역시 대단하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장예모의 스케일 작은 영화들이 보여준 커다란 영화(?)세계가 아쉬운 건 왜일까.

어른들 사로잡는 아이들 영화

방학시즌이 되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방학용 영화’들이 한 편 두 편 극장가에 선을 보이고 있다. 으레 방학이면 아이들 손잡고 영화 한 편 보는 게 통과의례처럼 되어 버려 좋던 싫던 시간 내서 영화관을 찾긴 찾아야겠는데, 그게 그렇게 영 내키는 일은 아니다. 아무래도 ‘애들 영화’라는 선입견 때문. 하지만 애들 영화라고 얕보면 안 된다. 별 기대않고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감동 먹은 어른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어른들 마음 사로잡는 아이들 영화, 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빠 왜 울어? 어른 울리는 ‘해피피트’
이 영화를 보기 전 주의사항.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간 끝 부분에 가서 북받쳐 오르는 감동에 “아빠 왜 울어?”하고 아이가 물어보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 펭귄의 세계를 통해 동심으로 만들어진 ‘해피피트’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즐거운 영화일 수 있겠지만, 어른들은 그 깊은 이야기 속에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음치이지만 대신 춤을 잘 추는 멈블은 그 춤이 물고기가 사라지는 재앙을 불러올 것이란 이유로 종족에서 쫓겨난다. 멈블은 그러나 물고기가 사라지는 이유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결국 인간에게 그 환경문제를 알려 펭귄들을 구한다는 이야기다. 얼핏 보면 그저 ‘미운 오리새끼’의 변용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펭귄세계의 종교적 상황과 어찌할 수 없는 미지의 힘에 대한 해석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좀더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담지한다. 이 영화는 대부분의 동물영화들이 그렇듯이 동물을 통한 인간 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만의 미덕은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인간 실존의 질문들을 담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아이들은 탭댄스 추며 노래하는 펭귄에 매료되는 것으로 대만족이지만, 어른들은 생각 못한 수확을 얻게되는 셈. 순수한 아이들의 세상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어갈 것이 많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야생의 맛을 보여주자구, ‘부그와 엘리엇’
‘부그와 엘리엇’은 자칫 직장이나 가정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귀차니스트’ 어른들에게 야생의 맛을 보여줄 영화다. 부그는 산악관리인 베스에 의해 키워진 곰으로 TV와 쿠키를 좋아하고 변기가 없으면 볼 일을 못 볼 정도로 야생과는 거리가 멀다. 어느 날 난폭한 사냥꾼 쇼에게 잡힌 사슴 엘리엇을 부그가 구해주자 엘리엇이 자꾸만 부그를 부추겨 야생으로 끌어낸다. 결국 사고를 친 부그와 엘리엇은 산으로 돌아가게 되고 거친 야생의 맛이 고달픈 부그는 인간세상으로 돌아오려 한다. 그러나 마침 사냥철이 되어 위기에 몰린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인간과 맞서면서 차츰 야성을 찾아간다는 이야기.

조금 결말에 가서 무언가 맥빠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이 ‘인간에게 길들여진 곰’이 야생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울림이 있는 것은 바로 우리네 삶에도 부그가 처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어 동물들이 모두 협심해서 인간들을 혼내주는 장면에 가서는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이나 어른이나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우리네 환경에 속시원한 야생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다.

아버지는 살아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남자는 약하지만 아버지는 강하다. 박물관이 밤이 되면 살아난다는 ‘주만지적인’상상력으로 돌아온 ‘박물관이 살아있다’에는 박제되어버린 우리네 아버지들의 자화상이 숨어 있다. 하는 일마다 실패해 이혼까지 한 래리 댈리(벤 스틸러 분)는 아들에게만은 떳떳하고 싶어 일자리를 찾는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박물관 야간경비원. 그런데 이 박물관 야간경비가 만만찮은 일이다. ‘박물관은 역사가 살아나는 곳이다’라는 경구가 실제 상황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타듯 신나게 박물관 모험 속에 빠지다 보면 슬슬 이 영화가 직업도 없고 입지도 좁아진 우리네 아버지들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들 앞에서 떳떳하게 서는 모습에서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되지만, 그것이 결국 환타지라는 점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평소 아이들에게 주말 잠자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아버지라면, 함께 보는 것으로 서로간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영화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아이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 영화를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너무나 통쾌한 웃음을 웃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현실이 아이들의 순수에서 더 멀리 있다는 걸 안다는 증거이다. 취향따라 만족도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한번쯤 아이들 세계 속으로 푹 빠져보며, 잊고 있던 방학의 기억을 되살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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