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절친노트3', 뭐가 문제일까

원조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자신만의 고유한 맛을 지킬 때 유지된다. '절친노트3'는 '절친노트'라는 원조의 연장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맛은 얼마나 유지되고 있을까. '절친노트3'는 '절친노트'라는 제목을 붙이기가 어색할 정도로 확 달라졌다. '절친노트1'이 주창했던 화해의 맛도 찾기가 어렵고, '절친노트2'의 대결의 맛도 찾기 어렵다. '절친노트3'은 '절친'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기존 여러 가지 원조 토크쇼들의 맛을 조합한 듯한 느낌에 머물고 있다.

초대 손님들을 위해 요리를 만들어내는 '찬란한 식탁'은 과거 이홍렬쇼의 '참참참'을 떠올리게 만든다. 초대 손님들이 음식의 이름을 '유자부인 애썼네' 같이 짓는 형식도 '참참참'에서 시도됐던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홍렬쇼에서는 게스트와 함께 요리를 했지만, '찬란한 식탁'에서는 게스트를 위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요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차별점으로는 '절친노트3'만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신정환이 특유의 깐족개그로 게스트를 당황하게 만들고, 박미선은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게스트를 다시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토크를 구사하지만, 이경규와 김구라의 공백은 어쩔 수 없다. 박미선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신정환과 윤종신이 보조하면서 때로는 자료화면을 통해 게스트의 면면을 보여주면서 웃음을 끄집어내는 질문 형식은 '무릎팍 도사'의 박미선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박미선은 토크 방식이 강호동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 같은 힘을 갖기는 어렵다. 박미선은 오히려 '세바퀴'처럼 게스트들이 많고 그 세대 또한 폭넓을 때 그 균형을 맞춰주는 지점에서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절친노트3'의 후반부에 구성되어 있는 '나이를 넘어 절친'은 형식은 물론이고 구성원들까지 '세바퀴'를 연상케 하지만 그만큼의 힘을 느끼기가 어렵다. 선우용녀, 이계인, 김현철, 김태현은 '세바퀴'에서의 개그방식과 개그감을 똑같이 사용하지만 그 맛은 밋밋하다. 질문을 던지고 공감을 구하는 형식 또한 이미 원조에서 본 맛이기에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절친노트3'는 왜 훌륭한 원조집의 맛을 포기하고 다른 원조집의 맛을 가져다가 버무려놓았을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메인 MC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친노트'는 사실, 김구라와 문희준이라는 두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가 프로그램으로 전화된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이들의 부재는 기존 '절친노트'의 핵심적인 맛을 느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절친노트2'에 등장했던 이경규는 김구라와 문희준이라는 원조집의 맛에 자신만의 강한 대결구도를 넣음으로써 '절친노트' 원조의 맛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절친노트3'는 굳이 '절친노트'라는 제목을 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른 집의 맛을 내고 있다. 실제로 미션이 주어지는 절친노트가 존재하지 않는 '절친노트'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친노트3'의 시청률 하락은 물론 교체된 요리 토크의 주방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방장을 새롭게 기용한 프로그램의 문제가 더 크다. 원조집의 맛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본래 주방장을 쓰던가, 그 주방장 밑에서 그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배워온 인물을 주방에 두는 것이다. '절친노트3'의 문제는 '절친노트'라는 간판을 걸어 그 맛을 기대하게 만들고 전혀 다른 맛을 내고 있는데 있다.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들

2009년에 개봉한 영화 '2012'의 쓰나미는 온 지구를 삼켜버리지만 그 이유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뭐 과학적인 이론이야 그럴싸하지만 과연 그런 지구 종말이, 그저 예언되어진 대로 벌어지는 것일 뿐, 인간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는 심지어 무책임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긴 할리우드에서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재앙 블록버스터에서 윤리적인 측면까지 기대한다는 건 좀 지나쳐 보이기까지 한다. 재앙이 벌어졌으나 거기에 인간의 죄는 묻지 않는 태도,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지지만 먼 거리에서만 바라봐 그 지옥도조차 스펙타클로 여겨지게 만드는 할리우드 CG의 놀라움 앞에서 환경 문제 같은 이야기는 쑥 들어가 버린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 이 작품 역시 무엇이 그런 지구의 종말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이 모든 원인들이 바로 인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종말 이후의 세계 속에 생존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 종말의 원인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파괴된 세계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때론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끔찍한 카니발리즘을 만나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끔찍한 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다. 희망하는 자는 길을 따라 걸어가고, 포기한 자는 길 바깥으로 나가 짐승의 길을 가게 된다. '2012'는 종말의 스펙타클(?)을 보여주지만, '더 로드'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 환경 파괴가 가져오는 그 지옥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 '아바타'는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되고 에너지가 고갈된 지구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 행성인 판도라로 날아간다. 그런데 아직도 인간들은 정신 못 차리고 지구에서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대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터전을 불질러버리는 것. 문명의 바람을 이미 쐰 인간으로서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휠체어 신세로 다리(아마도 기계 다리)를 얻기 위해 이 행성에 들어와 아바타(분신)를 이용해 나비족에게 접근한 제이크 설리(샘 웨딩턴). 그러나 그는 점점 나비족에게, 아니 이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 빠져든다. 결국 이 판도라 행성을 지키는 제이크 설리의 이야기는 바로 파괴되지 않았던 시절, 자연과 인간이 영적으로 소통하던 옛 시절의 지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담는다. 판도라 행성을 구해낸 제이크 설리가 기계 다리를 포기하고 주술이 살아있는 자연의 품에서 새 몸을 얻는 장면은,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의 도피, 즉 가상이지만 낙원으로 영원히 접속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에서 '아바타'의 잔영이 보이는 것은 그 판도라 행성의 살아있는 자연이 아마존의 밀림을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고, 대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 원주민들의 터전을 불 지르는 인간의 이야기가 바로 이 곳 아마존에서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눈물'의 시선은 '아바타'에서의 제이크 설리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마존 밀림 속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차츰 이해해가는 그 과정에서 저 한 편에서 밀림을 향해 다가오는 기계음을 듣게 되는 식이다. '북극의 눈물'에서 카메라가,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북극곰에 머무르는 것으로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잡아냈던 것처럼, '아마존의 눈물'에서 카메라는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삶을 따라가며 지구의 이야기를 건넨다. 물론 '아마존의 눈물'에는 파괴되어 가는 '지구의 허파'를 위해 싸우는 제이크 설리 같은 돈키호테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 곳에 들어가 그 실상을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대비시켜 담아온 그들이 바로 환경 파괴에 맞서는 첫 발을 내디디는 제이크 설리가 될 것이다.

올 겨울, 전 세계는 이상기온으로 들썩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때 아닌 폭설에 한파가 몰아닥쳤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호주에는 난데없는 열대야로 펄펄 끓고 있다.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는 어쩌면 이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문명의 평온한 만큼 앞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보는 시선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2012'의 무책임한 태도로 바라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로드'의 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바라봐야 하는 현실로 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아바타'가 그리는 막연한 야생과 자연에의 향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아마존의 눈물'처럼 그네들의 불행이 우리의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우리 각자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화는 때로는 이야기와 꿈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붕킥'의 황정음과 신세경

술에 만취해 한 여인은 끊임없이 웃고, 한 여인은 끊임없이 울어댄다. 웃는 여인은 신세경이고 우는 여인은 황정음. '지붕 뚫고 하이킥'의 핵심적인 두 캐릭터들이다. 그런데 왜 똑같은 술을 먹고 신세경은 웃고 황정음은 우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 시트콤이 가진 독특한 재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알다시피 술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물건이다. 평상시에 억눌렸던 감정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는 이 술을 통해서 웃고 있는 신세경과 울고 있는 황정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는 시트콤 속에서 우울한 상황에 놓여진 존재로서 그려진다. 아버지가 부재중인 상황에 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이순재네 집에서 식모로 살아가는 처지. 그러니 웃을 일이 뭐가 있을까.

한편 황정음은 신세경과 비교해 늘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실제 속은 역시 그다지 좋지만은 않다. 서운대 출신이라는 서러움과 돈이 없어 남자친구에게 늘 얻어먹는다는 자괴감 속에서도 늘 고개를 빳빳이 들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녀의 당당함 속에는 숨겨진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슬픔이 있다. 그러고 보면 황정음이나 신세경은 내면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에 서 있다고 보여진다. 다만 그 힘겨움의 강도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황정음의 슬픔과 신세경의 슬픔을 다루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시각이 다르다. 황정음은 슬픔을 웃음으로 전화시킨다. 그녀가 떡실신녀가 되고, 서운대라는 사실 때문에 버스의 서운대 광고에 들어간 자신의 얼굴에 낙서를 해대는 상황은 그녀에게는 고통의 순간이지만 그것이 시트콤의 과장된 연출과 연결될 때, 보는 이들은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삐에로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을 터뜨리게 하듯이.

반면 신세경은 슬픔을 슬픔 그대로 그려낸다. 이것은 시트콤의 시각이 아니라 정극의 시각이다. 물론 이 '지붕 뚫고 하이킥'의 본질은 시트콤이기 때문에 신세경을 다루는 시각이 모두 정극의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다른 어느 캐릭터들보다도 진지한 편이다. 따라서 신세경의 캐릭터는 시트콤과 정극을 오간다. 동생을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는 신세경이 우스우면서도 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 여타의 시트콤들과 달리 웃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감동까지 선사하는 것은 황정음과 신세경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극적으로 보여지듯이, 시트콤의 시각과 정극의 시각을 절묘하게 넘나드는 그 자유자재의 연출력이 대중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웃음은 이 시트콤의 재미를 극대화시켜주고, 감동은 거기에 어떤 의미까지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이 두 코드는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마지막으로 황정음과 신세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붕 뚫고 하이킥'만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을 주기도 하고, 그들이 울 때 웃음을 주기도 하는 그 반어법 같은 이 시트콤만의 쿨한 자세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닐 때, 보는 이들은 그 웃음의 과장됨과 눈물의 질척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또한 웃음과 감동의 강도도 세진다. 거꾸로 말해 웃기기 위해 웃기는 것과 울리기 위해 울리는 것은 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즉 이런 상반된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세련되게 웃음과 감동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음과 신세경이 보석 같은 캐릭터인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두 캐릭터는 실로 시청자들이 이 시트콤을 보며 웃고 울게 되는 그 핵심적인 재미를 만들어내는 장본인들이다. 이렇게 잘 운용된 시트콤의 캐릭터는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이미지까지 제고시킨다. 황정음과 신세경의 주가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은 이 시트콤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연기자들에게도 잘 만들어진 시트콤은 기회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떤 정극도 해내지 못한 매력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니 말이다.

'제중원, '공부의 신', '파스타'가 그리는 세 가지 성공

'제중원'의 황정(박용우)은 그 신분이 백정이다. 하지만 그가 쥐고자 하는 건 소 잡는 칼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칼이다. 백정에서 의사가 되고자하는 그 지난하고도 먼 길. 신분의 벽을 넘어야 하고,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야 하고, 서양의학이라는 벽을 넘어서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 멀고도 험한 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 바로 '제중원'이다.

한계를 넘어 성장해나가는 황정이라는 인물. 이 드라마틱한 성장드라마에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그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극 중에도 언급되지만 본래 서양의사들의 시작은 칼을 잘 다루는(?) 이발사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아직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인 구한말의 상황에 서양의 이발사와 비슷한 조건을 갖춘 직종은 백정이다. 칼을 잘 다루고, 바느질도 잘 하는 데다, 무엇보다 생명에 칼을 댈 수 있는 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적 의료교육기관이었던 제중원이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을 때, 박서양이라는 인물이 백정의 아들로 들어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일곱 명 중의 한 명으로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근대의 격동기에 백정의 아들에서 의사라는 길까지 걸어간 박서양이라는 인물의 성장 이야기가 '제중원'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공부의 신'은 대한민국 평균 이하의 학교인 병문고의 오합지졸 학생들이 최고의 명문이라는 천하대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백현(유승호)은 부모 없이 할머니와 함께 집마저 쫓겨나게 된 상황이지만 강석호(김수로)의 도움으로 천하대 특별반에 들어와 공부를 하게 된다. 풀입(고아성)은 작은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어머니 때문에 괴로워하고, 찬두(이현우)는 춤과 노래에 빠져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다. 봉구(이찬호)는 부모의 방임으로 스스로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도 잘 모른 채 살아간다.

이 학생들이 꾸는 꿈은 지독하게도 현실적이다. 이 드라마는 굳이 '꿈을 꾸라'는 식의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대신, '천하대에 들어가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바로 이 점은 우리 시대의 성장에 대한 양면적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 천하대라는 특정 일류대에 가는 것이 현실적인 성장이 되는 사회, 하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성장(자신의 꿈을 펼쳐나가는)은 잠시 보류되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저게 현실이야"하고 긍정하다가도, "그래도 저건 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건 바로 이 성장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파스타'는 파스타 요리사가 되기 위한 서유경(공효진)의 성장드라마다. 그녀는 3년이나 이태리 음식점 라스페라에서 보조로 일해오지만 드디어 프라이팬을 잡게 된 순간, 새로운 쉐프 최현욱(이선균)에 의해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최현욱은 "자신의 주방에 여자는 없다"고 외치는 인물. 그러니 이 성장드라마에서 서유경의 장벽은 바로 최현욱이다.

그런데 이 최현욱이라는 버럭남은 묘한 매력을 갖는다. 따라서 서유경이 요리사라는 직업으로서 성장해나가기 위해서 최현욱은 부딪치고 깨지고 넘어서야 할 인물이지만, 그저 한 여성으로서 멜로적인 판타지를 갖게도 하는 인물이다. 서유경의 성장드라마와 그녀의 최현욱과의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잘 어울리는 레시피처럼 드라마 속에서 녹아든다. 직업적 성취와 사랑의 쟁취를 성장의 두 축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파스타'라는 드라마는 맛을 낸다.

신년 벽두부터, 이처럼 드라마들은 모두 성장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은 구한말이라는 과거의 시제로 날아가기도 하고, 지금 이 땅의 교육현실로 돌아오기도 하며, 라스페라라는 자그마한 조리실 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 꿈을 꾸는 이들이 모두 백정, 열등생, 주방보조라는 측면은 이 사회의 낮은 자들의 감성을 건드린다. 그리고 그들을 꿈꾸게 한다. 이것이 성장드라마가 현실과 연결되는 지점이다. 현실이 갑갑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꿈을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현실이 그만큼 꿈꾸기 어렵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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