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 메이드 사극, ‘황진이’

KBS 수목드라마 ‘황진이’가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총 24부작에 이제 3부만을 남겨놓은 ‘황진이’. 그런데 왠지 그 24부작이 짧게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그렇다고 조금 시청률이 된다는 드라마들이 으레 해버리는 연장방영이 아쉽다는 말은 아니다. 24부작이 짧다는 것은 저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이 올해의 좋은 드라마로 뽑았던 ‘연애시대’에서 보았던 ‘웰 메이드 드라마’의 징후를 ‘황진이’에서 보기 때문이다.

사극의 핵심은 아무래도 그 대결구도에 있다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신화와 설화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영웅이 되는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이 걸어갈 길에 고난이 자리잡는데, 그것을 드라마적으로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자가 있어 대결구도를 이루기 때문이다. ‘황진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처음 황진이는 주변에 적이 산재해 있다 할 정도로 많았다. 매향(김보연 분)과 부용(왕빛나 분)은 물론이고, 벽계수(류태준 분), 심지어는 스승인 백무(김영애 분)까지 적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황진이’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 대결구도가 지향하는 바가 그들 개인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백무의 죽음을 통해 황진이는 스승과 화해하고, 또한 그 죽음은 매향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 김정한(김재원 분)의 죽음을 막아보려는 황진이의 노력 속에서 이제는 부용과 벽계수까지 조금씩 얼었던 마음이 녹게된다. 대부분의 사극들이 권선징악의 구도로 적의 패배를 그 끝으로 여기지만, ‘황진이’의 끝은 이렇듯 굴복이 아닌 화해이다. 황진이가 이러한 인물들의 화해를 통해 결국 싸우려는 것은 조선시대 예인, 기녀에 대한 편견과 핍박이다. 그것은 마음의 전쟁을 통해 벌어진다는 점에서, 황진이라는 마음 수도자에게는 해볼만한 대결이 되었다.

드라마의 본질이, 이 마음들이 부딪쳐 일어나는 갈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황진이’에서 보여주는 마음싸움은 볼만해진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황진이가 벽계수를 찾아가 김정한을 살리는 것이 진정한 복수가 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황진이는 저 밖에서 벽계수를 격동시키고, 부용의 애틋한 마음을 빌어 김정한에게 자신의 처소를 알려주었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싸움의 문제다. 마음 줄이 가는 길을 유도하여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면 유치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황진이’의 드라마가 남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황진이’가 ‘웰 메이드 사극’으로 불릴만한 것은 비로소 사극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의 의복과 배경, 이야기를 담으면 사극이라 했던 것에서, ‘황진이’는 미려한 미장센으로 포착된 전통의 미와, 우리네 자연적 배경의 아름다움(백무가 마지막 학춤을 추던 벼랑끝 같은)에, 울긋불긋 피어난 꽃처럼 도드라진 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사극에서 우리 식의 미를 찾아내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여전히 ‘황진이’에 남는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이 잘 만들어진 드라마가 이제 막 시작을 하려는 지점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황진이가 탄생되는 과정이지 황진이의 본격적인 행보라 하기엔 어딘지 아쉬운 구석이 있다. 춤과 시, 그리고 음악에 출중했던 예인으로서, 또 인간의 길을 알고자 했던 구도자로서 황진이의 진짜 모습을 잡아내려 했다면 지금부터가 그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어야 했다.

아마도 보다 드라마틱하게 ‘황진이’의 모습을 그리려다 보니 초기의 성장에 너무 힘이 집중되었던 것은 아닐까. 황진이의 인간적 조명보다 사랑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24부작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자꾸 시즌2를 기대하게 되는 것은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에 덧댄 인간적 모습이 그립기 때문이다.

아무 기대 없이 영화관을 찾았던 분들이라면 이 ‘개그콘서트 같은 영화’에 푹 빠져서 배꼽 빠지게 웃다가 눈물을 흘릴 지도 모른다. TV시트콤으로 봤던 사람이라면 영화 속에서 좀더 자유로운 상상을 즐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대 블록버스터의 숫자놀음에 질렸던 관객이라면 이 조촐한 잔치에서 풍성한 대접을 받은 기분을 느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에 옆구리나 주머니가 허전한 사람이라면 단돈 몇 천 원으로 큰 위안을 받을 지도 모른다. 소박하지만 풍성함을 주는 영화, ‘올드미스다이어리(이하 올미다)’다.

솔로종합선물세트가족이 주는 개콘식 웃음
영화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최미자(예지원 분)의 꿈으로 시작한다. 꿈속에서 뭔들 못할까마는 그녀는 꿈속에서조차 비행기가 추락하고 벼락을 맞는다. 하지만 그녀의 현실은 이것보다 더 암울하다. 바로 ‘노처녀에 백수’. ‘너무 자서 허리가 아픈’ 그녀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으니 함께 사는 가족들. 그런데 이 가족들 역시 범상치 않다.

노년에 홀로 남은 할머니 세 자매에, 역시 홀로된 아버지, 게다가 노총각 외삼촌까지 줄줄이 짝 없는 화투패 신세다. 이 ‘솔로종합선물세트가족’은 마치 저 개콘 가족들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같이 부족해 보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들. 굳이 김석윤 감독이 개그콘서트의 연출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영화는 최미자를 중심으로 드라마를 엮어가기보다는 이들 각자의 개콘식 에피소드로 엮어진다.

개그콘서트에서 가끔 한 코너의 아이콘이 다른 코너에 이입되면서 웃음을 만드는 것처럼, ‘올미다’도 세 할머니 자매(영옥, 승현, 혜옥)의 이야기와 소심남인 노총각 외삼촌(우현)의 은행 에피소드, 그리고 최미자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그려지지만 그 이야기는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 상황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관계가 중요한데 세 할머니 자매의 상황과 최미자의 상황이 유사하다는 것은 나이로 구획되어지는 연애담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사랑이라는 보다 큰 주제로 영화를 확장시킨다. 또한 우현과 최미자의 상황 역시 사회적 약자로서 유사한 상황을 그려내면서 영화는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포함시킨다. 결과적으로 노처녀 원맨쇼에 머물 수 있었던 소재를, 개콘식 솔로 가족들로 줄줄이 사탕 엮어내자, 영화는 단순한 ‘노처녀 연애 성공기’를 넘어서 진한 페이소스를 갖는 블랙코미디로 나아간다.

정작 웃기는 사람은 슬프다
영화 내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은 그러나 점점 진행될수록 그 웃기는 자의 심정 속으로 빠져들면서 알 수 없는 애잔함을 갖게 만든다. 이것은 마치 무대 위에 올랐을 때 그저 당연히 웃음을 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던 개콘 식구들이 가끔 저 무대 뒤의 진솔한 모습을 보였을 때 느껴지는 슬픔 같은 것이다.

그 슬픔의 근원은 바로 저 ‘블랙코미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확장시킨 이야기 속에는 이 시대 소외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 숨겨져 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가만두지 않느냐”는 원망과 “그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최미자의 절규를 들었을 때, 우리는 영화 내내 우리를 웃겼던 그 장면들이 사실은 꽤나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분들을 위한 한 편의 백일몽이다. 시작부터 꿈을 꾸는 최미자는, 무언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만이라도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을 꿈꾸게 하는 마력이 있다. 따라서 영화가 환타지라도 그것은 꿈이 간절한 사람들을 위해 용서받는다. 정작 현실에서 그들은 저 무대 위의 개콘 가족처럼 슬픔이 있어도 겉으로는 웃지 않았던가. 이 영화를 보고 진정으로 실컷 웃다가 눈물이 나왔다면, 영화가 말하듯 당신은 진정한 행복을 꿈꿀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이 영화에서 최미자 역을 해낸 예지원은 연기자로서 망가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마치 저 개콘의 마빡이처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들
올해는 사극은 약진하고 현대극들은 주춤했던 한 해였다. 처음에는 월화 드라마를 ‘주몽’이 잠식하더니, 주말 드라마에 ‘연개소문’과 ‘대조영’이 포진하고, 수목 드라마마저 ‘황진이’가 장악하면서 현대극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과거 형태의 구태의연한 답습을 거듭하는 트렌디 드라마는 더더욱 살아남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꿋꿋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있다.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특별한 시도와 보다 높은 완성도를 무기로 이들은 우리네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포스트 트렌디 드라마’의 징후를 읽게 해준 그 드라마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웰 메이드 드라마, ‘연애시대’
‘연애시대’가 끝난 지 꽤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금단증상을 이야기한다. ‘연애시대’를 축으로 그 이전의 드라마가 있고, 그 이후의 드라마가 있다고 할 정도로, 스토리면 스토리, 연기면 연기, 연출이면 연출 어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이 드라마로 인해 여타의 드라마들이 어딘지 시시해 보인다는 것. 영화인들이 참여해 만들어낸 이 드라마는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 사전제작에 대한 논의가 일어날 정도로 완성도를 높였다. 감우성, 손예진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주연만큼 빛났던 공형진, 이하나는 물론이고 김갑수, 서태화, 오윤아, 문정희까지 어느 조연하나 뺄 수 없이 드라마의 독특한 감미료가 되어주었다. 이러한 연기자들의 호연을 바탕으로 악역이 없는 대신 내적 갈등을 만들어 상황을 관조하게 하는 설정과, 충분한 공감을 일으키면서도 도발적인 ‘이혼 후 시작된 연애’라는 소재,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는 연출력이 잘 어우러졌다. 이로써 ‘연애시대’는 지금까지 드라마가 해온 그 이상을 만들어내며 ‘웰 메이드 드라마’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내러티브의 실험, ‘굿바이 솔로’
최근 들어 종종 볼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로서 다중스토리 구조를 들 수 있다. 하나 혹은 둘의 주인공 캐릭터가 나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전통적인 스토리 구조가 아닌 여러 인물들이 똑같은 비중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어떤 울림을 만들어가는 내러티브 방식이다. ‘러브 액추얼리’와 ‘숏컷’ 그리고 ‘크래쉬’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현상을 목도한 적이 있다. 노희경 작가가 ‘굿바이 솔로’를 통해 무려 10여 명에 달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드라마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 스토리 구조가 역부족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해체된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은 이들 캐릭터들은 하나둘 카메라 속으로 모여들어 유사가족을 만들어낸다.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인물들은 서로 아파서 부둥켜안으면서 상처를 핥아준다. 노희경 작가는 이들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어우러짐을 주관 개입을 극도로 절제하면서 카메라 속에 넣는데 성공함으로써 이 시대 가족드라마(가족보다 이웃이 낫다)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었다.

드라마에 대한 만화적 접근, ‘환상의 커플’
만화적 감수성이 하나의 장르적 틀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 드라마가 ‘환상의 커플’이다. 원작만화를 드라마화한 게 아니지만 만화만큼 재미있는 ‘환상의 커플’의 성공요인은 ‘만화 같은 이야기’가 더 이상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말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라던가, 완성도가 떨어진다던가 하는 의미가 아니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그것은 상상력과 캐릭터가 독특하며, 이야기 진행이 유쾌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진지성이 있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만화적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낸 한예슬은 수많은 유행어를 남길 만큼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코믹 드라마는 기존 트렌디 드라마들의 상투적인 진지함을 벗어나 만화적 편안함과 유쾌함을 만들어주었다.

남자의 눈물을 보여준 ‘투명인간 최장수’
이른바 ‘남성신파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극중에서 남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남녀의 사회적 위상이 반영된 결과. 드라마를 보는 주 시청자는 여성이지만 그들은 더 이상 우는 여성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의 현상처럼 나타난 것이 남자의 눈물이다. ‘투명인간 최장수’는 이 시대에 가족에게 있어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가장의 이야기. 알츠하이머에 걸린 최장수를 통해 가족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고싶은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냈다. 이 사나이 울리는 신파 드라마는 그러나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물에 오른 유오성으로 인해 아버지의 초상을 제대로 그려낸 신파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드라마 시청층의 가능성을 보여준 드라마이다.

장르의 폭을 넓힌 ‘돌아와요 순애씨’
‘투명인간 최장수’의 정반대편에 선 ‘돌아와요 순애씨’는 아줌마들의 웃음을 공략하며 인기를 끌었다. 이 40대 아줌마와 20대 처녀의 영혼이 바뀐다는 황당한 설정의 드라마는 그러나 그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 아줌마들의 감성을 매료시켰다. 시트콤에나 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설정이 수목드라마에서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소구한 것은 장르적으로 선택한 코미디에 진한 페이소스를 달아놓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여자들의 연대에서부터, 생활력에서부터 만들어진 아줌마 속성에 대한 웃지 못할 풍자, 젊은 여자에 대해 갖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등등 남녀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다룬다. 40대 아줌마에서 20대 처녀로 탈바꿈한 순애씨의 거침없는 비판과, 욕망의 분출은 TV 앞에 앉은 수많은 우리 시대의 아줌마들에게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진지함이 시청자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라마다.

상큼발랄 아줌마 트렌디, ‘발칙한 여자들’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아줌마들이란 ‘불륜’과 ‘신파’를 오가며 살아왔다. 하지만 ‘발칙한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끈적임 없는 상큼 발랄 경쾌한 세상이다. 과거 아줌마 이미지에서 기름기와 물기를 쪽 빼내 비로소 ‘여자’를 보기 시작한 드라마, 바로 ‘발칙한 여자들’이다. 이 질척하지 않은 발칙한 여자의 복수극이 상큼했던 것은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경제적으로도 독립했고,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아줌마’ 캐릭터로부터 가능해진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자격이 갖춰진 셈이다. 이로써 ‘발칙한 여자들’은 ‘아줌마의 사랑 = 불륜’이라는 악의적인 등식을 깨고 당당한 ‘중년여성의 사랑’을 보여준 드라마다.

사회적 편견과 맞선 진짜 트렌디, ‘여우야 뭐하니’
‘여우야 뭐하니’는 과거와는 달라진 사랑방정식으로 보여준 트렌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먼저 재벌집 아들도 아니고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자도 아닌 보통 남녀의 사랑으로 선회한다. 이 밋밋해 보이는 설정에 드라마성을 가미해주는 것은 최근의 결혼풍속도라 할 수 있는 연상연하 커플. 나이와 나이에 따른 현실 등이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편견과 맞선 트렌디라 할만하다. 결국 사랑이야기에, 그 사랑에서 선택해야할 것이 현실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드라마이지만 요즘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낸 진짜 ‘트렌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그 밖의 다양한 시도들
이밖에도 저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가능성을 읽게 해주었던 ‘인생이여 고마워요’, 금요드라마는 불륜드라마라는 공식을 깬 ‘내 사랑 못난이’, 공백을 메꾸려 채워졌지만 호평을 받으며 사회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내 인생의 스페셜’, 최근 아직 종영하지 않았지만 불륜과 불치에 대한 새로운 공식을 써나가는 ‘90일 사랑할 시간’ 등등 열거하지 못한 많은 트렌디 드라마들의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주6일사극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인해 더 치열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시청률은 저 사극들의 빛에 가려졌지만, 보다 완성도를 높이려는 시도를 한 몇몇 드라마들이 있어 트렌디를 뛰어넘는 포스트 트렌디를 기대하게 만든다.

작년에 이어 올 한해도 그 화두는 역시 ‘몸’이었다. ‘얼짱’에서부터 ‘몸짱’으로 넘어온 신드롬은 올초에는 ‘동안’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을 성형과 몸 만들기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심지어는 ‘생얼’이라는 극단적 하드코어 뷰티(나 벗어도 이렇게 아름다워요!)까지 유행하면서 이제 외모지상주의는 극단적인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보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는데 일거양득이지, 뭐가 문제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런데 왠지 기분이 나쁜 건, 보기 좋고 건강 좋은 몸에 자꾸 가격이 매겨지는 느낌 때문이다. 이른바 말 그대로의 ‘몸값’, ‘꼴값’하는 세상에 사는 기분 때문이다. ‘미녀는 괴로워’는 그 상품화가 가장 첨예하게 벌어지는 연예계를 소재로 이 사회에 만연한 ‘몸 신드롬’을 유쾌하게 뒤집어놓는다.

얼굴 없는, 혹은 얼굴만 있는
공포영화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얼굴 없는 가수, 한나(김아중 분)가 얼굴만 있는 가수, 아미의 입을 대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69cm의 키에 95kg의 몸무게를 가진 한나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그 거대한 몸을 숨기며 살아가는 존재. 반면 노래를 못하나 완벽한 S라인의 몸매와 외모를 가진 아미는 ‘몸만’ 드러내놓고 사는 존재다. 이 둘의 물리적인 조합은 저 공포영화에서나 가능할 이야기지만, 연예비즈니스에서 이 두 존재는 하나의 ‘상품’이라는 틀 속에서 자연스럽게 엮어진다. 그들이 둘다 상품으로서 기능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정체성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순간 상품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이 사모하던 상준의 말에 상처를 받고 한나가 사라지는 순간, 아미라는 상품도 사라지는 것이다.

인생 180도로 바꾸어 주는 환상의 몸
재미있는 건 몸을 상품화하는 사회가 한나에게 고통을 주는 장면들을 보면서 관객들이 그녀에게 거는 변신의 기대다. 관객들은 그녀의 변신 역시 몸을 상품화하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변신했을 때의 달라진 반응을 기대한다. 보상심리다. 너희들의 몸에 대한 매혹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걸 보고 싶은 것이다. 한나라는 무거운 몸이 제니가 되었을 때, 그녀의 과장된 몸짓에 거리의 이목이 집중되고, 자장면 범벅이 되어도 아름다운 모습에 사람들은 어떤 보상심리를 갖게된다. 심지어 교통사고를 내고도 피해당사자나 경찰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 이 사회에 고소함을 느끼고, 자신을 거대한 몸이 아닌 아름다운 몸으로 바라보는 상준(주진모 분)의 눈길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인생을 한 순간에 180도 바꾸어주는 이 환상적인 몸의 변신에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하지만 살 떨리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
그러나 부작용은 있다. 그것은 거구의 한나가 얼굴 없는 시절, 얼굴만 있는 아미에게 목소리를 주면서 자신의 몸을 숨겼던 것처럼, S라인 쭉쭉빵빵으로 변신한 한나 역시, 제니라는 가상의 인물 뒤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다는 것. 여기에 연예 비즈니스가 맞물리고 상품의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제니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얼굴만 있는 아미와 하나 다를 게 없다는 것. 영화는 이렇게 완벽몸매로 변신한 한나의 잘라낸 살 찾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살들을 맞대며 추억을 만들어온 친구와 부모를 되찾는다. 저 공포영화는 아니지만 분리되었던 몸과 이름은 이제 제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정말 현실에서도 그럴까하는 의심이 들지만, 어쩌랴 이건 로맨틱 코미디이니,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갈 관객들에게 순간적이나마 행복감을 주는데 만족할밖에.

영화는 포스터가 주는 이야기가 전부이지만 가히 ‘살 연기’라고 해도 괜찮을, 육중한 살의 무거움과 군더더기 없는 살의 가벼움을 잘 표현해낸 김아중의 호연과 ‘무사’이후 오랜만에 보여준 주진모의 존재감 있는 연기,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의 맛을 살려준 성동일, 임현식, 박휘순, 이범수, 김용건, 이원종 등의 출연으로 유쾌함을 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단순한 이야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은 지긋지긋하게 우리의 귓전에 눌러앉았던 저 ‘몸 신드롬’이란 거구가 아니었을까. 이 거구야말로 수술대 위에 올려 슬림하게 S라인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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