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해요 캡틴', 억지와 우연의 남발

'부탁해요 캡틴'(사진출처:SBS)

이런 관계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부탁해요 캡틴'의 김윤성(지진희)과 한다진(구혜선)은 같은 비행기를 타는 기장과 부조종사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너무나 우연적이다. 한다진의 아버지가 기장이었을 때 김윤성이 부조종사로 비행기를 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은 이게 다가 아니다. 마침 한다진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가 임신한 무거운 몸을 이끌고 탄 비행기가 하필이면 한다진의 아버지와 김윤성이 조종하는 비행기였고, 하필이면 그 날 또 처음으로 조종관을 잡은 김윤성이 실수를 저질러 비행기가 몹시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또 마침 그 때 한다진의 어머니가 화장실에 있다가 배를 부딪쳐 하혈을 하게 되고 그래서 비행기에서 아이를 낳고는 죽게 된다.

이 정도면 작품에서 '신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신이 이들을 하나의 체스판 말처럼 이리저리 옮겨놓고 엮어놓는 듯한 과도한 설정이 너무 노골적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 비행기에는 스튜어디스가 되어 (마침) 첫 비행을 하는 최지원(유선)이 타고 있었는데 하혈하며 쓰러진 한다진의 어머니의 죽음이,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그녀의 책임처럼 되어 있다. 첫 비행을 하는 스튜어디스에게 이런 중차대한 일의 책임을 묻게 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 설정일까. 그런데 또 이 최지원은 당시 김윤성의 애인이었다. 이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헤어지게 되지만. 결국 이 비행기에는 이 드라마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타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들은 또 세월이 흐른 뒤 모두 같은 항공사에서 만난다. 한 명은 기장으로 한 명은 부조종사로 또 한 명은 스튜어디스로. 제 아무리 드라마가 현실이 아니라고는 해도 이런 관계는 너무나 작위적이다. 이러한 억지와 우연의 남발은 이 드라마 곳곳에서 보여진다. 타워관제사인 강동수(이천희)와 한다진이 처음 만나 서로 부딪치는 장면 역시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설정으로 이뤄져 있다. 비행기의 착륙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때문에 착륙을 서두르는 한다진과 비행장 사정으로 이를 허락하지 않는 강동수의 대립이 지나치게 과장되게 만들어지고, 마침 누군가 커피를 엎질러 관제탑 시스템이 마비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일어난다. 누가 봐도 강동수와 한다진의 관계를 만들어내려는 억지 설정이다.

이밖에도 김윤성과 윙스에어 부사장인 홍인태(최일화) 그리고 그의 딸인 같은 회사 상무이사 홍미주(클라라)의 관계 역시 너무 우연적이다. 김윤성은 어린 시절 홍인태에게 입양되어 홍미주와 함께 자랐는데, 어느 날 벌어진 화재에서 홍미주를 구해냈지만 그 사건 때문에 홍인태에게 파양 당한다. 그런 중차대한 사건을 겪은 인물들이 다름 아닌 윙스에어란 회사에서 한 자리에 만나 서로 대립관계를 갖게 된 것. 이 정도면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신의 장난'인 셈이다.

도대체 왜 이런 억지스러운 우연의 남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걸까. 당연한 일이지만 어떻게든 관계를 엮어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과잉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심자들이나 할 법한 개연성 없는 상황과 관계 엮기는 결국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조종되는 인형처럼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입양된 아들을 찾아가는 승객을 도와주는 한다진과 김윤성의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도 현실성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결국 김윤성의 파양의 기억과 연결고리를 맺으려는 의도라는 게 너무나 드러나는 스토리 설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기력 논란을 겪고 있는 구혜선의 문제는 이러한 억지스러운 스토리에 의해 몰입되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가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항공드라마는 그 소재만 두고 보면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즉 공항, 비행기, 기내, 그리고 해외의 풍광들까지 항공드라마는 스펙터클의 유혹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사고 장면 하나만 제대로 그려내도 항공드라마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볼거리가 제공된다. 하지만 제아무리 스펙터클이 시청자의 눈을 유혹한다고 해도 결국 드라마는 디테일한 사건들과 공감 가는 캐릭터들이 관계를 이뤄가며 만들어가는 것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의 클리쉐에 이력이 난 시청자들이라면 "이게 뭐냐-"고 말할 법한 드라마, '부탁해요 캡틴'. 제발 제대로 된 드라마를 볼 수 있기를 부탁한다.


'빛과 그림자'와 역사 속 실제인물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이 드라마는 특정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으며 당시 시대상을 배경으로 창작되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시작 전에 이런 자막을 내보내는 경우가 있다. '빛과 그림자'도 그런 드라마 중 하나다. 특정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 인물과 겹쳐져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자막을 내보내도 드라마 속 인물들이 역사 속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래서 자막을 굳이 붙이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빛과 그림자' 같은 시대극은 이 가상의 캐릭터와 실제인물을 맞춰보는 재미 역시 쏠쏠한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빛과 그림자'는 현대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했던(물론 실제로는 암울한 역사였지만)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을 다루고 있다. 워낙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이 시절을 다룬 드라마가 꽤 있었지만 '빛과 그림자'는 이 시절을 영화사, 가요사 같은 대중문화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드라마에 전면으로 '각하'가 등장하진 않지만 '각하'의 존재감은 이 드라마의 기본전제가 된다. 장철환(전광렬)이나 김부장(김병기)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드라마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근거는 바로 이 '각하'에 대한 충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특정인물과 상관없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렁대는 장철환과 김부장에서 차지철과 김재규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그만큼 당대의 권력자들인데다 그 팽팽한 대립이 결국 궁정동의 총성으로까지 이어진 시대의 인물들이 아닌가. 각하를 두고 벌어지는 비서실과 중정의 대립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기본 얼개가 되어 있다. 그 밑으로 장철환의 비호를 받는 조명국(이종원)이 있고, 김부장이 밀어주는 빅토리아 클럽의 손미진(이휘향)이 있으며, 또 조명국 밑으로 세븐스타쇼단의 노상택(안길강)과 빛나라쇼단의 강기태(안재욱)가 서 있다. 위로는 정치권력의 대립이 있고 그 밑으로 딴따라로 비하되던 쇼단 연예인들의 대결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차지철과 김재규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궁정동에서 벌어진 '그 때 그 사람'의 실제 사건을 예감하게 만든다. 과연 누가 누군가에게 총을 쏠 것인가와 그 자리에 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다. 알다시피 당시 자리에 각하와 이들 권력자들, 그리고 연예인들이 함께 있는 이 그림은 다분히 정치와 연예계를 엮어 그 시대를 풀어내려는 '빛과 그림자'의 풍경이 가진 뉘앙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특정 사건과 관련 없다'고 주장하는 드라마는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갈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시대극이 당대의 현실과 무관한 허구로만 치닫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당대를 드러낼 수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 드라마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다만 똑같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고 재해석될 뿐이다.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인물이 만들어지고 사건이 재해석된다고 해서 너무 실제와 멀어져서도 안 된다. 따라서 어디선가 실제로 본 듯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세창이 연기하는 느끼남 최성원이나 당대 전국구 주먹으로 나오는 조태수(김뢰하)를 보며 당대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물론 이 드라마는 아예 실제 인물을 오마주로 활용하기도 한다. 박준규가 연기하고 있는 마도로스박이다. 이 인물은 실제 당대 최고 액션배우였던 박준규의 아버지 박노식을 오마주한 캐릭터다.

'이 드라마는 특정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드라마의 문구를 볼 때마다 거꾸로 자꾸만 그 특정인물과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당대를 살아온 이들의 호기심일 것이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는 암울했던 시대의 정치와 딴따라가 대결하는 그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이 과연 실제 역사에서 누구와 닮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한 드라마다. 저 인물은 도대체 실제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놀이(?)이지만 그 놀이가 갖는 역사성은 지금 현재와도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뿌나'에서 '해품달'까지, 팩션 사극을 연 대표작가들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해를 품은 달'이 방영 시작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데는 정은궐 작가라는 원작자의 작품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인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을 쓴 작가다. '성균관 스캔들'은 사극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역사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적 배경을 과거로 돌린 채, 그 안에서 지극히 현대적인 청춘멜로를 담아냄으로써 사극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청춘멜로나 사극 이 두 장르는 모두 어떤 침체기에 접어 들어있었지만, 이 두 이질적인 두 장르가 합쳐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생겨났다. 청춘멜로가 갖는 어딘지 지나치게 가벼운 비현실적 느낌은 사극을 만나 그 무게감을 확보하게 되었다. 사극 특유의 강한 극성은 멜로조차 그 결과로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스토리를 가능하게 했다. '성균관 스캔들'이 성균관이라는 금남의 지역에서 남장여자라는 아슬아슬한 청춘멜로를 실험했다면, '해를 품은 달'은 그 공간을 궁궐로 강화시키고, 세자와의 로맨스를 통해 삶과 죽음이 왔다 갔다 하는 극성 높은 청춘멜로를 그려냈다.

반응은 놀랍게도 단 6회 만에 마의 시청률이 되어버린 30%에 육박하는 결과를 내고 있다. 이것은 최근 사극의 시청률이 20%대 중반에 정체되어 있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놀라운 결과다. 이제 겨우 도입부에 불과한 스토리에서 이 정도라면 '해를 품은 달'은 어쩌면 전성기 시절의 사극이 거둔 성과를 재연할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팩션 작가 정은궐을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틀에 갇히기 보다는 그 역사적 틀을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사극의 세계를 개척한 팩션 작가들의 그 과감한 파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성균관 스캔들'과 '해를 품은 달'의 원작자인 정은궐 작가와 함께 주목되는 팩션 작가는 이정명이다. 작년 말 화제를 불러일으킨 '뿌리 깊은 나무'의 원작자인 이정명 작가는 신윤복이 여자라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그의 그림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내 화제가 되었던 '바람의 화원'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바람의 화원'은 겉으로 보기엔 여성으로 설정된 신윤복과 김홍도의 멜로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낸 듯한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들의 풍속화가 하나의 모티브가 되고 그 풍속화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극의 실험이었다.

이정명 작가는 이 두 작품을 통해 보여지듯이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끌어오지만 그것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작가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를 소재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궁궐 내에서의 연쇄살인사건을 다루었다. 사실 세종 시대는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사극처럼 극적 대립이 필요한 장르에 쉽지 않은 소재다. 하지만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역사 바깥에서의 극적 상황을 집어넣자 이 작품은 전혀 다른 긴장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원작을 드라마로 재해석한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이 원작을 보고 나서 비로소 세종 시대를 사극으로 다룰 수 있겠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파격적인 실험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이 있지만 확실히 사극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은 달라졌다. 정통사극의 시대는 왕의 시점으로 읽히는 역사를 강요받던 권위주의의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역사를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푸코가 미시사를 가져와 본래 역사가 가진 권위를 해체시켰던 것처럼, 역사란 사실 권력자의 기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다른 계층의 시각으로 보면 역사는 또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셈이다.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사극의 새로운 스토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좀 더 극대화되고 심지어 장르화된 것이 '바람의 화원', '성균관 스캔들', '뿌리 깊은 나무', 그리고 '해를 품은 달'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극의 계보다. 그 중심에 이정명, 정은궐 같은 팩션 작가가 있었다는 얘기다.

사극의 이러한(역사를 벗어나 장르화 되는) 변화는 향후 이 장르가 한류 드라마의 대표 콘텐츠가 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사실 사극이 굉장히 글로벌하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은 '대장금'을 통해 확인되었다. '대장금'은 일본, 동남아를 넘어서 중동, 유럽까지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으니까. 그만큼 사극은 우리의 모습을 가장 특징적으로 잡아낼 수 있는 장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에 집착하게 되면 민족주의적인 틀에 갇히게 된다. 최근 사극의 변화는 이런 틀을 과감히 벗어던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물론 사극은 이제 더 이상 역사교과서가 될 수 없다. 그저 하나의 콘텐츠로 즐기는 대상이 된 것. 이정명, 정은궐 같은 사극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한 팩션 작가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청춘과 가장에게 던지는 격려, '페이스메이커'

자료 : 페이스 메이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달리는 존재. '페이스메이커'는 그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울컥하게 만든다. 30킬로까지 주역(?)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달리고는 정작 남은 12.195킬로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늘 스포트라이트 뒤편에 서있을 수밖에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영화 '페이스메이커'가 단순한 마라톤 영화가 아닌 점은 그 소재를 다름 아닌 페이스메이커로 잡았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왜 하필 페이스메이커일까. 이 페이소스 짙은 설정은 어린 시절 만호(김명민)가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는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동생과 둘이 살아가는 만호는 운동회에서 배고파하는 동생을 위해 달린다. 1등이 아닌 2등을 해야 라면 한 박스를 얻을 수 있는 이 상황은 꿈이나 일의 성과 혹은 주역이 되는 것보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달려야 했던 우리네 가장들의 삶을 고스란히 잡아낸다.

오로지 몸 하나에 의지해 결승점까지 가야하는, 그것도 1등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로써 달려야 하는 페이스메이커의 마라톤은, 즐거움과는 상관없이 힘겨운 노동으로 집약되는 일로서의 삶을 겪어온 가장들을 가장 잘 표현한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동생을 성공시키고는, 정작 자신은 노동에 피폐된 몸뚱어리 하나 덩그러니 안고 있으면서도, 그 잘 된 동생만 보면 바보 같이 웃는 가장들. 그런 형이 부담된다는 동생의 말에 질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도 모르고 동생을 힘들게 했다며 자책하는 그런 존재들. '페이스메이커'는 이들에게 던지는 헌사 같은 영화다.

흥미로운 건 이 가장을 대변하는 듯한 페이스메이커 만호 옆에 이 시대의 청춘을 대변하는 듯 세워놓은 신세대 미녀새(장대높이뛰기 선수) 지원(고아라)이란 존재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만호의 질문은 그래서 이 한 시대를 겪은 가장 같은 인물이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던지는 화두다.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하다 보면 잘하게 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것은 만호라는 온 몸으로 얘기하는 페이스메이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에 상투성을 넘어선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가장들과 청춘들이 서로의 등을 토닥여주는 영화로 여겨지기도 한다. 기득권자들에게 1등을 포획당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꿈꾸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페이스메이커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격려. 누군가는 1등을 하기 위해 달릴 때, 자신은 살기 위해 달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 이제 꿈꿔보라고 아낌없는 보내는 응원.

김명민은 이 영화가 결국 대사 몇 마디가 아니라 몸으로 말해줘야 그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배우다. 완벽하게 페이스메이커로 빙의된 김명민은 그 어눌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과 비쩍 마른 체구, 그리고 달리고 달려서 너덜너덜해진 발바닥 같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몸 그 자체로 이 진심을 전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김명민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슴이 찡해질 수밖에 없다.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달려 나간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처지지만 또 누군가는 그저 그 레이스에서 탈락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페이스메이커로 달리기도 한다. 이 김명민이라는 놀라운 배우에 의해 완성된 '페이스메이커'를 보면서 울컥했다면 당신은 어쩌면 이 사회 속에서 때때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부지불식간에 해온 장본인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당신의 페이스메이커였는지도. 그래서 '페이스메이커'는 자꾸만 자신을 또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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