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포 '슈스케3'냐, 편안한 '위탄2'냐

'위대한 탄생2'(사진출처:MBC)

'슈퍼스타K3(이하 슈스케3)'. 이건 거의 미친 속도감이다. 한 참가자가 반 소절도 부르기 전에 화면은 다른 참가자로 넘어가고 또 짧은 한 소절을 부르는 참가자의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간간히 따라붙는 인터뷰도 절대 늘어지는 법이 없다. 물론 긴장감을 만들기 위해 뜸을 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면이 고정되거나 반복되는 법은 별로 없다. 대신 '슈스케3'는 역순으로 편집된 영상을 보여주거나 차라리 다른 참가자의 오디션 영상을 끼워 넣는다. 이건 거의 편집이 롤러코스터 수준이다.

익숙하지 않은 시청자들은 심지어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다. 과도하게 빠르게 진행되는 영상 속에 엄청나게 많은 참가자들의 면면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거기서 심사평과 당락 결정까지 순식간에 이뤄진다. 잘 따라잡기 힘든 이야기를 자막으로 읽어내려면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한다. 어찌 보면 피곤해 보이지만 막상 이 롤러코스터에 적응하면 또 거기에 걸맞는 속도감이 쾌감으로 제공된다.

비교점이 있다는 것은 프로그램의 특징을 더 잘 보이게 만든다. 미친 속도감을 느끼게 하는 '슈스케3'를 더 특징적으로 보게 만드는 건 이제 막 시작한 '위대한 탄생2(이하 위탄2)'다. 이미 먼저 출발선을 지나 이제 본격적인 속도를 내고 있는 '슈스케3'에 적응한 시청자라면 '위탄2'는 조금 심심하게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첫 방송인데다 새 멘토의 소개에 프로그램의 초반 20여분을 할애했다. '슈스케3'에 비하면 느긋한 행보다.

영국에서 치러진 1차 예선이 스케치 되었지만 그 오디션 장면은 모두 편집되었다. 대신 여기서 뽑힌 참가자들의 2차 예선 장면이 방영되었다. 영상은 많은 인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몇몇 주목되는 참가자의 면면에 집중했다. 영국인으로써 2NE1의 노래를 거의 완벽하게 부른 티타,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인 샘 같은 참가자들에 대한 멘토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서울 2차 예선으로 넘어와 이효리의 '치티치티뱅뱅'을 새롭게 해석한 김태극, 절대음감으로 극찬받은 신예림, 가수가 되기 위해 80킬로그램을 감량했다는 고필준 같은 인물들을 포착했다.

'위탄2'의 영상들은 '슈스케3'에 비해 훨씬 집중된 느낌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편집이지만, 어딘지 빈약한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196만여 명이 참가한 '슈스케3'가 가진 압도적인 자원(?) 덕분인 지도 모른다. '슈스케3'는 너무 많은 경쟁자들이 들어와 있어 그들을 어느 정도 잡아내려면 그만한 미친 속도감이 필요했을 것이다. 속도감이 피로하기는 하지만 경쟁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도 '슈스케3'만의 장점이다.

반면 '위탄2'는 짧게라도 들어오는 참가자들의 영상이 별로 없고, 편집되지 않고 살아남은 경쟁자들은 확실히 카메라가 잡아주기 때문에 집중도가 높고 피로감도 덜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경쟁의 느낌이 별로 없어 밋밋한 인상을 지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슈스케3'와 '위탄2'의 속도감의 차이는 그것이 케이블과 지상파를 가르는 특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악마의 편집'으로 불리는 '슈스케3'의 현란한 편집은 케이블에 걸맞게 마니아적이고, '위탄2'의 편안하다 못해 밋밋한 느낌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지상파에 걸 맞는다.

어찌 보면 이 케이블과 지상파가 맞닥뜨리게 된 두 오디션 프로그램의 대결은 바로 이 속도감의 대결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두 프로그램이 내세우고 있는 관전 포인트는 약간 차이가 있다. '슈스케3'는 바로 그 야생적인 생존경쟁의 모습을 가감 없이 포착하는 묘미가 있고, '위탄2'는 멘토링이라는 성장과정을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이 바탕에 깔린 편집이라는 요소는 시청자들을 부지불식간에 적응시키는 요소로 어쩌면 내용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어느 속도에 적응하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른 속도가 너무 어지럽거나 너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을 테니까. 속사포 '슈스케3'와 편안한 '위탄2'. 당신은 어느 속도에 적응하고 있는가.


멜로 그 이상 세상의 아픔을 담아낸 '통증'

'통증'

세상이 앓는 통증을 당신은 느끼고 있는가. '통증'은 멜로드라마 구조를 갖고 있지만 그저 멜로로만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이 갖고 있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병'이 사회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이 남자를 세상은 두드려 패고, 그 맞는 대가로 이 남자는 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간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설정인가. 통증을 느끼지 못해 맞으면서도, 심지어 죽어가면서도 "나 하나도 안 안파"라고 말하는 남순(권상우)의 몸에 난 멍 자국을 보면서 눈물 흘리게 만드는 영화, '통증'은 지독하게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자, 동현(정려원)은 바로 이 남순이라는 아픈 세상을 겪고 있는 인물을 바라본다. 정작 자신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남순은 너무나 아프다. 이것은 그녀의 캐릭터가 작은 상처조차 치명적인 결과에 이를 수 있는 혈우병 환자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그녀는 통증에 그만큼 민감하다. 타인의 상처마저 내 상처로 고스란히 느낄 정도로.

이 통증을 두고 상반된 캐릭터의 만남은 절절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동현이 그렇게 한없이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남순은 처음으로 통증을 느낀다. 자신의 통증은 못 느끼던 그가, 그녀가 우는 모습에는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린다. 이 화학작용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는 시점이 생겨난다. 우리는 남순의 시점으로 동현을 바라보고, 동현의 시점으로 남순을 바라본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이 겪고 있는 깊은 상처와 그 상처를 서로 핥아주는 간절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남순의 정돈되지 않은 집은 상처의 원형이다. 그 속에서 상처를 지워내지 않고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남순의 집에 들어와 그 집을 치우고 닦고 하는 건 '통증'이 전하는 사랑의 해석이다. 누군가의 공간 속에 들어가 그것이 아픈 것이라 해도 보듬어주고 안아주는 것. 남순과 동현의 입맞춤은 그래서 이 공간을 상처만 남은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이제 새로운 가족을 꿈꾸게 하는 미래의 공간으로 바꾼다. 물론 냉혹한 바깥 세계는 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지만.

흥미로운 건 이 멜로 구도 안에서 영화가 자꾸만 그 구도 바깥을 생각하고 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즉 통증이 있다면 그 통증을 만들어낸 주체가 있게 마련이다. 남순을 피 흘리게 만드는 것은 저 자본주의의 탐욕스런 욕망이다. 재개발 현장을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폭력과 사건들은 우리가 현실에서 뉴스 속의 원경으로 봐왔던 실제 사건들을 근경으로 당겨놓는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통증으로 여겨졌지만, 가까이 다가가 남순이라는 캐릭터를 그 안에 두고 바라보니 그 통증이 내 것처럼 절절해진다.

우리는 흔히 '불감증에 걸린 사회'를 말한다. 아픔과 상처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에 쉽게 그 상처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의 것처럼 고개 돌려버리는 사회를 얘기한다. '통증'은 바로 그런 우리들 앞에 그 아픔을 던져놓고 직시하라고 하는 영화다. 그래서 남순처럼 아픔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가 누군가의 눈물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게 되는 그런 영화이고, 맞으며 희생하는 대가로 이제 맞는 것조차 아프지 않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세상의 약자들을 동현의 시선으로 끌어안게 되는 영화다. 돌아누운 남순의 허리에 남겨진 멍자국에 눈물이 난 것은 그의 몸으로 환기되는 세상의 잔혹함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보스',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어보자

'보스를 지켜라'(사진출처:SBS)

이것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C그룹 회장 아들 지헌(지성)이 취업을 못해 전전긍긍하다 간신히 비서로 들어온 노은설(최강희)을 졸졸 쫓아다니는 일. 그러면서 "난 네가 좋다"는 간지러운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짓. 그런데 노은설을 좋아하는 건 지헌만이 아니다. 지헌의 사촌인 C그룹 실세 본부장인 무원(김재중)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노은설은 거꾸로 어느 쪽을 선택했을 때 다른 한쪽이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한다. 이 신데렐라가 거꾸로 왕자를 거느리는 이야기에 비하면 진짜 신데렐라 이야기는 판타지 축에도 못 끼는 셈이다.

결혼에 대한 양가의 반응 역시 보통의 드라마들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즉 재벌가 자제와의 결혼이라면 응당 그쪽에서 집안이니 학력이니 등을 내세워 반대하기 일쑤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노은설의 아버지 노봉만(정규수)이 지헌의 아버지인 차회장(박영규)을 찾아와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노봉만은 자칭 무림고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부적응자에 가깝다. 그런 그가 차회장에게 으름장을 놓는 장면은 어딘지 속 시원한 구석이 있다. 이른바 스펙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회장이 처음 아들인 지헌과 노은설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는 장면도 기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는 다르다. 차회장은 노은설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그러니 좀 잘 나지 그랬어!"하고 말한다. 이 말 속에는 마음으로는 반대하지 않지만 기업 후계자의 배우자로서 맞닥뜨릴 수 있는 주주들의 반발에 안타까워하는 속내가 들어있다. 즉 교제 반대를 얘기하는 이 장면 속에서마저 은근한 스펙사회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는 셈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 늘 등장하기 마련인 경쟁자로서 서나윤(왕지혜)의 모습도 기존 드라마들과는 다르다. 그저 안하무인격의 재벌가 딸내미가 아니라 심지어 귀엽기까지 한 모습은 그녀가 과연 사랑의 라이벌이 맞나 싶을 정도다. 가출한 그녀가 노은설의 집에 얹혀사는 설정 역시 전혀 현실성은 없지만 보는 이들을 즐겁게 만든다.

이것은 기존 신분상승의 판타지를 그리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완벽하게 뒤집어놓은 것이다. 노은설이 말하는 것처럼, 이 땅에는 두 개의 세계(빈부로 나눠지는 계층)가 있는데 기존 드라마들이 재벌집 왕자님들에 의해 신데렐라가 구원(?)받는 판타지를 그렸다면, 이 드라마는 거꾸로 아무 것도 없지만 마음이 건강한 신데렐라에 의해 재벌가 사람들(왕자님은 물론이고 그 아버지,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이 구원받는 이야기다. 노은설이 그쪽 세계가 부담된다며 이곳에 남겠다고 하자, 지헌은 "내가 그쪽으로 갈께"하고 말하고, 무원은 "이쪽을 당신이 올 수 있게 바꿔놓겠다"고 말한다.

물론 어디 현실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현실은 노은설이 늘 떠들고 다니던 것처럼 '정직원, 파격승진, 월급인상'이 샐러리맨들의 로망일 것이다. 하지만 '보스를 지켜라'는 마음껏 상상해보기로 작정한 듯하다. 세상을 한껏 뒤집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돈과 권세로 위세 떨며 군림하던 이들을 '서민의 힘'으로 쥐락펴락하고픈 것이다. 스펙 사회로 태어날 때부터 낙인찍혀 살아가는 답답한 세상에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어보자는 것이다.

"아주 볼수록 물건이네 이거." 가끔씩 차회장은 노은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 표정에는 '정말 대견하다'는 애정이 듬뿍 들어있다. 차회장의 그런 모습은 이상적인 기업인의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대외적으로는 조폭회장으로 불리지만 속내는 한없이 정이 많고 특히 자식사랑에 있어서만큼은 보통사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부정을 드러내는 인물. 그리고 무엇보다 스펙이 아니라 그저 사람 됨됨이를 통해 '물건'을 알아보는 인물. 그런 판타지는 현실이 되지 못하는 걸까. 이 드라마가 '볼수록 물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적어도 이런 세상 사람들의 답답한 소회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박2일' 아이러니, 애정만큼 큰 아쉬움

'1박2일'(사진출처:KBS)

'1박2일' 시청자투어 3탄. 이건 블록버스터급 예능이다. 대한민국 1세부터 102세까지의 시청자를 초대해 하나의 예능으로 묶어낸다는 건 웬만한 예능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유아에서부터 한 세기를 훌쩍 살아낸 어르신까지 "1박!"하고 외치면 "2일!"하고 답변을 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1박2일'이라는 예능이 전국 어디를 찾아가서든 또 거기서 누구를 만나든 소통될 수 있는 콘텐츠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처럼 거의 전세대의 취향을 하나의 콘텐츠 안에 묶어둘 수 있다는 건 '1박2일'만이 가진 자신감이자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가능성이다. 시청자투어 3탄의 첫 회를 그저 그 참가한 시청자분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채운 것은 단지 시간적인 부족 때문이 아니다. 한 프레임 안에 전 세대가 '1박2일'이라는 제목 하에 앉아있는 그림. 이 풍경이 주는 뉘앙스는 보는 이들을 "역시 1박2일!"이라고 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한 세기를 살아왔던 또 앞으로의 한 세기를 살아낼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와 의미를 줄 수 있다. 카메라 앞에서도 장난기 가득한 '리틀 강호동'의 천진난만함과 시종일관 웃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의 미소에 한없이 즐거워지다가, 입양해 친 딸처럼 잘 키워준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나려고 신청한 딸의 이야기에 먹먹해지고, 한 세기를 살아온 어르신들이 등장할 땐 그 자체로 뭉클함이 느껴지는 것.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미래가 아닌가. 그것을 한 장면 속에서 보고 있다는 건, 마치 한 인생의 삶을 관조하는 것만큼 뭉클해지는 일이다. 그래서 모두의 소개가 끝나고 '인생극장'이라는 짧은 제목으로 아이서부터 어르신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기 출연하신 분들의 얼굴로 보여주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여전히 정정하신 102세 할아버지가 80세 어르신들에게 "이팔청춘이여!"할 때, 우리가 생각해왔던 세대에 대한 편견은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따라서 이렇게 전 세대가 모여서 하는 모든 일들은 그들에게도 또 그들을 바라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새록새록 입게 된다. 그 세대들의 여행은 또한 저마다 같은 세대의 시청자들이 대리할 수 있는 여행이 되는 셈이다. 그들이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복불복을 하고, 모두 특별 전세기를 타고 부산까지 날아가며, 거기서 보내는 1박2일 간의 여행은, 거의 전 시청세대가 함께 하는 여행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여행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가진 '1박2일'의 가장 큰 야심이자 저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대감이 커져갈수록, 또 그 재미가 점점 깊어질수록 그만큼 아쉬움도 커지는 게 사실이다. 6개월 후 종영을 예고한 '1박2일'은 마치 시한부 판정을 받은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것처럼 순간순간이 아름다울수록 안타까움도 커져간다. 전 세대를 '1박2일'이라는 비행기에 태우고 지금껏 날아왔던 시간들은, 마치 1세부터 102세 어르신까지를 통해 하나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소회처럼 아련해진다. 도대체 무엇이 이 많은 분들이 그토록 외쳤던 "1박2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6개월 후, 이제 "1박!"하면 그 누가 "2일!"을 해줄 것인가. 애정이 깊은 만큼 아쉬움도 커지는 '1박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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