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과 ‘타짜’, 드라마와 영화 그 엇갈린 반응 왜?

왜 같은 허영만 화백의 만화이면서 드라마 ‘식객’은 되고 ‘타짜’는 잘 안 되는 걸까. 또 아이러니 하게도 이 상황은 왜 영화에서는 거꾸로, 즉 ‘타짜’는 되고 ‘식객’은 안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작품은 그 소재에 있어서 각각 적합한 매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즉 ‘식객’은 드라마가 더 적합했고, ‘타짜’는 영화가 더 적합했다.

‘식객’과 ‘타짜’, 그 다른 이야기 구조
‘식객’이 드라마에 더 적합했던 첫 번째 이유는 그 원작의 특징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병렬적으로 이어놓았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시리즈로 방영되는 드라마가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담기에 더 유리했고, 상대적으로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을 소화해내기가 부담이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모두 운암정을 사이에 둔 봉주와 성찬의 대결구도가 그 메인이 되고 그 뼈대 위에 소소한 이야기들이 살처럼 박혀있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이러한 반응의 차이는 서로 다른 매체적 속성에서 비롯된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타짜’는 그 이야기 구조가 ‘식객’과는 다르다. 물론 허영만 화백 특유의 취재에 근거한 리얼한 에피소드들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주인공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즉 편편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연결고리를 유기적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평경장 같은 한 인물의 이야기는 ‘식객’처럼 그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인물들과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짜여진’ 구조는 드라마처럼 늘여서 보는 것보다 영화처럼 압축적으로 보는 것이 더 흥미진진하기 마련이다.

영화여서 담을 수 있는 것, 드라마여서 못 담는 것
‘식객’은 그 소재 자체가 음식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TV 방영에 있어서 부담이 없다. 하지만 ‘타짜’는 다르다. 도박이라는 소재는 여러모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위험성이 있다. 실제로 손가락이나 손목을 걸고 하는 도박은 지나치게 폭력적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영화는 이런 부분에서 자유롭다. ‘타짜’가 영화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저 홍콩도박 영화들이 가진 선악구도의 개념 자체를 뛰어넘는 도박의 세계를 리얼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물론 ‘타짜’에도 주인공이 있고 그와 대립하는 아귀라는 절대적인 악이 존재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해서 선한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저 도박이라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 있을 뿐이다. 영화 ‘타짜’는 바로 이런 캐릭터들이 존재했다. 아귀나 정마담은 악한 인물이면서도 이 타짜의 세계를 통해 보면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에는 분명한 선악 구도가 나뉘어져 있다. 고니(장혁)는 ‘착한 타짜’고 아귀(김갑수)는 ‘악한 타짜’가 된다. 고니가 도박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한 것이지 도박 자체에 매료된 탓은 아니다. 이것은 드라마로서 도박이라는 사행심리를 자칫 부추기는 결과를 피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 ‘타짜’가 영화의 그것처럼 리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분명한 선악구도를 그 안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타짜라는 소재는 매력적이다. 즉 도박의 세계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끌어내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네 TV에 적합한 소재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시청연령을 제한하는 고지가 나오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방영되는 TV드라마에 대한 우리의 정서는 아직까지 도박과 폭력을 용인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식객’과 ‘타짜’, 모두 좋은 소재의 작품이지만 저마다 적합한 매체는 달랐던 셈이다.

방송3사 복수극, 엇갈린 운명의 늪에 빠지다

지금 드라마들은 엇갈린 운명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MBC 월화드라마 ‘에덴의 동쪽’은 운명의 장난 종합 선물세트(?) 같은 드라마. 전형적인 출생의 비밀의 코드가 들어가 있는 이 드라마는 어린 시절 서로 원수지간인 집안의 아들들, 즉 이동욱(연정훈)과 신명훈(박해진)의 운명을 바꾸어버린다. 이렇게 되자 본래 핏줄로 따진다면 자식과 부모가 맞서고, 같은 형제가 맞서는 형국이 되어버린다. 여기에 이 둘 사이에 끼워 넣은 지현(한지혜)마저 사랑하던 이동욱과 헤어져 신명훈과 결혼하게 되고 이 운명의 늪에 동참하게 된다.

꼬여도 너무 꼬였다
이 드라마가 가진 관계의 복잡함은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목되던 삼각 사각관계와 출생의 비밀 같은 자극적인 설정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비판받는 것이지만 이 드라마의 높은 시청률과 특유의 극성은 바로 이 요소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드라마 속의 인물들은 엇갈린 운명 속에 빠져 누구 하나 행복을 누리는 자가 없다. 이동철(송승헌)은 카지노 대부 국회장(유동근)의 딸인 영란(이연희)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국회장의 충복으로서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동생 이동욱은 더 관계가 복잡하다. 동욱은 지현을 사랑하지만 이미 지현은 원수의 자식인 신명훈과 결혼했고, 그래도 일편단심 지현만을 생각하는 동욱을 혜린(이다해)은 사랑한다. 그런데 그 혜린은 또 자신의 언니와 결혼을 약속했지만 그것조차 파기해버린 백성현(박성웅)의 구애를 받는 입장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은 여기에 이동욱이 사실은 신명훈과 운명이 바뀐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이 일련의 운명의 장난들은 단순한 삼각 사각관계 그 이상의 복잡함을 띄게 된다.

SBS 월화 드라마 ‘타짜’에서는 고교시절 둘도 없던 친구였던 고니(장혁)와 영민(김민준)이 각각 타짜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서로 대결하는 위치에 서게된다. 영민이 아귀(김갑수)의 수하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고니의 여자친구인 난숙(한예슬) 역시 마찬가지. 그녀는 교도소에 들어간 오빠의 형기를 줄이기 위해 아귀 밑, 정확히 얘기하면 정마담(강성연)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고니와 둘도 없는 연인관계이지만, 또 하나의 이름 지나로 불릴 때는 고니와 대결해야 하는 운명이다.

복수극의 엇갈린 운명, 그다지 신선한 것이 아니다
KBS 수목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는 아버지인 유리왕(정진영)과 아들인 무휼(송일국)이 엇갈린 운명에 서 있다. 고구려를 망하게 할 운명을 타고났다는 어린 무휼을 아버지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버리게 되고, 그 버려진 아들은 먼 길을 돌아 아버지에게 칼끝을 겨누게 된다. 이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구조를 지니고 있는 ‘바람의 나라’에서 서로 맞서게 되는 부자는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며 드라마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 세 드라마가 모두 복수극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왜 이러한 운명의 장난이 모두 활용되고 있는가를 설명해준다. 아버지와 아들이 맞서고, 형제가 맞서고, 친구가 맞서고, 연인이 맞서는 이런 구조는 사실상 드라마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꼬아놓은 것이지만, 또한 그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에덴의 동쪽’의 복수는 그것이 결국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날아온다는 걸 말해주고, ‘타짜’는 평경장이 말하듯 도박판에서 복수란 의미가 없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며, ‘바람의 나라’에서의 복수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적 한계를 드러내주기 위해 사용된다.

복수극이 가진 이러한 엇갈린 운명 코드는 그러나 지나치게 드라마를 꼬아 시청자의 시선을 묶어두겠다는 의도가 짙다. 어떤 경우에는 이 꼬여진 운명 때문에 드라마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빙빙 도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물론 주제의식을 위해 활용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코드가 그다지 신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스타의 후광을 받는 친구 혹은 스타가 되고자 하는 친구

스타가 TV 저 편에 존재하는 외계인이라면, 친구는 TV 이 편에 존재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리고 그 중간지대에 ‘스타의 친구’가 있다. 즉 ‘스타의 친구’는 스타는 아니지만 그 스타의 후광을 받는 ‘특별한 보통사람’이다. 바로 이것은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스친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스타의 친구’라는 독특한 지점
짝짓기 프로그램들은 초기 ‘사랑의 스튜디오’의 일반인 짝짓기에서 시작해, 2000년대 들어 붐이 일었던 동거동락(2001), 천생연분(2002), 산장미팅-장미의 전쟁(2003), X맨(2005), 리얼 로망스 연애편지(2006) 등의 스타 짝짓기 프로그램들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우리 결혼했어요’, ‘골드미스 다이어리’, ‘꼬꼬관광 싱글♥싱글’같은 스타들의 짝짓기이면서도 그 일상을 포착하는 리얼리티 스타 짝짓기 프로그램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이 리얼리티 경향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틀, 즉 스튜디오나 특정 장소에서의 장기자랑과 게임, 그리고 선택이라는 전형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의 단순한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건 ‘스친소’가 거의 유일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스친소’만이 가진 ‘스타의 친구’라는 독특한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짝짓기 프로그램에 스타가 직접 등장했던 시기에는 그 ‘스스로 빛나는’ 그네들의 일거수 일투족과 언뜻언뜻 드러나는 아슬아슬한 속내가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 형태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우후죽순 생겨난 유사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들의 선택권을 앗아간 탓도 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지나치게 스타들 자신들의 홍보의 장이 되어버린 탓도 있다. TV 이편의 세계에 놓여진 시청자들은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그 프로그램에서 재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소외되는 양가적 경험을 해야했다.

‘스타킹’과 ‘스친소’의 유사점
‘스타킹’은 이 상황을 뒤집어놓음으로써 소외된 시청자를 프로그램의 무대 위로 올렸다. 일반인들이 무대에서 자신들의 장기를 보이고, 스타들이 객석에 앉아 아낌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는 이 프로그램은 누구나 영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UCC 시대의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짝짓기 프로그램과 만나 탄생한 것이 ‘스친소’라 할 수 있다.

스타는 자신의 친구를 자랑하고, 그 친구가 이 짝짓기에서 성공하게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친구는 거기에 맞춰 자신의 끼를 한껏 발휘한다. 그런데 ‘스타킹’에 출연하는 보통사람들이 그저 보통이 아닌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진 것처럼, ‘스타의 친구’들 역시 보통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끼와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 ‘특별한 친구’는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지만, 또한 친구를 소개하는 스타 자신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에는 스타 중의 스타가 존재하는 ‘스타킹’처럼, ‘스타’ 그 이상의 ‘스타의 친구’가 존재한다. 붐의 친구인 장마철은 이 프로그램이 만든 스타 중의 스타다. 특유의 끼로 똘똘 뭉친 그는 출연하는 스타들을 모두 포복절도하게 하는 재미를 줌으로써 거꾸로 그 친구인 붐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까지 해낸다. 또 MC몽의 친구로 등장한 박장근은 프로그램에서 만든 ‘전국민 러브송’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준연예인이라는 비판과 주목도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스타의 친구’가 이처럼 스타 이상으로 주목받고, 또 그럼으로써 이 프로그램이 유지될 수 있기 위해서는 따라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섭외되는 ‘스타의 친구’가 스타도 보통사람도 아닌 그 중간지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과거 연예인 지망생들이 데뷔의 수순처럼 스타와 함께 출연해 비판받았던 짝짓기 프로그램들(예를 들면 ‘장미의 전쟁’ 같은)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장마철은 본래 문웅기라는 이름의 영화배우로 ‘고사’에 출연했고, 서인영의 친구 이세미는 MBC ‘섹션TV 연예통신’의 리포터로 등장했다. 이밖에도 ‘스타의 친구’로 소개된 친구들은 대부분이 연예계 종사자이다. 이것은 물론 스타가 가진 직업과 연관이 있는 친구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생각하는 ‘스타의 친구’와는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성격상, 즉 ‘스타의 친구’라는 스타의 후광을 받는 인물로서의 친구가 갖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인물을 연예계와는 거리가 먼 보통의 직장인에서 찾기가 사실상 어렵다는데 딜레마가 있다. 방송을 알고 그만큼 방송출연에 부담이 적은 데다가 특유의 끼로 무장한 인물은 아무래도 연예계 가까운 곳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판의 소지는 있지만 장마철 같은 재기 넘치고 발랄한 준 연예인이 등장했을 때 그 주목도는 높아진다. ‘스친소’에서 특집으로 방영한 ‘스타의 매니저를 소개합니다’는 어쩌면 이런 고민들이 작용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스친소’는 지금 준연예인이라는 그 비판과 주목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법정드라마는 어떻게 우리 식 정서와 만났을까

법정드라마에는 반드시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그 피해자를 돕는 법조인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신의 저울’에서도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사랑하던 여자친구가 살해당하고 그 살인범으로 누명까지 썼으며, 그를 대신해 범인을 자청해 교도소에 들어간 동생을 둔 피해자 장준하(송창의)가 있고, 과실치사지만 그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장준하의 가족이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만든 가해자 김우빈(이상윤)이 있다.

신의 저울은 공평하지 않다는 전제
하지만 ‘신의 저울’이 평범한 법정드라마의 공식을 따르는 건 여기까지다. 이 피해자가 어떻게 법으로써 구원을 받는가의 문제라든가, 가해자가 어떻게 그것을 은폐하려 하는가의 문제는 공식을 벗어나 있다. 피해자인 장준하가 선택하는 것은 법조인, 즉 검사가 되는 것이다. 즉 ‘신의 저울’은 피해자가 법조인의 도움을 받는 드라마가 아니라 피해자 스스로 법조인이 돼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드라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가해자인 김우빈(이상윤) 역시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법조인으로서의 권력과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법을 통해 한 명은 진실을 밝히려하고 다른 한 명은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이것이 말해주는 건 법이 멀쩡한 사람을 살인자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또 정반대로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장준하의 가족이 겪는 고통을 들지 않더라도 이러한 법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대결구도 자체는 ‘신의 저울’이 공평하지 않다는 이 드라마의 전제를 말해준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법을 통해 보는 현실의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신의 저울 위에 얹어지는 관계라는 무게의 추
‘신의 저울’이 독특한 것은 법정 드라마에 우리네 멜로나 가족드라마의 관계 코드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장용하의 사건을 두고 벌어진 모의법정에서 유죄냐 무죄냐를 두고 갈라진 김우빈과 장준하 사이에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영주(김유미)는 갈등한다. 김우빈은 간교하게도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꺼내고,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김우빈의 어머니인 송여사(김서라) 역시 이를 부추긴다.

눈을 가린 채 ‘신의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처럼 공평해야할 영주에게 그 가린 헝겊을 벗겨내고 자신 쪽을 바라보게 만드는 김우빈이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지금 우리의 법 현실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의 멜로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는 양가의 결혼을 중심테마로 하는 우리네 가족드라마의 틀은 ‘신의 저울’로 들어와서 이처럼 전혀 다른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사회가 법이라는 잣대보다는 관계와 지위, 권력 등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세련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법 현실을 고민한 흔적
‘신의 저울’이 할리우드의 법정드라마처럼 쿨하게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런 법 집행에 있어서의 관계의 문제를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틀 안에서 풀어내기 때문이다. 자식의 죄를 덮기 위해 힘있는 로펌과 사돈을 맺으려는 빗나간 모정, 사랑하는 연인의 애정공세 앞에 흐려지는 판단력, 무엇보다도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고시를 준비하는 주인공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여자라는 설정 같은 것들은 법정드라마처럼 보다 전문적이고 세련될 것 같은 소재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왕의 아들이 거지를 죽였을 때와 거지가 왕의 아들을 죽였을 때는 절대로 똑같을 수가 없다”는 노세라(전혜빈)의 말처럼 어쩌면 바로 이런 신파적이고 얼기설기 엮어진 관계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 우리네 진짜 법 현실인지도 모른다. ‘신의 저울’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저 서구의 세련된 법정드라마를 흉내내기보다는 조금은 구닥다리라도 우리 식으로 그것을 풀어내려 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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