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스타’의 생존법

대화를 통해 재미를 이끌어내는 토크쇼는 시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해왔다. 그것은 시대마다 토크의 방식 또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일방향적 미디어 시대에 주조를 이룬 것은 ‘주병진쇼’, ‘자니윤쇼’같은 1인 토크쇼였다. 하지만 쌍방향 미디어 시대에 1인 토크쇼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일방적인 토크가 갖는 홍보성향이 문제가 되었다. 어디서나 토론이 일어나고 중심 없는 지방방송(?)이 대화의 주류가 된 지금 시대에 홍보성향을 버리고 진정성을 담기 위해 토크쇼는 진화해왔다. ‘무릎팍 도사’와 ‘라디오 스타’는 이러한 대화방식의 변화 속에서 지금의 토크쇼가 어떻게 생존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무릎팍 도사’, 대결 토크로 살아남기
대세로 자리한 집단 MC 체제의 토크쇼 속에서도 ‘무릎팍 도사’는 여전히 1인 체제(물론 유세윤과 올밴이 있지만 이들은 분명 보조자일 뿐이다)로 굳건히 버티고 있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가 버틸 수 있는 건 과거의 1인 토크쇼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릎팍 도사’는 다른 토크쇼와는 차별된 구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출연진들이 카메라를 향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MC 강호동은 게스트와 마주보고 있으며 그것을 옆에서 찍는 카메라는 그 장면 자체를 자연스럽게 대결구도로 포착해낼 수 있다.

이것은 물론 과거 1인 토크쇼 중에서도 보이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과거의 구도에서 MC와 게스트는 기본적으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향해 보고 말한다. 즉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는 이 방식 속에서 MC는 게스트가 하고 싶은 얘기를 끄집어내게 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는 시청자에게 직접 토로하려는 게스트의 시선을 MC 강호동이 붙잡아두고는 그가 원하는 방식의 대화로 이끌어간다.

무언가 숨겨져 있던 비화를 끄집어내거나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진솔한 모습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서 이 대결구도의 토크는 과거의 그것과 비교해 신선하다. 대화방식도 공격적이어서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의 경우 바로 그 아픈 이야기가 거침없이 끄집어내진다. 홍보의 느낌이 상쇄되고 진정성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은 또한 고도로 우회된 홍보의 방식이기도 하다. 물의 연예인은 이 적나라한 이야기 끝에 가서 결국 면죄부를 받게 된다. ‘무릎팍 도사’가 무당 같은 도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이 한바탕 토크의 굿판을 통해 그 연예인의 이미지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라디오스타’, 중심 없는 대화로 살아남기
‘무릎팍 도사’가 1인 토크쇼가 가진 홍보성향을 대결 구도의 토크로 넘어섰다면, ‘라디오스타’는 중심이 없는 토크로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라디오 스타’는 모두 카메라 정면을 보고 빙 둘러앉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메인 MC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토크가 어떤 중심을 갖고 흘러가기보다는 산발적으로 쏟아대는 말들의 상찬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방식은 고정 MC는 물론이고 게스트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고정 MC들은 게스트를 초대해놓고도 저들끼리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다투면서 게스트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게스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하면 가차없이 잘라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라디오스타’만의 독특한 대화방식이다.

혹자는 이런 방식이 게스트를 배려하지 않는다 하여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화방식은 이제 디지털 세대들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고 있다. 대화방에 들어가 손가락에 불이 나게 타자를 쳐본 적이 있거나,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메신저 대화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이 대화방식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것인지 알 것이다.

1인 토크쇼가 대세였던 시대를 ‘집중’의 시대였다면, 집단 토크쇼가 대세를 이루는 지금 시대는 ‘정신분산’의 시대다.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모니터에 수없이 많은 창들을 띄워놓고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는 않지만 모든 창을 통제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표상한다. 토크쇼는 그 달라지는 담화방식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프로그램 형식이며 ‘황금어장’은 바로 그 변화양상을 가장 잘 보이고 있는 토크쇼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베바스’와 ‘바람의 화원’의 초현실적인 연출력

“눈 뜨지 마세요. 자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립니다. 졸졸졸졸 시냇물 소리도 들립니다.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드는 따스한 햇살도 느껴집니다. 다람쥐가 지나가는 바스락 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그 바람에 섞여서 상쾌한 풀잎 향기도 느껴집니다.” 강마에(김명민)의 말소리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은 단원들의 모습이 비춰지고 살짝 살짝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거길 지나가는 새 한 마리가 보이더니 단원들은 어느새 평원에 앉아있다. 이어 들리는 강마에의 목소리. “느껴지세요. 여기는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새로운 세계입니다. 넬라 판타지아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는 연출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등장하는 이 초현실적인 장면은 클래식 연주와 연주자의 느낌이라는 영상으로는 표현하기 곤란한 시퀀스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사실 “박자 맞추고 음 안 놓치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건 혼자 죽어라 연습하면 다 되니까. 중요한 건 관객에게 무얼 전달하려 하느냐는 그 마음, 그 느낌이다. 대사로 전달하면 통상적인 말에 끝났을 이 시퀀스는 그러나 이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연출되면서 생생함과 함께 깊은 감동을 주게된다.

이제 곧 귀가 먹게될 두루미에게 그 절망적인 상황을 인지하게 하려고 강마에가 물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종용하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연출력은 돋보인다. 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암흑 속의 절망감을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는 물 속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을 그려냈다. 연주광경은 있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장면은 고스란히 두루미가 겪게될 상황을 감각적으로 전해준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러한 연출은 소리가 주는 절망감과 환희를 영상으로 표현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강마에가 어떻게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는가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한다. 가난했던 강마에가 병져 누운 어머니에다 수재까지 겪으며 절망해 자살하려 했던 그 순간, 그의 귀를 괴롭히던 어머니의 가래 끓는 소리 속에서 합창 교향곡으로 연결되는 장면이 그렇다. 여기서 어린 강마에가 현재의 강마에를 조우하는 초현실적인 장면이 연출된다. 여기서 지옥 같던 소리는 아름다운 합창교향곡으로 구원받는다.

그림 속에 박제된 시간을 살리는 연출
한편 SBS 수목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온 그림 한 장 속에 잠들어있는 이야기를 깨어내기 위해 초현실적인 연출을 활용한다. 그림이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며 실사로 변하거나, 실사가 화원의 붓끝에 의해 그림으로 변하는 식이다. 신윤복의 ‘기다림’이라는 그림은 정순왕후가 나무 곁에 서서 잠깐 동안의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크로키처럼 빠르게 신윤복(문근영)이 그리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여기서 실사는 그대로 붓끝의 질감으로 서서히 변하면서 그림으로 나타난다.

이런 장면이 가장 뛰어나게 연출된 것은 김홍도의 ‘군선도’에 있어서다. 먼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신윤복과 김홍도(박신양)의 눈에 다양한 인물군들이 포착되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이어서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그림 속의 인물이 그 저잣거리의 인물들과 오버랩된다. 이러한 연출은 지금 현재 박제로 남아있는 그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시에 김홍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의 철학을 엿보게도 해준다. ‘군선도’를 그리며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은 저잣거리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신선을 볼 수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신윤복의 그림, ‘단오풍정’은 단오에 계곡에 모여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타는 여인네들을 드라마 속 에피소드로 풀어냄으로서 정지된 그림 속의 이야기를 눈앞에 생생히 보여준다. 기생 정향(문채원)과 신윤복이 함께 그네를 뛰면서 그 부서지는 풍광들 속에 계곡의 여인네들이 하나하나 그림의 부분으로 바뀌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가진 연출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두 드라마가 예술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은 영상미학에 있어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보이게 하고, 오랜 시간 동안 화폭 속에 박제된 시간을 열어 그림을 꿈틀대게 만드는 초현실적인 연출의 힘은, 그저 보여지는 영상 그 이상의 것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드라마인지 꿈인지 착각될 정도의 영상 연출은 우리로 하여금 시각에만 매몰되어 있던 영상을 상상력의 세계로 넓혀나가게 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바로 음악과 미술 같은 예술 자체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삶의 현장에서의 재미는 의미가 담보되어야 한다

‘체험 삶의 현장’이 2001년부터 무려 7년이 넘게 장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첫 번째는 이 프로그램만이 갖는 독특한 재미에 있다. ‘삶의 현장’은 여행지와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것은 시골이 될 수도 있고 도시가 될 수도 있다. 즉 장소를 불문하고 땀흘리는 일터가 바로 그 현장이 된다. 예를 들면 병어잡이를 하러 배를 타는 어부들의 현장이나, 동물원 사육사들의 현장 같은 것이다.

‘체험 삶의 현장’이 장수할 수 있는 이유
이런 체험은 일반인들이 여행 같은 것을 통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청자를 대리하여 체험하게 되는 출연자들 역시 마찬가지. 시청자들이 흔히 체험할 수 있는 보통 여행지와 체험하기 어려운 삶의 현장 그 중간을 이어주는 그 자리에 ‘체험 삶의 현장’만이 가진 재미가 존재한다. 게다가 그 체험을 하기 위해 마음껏 망가지는 연예인들의 모습은 그 재미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이런 재미만을 추구했다면 그 오랜 시간동안 프로그램이 장수할 수 있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혹자들은 일터에서 민폐만 끼치는 이 프로그램을 외면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진짜 장수할 수 있었던 힘은 그 공공성에 있다. 체험을 통해 얻은 일당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그 민폐(?)는 용인될 수 있었던 것. 이처럼 특정 지역을 프로그램 속에 넣는 과정에는 그 대민 접촉이 갖는 위험성을 배제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이 존재한다. 재미와 민폐의 차이는 아주 작은 것에서 비롯되지만 그 파장은 엄청나다.

‘무한도전’에 의해 시도되고 ‘1박2일’에 의해 정착된 여행 버라이어티는 이제 ‘패밀리가 떴다’로 완성되어가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이들 여행 버라이어티는 점점 재미에 더 열을 쏟고 있다. 오락 프로그램이니 재미에 대한 추구는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빈번하게 대민 접촉이 일어날 수 있는 이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재미에만 몰두하는 건 여러모로 그 생명을 단축시킬 우려가 있다. 촬영은 그 촬영지의 주민들에게는 환영받기도 하면서 동시에 비난받기도 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버라이어티, 그 재미와 민폐 사이
여행 버라이어티로서 오락 프로그램이 추구해야할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그 여행지 즉 촬영지의 민폐를 상쇄하는 방법으로 ‘1박2일’이 초반부에 했던 것들은 ‘오지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었다. 즉 독도나 가거도 같은 오지에 사는 분들을 조명해주고 현지인들에 대해 따뜻한 정을 나누는 이벤트를 벌이는 식이다. 이것은 민폐를 넘어서 어떤 감동으로까지 이어줄 수 있는 이 프로그램만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백두산을 가던 에피소드 같은 거대담론에서부터 ‘1박2일’이 가진 소박한 느낌이 점점 지워졌고, 또한 캐릭터가 정착되면서 이야기가 자꾸 캐릭터에 매몰되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즉 장소가 주는 의미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그 상황에서도 ‘1박2일’은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민 접촉을 계속해서 시도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공공성에서 비롯되는 공감을 바탕으로 깔고 있던 ‘1박2일’로서는 그것이 많이 상쇄된 이 시점에서의 대민 접촉은 오히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터진 것이 사직구장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한편 ‘패밀리가 떴다’는 애초부터 ‘1박2일’같은 공공성 자체가 희박했다.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여행 보내드리고 그 집을 하루 봐주는 것이 어쩌면 공공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비춰질 수는 있지만 사실상 ‘패밀리가 떴다’는 장소를 빌려 하룻밤 재미있게 노는 프로그램이다. 자칫 민폐가 될 수 있는 이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패밀리가 떴다’가 하는 것은 대민 접촉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다.

거의 장소로 정해진 시골집 안에서 게임을 벌이고, 또 개울이나 논두렁에 가서도 거의 현지인들과의 접촉을 통한 재미는 끌어내지 않는다. 추석 특집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호박죽을 나눠주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 외에 그다지 현지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집 주인 어르신들을 초반부에 만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보는 것이 거의 유일한 대민 접촉이다. 대신 ‘패밀리가 떴다’는 자신들 패밀리 내부의 관계와 접촉이 주를 이룬다.

일터에서 하는 게임, 괜찮을까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가 하는 체험은 저 ‘체험 삶의 현장’의 체험과 유사한 점이 많다. 해넘이 마을의 갯벌로 나가 대나리 그물로 하는 물고기잡이 체험 같은 것은 일반인들이 경험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그것은 여행지라기보다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짧은 체험을 해보고 결국 오리발을 발에 끼고 본래 모습인 게임을 하는 그 갯벌은 현지인들에게는 일터가 되는 셈이다. 그 노동의 현장에 있는 패밀리들은 노동과는 유리되어 있다.

그 특별한 체험은 저 ‘체험 삶의 현장’이 그러한 것처럼 일반인들이 경험할 수 없는 재미를 주지만 이것은 관점 자체가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에 맞춰져 있다는 약점이 있다. 그들이 연예인이고 또 방송 촬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빼놓고 같은 상황을 일반인이 했다고 생각해보면 한 쪽에서 땀흘리며 일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게임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그다지 현지인들에게 좋게 보일 리는 없다.

흔히들 버라이어티쇼 같은 오락 프로그램을 가지고 의미 운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오락 프로그램이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 재미는 타인의 피해를 대가로 치르는 경우가 생긴다. 현지인들의 생계가 달린 삶의 현장에 의미는 없이 재미만을 찾아가는 여행은, 마치 그런 삶의 현장을 밀어내고 그 위에 세워지는 도시인들의 현란한 재미공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의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장수하기 위해서는 재미는 물론이고 그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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